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
1. 蕭譽
519 ~ 550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황족으로 자는 중손(重孫)이고 소명태자 소통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누군지 알 수 없다. 521년 할아버지 무제로부터 지강현개국공(枝江縣開國公)으로 봉해졌으며 531년 아버지 소통이 죽자 무제가 진안왕 소강을 황태자로 세웠는데 그 대신에 소명태자의 다섯 아들들을 모두 왕작에 봉할 때 소예는 그해 하동군왕(河東郡王)에 봉했고 식읍 2천 호를 주었다. 영원장군(寧遠將軍)과 석두수군사(石頭戍軍事)를 맡다가 나와서 낭야태수(琅邪太守)와 팽성태수(彭城太守)를 겸직했다. 537년 남서주자사(南徐州刺史)로 개임되었고 뒤에 다시 시중(侍中), 경거장군(輕車將軍)과 치좌사(置佐史)로 개임되었다.
548년 5월 10일 남중랑장(南中郎將)과 상주자사(湘州刺史)로 개임되었다. 그해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549년에 형주자사인 상동왕 소역이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서 소예에게 사자를 보내 그 양식과 무리들을 감독하려고 했으나, 소예가 말하기를 "각기 한 나라의 군부인데 어찌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예속될 수 있겠소?" 라고 하며 세 번이나 거부했다. 그러자 상동세자 소방등이 소예를 먼저 토벌하기를 요청했고 소역은 4남 남안후 소방구를 상주자사로 삼고 이어서 소방등에게 명령해 정예군 2만 명을 거느리고 소방구를 상주로 호송한 뒤, 소예를 격파하고 소방구로 하여금 상주자사를 대신하도록 하게 했다. 소방등의 군대가 마계(麻溪)에 도착했는데 소예가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소방등을 기습 공격하니 소방등의 군대는 패배하고 소방등은 물에 빠져 익사했다. 소방구가 패군을 거두어서 강릉으로 되돌아갔고 소역은 포천과 왕승변을 보내 소예를 다시 공격하게 했다. 이듬해인 550년 왕승변이 소예가 있는 장사(長沙)를 포위·공격해 크게 이겼고 이어서 성이 함락되자 소예는 도주하다가 왕승변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왕승변은 소예의 수급을 소역에게 보냈고 소역은 수급을 되돌려보내 몸과 같이 장례를 지낸 뒤 안장하게 했다. 555년 동생인 소찰이 후량의 황제로 즉위한 뒤 소예의 시호를 무환왕(武桓王)으로 추시했다.
2. 邵銳
? ~ 1537
명나라 절강(浙江) 인화(仁和) 사람으로 자는 사억(思抑)이고 호는 단봉(端峰)이다. 정덕(正德) 3년(1510), 진사(進士)가 되고 서길사(庶吉士)가 되었다가 편수(編修)에 올랐다. 얼마 뒤 부친상을 당해 돌아왔고 복상이 끝나자 영국추관(寧國推官)이 되었다. 거듭 승진하여 복건제학부사(福建提學副使)가 되었는데 부화한 것은 억누르고 신실한 것을 숭상해 사습(士習)이 일시에 바뀌었다. 태복경(太僕卿)까지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시호는 강희(康僖)로 저서에 『단봉존고(端峰存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