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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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탐라국'''은 제주도의 옛 명칭이자 그곳에 존재했던 국가의 이름이다.
약 12세기까지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며, 그 이후에도 조선 초에 완전히 본국에 편입될 때까지 '탐라'라는 이름은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탐라국의 주민인 제주 원주민, 즉 탐라인은 탐라국이 있던 당시 육지의 한민족계와 유사한 혈통이었다. 물론 현대의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같이 차이가 큰 이민족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한반도에 공존한 고대 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등도 서로 말은 통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삼한인이라 지칭하는 등 어느정도 공통의식은 있었으나 서로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고구려인, 백제인이 있듯이 탐라인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말하자면 본토의 사람들과는 고구려-백제의 관계와 비슷한 수준의 형제뻘인 관계 정도. 그리고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본토와는 차별되는 문화가 발전해 왔고, 언어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그러니까 한국계 혈통이긴 하지만 한국인은 아닌 탐라인이라는 것. 오키나와의 류큐인도 일본인과 형제 뻘인 민족이지만 야마토 민족은 아니며 일본 본토에 그닥 동질성을 느끼지 않는데 이와 비슷하다(게다가 오키나와는 가까운 일본령인 큐슈 섬과 한참 떨어져 있다). 차이점은 복속의 역사가 더 긴 탐라국 쪽이 더 본토에 동화되었다는 정도. 오키나와는 현재도 일본 본토랑 이질적이다.
원대부터 명초까지는 탐라국에 중국 윈난성과 몽골의 문화가 유입되었으나, 본토에서의 중앙 집권 통치가 굳건해진 조선 왕조부터 한반도 본토와 같은 목, 군, 현 단위 행정구역이 설치되며 관리를 받으면서 한반도 본토와 일체화되어 갔다.
2. 명칭
명칭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신뢰가 떨어지는[18] 제주 고씨 문중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탐'은 고을나의 15대손인 고후 형제가 문무왕 때 조공하면서 탐진(耽津 :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군)의 '탐'을 따와 붙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혹은 강진이 백제 도무군의 도강과 동음현의 탐진을 따서 강진이 되었고, 이후 다시 신라 때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정작 탐진도 원래 강진이었다가 탐라 + 강진으로 759년 경덕왕 때의 지방 명칭 변경 때, 혹은 문무왕 때 고후 형제가 탐라국에서 조공할 때, 탐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말 그대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의 논쟁. 여하간 탐진의 탐은 둥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나 '라'는 신라에 입조할 때 당시 왕이 붙여준 것으로 의견이 대충 일치한다.[19]
한편으로는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에서 동국방음(東國方音)에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며 탐, 섭, 담 이 세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한 바 있다. 즉, 이 풀이를 따른다면 '탐라'는 말 그대로 '섬나라'가 되는 셈이다. ㅅ이 어떻게 ㄷ, ㅌ이 되느냐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약점이다. 이외에도 양서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어로 읍(邑)을 담로(擔魯)라고 부르고, 신당서에서 탐라가 담라(儋羅)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탐라는 '''고을'''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제주란 건널 제(濟) 자를 쓰는데, 고려 무렵에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탐라와 제주란 이름은 조선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혼용되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제주 목사 등이 편찬한 탐라순력도 등을 보면 제주도 섬 자체는 탐라, 제주목(현 제주시) 지방은 제주라 칭하는 형태를 찾을 수 있다.
이외에도 알렉산더 보빈은 반도 일본어족설을 주장하면서 탐라가 타미+무라, 타무라랑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도 일본어족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가설로 평가 받지만 탐라 명칭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고대 일본에서 탐라를 토라라고 불려졌다는 상반되는 증거도 있다.
고대 일본에서는 토라(度羅, トラ)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아악)의 탐라 음악이 토라가쿠(度羅楽)이다.
3. 역사
제주도의 역사는 오랜 기간 한반도와 동떨어져 진행되어 왔으며, 그 기록 또한 매우 소략하다. 이로 인해 기초개론 수준인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내용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잘 인지하지 못할 뿐, 선사시대 고산리 선사유적 기록부터 시작해 은근히 제주도 관련 기록이 적지 않다.
