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청
탐라국의 전통을 이어온 성주청(星主廳)터 제주도는 삼국시대에 탐라(耽羅)라는 고대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통일 신라때부터 간섭을 받으면서 탐라의 왕후에게 성주(星主)왕자(王子)의 봉작이 세습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고 1403년(태종 3) 성주제도가 폐지되어 조선시대에는 진무청으로 존속했으며 1910년 이곳에 제주우편수급소가 생기고 1927년 제주우편국 청사가 들어섰다. - 성주청터비.
1. 개요
星主廳. 지금의 제주도에 있었던 옛 소국 탐라국의 국왕/성주가 기거했던 궁궐.[1]
탐라국은 신라, 고려에 종속된 속국이었지만[2] 왕가는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대대로 성주청으로 불린 여기서 기거했다. 지금은 소실되었으며 위치는 지금의 제주우체국이다. 이 우체국을 가면 위 사진에서 보듯이 본래 이곳이 성주청터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작은 크기의 비 하나가 있다.
1.1. 성주청의 크기와 모습
전해지는 이야기들과 여러 자료들을 모아봤더니, 성주청은 중층의 2층 중대형건물로 추정되며 월대가 있는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구체적인 건축양식에 대한 기록이 없어 복원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당시 연구원은 “현재 우체국 건축물이 지하층까지 파내 건축됐기 때문에 이미 성주청 기단부의 일부는 교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복원 양식과 관련해서는 “탐라국에서 성주청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할 때 가장 웅장하면서 고도의 건축기술이 융합된 건축물로 추정된다”고 보고 “현재 목관아내 최대 규모 건물인 홍화각(정면 5칸, 측면 4칸)보다 더욱 크게 지어졌을것”으로 판단했다.
또 “1403년 성주청이 폐지된 뒤에도 일정기간 존속된 점을 고려할 때 성주청의 양식상의 연대는 탐라가 문헌에 공식 등장하는 5세기를 상한선, 고려시대 말까지를 하한선으로 잡고 당시의 건축양식을 기준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성주청은 고려와 합병된 이후 건물만 남아있다가 이후 조선초기,태종3년에 완전히 합병되어서 성주청 본관을 제외한 탐라국 궁궐 권역 전역이 모두 훼철되었다. 이후 유일하게 남아있던 탐라국 궁궐의 건물인, 성주청에 진무청이 들어섰으며, 숙종때까지 고려시대~조선초기 성주청 건물이 유지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 참고로 현재까지 유일하게 성주청의 건물로 추정되는 그림은 탐라순력도의 '제추전최'속 좌측의 2층 건물이다. 초록색으로 칠해진 난간(추정)이 있는것으로 보아서 이 건물이 진무청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2. 관련 자료
복원이 계획되고 있다. 다만 탐라 관련 건축 사적자료가 부족해 창조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비슷한 사례로는 월정교, 백제문화단지, 황룡사 등 여럿 있다.
[1] 탐라국에서는 엄밀히 말하면 성주星主(직역하면 별의 주인이란 의미, 성주城主가 아니다!)와 탐라왕이 꼭 일치하지 않았다. 그럴경우 성주가 탐라왕보다 지위가 높고 더 실세로 보인다.[2] 실질적으로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한것은 고려 중기 이후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실제로 고려 문종 때 고려 조정에 내부했던 탐라국 왕자 고말로의 아들인 고유가 고려 조정에 출사하여 과거에 급제할 때 그는 조공국 사람을 뽑는 '빈공'의 자격으로 응시했다.[3] 그 근거로 탐라순력도의 '제주전최'속 그림에 좌측에 2층 건물이 남아있다는것을 근거로 알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