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경
1. 소개
북위(北魏), 동위(東魏), 양(梁)의 장군. 자는 만경(萬景)이다. 양나라를 사실상 끝장 낸 후경의 난의 주동자로 유명하다. 원제(元帝)로 추존된 후표의 아들.
2. 생애
2.1. 북조에서의 활동
본래 갈족으로 선비족에게 동화되었으며 말을 잘 타며 활을 잘 쏘고 용감무쌍했다. 원래 북위 회삭진(懷朔鎭)을 지키는 일개 병졸이었으나, 육진의 난을 진압하는 이주영(爾朱榮)을 도와 공을 세워 동위의 장군이 되었다. 이주영이 몰락한 후 동위의 실권자가 된 고환(高歡)의 신임을 받아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하남을 지켰다. 후경은 스스로 고환에게 '공이 살아있을 때는 공을 따르겠지만 공이 세상을 뜬 후에는 알 수 없다.'라면서 야심을 은근히 드러냈다.
그러나 고환이 죽고 고징(高澄)이 뒤를 잇자, 고징을 경멸했던 후경은 동위를 배신하고, 서위(西魏)로 넘어갔다. 그러나 서위의 실권자 우문태(宇文泰)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후경은 투항의 대상을 양나라로 바꿔서 행대랑중(行臺郞中) 정화를 양나라에 보내 낙양을 포함한 황하 이남 13주를 바치고 양나라에 투항하겠다는 뜻을 양무제 소연에게 밝혔다.
이에 소연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의논했는데 상서복사 사거 등은 후경의 투항을 반대했다. 그러나 소연은 한 달 전 북방의 주군(州郡)이 다투어 투항하여 땅을 바치는 꿈을 꾼 이야기를 중서사인 주이에게 말했다.
더구나 정화가 전하기를 후경이 양나라로 넘어오는 일을 정월 17일로 전했는데 바로 그날이 소연이 그 꿈을 꾼 날이었다. 이에 꿈을 더 확신하게 된 소연은 후경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조서를 보내 후경을 대장군 하남왕 도독하남하북제군사 대행대로 임명하니 사실상 하남의 지배권을 후경에게 위임했다. 이 결과 형식적이지만 유송 이후로 상실한 낙양과 그 주변을 양나라가 탈환하고[1] , 한때 국경선이 황하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그동안 상당히 우호적으로 지내던 동위와 양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리고 반란자를 토벌하기 위해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동위의 모용소종(慕容紹宗)이 대군을 이끌고 후경을 공격하니 양군은 와양(渦陽)에서 수개월을 대치했다. 결국 후경은 태청 2년(548년) 정월, 모용소종의 5천기에게 대패하고 겨우 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회하를 건너 수양으로 도주했다. 수양에 이른 후경은 으름장을 놓다가 수성장 위암이 성문을 열자마자 입성해 위암을 죽이고 수양을 차지했다.
2.2. 남조에서의 활동
후경의 군대가 대패했다는 소식이 수도 건강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지만 태자첨사 하경용만은 오히려 복이라고 했다. 이에 태자 소강이 궁금해하자 하경용만은 후경은 변덕이 많아서 나라를 어지럽힐 자라고 말했다. 후경은 사람을 보내 소연에게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했으나, 소연은 오히려 그를 남예주목에 봉했다. 이에 광록대부 소개가 간하며 말했다.
그러나 소연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한편 고징은 양나라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사로잡은 남예주자사 정양후 소연명[2] 에게 말했다.
이에 소연명이 소연에게 편지를 보내니 소연은 대신들과 의논했다. 주이는 다시 화해함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사농경 부기는 고징이 후경과 이간질을 유도해 후경의 난을 일으키게 하려는 목적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주이는 계속 화해를 주장했고 소연 역시 동위와의 전쟁을 원치 않아서 사자를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동위의 사자가 돌아가는 길에 수양에서 후경에게 잡혔다. 후경은 소연에게 고징과 화해하지 말라는 내용의 상주서를 올렸다.
후경은 황금 300만 냥을 주이에게 주면서 이 상주서를 전해주라고 했지만 주이는 황금만 받고 상주서를 올리지 않았다. 이 후 소연이 동위에 사자를 보내 고환의 죽음을 조문하고 동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 이에 후경은 다시 상주했고 소연은 이렇게 답장했다.
급박해진 후경은 계책을 써서 '''소연명과 후경을 서로 바꾸자는 내용의 편지를 동위에서 보낸 것으로 위조해 소연에게 보냈다.''' 이에 소연은 다음과 같이 답장을 썼다.