3.1. 선사 시대
애월읍의 빌레못굴 유적과 같은 구석기시대 유적부터 인류 거주의 흔적이 발견되며 이는 당대에는 제주도가 해수면의 영향으로 육지와 연관되었을 가능성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사적 412호인 고산리 선사유적이 매우 유명하며, 삼양동 선사유적 역시 사적 416호로 지정되어 있어 제주도의 인류 거주가 역사 기록 이전에도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한반도에서 송국리형의 문화상이 청동기 중기 이후로 발현한 이래 가장 오래도록 송국리 유형의 주거지와 문화를 유지하는 곳이 바로 제주도, 즉 탐라국이기도 하다. 5~6세기가 되면서부터 백제나 신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정제된 기법으로 만들어진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종의 해상 문화 지체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 제주도의 신화적 기록으로는 개척 설화인 삼을나(三乙那) 설화가 있다. 이는 특이하게 타 지역과 다른 3성(三姓) 신화의 형태이다. 동문선, 고려사 등에 인용된 탐라국 건국신화에 따르면 태고에 양을나(良乙那)[20] ,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 삼형제[21][22] 가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 오늘날 삼성혈)이라는 땅에서 솟아 나와[23] 사냥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벽랑국(碧浪國)[24] 에서 들어온 세 공주를 아내로 맞아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면서 제주도 삼성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화 형태상 고구려, 백제와 동계인 부여계 신화의 영향이 있다고도 하며, 시조가 바다를 건너온 여인과 결합한 부분은 가야 수로왕이 바다 건너 허황옥과 결합한 것이나 신라 혁거세 거서간이 물의 근원으로 태어난 알영부인과 결합한 것과 유사점을 찾기도 한다. 이렇듯 초기에는 삼을나(良乙那, 高乙那, 夫乙那)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후술하듯 고려 이후에는 국왕 격인 성주, 부왕 격인 왕자 이 양자가 함께 다스리는 이원적 통치체제로 변화해 나간다. 탐라국 왕세기에 따르면 무려 기원전 2337년으로 '''단군조선보다 빠른''' 건국이라지만 애초에 단군조선의 2333년 기록부터가 신뢰하기는 어렵다. 이때 세 씨족 사회가 뭉쳐 고씨가 왕이 된 건 인간 세상이 생긴 후 900년 뒤라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신화적 기록은 실제 출신이나 성씨, 시간관념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창세 설화 내지 건국 설화에 나타나는 신화적 요소로서 파악해야 한다.
3.2. 삼국시대
탐라국이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하기 이전에,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주호국이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마한 서쪽 바다 큰 섬의 세력이라는데, 한반도 부속 도서 중에는 제주도가 가장 크므로 이들이 고대에 탐라국을 지배한 세력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탐라가 한반도 국가와 직접적으로 통교한 것은 백제의 웅진 남하 시기 이하로 추정한다. 근초고왕 대의 남방정벌 기사를 과거에는 침미다례를 제주 탐라로 규정하여 제주도까지 소급 적용했던 바 있으나 이후 침미다례와 같은 마한계 후기 국가의 소재를 전남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백제 문화권이 전남으로 내려오는 것은 웅진백제기 이후이며,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서도 백제의 전남, 제주 등의 남방 진출은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 이후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의 공물 납입 및 복속 기록, 일본서기의 복속 기록, 수서 백제전의 백제 부용국인 '탐모라(耽牟羅)'[25] 기록 등을 종합해 볼때 일반적으로 시기의 오차가 조금 있기는 해도 동성왕대를 전후하여 500년 근처에 전남 해안 지역과 탐라까지의 편입이 이루어졌다고 보는것이 대체적인 중론인듯.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문주왕 2년(476년). 한국 사서 중 탐라국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단이다.[26]
南海中耽羅人 初通百濟國
2년 (508년) 겨울 12월 : 남해의 탐라인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교통하였다,
《일본서기》 권17 계체기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울 때의 아홉 나라(九韓, 구한)에도 '''탁라'''(托羅)가 들어간다. 이외의 8국은 왜(倭), 중화(中華), 오월(吳越), 응유(鷹遊, 백제로 추정), 말갈, 단국(丹國, 거란), 여적(女狄, 여진족) [27] , 예맥(濊貊, 고구려로 보임)이다. 구한(九韓)이라고는 하나 전혀 삼한의 범주 같은 것과는 상관 없고 그냥 주변국 다 싸잡아넣은 것.平陳之歲, 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 (중략) … 其南, 海行三月有耽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진을 평정하던 해에, 군선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때 백제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는데, 창(위덕왕)이 이 배를 후하게 지원하여 보내고, 사신을 같이 파견하여 진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표를 올렸다. (중략) 그(백제) 남쪽에 바다로 3달을 가면 탐모라국이 있는데, 남북으로 1000여 리이고 동서로 수백 리이다. 토산물로 노루, 사슴이 많이 나고 백제에 부용해 있다.
