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량(남북조시대)

 


後梁
1. 개요
2. 후량의 황제


1. 개요


양나라의 황족 소찰은 후경의 난 직후, 각지의 황족이 서로 대립하던 중에 소역과 대립하였고 살아남기 위해 서위에게 원군을 요청해 보호를 받는다는 미명하에 실질적인 지배권을 넘겼다. 거기에 소역은 북제와 긴밀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서위는 이에 대항하고 강남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찰을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그 후 황제가 된 원제 소역과 서위는 대립 끝에 서위의 군대가 강릉에 있던 소역을 공격해 그를 죽이고 소찰을 양나라의 황제에 즉위시켰는데 이것이 후량의 탄생이었다. 오대십국시대주전충이 세운 후량과 구분하기 위하여 서량(西梁)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후량이 지배한 영역은 강릉 주변의 일부 지역 뿐이었기에 실제로는 서위의 괴뢰 정권에 불과했다. 그래서 양나라 정사인 <양서>에는 양나라 황제와 달리 후량의 황제는 본기가 아니라 소정덕, 소기, 소동, 소연명 등 괴뢰 황제와 함께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북제는 스스로 지배하에 들어온 소연명을 돌려보내 양나라를 계승시키고 이를 실효있게 지배했는데 소연명은 소역이 죽은 후 잠시 황제가 되었다. 이후 경제(敬帝)로 즉위했다. 하지만 소연명은 진패선에 의해 퇴위당하고 소역의 아들 소방지가 뒤를 이었지만 사실상 진패선이 대권을 장악하면서 양나라는 반쯤 멸망한 상태였다.
후량은 서위을 대신한 북주, 북주를 대신한 수나라 때까지 괴뢰 정권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북주와 수나라는 강남에 지배권을 넓히기 위해 진패선이 세운 진(陳)이 양나라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정권이며, 그래서 자신의 휘하에 있는 후량이야말로 정통성이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결국 후량은 남북조 통일 직전에 수문제 양견에 의해 사라졌다. 하지만 그 후 진나라 동양주 자사 소엄과 오주 자사 소환이 황제를 자칭하며 수나라에 대항했다.[1] 이번에는 진의 괴뢰 정권이 된 셈이랄까. (얼마못가 진은 망했지만.) 또한 수나라 말기 파릉에서 거병하여 양왕을 칭했던 소선은 소엄의 손자였으며 그는 당고조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당나라 때도 많은 양나라 황족 후손들이 등용되었다.

2. 후량의 황제


<rowcolor=#fff>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 기간
능호
-
양 고조(梁高祖)
무황제(武皇帝)
소연(蕭衍)
-
-
수릉(修陵)
-
후량 고종(後梁高宗)[2]
소명황제(昭明皇帝)
소통(蕭統)
-
-
-
1대
후량 중종(後梁中宗)
효선황제(孝宣皇帝)
소찰(蕭詧)
대정(大定) 555년 ~ 562년
555년 ~ 562년
평릉(平陵)
2대
후량 세종(後梁世宗)
효명황제(孝明皇帝)
소규(蕭巋)
천보(天保) 562년 ~ 585년
562년 ~ 585 년
현릉(顯陵)
3대
후량 공종(後梁恭宗)[A]
효정황제(孝靖皇帝)[A]
,<후주(後主)>,
소종(蕭琮)
광운(廣運) 586년 ~ 587년
585년 ~ 587년
-
[1] 소엄은 후량의 선제 소찰의 5남, 소환은 후량의 명제 소규의 3남이었다.[2] 후량 선제가 추존.[A] A B 소선이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