소연의 내심을 간파한 후경이 분노하자 그의 심복 왕위가 부추겼다.
2.3. 후경의 난
후경은 반란을 결정하고 수양성 내의 사람들을 군대로 징병했다. 하지만 후경의 처지가 엄청난 땅을 잃고 홀홀단신에 가깝게 피난한 처지인지라 돈이나 물자가 부족했으므로 반란군의 규모는 매우 적었다. 따라서 반란을 일으키면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적었다.
그러나, 5월, 소연이 산기상시 서릉을 동위에 보내 정식으로 관계를 회복하자 사실상 죽기 아니면 살기 처지가 되었으므로 후경은 반란의 마음을 더 굳혔다. 그리고 후경은 임하왕 소정덕이 군사를 기르고 식량을 비축하며 나라에 변이 생기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양나라에서 직위도 높고 황족인 임하왕 소정덕은 소연의 이복동생이자 여섯째 동생 소굉의 삼남이므로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럴 일이 없었지만 현실은 가상을 능가한다. 물론 소정덕에게도 이유가 있긴 했으니, 소굉을 좋아하던 소연이 아들이 없었을 때 소정덕을 태자로 삼았으나, 뒤늦게 장남 소통이 태어나자 소통을 태자로 삼았던 것이다. 소통이 요절하자 차남 소강을 태자로 삼으니 소정덕은 태자 자리를 잃은 것에 대한 불만때문에 탐오와 폭행으로 작위까지 박탈당하고 소연을 증오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상인이라면 이유라고 내세우기도 부끄러운 것을 이유라고 내세운 격이니 그냥 찌질이에 인격파탄자. 당연하게도 후경에게는 이용해먹기 딱 좋은 작자였으므로 그에게 편지를 보내 부추겼고 소정덕도 기뻐하며 답장했다.
8월 후경은 수양에서 간신으로 중령군 주이, 소부경 서린, 태자우위률 육험을 언급하며, 이들을 죽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주이는 황제를 속이고 조정대권을 휘두르며 서린, 육험은 탐오와 수탈을 일삼았기에 사람들은 이 셋을 삼두(三蠹)[3] 라고 불렀다. 이에 후경은 만인이 증오하는 삼두를 주살한다는 명분을 이용한 것이다. 후경의 반란군이 요새 몇 곳을 점령했다는 소리를 들은 소연은 쓴 웃음을 지으며 허세를 부렸다.
이에 주이도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임금과 대신들의 어리석은 오만이 넘칠 지경이니 코 앞에 닥친 화를 알지 못했다. 그나마 처음에는 계속 허세를 부리다가 양간 등 대신들이 강력하게 주장하자 소릉왕 소륜에게 군대를 주어 후경을 토벌하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후경의 반란군은 잘 해봐야 1천 명 수준이었기에 후경은 소륜의 대군에 밀려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자 왕위의 제안을 듣고 수양을 포기하며 10월, 수렵을 떠난다는 핑계를 대고 바로 건강으로 진격했다. 역양에 이르자 태수 장철이 투항하니 반란군의 규모는 늘어났고, 후경은 순조롭게 장강 북안에 당도했다. 다급해진 소연이 양간에게 방책을 물었는데 주이가 반대했다.