《수서》 백제전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28] 을 참조했을때 백제가 복속한 이후 백제의 관직을 받은 것으로 확인 되며, 왕자의 존재도 확인된다.
3.3. 남북국시대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662년 탐라국주 좌평[29] 도동음률(徒冬音律)[30] 이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31][32]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耽羅志≫에 “신라 때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삼형제가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하니 왕이 기뻐해 작호를 주었는데, 고후에게는 성주(星主), 고청에게는 왕자(王子), 고계에게는 도내(都內)라 하고 국호를 주어 탐라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성주란 명칭은 별의 주인이라는 뜻으로써, 탐라가 입조할 당시 신라 남쪽에 객성이 떴고 그 후 고후 형제가 신라에 입조해오자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하사한 것이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항로 지표로 별자리를 이용하였고 탐라국에선 북두칠성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칠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을 쌓은 것이 칠성단인데 현재 속칭 칠성통이라 불리는 곳에 칠성단이 있었다.[33][34] 탐라지 등에 조선조 칠성단에서 제를 지냈는데 칠성은 하늘의 북두칠성이고 제의도 천제란 기록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당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679년에는 다시 한 번 신라가 탐라국을 경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서 662년의 항복은 형식적인 것이고 한반도의 정리가 끝난 679년에 신라가 여유가 생긴 뒤 본격적으로 속국화했다는 주장도 있다. 662년의 신라는 백제 부흥군 상대하랴, 고구려 상대하랴, 그리고 곧 나당전쟁 준비하랴 바빴기 때문에 탐라국에 신경 쓸 여지가 전혀 없었다. 일본 쪽 기록에서는 백제 멸망 직후인 661년을 처음으로 이후 수 차례 탐라국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등 백제가 붕괴한 이후 탐라국도 나름대로 여기저기 활로를 모색한 흔적이 보인다. 탐라국과 일본의 교류는 693년 사신 가라(加羅)를 일본에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리고 이후로는 일본이 탐라국과 연락할 일이 생겨도 직접 하지 않고 신라 조정을 통하는 식으로 바뀐다.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이 즈음부터 신라의 탐라 통제력이 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탐라국은 892년 육지에서 후삼국시대가 개막할 때까지 통일신라에 정기적으로 조공하였다. 보덕국이나 우산국처럼 일종의 신라의 번국이 된 것인데, 속국이지만 일단 독립국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어서, 신라 복속 초창기인 7세기까지는 당나라에 조천사를 보내거나 일본에서는 견탐라사(遣耽羅使)가 잠깐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8~9세기가 되면서 일본 측도 탐라국이 신라의 속국인 것을 인지하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속일본기 기록에 따르면 778년 일본의 견당사가 탐라국 주민들에게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나자[35] 779년 신라에 견신라사를 보내 탐라국에 억류된 우나카미노마히토 미카리(海上眞人 三狩) 등을 빼내 일본으로 귀국시킨다. 즉 탐라국은 별도의 국가지만 신라의 제어를 받는 상태였던 것이다.
신문왕 4년(684)에는 고지창(高支昌)을 신라에 보내 설총의 이두문자를 도입했다고 한다. 다만 탐라국왕세기에서만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불확실하다.
김헌창의 난 때(822)는 신라 귀족들 일부가 탐라국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3.4. 고려시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2년여가 지난 938년 탐라국주 고자견은 태자 고말로를 보내 고려에 입조하여 형식상 속국이 되었으며 이에 고려 태조는 신라의 예에 따라 탐라에 성주와 왕자의 관작을 제수하였다. 탐라가 신라나 고려에게 관작을 제수받은 것은 지방 호족 세력이 한반도의 패권을 가진 중앙정부에 입조하여 탐라 지방의 지배력을 인정(책봉)받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고려 초기까지는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지방 호족을 고려의 지배 체계에 편입시키며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탐라국 역시 차츰 고려의 지방 행정 단위로 편입되었다. 제주라는 명칭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탐라인이 고려 '''빈공과'''('''賓'''貢科 : '''외국인을''' 자국의 관료로 임용하기 위하여 치르던 시험.)에 합격하거나, 탐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간관에 임명되지 못한 고유의 사례처럼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고려와는 별개인 속국 취급을 받는 등 자치는 허용되었다.
