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기
1. 순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서정기
서정기는 1897년 3월 6일 전라남도 순천부 장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로 상경해 학업에 종사하고 1919년 4월 중앙학교 4학년으로 재학하던 중 동창생 이춘봉(李春鳳) 과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3학년 장용하와 함께 자신의 집에서 등사판으로 <반도의 목탁 제1호>라는 제목의 유인물 100매를 인쇄해 서울의 각 가정에 배포했다. 또한 그는 4월 12일 자신의 집에서 이춘봉, 장용하와 함께 <반도의 목탁 제2호> 100매를 인쇄해 각 가정에 배포했고, 이튿날 이춘봉, 장용하, 염형우와 함께 <반도의 목탁 제3호> 100매를 인쇄해 배부했다.
4월 25일에는 <반도의 목탁 특별호>라는 제목으로 서양인들이 조선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 70매를 등사하여 배포하다가 4월 말에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1919년 11월 24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1년 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하던 중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 단체인 재일본 조선유학생 동맹(在日本朝鮮留學生同盟)을 조직했다.
1925년에는 북간도에 가서 김창진(金昌珍) 등 동지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길림성에서 체포되어 신의주로 소환된 뒤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다가 1964년 8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서정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8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 충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서정기
서정기는 1898년 충청북도 중원군 이유면 대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5년 1월 충주에서 서우순(徐宇淳) 등 3명의 동지와 회합하고 서울에서 아나키즘 계통의 항일비밀결사인 흑기연맹(黑旗聯盟)을 조직해 아나키즘 연구와 선전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5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9년 2월 18일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면 읍내리 금성여관에서 권오순(權五淳), 안동규(安東奎), 김학원(金學元), 정진복(鄭鎭福), 서상경(徐相庚), 김현국(金顯國)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문예운동사(文藝運動史)를 조직하고 기관지 <문예운동(文藝運動)>을 간행하려 했다가 다시 체포되었고, 1930년 3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그해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와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했으며, 8.15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6.25 전쟁 도중인 1950년 7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서정기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청도군 출신 독룹인동가, 서정기
서정기는 1903년 1월 24일 경상북도 청도군 대성면 내호리에서 태어낫다. 그는 1919년 3월 13일 김타관(金他寬), 정술문(鄭述文)과 함께 밀양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포섭한 뒤 3월 17일 유천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공소했지만 5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9년 7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서정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