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교
1. 개요
돌아온 신라의 다리, 월정교를 걷다 / YTN 사이언스
월정교의 모양 고찰
통일신라 시대 서라벌에 세워졌던 다리. 세트로 지어진 일정교와 함께 국왕이 사는 궁전인 경주 월성과 그 남쪽 남천 건너편의 남산(경주) 쪽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한때는 나무로 된 누(樓)는 사라지고, 다리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석조물만 남아있고 강바닥에 일부 기와, 목재 부재가 묻혀 있었다. 2004년 일정교와 함께 사적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신라 제35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으며, 서라벌의 교통로로 기능했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연을 트기 위해 유교(楡橋)에서 강으로 뛰어내렸던 일화를 월정교와 연관시키기도 하고, 김유신이 천관녀를 만나러 제매정 집에서 천관사 자리로 말을 타고 갈 때에도 월정교를 지나야 했다.
고려 제25대 충렬왕 6년(1280년)에 경주부 유수 노경론이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여몽전쟁의 참화까지 피해가며 최소한 520년간은 존재해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후 어느 시기에 불타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며, 1986년 발굴조사 중 월정교 아래 강바닥에서 불탄 기와와 목재 부재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름이 신라 때는 '月淨橋'였는데 이후 고려 때 언젠가부터 '정' 자의 한자가 다른 '月精橋'로 바뀌어 그 이름이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3. 복원
현대에는 다리는 무너지고 그 부재들이 폐허로 남아있었으나 21세기에 복원되었다. 다른 신라왕경 시절의 소실된 목조건축물들에 비해서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먼저 복원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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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층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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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층안'''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나 누교(樓橋)였다는 기록, 그리고 기와 및 목조건축의 처마를 구성하는 부재가 출토된 점에 근거하여 다리 양쪽 입구를 막는 누각을 세우는데, 복층안과 단층안이 제시가 되었다. 아무래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겸사겸사 복층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왕궁과 연결된 다리라는 점과 방어목적이 있었을 것이란 이유가 붙긴 했다. 아무튼 복층안이 선택되어 2007년부터 복원사업에 들어갔으며, 이런저런 논란 덕분에 계속 연기되다가 2012년 말을 완공 목표로 공사가 계속되었다. 월정교에 대해...
2011년 9월에 이미 상량식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누각을 제외한 다리의 목조 구조물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 그리고 2013년에 1차 복원 사업이 완료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2016년 4월에는 양쪽 문루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17년 10월 11일을 기준으로 문루복원이 완료되었으며 주변정리만 남은 상태다. 2017년 11월에 들어서는 주변도 정리가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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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이전 사진으로 당시 월정교의 터이다. 당시에는 석축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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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사업이 진행중이던 당시의 모습. 2013년에 1차 복원으로 누교(樓橋) 복원이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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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이후의 모습.
김생 글씨체의 남쪽 문루 설치가 되었다. 3월말 최치원 글씨체의 북쪽 문루 현판 설치가 완료되었고 공식적인 공사 완료는 2018년 4월 6일 이라고 한다. 조경사업의 경우 9월에야 완전히 끝난다고 한다.
2018년 11월 기준 모든 공사와 사업이 완료됨에 따라 항시개방으로 전환되었다.
3.1. 복원에 관한 논란
사실상 월정교의 구체적인 모습은 거의 상상에 의존하고 있다. 목조건축의 특성과, 불에 탄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봐서는 목조건축 지붕이 있는 다리였다는 것은 맞지만, 이곳과 인근 월지에서 출토된 여러 부재 유물들을 조합해서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에 따라 만들었을 뿐 전체적 디자인은 창작된 부분이 많고, 누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 옛날 월정교 그 자체의 재현이라기보단 사실상 신라 건축양식으로 다리를 새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석재 기단 부분은 복원 전의 부재를 많이 사용했지만[1] 윗부분은 목재 특성상 신라시대 월정교의 재료가 사용되지도 못했다.
월정교를 복원하는 측에서도 이 것이 다소 무리한 계획임을 인지했다. 월정교가 첫 복원 대상으로 선정된 것도 랜드마크급 유적들에 비하면 비교적 원형 훼손 논란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덜하기에 일종의 시험 사례로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황룡사 등의 더 중요한 유적의 복원 문제가 월정교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경주시라는 도시 자체를 재건하고, 관광 상품을 늘리자는 취지가 학술적인 정확성보다 우선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경주가 신라의 1천년 도읍으로써 그 흔적은 매우 많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석재 부분을 제외한 건축은 거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 실제적인 볼거리는 좀 부족했다는 점에서 이해가 안 가는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학술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계속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다.