1105년 숙종 시기에 탐라국은 '''탐라군'''으로 개칭되면서 속국 지위가 박탈되고, 본토에 있는 중앙 정부의 통제권에 들어왔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과 탐라 현지인은 갈등을 빚었으며 1168년 양수의 난으로 폭발한다. 성주는 여전히 대를 이어 세습되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계속 허용되었다. 목호의 난 진행 과정에서도 목호 측과 고려 진압군 측 모두 명목상 탐라의 지배자인 탐라 성주를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고려 중기 이후의 탐라는 사실상 고려에 복속했지만 아직 독립국가의 성격도 일부 가진 이중적인 정체성을 가진 지역이 되었다.
한편 탐라국 내에서도 정쟁이 일어났는데, 본래 양씨가 왕자를 제수받았지만 정작 마지막 왕자의 이름은 문충세(文忠世)였다. 오히려 왕자 작위를 세습한 성씨는 문씨가 더 많다. 이렇게 된 사연은 좀 길다. 탐라국은 명목상 고씨 성주가 군주지만 사실상 서쪽 반만 성주의 영토, 동쪽 반은 양씨 왕자의 영토, 수도는 공동 통치였다. 화산재 때문에 농사가 어려운 동부보단 서부가 항상 더 강했지만 성주들은 이에 만족 못하고 외국인 고려에서 과거를 보고 관직까지 얻을 정도로 조정에 협조해서 지원을 받는다. 조정은 덕분에 고씨와 양씨가 분열한 틈에 탐라국을 속국화시켰고 고씨 성주는 탐라국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얻은 윈윈 전략이었으나 이들에게 부림당하는 탐라인들과 토호들에겐 의문의 2패가 되었다. 그러다 무신 정변으로 고려가 막장이 되니 성주는 반발하는 토호들을 찍어누를 수 없게 되었고 왕권 유지를 위해서 육지 이주민 가문 문씨와 결혼 동맹을 맺는다.[36] 그러나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더더욱 혼돈 상황이 된 끝자락 쯤 고려의 빽이 완전히 증발한 성주 고적을 왕자 양호가 끌어내리고 성주에 올랐다. 다수의 탐라인들과 성주 양호는 탐라국의 자주 독립을 목적으로 삼별초 항쟁을 도왔고 1인자 자리에서 밀려난 고씨와 문씨는 자신들 권력을 보장해줄 여·몽 연합군을 지원했다. 최종적으로 김통정이 이끌던 삼별초가 패배하면서 이때부터 고씨가 다시 성주를 차지하고 동맹인 문씨에게 왕자의 자리와 왕자의 영토인 섬 동부를 주었으며, 이 문씨의 왕자 직위가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몽골 제국과의 여몽전쟁 시기에는 삼별초가 제주도를 점령하여, 최후 항전지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몽골 간섭기에는 말을 키우기 좋은 환경에 주목해 원나라의 직할령인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어 요양행성 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빼앗긴 충렬왕 시기에 일단 반환받았다. 공민왕 때 목호의 난(牧胡)[37] 이 일어나 최영 장군이 진압군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려 정부, 몽골, 삼별초 등이 탐라국을 계속 뺏고 빼앗겼지만 그 동안에도 탐라성주는 계속 존재했다. 가령 탐라총관부 시절에도 총괄은 몽골의 다루가치가 하지만 통치 실무는 성주, 왕자들이 계속했다. 탐라는 자체 왕실과 통치 체계가 존재하면서도 바다 건너편의 속국이기도 한 이중적인 체제를 고려시대 내내 유지했다.
3.5.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선 1402년, 명칭이 제주도가 되었으며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高鳳禮)가 삼국 시대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와 양씨가 세습한 성주와 왕자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 줄 것을 청하며 인부(印符)를 조선 조정에 반납했다. . 그래서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었고 이로써 그나마 이름만 유지하다가 조선에 완전히 편입되어 전라도 관할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설치, 완전하게 중앙 정부의 지휘를 받는 행정 구역으로 되었다.[38]
비록 행정구역 상으로는 전라도에 속했으나 제주목은 사실 조선시대에도 특수행정구역에 가까웠다. 실제로 다른 군수, 현감들이 목사와 독립적으로 관찰사의 직속 부하였던 것과 달리 정의현, 대정현의 현감들은 전라도 관찰사의 직속이 아니라 제주목사의 관할하에 있었고 소속 현감에 대한 행정적 명령에 대해 전라도 관찰사에게 사후 보고하였다.