2.3.1. 장강방어선의 붕괴
소연은 양간의 건의를 무시했고 양간은 머리를 흔들어대며 탄식했다. 소연은 소정덕을 평북대장군 도독경사제군사로 임명하고 단양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진작에 후경과 내통하던 소정덕은 갈대를 나른다는 허위 보고를 올리고 장강을 건너기 위한 큰 배를 후경에게 보냈다. 후경은 강을 순시하는 왕질의 일거일동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마침 소연이 진흔을 보내 왕질과 교체해 버렸다. 후경은 왕질이 떠나고 후임 진흔이 도착하기 전의 틈을 노렸다가 10월 22일, 8천의 병사와 수백의 군마를 배에 실어 장강을 건너 채석에 이르렀다. 그날 밤에야 그 소식을 들은 조정은 놀랐다. 장강방어선이 붕괴되고 후경의 반란군이 건강성 코 앞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아직 건강성은 탄탄했고, 기본적인 방어대책만 가동했어도 충분히 후경을 건강성 밖에서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양나라 말기의 조정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는데, 특히 이런 상황에서 군대를 지휘해야 할 수도의 고위 관료들은 청담사상에 빠져서 하이힐 같은 나막신이나 신고, 말을 타기는커녕 말이 히히힝거리는 소리에 놀라서 말을 호랑이라고 부르는 작자들이 대다수였으니 제대로 방어가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당장 건강성 남쪽의 문을 담당했던 관리는 고작 철갑을 입은 기병 1기가 얼굴에 방어용 철갑가면을 쓴 채 돌격하는 것에 놀라서 문을 포기하고 도주하기까지 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진격은 파죽지세로 이루어졌다. 10월 23일에는 판교, 10월 24일에는 진회하 남안에 이르러 건강성 내부로 확실하게 진입하는 데 성공했으며, 소정덕과 함께 건강성의 내성이자, 소연이 거주하는 황성인 대성을 포위 공격했다. 대성에 배치된 2만의 군대와 백성들은 양간과 태자 소강의 지휘에 따라 저항했으나, 긴급한 피난으로 인해 이미 초기부터 식량이 바닥난 상태였다. 후경 역시 후술하겠지만 반란군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식량이 바닥나 여기저기 약탈했으나, 수확이 없었고 왕위의 건의에 따라 협상을 했다.
2.3.2. 무제를 축출하다
후경은 남예, 서예, 합주, 광주 등 4개 주를 할양해 주고 선선왕 소대기를 시켜 자기들의 철군을 배웅하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강북으로 물러난다고 했다. 이때 배웅할 사람을 요구한 것은 인질로 잡아 조정을 협박한다는 뜻이었다. 소연은 이를 간파하고 협상하지 말자고 했으나, 소강은 원군이 오기 전에 화의를 하고 정세 변화를 지켜보자고 했다. 이에 소연은 오랜 생각 끝에 이를 허락했다. 회담을 거쳐 후경을 대승상 도독강서사주제군사 예주목 하남왕으로 임명했는데 후경은 '배가 없어 갈 수 없다.', '수양이 이미 고징에게 함락되어 갈 곳이 없다.', '원군이 뒤를 칠까 두렵다.' 등등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떠나지 않았다. 소연은 배 500척을 주고 조서를 내려 철군시켰으나, 철군하자마자 당장 협약을 파기하고 소연의 10대 죄목을 공포한 뒤 다시 성을 공격했다. 이에 분개한 소연도 다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대성 안은 이미 식량부족으로 인해 군대와 피난민을 포함한 10만 인구가 대부분 죽거나 굶어 지쳐있었다. 심지어 묘지를 팔 힘도 없어서 개울가에 썩은 시체가 쌓일 지경이었으니... 반면 후경은 밤낮으로 성을 맹공격했다. 후경이 이런 능력을 보일 수 있던 이유는 반란이 성공에 가깝게 진행되면서 건강성 외성까지 장악하자 평소 양극화로 인한 빈부격차에 시달리던 양나라 수도권의 무뢰배 및 빈민들이 엄청난 규모로 가세하였고, 당시의 번화가인 진회하 일대를 약탈하면서 얻은 재물을 뿌려서 군대를 추가로 더 모집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이르면 반란군의 숫자가 10만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결국 130여 일의 공격끝에 태청 3년(서기 549년) 3월 12일, 후경은 건강 대성에 입성했다. 그때 침상에 누워 있던 소연이 탄식하며 말했다.
후경은 실권을 잡고 소연의 군권을 포함한 모든 권력을 박탈했다. 소연은 대성에 연금되어, 5월 꿀물을 요구하다가 받지 못하고 결국 아사했다. 한편 태청 2년 11월, 이미 소정덕은 황제를 자칭했다. 건강을 점령한 소정덕은 맨 먼저 궁으로 돌진해 소연 부자를 죽이려고 했으나, 후경이 오히려 막았다. 후경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시중대사마를 줬으나, 이에 격분한 소정덕은 파양왕 소범에게 군대를 이끌고 건강으로 들어와 후경을 죽이라는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밀서가 발각되고 후경은 즉시 소정덕을 교살하니 한 때 양아버지였던 큰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찌질이 패륜아의 말로였다.
