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양나라)
[clearfix]
1. 개요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황태자로 시호는 소명태자(昭明太子), 자는 덕시(德施)이다. 무제와 무목황후(武穆皇后) 정씨(丁氏)[1] 의 장남로 태어났다. 동복 형제로 그들의 삼남 간문제 소강, 오남 여릉왕 소속이 있다. 훗날 삼남 소찰이 후량을 건국하자, 묘호를 고종(高宗), 시호를 소명황제(昭明皇帝)로 추존되었다.
2. 생애
아버지가 즉위한 502년 11월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3살 때 이미 《논어》와 《효경》을 읽어냈고 5살 때 오경을 독파했다고 전해진다. 515년 5월, 관례(冠禮) 의식을 치르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국정에 참여하여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펼쳐보이기도 하였다. 또 문장가로서도 매우 유명하여 3만여 권의 장서들을 소장하였다고 전해지며 그로 인해 주변에는 항상 유명한 문인들이 모였다. 그는 문인들과 함께 여러 유명한 문장을 모은 《문선》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뱃놀이를 하던 도중 배가 전복되어 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해 병을 얻었고 531년 5월 30일 향년 31세로 사망했다. 아버지 무제의 장수와 본인의 요절은 양나라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3. 평가
태자가 성인의 의복을 착용하면서부터 황상은 바로 조정의 정사를 사피고 관장하도록 시켰는데, 백관이 올리는 업무가 태자 앞에 쌓이고 맡겨지면 태자는 잘못된 것을 분별하였고, 가을철의 터럭 같은 것이라도 반드시 가렸으나 다만 명령하여 개정하게 하였으며 조사하여 탄핵을 덧붙이지 않았으며, 송사를 평등하게 결단하여 대부분 온전히 방면하였고 너그럽게 용서하여 무리를 화합시켰으며, 기뻐하고 화를 내는 것을 안색에 드러내자 않았다. 책을 읽고 문장을 짓기를 좋아하였고 훌륭한 인재를 끌어들여 가까이 하고 상을 주고 아끼는데 싫증내는 일이 없었고, 궁궐을 나간 지 20여년 동안에 소리와 음악을 기르지 않았다. 장마와 폭설 때마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보내어 민간 마을을 두루 돌게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살펴서 구제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공손하여 동궁에서 비록 한가롭게 있으나 자리에서 일어나 항상 서쪽을 향하였고, 저녁에 부름을 받아 들어가야 할 때면 자리를 바르게 하고 새벽까지 이르렀다. 누워서 병을 앓게 되자 황제께 우려를 끼칠까 두려워하고 칙령을 내려 물으면 번번이 스스로 힘을 들여 편지를 썼다. 죽게 되자 조정과 재야가 놀라고 건강에 거주하는 남녀들이 궁문으로 달려갔으며 도로에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