탐라국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탐라국 연표 참조.
4. 역대 군주
일본측 사서에서 나타나는 조공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가계도가 만들어진다.
아래의 이 연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정사가 아닌 제주 고씨 문중 족보에서[40]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열람에 주의를 당부한다. 족보 상 정사에서 확인 되는 왕의 이름이[41] 몇 있지만 워낙 기록이 적어 제대로 된 왕계조차 파악하기 어렵고, 도동음률이나 유리도라[42] 같은 고씨가 아닌 왕의 인명도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자료에 따라 양씨가 탐라왕 및 성주를 지낸 기록도 있어 고씨가 쭉 탐라국의 군주였는지도 의문이 가는 노릇이다... 그리고 애초에 시조 고을나왕의[43] 무려 136년이라는 재위 기간부터가 신빙성이 없다.[44] 신라에 입조한 이후에도 다시 고려에 입조하기 전까지 왕이라는 칭호가 이어진 것을 보면 외신내왕적 성격을 띈 것으로 보인다.
4.1. 역대 성주·왕자
이하는 고려사 등 사서에서 확인되는 고려의 제후 성주(星主)와 왕자(王子), 조선의 지방관 좌·우도지관의 목록이다.
5. 여담
탐라국 궁궐의 존재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많으나 본궐은 지금의 제주목 관아터에 지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 이유는 탐라국의 성주가 업무를 보았던 성주청이 제주 우체국 자리에 위치하였다고 하기 때문. 824년에는 서귀포에 이궁인 남궐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민간설화에는 탐라국의 왕자가 지금의 서귀포 위미리 또는 한남리에 남궐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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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청을 다시 짓는다고 한다. # 다만 애초에 탐라국 건축 관련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냥 전통 양식의 건물을 새로 짓는 수준이 될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많다. 백제문화단지, 월정교 등이 존재한다.
우산국과 비교해봐도 많은 유적, 유물, 기록이 나온다.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시조와 말왕의 기록도 우산국보다 더 많다.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에서는 혈망봉과 도귀촌이 탐라 지역으로 등장하는데 메인 빌런인 마고에 의해 완전히 오염되어 버린 땅으로 등장한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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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부에 기원전 2337년이라고 서술한 자료가 있으나, 이는 신화적인 연대이고 실제로는 기원후 3세기를 전후하여 육지에서 새로이 이주한 이들을 중심으로 국체가 형성되었다.[2] 《위서(魏書)》, 이를 신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3] 《수서(隋書)》[4] 《신당서(新唐書)》[5] 《삼국유사(三國遺事)》[6] 초창기 탐라국의 수도는 지금의 '라마다프라자 제주호텔' 과 탑동로 일대였다. 그러다 삼국시대 말기에 지금의 제주목관아 일대로 옮겨졌다. [7]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대, 정확히는 제주우체국 자리다.[8] 부왕 왕자(王子)가 있었다.[9] 제주 양씨의 시조이다. 그리고 제주 양씨에서 분관된 남원 양씨의 시조이기도 하다.[10] 제주 고씨의 시조이다.[11] 제주 부씨의 시조이다.[12] 이후 성주제가 실시된다.[13] 국왕 성주(星主), 이후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를 한 기록도 확인된다.[14] 부왕 왕자(王子), 이후 우도지관(右都知管), 성주를 한 기록도 확인된다.[15] 지금의 제주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언어로, 제주어가 아닌 탐라어가 맞다.[16] 숙종 시기에 탐라군으로 개칭, 의종 대가 되면 중앙 정부의 지방관까지 파견되므로 국가로서는 사실상 고려 시기에 멸망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주와 왕자에게 명목상 위치도 있어 고려와는 별개 국가라는 인식이 있어 고려 말 공민왕 시기에 와서도 고려에서는 탐라를 고려에 공물을 바쳐온 국가로 인지하고 있는 기록이 나온다.[17] 성주제 폐지로 겉치레 직위와 권한마저 사라지며 탐라국이라는 별개 인식도 사라지게 된다.