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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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홈페이지
1. 개요
정부가 지정한 백제 문화권이 대통령령에 의해 국책사업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1993년부터 2010년까지 백제의 옛 수도 지역인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일대에 조성된 백제 관련 테마파크. 롯데그룹의 민자투자를 받아 롯데부여리조트, 롯데아울렛이 안에 위치해 있으며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역시 이 단지 내에 위치해 있다. 관람료는 어린이 3,000원, 청소년 - 군경 4,500원, 어른 6,000원.
총 100여만 평 규모로 1994년부터 충청남도와 문화관광부가 부소산과 낙화암 맞은편 백마강변에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지었으며 1998년에 첫 삽을 떴을 때는 국무총리까지 다녀갔을 정도라고. 그런데 이 당시 국무총리가 김종필이었고, 이 사업 자체가 김종필의 주도로 충청권의 민심을 사기 위해 이뤄진 거라는 분석도 있다. 2010년 세계대백제전 개막에 맞춰서 2010년 9월 17일에 공개되었다. 롯데 그룹이 투자한 민자투자만 3100억 원대... 이거 안 했으면 예상 적자만 연간 100억 원대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단순 '역사 재현'만 목표로 하는 문화재단지가 아니라 '테마파크' 형식으로 개장되었다.
당연하지만 한참 이후 시대인 고려 시대 건축물도 남은 게 얼마 없어 겨우 고려 불화 같은 회화 등에서 건축물 양식을 살펴볼 수 있지만, 백제는 그림은 커녕 기록도 별로 없으니 고증이 쉬울 리 없다. 결국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 관련 유적이나 한국의 백제 관련 유적 등을 참조하여 고증했는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부하고 있다고.
문화재 단지에는 사비에 세워졌던 궁궐, 성왕의 능에 세워졌던 능사, 고분공원, 생활문화마을, 하남 위례성 등이 재현되어 있으며 그 이에도 백제역사문화관이나 위에서 설명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롯데부여리조트, 롯데아울렛이 들어서 있다.
백제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인 근초고왕과 계백, 제왕의 딸 수백향의 세트로 이용되었으며, 배경이 고려 말인 '''대풍수'''와 가상의 역사인 대한제국을 배경으로 한 '''황후의 품격'''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2. 주요 건축
2.1. 사비궁
사비궁(泗沘宮)은 삼국시대 왕궁 중 최초로 재현된 왕궁이다. 현재는 대외적 공간인 치조(治朝) 권역을 재현한 상태이다.
2.2. 능사
능사(陵寺)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졌던 백제 왕실의 사찰이다. 중문-탑-금당-강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어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가람배치 형식을 하고 있다.
2.3. 고분공원
백제시대의 대표적 고분 형태를 보여주는 곳이다. 백제문화단지 화계조성부지에서 출토된 4기와 부여 은산면 가중리에서 출토된 3기 등 총 7기가 이전복원 되어 있다.
3. 비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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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단지의 능사 5층목탑. 복원된 것이다.
우선 제기되는 비판점은 백제문화단지에 재현된 건축의 형태와 비율이 백제유물인 청동소탑편, 또는 호류지같이 백제와 동시대로 여겨지는 건축물과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같은 양식이라고 해도 각각의 건축물별로 다른 점이 있었다거나, 호류지의 건축 양식이 백제와 동일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1]
유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옥충주자 같은 백제 혹은 신라시기의 유물이 있음에도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 비판론자들의 주된 근거이다. 다만 옥충주자의 원산지가 한반도인지,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제작한 유물인지는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므로 온전히 고증에 반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백제문화단지 재현단 측에서는 기와의 배치나 내림마루 부분의 곡률, 하앙의 배치와 형태 등에서 옥충주자를 상당히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백제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소탑편에서는 끝부분이 살짝 깎인 하앙의 형태나, 처마의 곡률 등을 고증에 반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건축기법을 통해 살펴보자면,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풍판과 같은 부재를 박공 지붕에 쓴다거나, 공포와 부연이 발달한 시기의 두터운 비율을 가진 지붕은 역시 백제의 건축양식이라기에는 신뢰성이 떨어져 보인다는 점이 주된 비판점이 되었다. 심지어는 복원안이나 모형보다도 기둥들이나 각 부분들의 높이가 낮아 둔탁해보이기까지 한다. 기둥 위의 포작(지붕과 기둥을 결합하는 구조)을 보면 국내 유일의 하앙식 고건축물인 화암사의 것과 유사해 보이는데, 시기상 백제보다 훨씬 뒤에 건립되었고 하앙이 퇴화되는 조선시대의 건축물과 유사해 보이는 것도 타당성이 떨어져 보인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물론 국내 유일한 현존 하앙식 건물이라는 점에서 고증에 참조하지 않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현대 한국의 목수들은 조선시대의 건축에 익숙하기 때문에 아마 작업의 용의성을 위해 조선시대의 건축 기법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할 만하다. 현대에 지어진 삼충사 등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하앙조차 현대에는 사용되지 않는 기법이다.