2.3.3. 막부 군림
소연이 죽자 후경은 소강을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간문제이다. 그리고 간문제를 협박하여 조서를 배포하게 하니, 후경의 반란기간동안 수도를 구원하기 위해 모였던 양나라의 군대들은 조서를 받고 모두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가버렸다. 분명히 해당 조서는 후경의 압력으로 작성된 것이 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군대들이 조서를 인정한 이유는 이미 그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양나라의 황족들이 스스로 군벌이 되거나, 양나라의 황족을 꼭두각시로 세운 후, 내부의 실권자가 군벌이 된 상황이었기에 굳이 중앙정부를 구원하고 싶은 이유도, 해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후경이 건강성의 대성을 공격할 때도 멀리서 쳐다보기만 한 것이 바로 양나라의 군대였다.
이렇게 양나라의 군대가 양나라 중앙 조정을 사실상 배반하자, 소강은 2년 동안 꼭두각시 황제 노릇을 하다가 태보 2년(서기 551년) 8월, 후경의 압박으로 소통의 손자이자 종손(從孫)인 소동에게 선양했다. 태자 소대기와 건강에 있던 왕공후작 20여 명은 모두 후경에게 피살되었는데 소대기가 후경에게 굴복하지 않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대기는 28세의 나이로 이렇게 죽었다. 8월, 소동이 즉위했고 10월, 후경이 연금되어 있던 소강에게 술과 안주를 보냈다. 소강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술과 안주를 다 먹고 대취했는데 그 틈을 타서 후경의 명을 받은 사람이 흙을 담은 자루로 얼굴을 눌러 질식사시켰다.
2.3.4. 한(漢)의 천자
11월, 소동을 황제에서 몰아낸 후경은 드디어 황제를 자칭하고 국호도 한(漢)[4] 으로 고쳤으며 죽은 소강의 딸 율양공주 소씨를 황후로 삼았다. 하지만 후경은 일개 무부(武夫)였고 3년 전 수양에서 병사를 일으킬 때는 그저 원한을 풀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그 자신도 갑작스럽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고 예의법도를 전혀 몰라서 여러가지 우스개거리를 제공했다.
한 번은 왕위가 후경에게 칠묘(七廟)를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에 모든 신하들은 후경을 한심하게 여겨 몰래 웃음을 참지 못했고 왕위는 어쩔 수 없이 후표를 제외한 나머지 6개의 위패에 그냥 아무렇게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건강을 점령한 이래 후경은 오군, 오흥, 회계 등을 점령하고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을 일삼았다. 더구나 강남에 큰 재해가 들었는데 굶주림 속에서도 백성들은 후경에게 저항하니 후경은 더욱 잔혹한 형벌을 자행했다. 예를 들어 남녀노소 모두 허리 아래를 땅에 묻은 다음 궁기병을 돌게 하며 활을 쏘게 하거나 개로 하여금 물어 뜯게 했다. 이렇게 하다보니 재정이 곤란해졌고, 고작 양나라의 수도권만 장악한 상태에서는 황제라고 자칭하기도 뻘쭘하므로 후경은 양나라 국토를 모두 점령하기 위해 강릉으로 진격했다.
2.3.5. 최후
당시 강릉에는 소연의 7남인 상동왕 소역이 있었는데 그는 대장 왕승변을 보내 고요태수 진패선과 함께 후경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동쪽으로 도주한 후경은 3월에는 진릉, 4월에는 가흥으로 도주했다가 송강까지 도주했다. 그때까지 배 200척과 수천명의 군대가 남았지만 결국 추격병에게 전멸당했다. 마지막에 후경은 심복 수하 수십 명과 배 하나를 타고 바다로 해서 북쪽으로 도주했다. 후경은 급박하자 자신의 자식들까지 물에 빠뜨려 버리고 도주했는데 지쳐 잠든 사이에 고직도독 양곤이 사공을 시켜 배를 경구로 몰아갔다. 배가 호두주에 이르렀을 때 양곤은 후경의 가슴을 칼로 난자해 죽였다.
양곤은 양간의 아들로, 후경이 건강을 점령했을 때 양간의 딸 양씨를 강제로 첩으로 삼았기에 양곤은 후경을 증오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양곤은 후경의 시체를 썩지 않게 하려고 배에 소금을 채우고 건강의 왕승변에게 투항했다.
왕승변은 후경의 머리를 베어 강릉의 소역에게 보내고 손을 끊어 동위의 후신 북제(北齊)에 보냈다.그리고 후경의 남은 시체를 거리에 내다 버리니 분노한 백성들이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 씹어먹었는데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이를 아쉬워하며 남은 뼈를 태워 물에 태워서 마셨다. 후경의 머리는 소역이 아사한 아버지 소연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삿상에 올려졌다가 옻칠과 색칠을 한 다음 무기창고에 보관했다.