[18] 가장 큰 이유는 양씨와 고씨가 정통성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2014년에 삼성혈에 이름 먼저 올리는 문제로 법정 다툼까지 벌일 정도이다. 다만 후술하듯 정통성 문제는 조선조에 이미 옛 문헌을 널리 상고한 끝에 결론이 났기에 의미가 없고, 현재 논란은 3성 중 가장 수가 많은 고씨 문중의 억지인 셈이다.[19] 그러나 신라에서 황룡사를 제작할 당시, 탐라국은 백제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이때 탁라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20] 양씨는 후에 良에서 梁으로 바뀜[21] 조선왕조 관찬사서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형제의 순서는 차례대로 양, 고, 부이다. 다만 후에 기록된 사료에서는 양고부, 고양부 이렇게 뒤섞인 채로 표기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良·高位次 改換事件(양고위차개환사건) 및 삼성혈 외부 링크 참조.[22] 조선 영조 때 고한준(高漢俊)의 상소에도 良高夫로 되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 고씨이다. 조선 왕조 실록 濟州儒生高漢俊等上疏言(제주 유생 고한준 등 상소문) 참조. [23] 고조선, 고구려, 가야, 신라의 건국 신화에서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는 반대다. 하지만 백제 같은 경우에는 시조인 온조가 하늘과 연계되는 것이 아니며, 가야 같은 경우에는 신화가 2가지인데 김해의 금관국은 하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과는 다르게, 대가야의 신화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중심이다. 대가야 신화를 생각하면 제주도의 것과 비슷하게 땅의 역할을 크게 보고 있다.[24] 고려사에는 일본국이라 되어 있다.[25] 남북 1000여 리, 동서 수백 리에 항해에 3달이 걸린다는 기록 때문에 섬의 크기나 생김새, 거리상 제주도가 아니라 지금의 대만 섬이라는 떡밥이 있으나, 군선이 대만으로 표류했다면 굳이 백제를 들러 중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또한 대만은 수서에 함께 기록된 유구국(流求國)이라는 설이 있다(다만 유구국에 대해서는 류큐설이 조금 더 우세하긴 하다.). 물론 가장 기본적으로 백제가 제주도 또한 완전히 영토로 편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만까지 원정을 나가는 뻘짓을 왜 했느냐, 그리고 했다면 관련 기록은 왜 없느냐는 비판 또한 들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수나라가 바다 동쪽의 여러 섬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로 보인다.[26] 다만 이 문단에서의 탐라국은 아래 기록의 '''처음으로'''라는 말 때문에 전남지역에 존재하는 마한의 잔존 세력으로 파악하려는 의견도 있다. 또 이때는 막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시기였는데 그것을 알아차리고 제주도에서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27] 의외로 여진족의 존재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기록에 나온다. 흔히 퉁구스계 민족들의 계보를 '물길-말갈-여진-만주'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확히는 퉁구스계 제민족들을 통일한 부족의 이름이 종족명이 된 경우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즉, 말갈족이 득세할 때도 여진족이 있긴 했지만, 이때만 해도 말갈족에게 끽소리도 못하고 눌려지내던 겉절이였다는 뜻이다.[28] 탐라국이 연마 등을 보내 옴.[29] 백제의 관직이다. 탐라국은 상기했듯 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들어오기 전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다.[30] 또는 탐라국왕 유리도라(儒李都羅)[31] 제주 고씨의 족보에 따르면 처량왕(處良王)이 이때 왕인데, 후대에 지어진 족보보다는 당대 기록 쪽이 당연히 신빙성이 높다.[32] 도동음률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서, 유리도라라는 이름은 신당서와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 등장한다. 徒는 이두로 네로 읽히고 유리는 누리, 내이므로 서로 같은 이름이다.[33] 칠성통과 그 주변 지역은 탐라국 시대부터 1990년대까지 제주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며 지가 역시 가장 비싼 곳이었다. 