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지오 3세
- 생몰년: ? ~ 911년 4월 14일
- 재위기간: 904년 1월 29일 ~ 911년 4월 14일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정치적으로 격랑에 휩싸이는데 람베르토 2세가 이탈리아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베렝가리오 1세에게 패하면서 주도권이 넘어 갔으나 마자르 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자 독일의 루트비히 3세가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루트비히 3세는 베렝가리오 1세를 이겨내고 이탈리아에 입성했으나 다시금 베렝가리오 1세에게 패하고 두 눈히 뽑혀 '맹인왕'으로 불리게 된다.
이렇듯 이탈리아 정세가 불안정하자 로마에서도 여러 분파가 생겨났고, 그 과정에서 레오 5세가 추기경 크리스토포로에게 추포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투스쿨룸 백작 테오필락트 1세는 군사를 동원해 대립교황 크리스토포로를 추포하고 세르지오에게 교황좌에 앉을 것을 권한다. 세르지오는 이를 받아들여 세르지오 3세로서 교황좌에 착좌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모든 실권은 군권을 쥐고 있던 테오필락트 1세에게 있었고 세르지오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후 전입 교황인 레오 5세와 대립교황 크리스토포로는 감옥에서 교살 되는데 아마도 테오필락트 1세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르지오 3세와 테오필락트 1세는 루트비히 3세를 탐탁치 않아 했지만 그의 경쟁자 베렝가리오 1세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베렝가리오와 몇번이나 대관문제를 두고 말이 오갔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를 대관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과의 정치적 문제에서도 황제 레온 6세의 혼인 문제에 대해 관여했는데 3번째 혼인까지만 인정하던 관례를 깨고 황제의 4번째 혼인을 인정하면서 동방 대주교와 동로마 황제 사이에서 황제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편 그는 테오필락트 1세의 딸 마르치아와 염문이 나돌았는데, 둘 사이의 사생아가 훗날 교황 요한 11세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50여년 뒤의 기록에서만 발견될 뿐, 명확하지는 않다.
매우 혼란한 시기를 관통한 세르지오 3세는 911년 4월 14일에 사망했고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전통적으로 세르지오 대한 평가는 창부정치를 시작한 교황으로서 매우 안 좋은 평이 많고 현대에도 이러한 관점은 유효하다. 다만 그에 대한 기록이 그의 반대파에 의해 기록된 것이 주를 이룬다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