하지만 후경의 죽음은 대란의 종식이 아니었다. 후경은 죽었지만 이미 군벌화된 양나라의 군대는 서로 싸움을 벌였고, 북쪽에 있는 서위까지 가세한 바람에 사실상 이때 양나라는 멸망하고 건강 지역에는 진패선의 진나라, 강릉 일대는 서위의 괴뢰정권인 후량이 양립하게 된다.
3. 평가
아무런 교양이 없는 무식한 군인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권좌에 오르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자, 이런 작자도 더 개판인 국가를 상대로 대난동을 부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양나라의 난맥상이 어디까지 갔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보면 된다.
사실 반란을 일으킬 당시의 후경의 처지도 난감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반 쯤은 무계획적으로 벌인 반란이 후경의 난이었는데, 이게 양나라를 사실상 멸망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이 양나라의 조정은 개판이고 양나라의 중앙관료는 청담사상에 찌든 무능력자였으며 양나라의 군대는 말이 군대지 사실상 군벌화된 무뢰배 집단이었다. 거기에 국가 내부의 경제상황도 빈부격차가 극에 달하는 등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누군가가 도화선에 불만 당기면 터질 화약고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경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당대급 군략가인 이주영과 고환 밑에서 20년이상 전장에서 굴렀고 요충지인 하남의 총독을 역임한 점으로 보면 군사적 재능만큼은 당시 손꼽는 수준이었다. 고환 임종시 고징에게 전한 유언으로 자신의 사후 후경을 제어할 인물이 모용소종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모용소종은 북제의 실질적 창업자이자 당대 손꼽히는 명장인 고환이 가장 믿는 장수였다. 그렇게 믿을만한 장수였던 모용소종은 자신의 군대가 막 양나라의 군대를 대파해서 기세가 올랐고 자신의 군세가 후경의 2.5배나 되는데도 불구하고[5] 후경과 붙어서 이긴다는 확신을 전혀 하지 못했을 정도로 후경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고 경계하였다. 모용소종은 후경군의 기습 습격을 예언하였으나 바로 그 예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경의 결사대가 모용소종의 군대를 기습하였고 동위의 군대는 크게 동요하였으며 이 와중에 모용소종도 말 위에서 떨어져 거의 포로로 잡힐 뻔했다.
그렇게 모용소종은 후경에게 패배하여 잔병을 이끌고 초성(하남성 상구 부근)까지 퇴각하였는데, 당시 초성을 지키고 있던 훗날 이 시대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곡률광'''은 장시현과 같이 모용소종을 원망하였다. 그러자 모용소종은 화를 내면서 "나는 오랫동안 작전을 지휘해왔으나 후경과 같은 난적을 만난 적은 없소. 내 말을 못 믿겠으면 한번 직접 대적해보시오!"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장시현과 젊은 시절의 곡률광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후경과 싸웠는데 처참하게 패하였다. 곡률광은 전마가 쓰러지는 바람에 거의 사살될 뻔했고, 장시현은 산 채로 잡혔다. 후경은 장시현은 죽일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몽둥이로 곤장을 친 후 내보냈고, 이후 두 사람은 모용소종을 감히 원망하지 못했다고 한다. 후경은 뒷날 명장이라고 손꼽히는 곡률광마저 가지고 놀 정도로 대단한 군사적 재능을 갖췄던 인간이었다.[6] 변변한 세력도 없는 상태에서 막장이라지만 대국인 양나라를 뒤엎은 성과를 보면 그의 군사적 재능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후경은 도화선에 불을 붙여서 화약고를 터뜨리는데는 성공했지만 그 뒤에 소화 및 뒷수습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것이 그의 한계점이었다. 결국 후경은 이로 인해 새 왕조를 창립하는 데는 실패하고 후경의 난의 주동자이자 역적으로 역사에 패배자라는 오점으로 남게 된 것이다. -
4. 후경의 가족
- 부황: 후표(侯標, ? ~ ?). 후경의 아버지. 후경이 원황제(元皇帝)로 추존.
- 처: 불명(후경이 망명한 후 고징에게 피살), 소씨(소정덕의 딸), 소씨(소강의 딸 율양공주)
- 첩: 양씨(양간의 딸)
- 아들: 후화(장남, 고징에게 피살), 불명(차남, 도주하던 후경에 의해 익사), 불명(삼남, 요절), 불명(막내, 북제 고양에게 피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