허나 제주도청과 시청, 법원 등 주요 기관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신제주와 광양 등지로 중심지가 옮겨가면서 점차 쇠락 중이다. 특히 제주도립병원(현 제주대학교병원)이 아라동으로 이전한 것을 두고 호흡기를 떼버렸다는 평가도 있다.[34] 제주도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관덕정 앞 마당이 지금의 칠성통 입구 제주목관아 앞에 있었고, 그 제주목관아와 관덕정 바로 동쪽에 있는 제주우체국이 과거 탐라국의 군주인 성주(星主)가 집무하던 성주청 터이다. 조선보다 더 이전 원간섭기에는 지금의 제주목관아 북쪽. 그러니까 탑동 매립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바로 바닷가 앞이였을 곳에 탐라총관부의 관청들이 있었다.[35] 일본에서 당나라로 견당사를 보내는 바닷길 중간쯤에 탐라국이 있다보니, 견당사를 탐라국에서 약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36] 부연하자면 남평 문씨는 육지 이주민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제주도와 가까운 나주 일대의 가문이다.[37] 목호는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담으로, 제주도 향토사학자인 이영권이라는 사람은 이 사건을 두고 고려시대 버전 4.3 사건라고 했다. 제주도에 살던 몽골인 목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고려군에게 진압되면서 애꿎은 제주인들 일부가 몽골인으로 오인받아 학살당하자, 몽골계 귀화인(제주 초씨나 제주 좌씨 등)이나, 제주도 토착민이나 자기들이 몽골인들과 연관되었음을 필사적으로 부정하였는데, 이것이 현대의 4.3 사건 당시에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아서 제주도민들의 상당수가 학살당한 후에 제주도에서 반공주의가 확산된 것과 절묘하게 똑같아서 그렇다고 한다.[38] 하지만 삼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세습 제도가 한번에 폐지된 건 아니었고 1445년이 되어서야 좌도지관은 상진무(上鎭撫)로, 우도지관은 부진무(副鎭撫)로 명칭이 바뀌면서 비로소 선출 제도가 실시된다. 그 후 1620년경 상진무는 진무(鎭撫)로, 부진무는 유향(留鄕)으로 개칭된다.[39] 구마기와는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40] 이런 경우 대부분 숭조 작업의 일환으로 왜곡한 기록이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가치를 두지 않는다.[41] 도동음률. 유리도라. 고여 등.[42] 당회요에 나오는 국왕 이름이다. 동시기의 다른 국왕으로는 대위해가 있다.[43] 고을나왕과 아래에 15대 고후왕은 고려사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등 여러 사서와 제주의 여러 전설에 전하고 있어 근대에 창작된 허구적 인물은 아니지만 전하는 사서들이 탐라국이 망하고 워낙 수백 년 후에 쓰여진 거라서 실존했다는 신빙성은 없다.[44] 28대부터 서왕부터 42대 소왕까지는 모두 똑같이 25년씩이다.[45] 고(高)를 제외한 성주의 성씨는 문헌상의 이름에서 성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표기한 것이다.[46] 고려사에서 '추장(酋長)'이라는 표현은 말갈, 여진의 군주를 이를 때 쓰인다. 성주(星主)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나, 아들의 이름이 고몰(高沒)인 것으로 미루어 성주 본인이거나 탐라국의 하위 토호인 것으로 보인다.[47] 아들 고몰(高沒)도 함께 운휘대장군 상호군에 임명된다.[A] A B C 제주 양씨 족보에서는 양씨.[B] A B 제주 양씨 족보에서는 왕자 두라와 성주 두량을 함께 중시조 양구미의 2세손으로 파악하고 있다.[C] A B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원종 11년(1270년) 경오년에 반적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진도에 머무르다 이듬해 신미년에 탐라를 침략하니, 성주 고인조와 왕자 문창우 등이 (왕에게) 아뢰었다(十一年庚午反賊金通精領三別抄據珍島翌年辛未來據侵掠星主高仁朝王子文昌祐等以聞越)"고 한다.[48] 공민왕 11년(1362년) 목호의 난에 관련된다.[49] 고신걸의 아들.[50] 고봉례는 장남 고상온이 토호인 도주관 좌도지를 이어받기를 태종에게 청했다. 고상온은 좌도지를 이어받았지만, 약 3개월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51] 정부의 청으로 '고봉례의 뒤를 이어' 도주관 좌도지관이 된다.[D] A B 병조의 청에 따라 도지관직이 혁파되었다.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6월 19일)[52] 제주 양씨 족보에서는 이 인물을 4세손이자 이름(號)이 잉(仍)인 양잉(良仍, 梁仍)으로 본다.[53] 아들은 배융교위 고물(古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