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익환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성익환은 1925년 2월 25일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경복중학교에 재학하던 중 동창생 이현상(李賢相), 주낙원(朱樂元), 명의택, 장의찬, 최고, 홍건표 등과 함께 조국 광복을 위해 친일파 및 일본인 고관을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동지 포섭 등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1941년 동지들과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그는 동년 가을에 봉래동 소재 주낙원의 집에 모여 정식으로 항일학생결사단체인 흑백당(黑白黨)을 결성하고 부서 및 선언문, 강령, 규약 등을 정했다. 흑백당의 선언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흑백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삼천리 금수강산에 단군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조국(祖國)이 악독한 일제의 잔인무도한 질곡 속에서 빈사지경에 이른 현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여기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자 흑백당(黑白黨)을 조직한다. 우리는 조국이 광복(光復)을 되 찾는 그날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바쳐 모든 방법을 다하여 일제(日帝)와 투쟁할 것을 삼천만 동포 앞에 엄숙히 선언한다.
흑백당원들은 우선 실천행동 방략으로써 친일파 처단 명부를 작성하였으며, 일인이 밀집하여 살고있는 당시 욱정(旭町 : 현재 남산동 부근)일대를 방화하여 일인을 섬멸하는 계획도 세웠다. 또한 이들은 일제의 패망과 조국광복이 가까왔음을 알리는 격문을 각처에 뿌려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기로 했는데, 성익환은 주낙원과 함께 격문인쇄 및 살포에 따른 실천계획의 책임을 맡아 활약했다. 한편 흑백당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경복중학교 무기고에서 교련용 38식 소총 2자루와 실탄 및 총검을 빼내기도 했다.1. 본 당원은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맹서한다.
2. 본 당원은 본당의 조직·이념·행동에 관한 사항을 절대 비밀로 한다.
3. 본 당원은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전력을 다해 완수한다.
그러나 거사를 준비하던 중인 1943년 10월 흑뱅당의 동조자였던 보성전문학교의 김창흠(金昌欽)이 귀향열차 안에서 우리말로 일제를 욕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가택수색을 당하던 중 흑백당에 관한 문서가 발각되면서 사태가 심각해졌다. 이에 당원들은 긴급 모임을 갖고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당원들은 김성근의 자형이 있는 만주의 신민(新民)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1943년 12월초부터 1∼2명씩 조를 나누어 떠났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에 의해 1944년 1월에 만주의 북경·심양(瀋陽)·신민(新民)·승덕(承德) 등지에서 먼저 떠난 선발대원이 체포되었다. 이때 성익환은 선발대원으로서 먼저 출발했다가 이때 체포되었다. 이후 국내에 남아있던 흑생당원 역시 모두 체포되었다.
성익환은 체포 후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44년 12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1945년 2월에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1년 8월 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성익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1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