복원된 결과물에서 고대 건축의 특징인 솟을대공이나 조선시대에 사라진 목조 박공장식인 현어, 출토된 금동 난간 장식 등을 어느 정도 사용한 점과 벽체색을 하얀색으로 채택한 일[2][3] 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봐서는 몇 가지 의문점이 보인다. 다리 난간 아래에 있는 기와 지붕 등이 대표적인데, 이런 양식은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풍우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지만,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관련성을 찾기는 어렵다. 이외에도 고질적인 한국 건축물 복원의 난점인 단청의 세부 문양과 상록하단법이 실제로 신라 시대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겠느냐 등 누군가 확실하게 그렇다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또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난감한 점들이 남아있는 것.
그러나 고구려나 통일신라 시기의 벽화나 출토된 건축 상단부의 하연 유구 등을 보면 고구려나 통일신라는 상록하단을 사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건축은 바탕색이 붉은색과 하얀색 건축 위주였다.
그리고 8세기 이후 당나라 건축 유구인 중보촌당묘 건축 명기나 일본 헤이안 시대 당초제사의 복원된 단청 유구를 보면 상록하단과 비슷한 경향의 채화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으나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아직 상단부 전체를 초록색 단청으로 칠하는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저 두 유구는 상록하단이라기보다 여러가지의 바탕색을 단청으로 칠하는 오채단장에 가깝다. 우리가 아는 형태의 상록하단 유구는 11세기인 북송 초기 때에 가서야 발견되기 시작한다. 즉, 당나라 시대까지는 상록하단 단청은 동아시아 건축 양식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바탕색이 녹색인 단청은 중국 원나라~명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단청이고 그 이전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단청에 상록하단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바탕색은 주칠로 되어있었을 거라는 얘기.
최근 발간된 월정교 문루 보고서를 보면 명지대학교의 동궁과 월지 단청 복원 보고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동시대 중국 당나라와 일본 나라시대의 유구들을 참고하여 적색을 주된 색으로 사용하는 단청안이 채택되었으나, 기존 월정교 누각 단청과의 조화를 이유로 푸른색이 바탕인 상록하단식 단청으로 결국 채색되고 말았다. 초기 복원이 제대로 고증되어야 추후 복원 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 문양은 기존 누교의 단청 문양처럼 신라시대 유물 문양을 바탕으로 하였다. 다만 신라시대와 고려, 조선의 단청은 전체적인 구조의 틀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는데 고려와 조선의 단청의 틀에 신라시대 문양을 추가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국적불명의 단청이 나왔다는 문제가 있다. 이는 신라시대와 고대의 단청이 남지 않은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다만 훗날 신라의 단청이 복원되거나 발견된다면 다시 단청을 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미지수...
현판의 경우에는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불감제일'(佛龕第一) 현판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글씨체는 신라의 명필 서예가인 김생과 최치원의 글씨체를 인용하였다.
다리가 남아있던 시절 지어진 고려시대 김극기의 시에 나온 무지개 다리 그림자 거꾸로 문천에 비치었네’ 구절로 볼 때 석조 아치교 였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하지만 발굴조사에서 불탄 기와, 석재 등 부재가 많이 나왔지만 그 중 아치에 쓰이는 부재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치형 다리가 아니라고 판단된 것.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완벽하게 잘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전에 있던 고대건축물의 복원결과물들 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점은 많다는 것이다. 다만 무분별한 상록하단의 사용은 여전히 한국 고건축 복원의 숙제로 남은 상황.
[1] 기단을 보면 돌이 얼룩덜룩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말끔한 석재는 새로 넣은 것이지만 그 사이사이에 과거 소실되고 남아 출토된 부재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왜 다 새돌로 색을 맞추지 않았냐고 안 했냐고 따지는데, 이전에 기단부에 있던 돌을 다시 재활용했기 때문에 색이 다른 것이다. 가능한 본래의 재료를 활용하는 것도 문화재 복원의 중요한 원칙이다.[2]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얀 벽체색을 가진 복원 건축물은 한국에서는 이 건축물이 최초다. 당장 호류지 같이 고대에 새워진 일본의 목조건축물을 봐도 벽체색이 하얀색인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증거들이 있음에도 백제문화단지 사례처럼 한국의 고건축 복원물은 꾸준히 백색이 아닌 다른 색을 사용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3] 물론 북한까지 영역을 넓히면 이 건물이 최초는 아니다. 월정교 이전에 북한에서 복원한 고구려의 사찰 정릉사와 고려의 사찰 영통사는 하얀 벽체색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