서오룡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서오룡
徐五龍'''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창씨명'''
오오모토 토오루(大本徹)
오오모토 코오스(大本爀洙)
'''족보명'''
서혁수(徐爀洙)
'''이명'''
서오룡(徐吳龍)·최용길(崔龍吉)
'''본관'''
달성 서씨[1]
'''출생'''
1911년 6월 1일
경상북도 대구부 동중면 산격동
(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2]
'''사망'''
1950년 10월 10일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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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서오룡은 1911년 6월 1일 경상북도 대구부 동중면 산격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서 종6품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서사도(徐思道)의 10대 종손인 아버지 서진태(徐鎭泰)와 어머니 경주 최씨 최정화(崔廷華)[3]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 12월경, 대구전보사(大邱電報社) 인쇄소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대구상업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비밀결사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 조선 제1호 지국>을 결성했다. 이후 1931년 1월 21일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신사회 건설을 주장하는 격문을 대구 시내에 살포했으며, 같은 해 4월 대구상업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그리고 대구상업학교 졸업 후인 같은 해 7월에는 <프롤레타리아 과학연구소 지국뉴스> 제1호를 간행하고 11월에 제2호를 등사·인쇄하여 만보산 사건이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일환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12월경, 2차례에 걸쳐 대구부 대봉정(현 대구광역시 남구 이천동) 소재 일본제국 육군 보병 제80연대와 대구고등보통학교 구내, 대구부 칠성정(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2가) 대구역 앞 등지에 반전·반제 격문을 살포했으나,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와 대구경찰서 고등과의 끈질긴 수사 끝에 곧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1932년 1월 23일 대구전보사 인쇄소 주인 佐佐木隆, 대구부 삼립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소재 경북잠종업조합(慶北蠶種業組合) 사무원 瀨戶口茂 등 대구상업학교 동기생들을 비롯해, 대구상업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권태우(權泰禹)·서상조(徐相祚)·정학진(鄭學鎭), 대구상업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암이(金岩伊)·강신중(姜信重)·이풍택(李豊澤) 등 동지 8명#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미결구류일수 18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 후 좌익 활동을 벌였다가 당국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0일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서오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현감공 제(濟)파. 달성 서씨 23세 '''수(洙)''' 원(源) 호(浩) 항렬.[2] 달성 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서상락도 이 마을 출신이다. 산격동 산79-1번지에는 산격동 입향조인 서침(徐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구암서원이 있다.[3]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의 9대손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