다만 일본에서도 시기가 앞서는 초기 고건축물에서는 마치 조선시대 건축을 연상시키는 둥그런 서까래와 네모진 직사각형 부연이 쓰인 적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고대에도 부연이 발달한 두꺼운 지붕이 쓰인 적이 있고, 도래인과 백제 유민을 통해 백제의 건축 기술을 거의 그대로 수입했을 가능성이 있는 8세기 초반 건축 유물이 특히 그러하다. 8세기에 만들어진 카이류오지 5중 소탑의 경우 부연의 형태마저 현대 한국의 목조건축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직사각형의 부연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위의 사진을 참고해보자. 지붕의 곡률이나 전체적인 실루엣이 의외로 재현된 능사 5층 목탑과 상당히 유사하다. 현재로서는 백제의 건축양식을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나마 추정복원을 통해 어느 정도 합리적인 가능성을 구현해내는 데는 성공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단청과 같은 세부적인 장식에 대한 비판점으로는, 우선 단청 색상이 너무 광택이 선명해 화학안료 같고, 고구려 벽화 등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은 초록 계열의 색을 너무 많이 사용하였으며 벽을 분홍빛으로 칠한 것이 조선시대의 느낌이란 비판이 있다. 세부적인 문양 쪽으로 가면 더더욱 의아스러우며, 단청업자와의 마찰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 또한 미적 감각이 결여되어있다는 점에서도 넷상에서 크게 비판받았다#. 일단 문화단지 조성 사업단 측에서는 단청 문양을 재현하기 위해 무령왕릉 출토 유물의 격자 무늬라든가 금동대향로, 무늬 벽돌 등을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동궁과 월지에서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상록하단의 경향이 삼국시대에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최근 일본에서 백제와 거의 동시기인 1300년 전 건축된 약사사 동탑 천장의 단청 그림이 발견되었는데기사, 그 형태나 색채가 조선시대의 단청과도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의 고건축에서도 오색 단청의 흔적이 보이므로(산주산겐도의 천장 등), 고건축이라고 해서 오로지 주칠로만 마감되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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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약사사 동탑의 천장 단청
조선시대의 단청은 주로 녹색을 바탕색으로 하고 다른 오방색을 채우는 식이기 때문에, 단청 무늬에 녹색이 다른 오방색과 같이 들어간 것일 뿐인 약사사 단청과는 다르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상록하단과 유사한 양식은 7~8세기경 헤이안 시대 일본의 당초제사 복원 단청과 당나라 유구(서안 중보촌당묘 건축 명기)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중요한 건 상록하단과 유사한 양식이 사용된 건 맞는데 바탕색이 지금처럼 녹색이 아닌 옻칠한 검은색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녹색을 바탕으로 하는''' 11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북송의 상록하단과는 양식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나라 건축에서 나타나는 청록색 단청은 상록하단 단청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인식에 따르면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에 나온 건축 제한 규정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오방색 단청이 단색 주칠 단청보다 격이 높았기 때문에, 남북국시대에 이르면 궁궐과 사찰 같은 중요 건축에 오방색이 칠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정리하면 단청의 바탕색이 녹색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당나라 시기까지만 해도 바탕색이 녹색인 단청이 중국에서 사용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삼국시대 단청에 오방색이 쓰였다는 것은 기록과 유물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때문에 한반도의 삼국시대 건축과 남북국시대 건축엔 상록하단 단청이 사용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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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상록하단과 유사한 단청 유구
하지만 위와 같은 당조의 상록하단과 유사한 단청은 중국에서 상록하단 단청이 "대중화되기 전"이라는 지적이 있다. 현대 학계의 상록하단에 대한 집착은 일제시대에 시행되었던 고려시대 건축 조사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조사들은 후대에 채색된 단청이라는것과, 고려 불화나 당대 중국 일본 건축들과의 비교연구가 힘들었다는 한계점을 갖고 있었다. 이 조사들을 바탕으로 현대에도 "상록하단" = 한국건축의 특징이라는 사상이 정설이 되어버렸고, 결국 잘못된 조사가 후대 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쳐버린것이다.
