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신
1. 개요
宋福信
(영어명: Grace Poksyn Song Line)
1900년 - 1994년
일제강점기 조선 및 미국에서 활동한 의사 및 공중보건학자. 한국인(조선인 포함) '''여성으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흔히 김활란이 한국 여성 최초의 박사라고 잘못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의 오보 때문이기도 하고, 또 김활란은 귀국하여 활발히 사회활동을 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인 반면 송복신은 미국에서 결혼하고 정착한 탓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2. 상세
평양의 포목상인 송상점(宋相漸)의 1남 4녀의 둘째로 평양에서 자랐다. 평양숭의여학교를 거쳐, 1922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현 도쿄여자의과대학)를 졸업한 후 미국 미시간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13년 숭의여학교 교사 황애덕, 김경희, 박정석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송죽회[2] 를 결성하였는데 처음 3명의 교사가 선정한 10명의 제자 중 한명이 송복신이다.
유학 생활 중에도 광복대업에서 언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설명하며 삼일신보(三一申報)의 창간목적과 의의 및 사업내용을 기술한 삼일신보 창간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일제에 의해 불온조선인으로 분류되었다.
동경여의전 재학 중에는 재동경조선여자친목회 회원인 동경여의전 학생 현덕신, 정자영, 유영준과 황에스더, 나혜석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 운동의 확산을 위해 민족자결운동에 관한 비밀문서를 갖지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성악 기량이 뛰어나 전 이왕직 양악대, 경성악대 등 1백20명의 악사의 반주에 맞춰 독창회를 하기도 하고, 숭의음악급 강연회에서 독창,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동경 여자유학생친목회의 졸업생 축하회에서 허영숙, 나혜석 등의 졸업생 답사에 이어 가창하는 등 평양은 물론 많은 음악애호가들 사이에도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1924년 미국 유학생들이 북미조선학생유학회를 결성하였는데 여기서 회계부장(재무부장)을 담당하였다.
1928년 미국 유학생들이 발간한 우라키에 '아동 영양부족과 그 원인'이라는 논문을 게재하였다.
'''조선 최초의 여 위생학 박사'''
'''여자 박사는 조선서 처음이다'''
'''금의환향한 송복신씨'''
【평양】'엠에이'(MA)를 최고 학위로 한 조선 여자계에도 우리의 기대한 여박사의 출세를 보게 되었다. 평양부 차관리 송상점씨의 장녀 송복신(27)양이 조선에 처음인 여자 박사 학위를 받아 가지고 지난 1일 금의환향하였는데 양은 1923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의학전문학교를 마친 후 미국 미시간주로 건너가 동주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 작년 6월에 '인종별의 성장차이'라는 논문을 제출한 결과 통과되어 위생학 박사의 학위를 받고 고향에 돌아왔는바 양의 포부는 금춘에 다시 미국 미시간주로 건너가 동주청 공중위생국에서 한 3년동안 근무하다가 돌아오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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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인종별 성장 차이'라는 논문으로 공중보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박사'''가 되었다.학위논문학적부'''여의박 송복신양'''
'''6년간 미국 유학 마치고 금의환향으로 귀국하여'''
평양 출생 송복신(27)양은 일찍이 평양 숭현, 숭의의 두 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에 건너가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 여름에 미주로 건너가 북미 미시간대학 의과 공중위생과 연구소에서 6년간 연구를 하여 1928년 동대학을 졸업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고 다시 논문을 동대학 박사원에 제출하였던 것이 통과되어 박사 학위를 얻은 후 다시 연구 계속하다가 2일 오후에 고향인 평양에 도착되었는데 2,3개월을 두류하다가 다시 미주에 향하여 연구를 2년간 더 할 예정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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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외일보 1930년 2월 7일출처
미시간 대학교 재학 중에 Winfield Henry Line와 만나 캠퍼스 커플로 교제 끝에 결혼했다. 그는 1902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유명한 상업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졸업 후 아버지의 백화점을 물려받아 경영하는 등 사업가로 활동하다 송복신이 사망한 해와 같은 1994년 사망했다. 1938년 부부가 조선을 방문했으며 당시 여행 기록을 책으로 내기도 했다. 제목은 Pyeng Yang : the story of Winfield and Grace Song Line in Japanese controlled Korea and Hawaii : August to November 1938 당시 기사
의사이자 공중보건 전문가로 미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실제로 1947년에 Michigan State College에 근무중이라는 기사가 확인된다. 1960년 4.19 혁명 당시에 개인적인 친분에 관계없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신문기사가 나기도 했다.
남편과 본인의 이름을 딴 Winfield H. & Dr. Grace Song Line Scholarship Fund가 있다.#
유학생 시절부터 미모로 유명하여 남자 유학생들의 연모를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볼 수 있다.
'''해내 해외에 흩어져 있는 조선 여의사 평판기'''
X 응 나 아는 중에도 두어 분 더 있어. 지금 인천 야소교부인병원에 가 계신 전혜덕씨하고 미국 가서 지금 유학하는 송복신씨하고 한소제씨가 있지.
A 아하 송복신씨, 한참 동경 재학 시대에 유학생들의 물의가 분분하여 양근환군의 주먹까지 왔다갔다 했다는 그 분 말인가. 그 분이 의전 출신이던가?
X 나는 그것까지는 몰라도 하여간 일본서 의전을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가더니 요새 들으니까 학위까지 얻었다는 말이 있데.
A 갸륵한 노릇일세. 아무러나 조선 여자도 해외에까지 나아가서 학위까지 얻는데는 그의 고심도 적지는 아니하였겠지. 그리고 조선의 여성이 그렇게 발전하여 나간다는 것이 참으로 기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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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3월 1일 별건곤 제5호
'''신여성 총관(2) 백화난만의 기미 여인군'''
송복신 여사도 그 당시 화려한 기억을 주던 여인이었다. 지금은 미국에 가서 고등교육을 받고 영국인인 어떤 유력한 은행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지내는데 외국에 내어놓아도 실로 그 용모나 학식으로 부끄럽지 않을 이는 송복신 낭(娘)이라 하리만치 그때는 경모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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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6월 1일 삼천리 제16호
동경에서 공부하던 조선 학생 사이에 한때 평판이 잇던 미인으로 화제의 주인공인 당시의 송복신양..... 그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재학 당시에는 그 교태에 취하야 가슴을 태운 열정 청년도 적지 안헛섯다. 그러나 그는 그 만흔 청년 학생들의 불꼿가티 퍼붓는 사랑도 칼날로 베이드시 다 물리치고 큰 뜻을 품고 태평양을 건너 멀리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낫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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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9월 13일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