"적색 + 청색"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청이라는 단어 또한 고려시대에선 특정한 색깔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그림이나 벽화와 같은 의미로 쓰였고, 고구려 시대의 상록하단의 증거로 사용되는 진파리 4호분 벽화또한, '''사실 나무를 표현한 그림을 후대에 끼워맞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정작 1100년대 ~ 1200년대 건축으로 추측되는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에도 해체 조사 중에 나온 고려시대 단청문양은 '''붉은색 바탕의 단청'''이던 것이나, 고려불화나 고구려 벽화등에서도 바탕색으로 붉은색을 사용한것은 한국 고대건축의 대다수가 붉은색 바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참고로 고려 불화에서의 변천사나 현존하는 한국 중국 건축의 단청 변화를 보면 상록하단은 14세기부터 대중화 되었다고 볼수 있다.
이은희 박사의 논문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의 上綠下丹 단청기법 수용](2016)
물론 그렇다고 해서 초록색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바탕색이 초록색인 것은 잘못된 게 맞다.''' 중국 건축에서도 바탕색이 녹색인 상록하단이 처음 등장하는 게 중국 북송 시기이다. 당나라 건축 관련 유구에도 청록색 단청이 쓰이긴 하나 바탕색이 전부 붉은색 또는 옻칠한 검은색을 띄고 있어 바탕색이 녹색인 상록하단과는 단청 양식이 다르다. 또한 백제문화단지의 단청 문양은 고구려와 백제 벽화나 유물에서 따온 것을 보아 이 부분에서는 고증을 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탕색이 붉은색이 아닌 녹색인 것과 색감 고증이 문제인 것이다. 상록하단 자체는 삼국시대부터 쓰인 건 맞다. 다만 바탕색이 녹색이 아닌 주칠 단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색이었고 단청 색감도 지금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고구려 용강대총에 묘사된 단청의 바탕색이 붉은색으로 된 주칠인 게 명확히 나와있고 발해 고분 벽화에서 발견된 단청 양식도 바탕색이 역시 붉은색이다.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건축에 바탕색이 녹색이 아닌 붉은색이었다는 건 당시 출토되는 유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가장 큰 문제점은, 벽의 색깔을 고려 후기에나 사용되는 선홍색으로 사용했다는것이다. 이는 시대상 백제문화단지의 원형인 능사나 사비궁과 150년의 연대차이가 나는 호류사에서도 백색을 사용한 것을 고려하면 대체 그 근거가 무엇인지 의문이다. 개다가 최근에 복원완료된 월정교의 문루는 벽채를 백색으로 마감했기 때문에 더욱 비교되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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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면에서는 무늬가 찍힌 전돌이나 추녀 마구리 장식 등을 쓴 것은 고무적이지만, 서까래 끝을 막은 기와[2] , 금동 장식, 풍경 등이 삼국에서 널리 쓰였고 실제로 출토된 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왕궁과 절 건축에 쓰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다. 풍경의 경우엔 완공 이후에 따로 만들어 달아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와의 경우 회칠을 노출시키지 않고 깔끔하게 재현한 것은 좋지만[3] , 망새를 쓰는 조선시대의 기와 배치를 사용해 결국 치미의 위치가 제대로 맞지 않고 바깥으로 튀어 나와버렸다. 아무래도 시행착오가 다발했던 만큼 향후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기를 기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