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말라르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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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 폴 베를렌과 함께 19세기 말 프랑스 시단의 핵심이었으며 상징주의의 창시자이다.
2. 생애
1842년, 프랑스 파리의 하급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말라르메는 외조부모 손에서 고아 같은 처지로 자란다. 14세에는 기숙학교에 들어갔으나, 심약했던 그는 고독했으며 홀로 몽상에 잠겨 시를 짓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 시기 말라르메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으며, 보들레르를 경유해 에드가 앨런 포를 접하고 포의 작품들을 연구하기 위해 영어를 공부한다.
18세에 바칼로레아에 합격하고 한동안 등기소에서 수습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독일 여행 중 연상의 연인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마리제랄과 만나고 그녀와 약혼한 뒤 런던으로 건너가 1년간 체류한다. 이후 영어 교사 자격을 취득하고 이듬해 본국으로 돌아가 지방도시 투르농의 중학교 기간제 교사로 부임한다. 힘든 생활에도 독자적인 미학을 담은 대작 '에로디아드'를 쓰기 시작했으며, 1866년에는 <현대 고답파 시집>에 10편의 시를 기고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끌게 된다. 이 해에 말라르메는 뷰활절 휴가를 보내며 '에로디아드'를 작업하고 있었는데, 이때 정신적인 전복을 체험한다.[1]
한동안 지방의 학교들만 전전하다가 1871년 29세에 파리로 돌아와 자리잡는데, 아들 아나톨이 태어나면서 생계를 위해 최신 유행 잡지의 편집을 맡거나 어학 서적을 번역하고 직접 집필하는 등 세속적인 문필 활동을 부업삼아 시작한다. 1877년부터 말라르메는 작은 아파트에서 화요일 저녁마다 모임을 열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집을 방문한다. '화요회'라 불린 이 모임에는 앙드레 지드, 라이너 마리아 릴케, 폴 베를렌, 폴 발레리, 오스카 와일드 같은 문인들은 물론 화가 고갱, 마네, 모네 등이 참석해 밤새워 토론하고 교감했다.[2]
말라르메의 작품들은 워낙 난해했기에 대중적으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1884년, 베를렌의 책 '저주받은 시인들'에서 말라르메 시 분석에 페이지를 할애하고, 조리스 위스망스가 소설 '거꾸로'에서 '에로디아드'를 극찬하면서 유명세를 얻는다. 덕분에 말라르메의 작품들은 곧이어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에 퍼지며 번역되고 출판되었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는다.
1894년 정년퇴임 후, 영국으로 떠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음악과 문예에 관해 강연한다. 이후 베를렌이 죽고 말라르메가 '시인들의 왕'으로 추대받기도 한다. 이후 발뱅과 파리를 오가며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남은 여생을 보낸다. 말년의 말라르메는 활자와 종이라는 형식을 탐구하였고, 1897년 발표한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없애지 못하리라'는 이러한 노력의 산실이었다. 1898년, 저택 서재에서 작업하던 중 갑작스러운 후두경련을 일으키며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에로이디아드'는 미완으로 남았고 '시집'은 이듬해 유작으로 출간된다. 말라르메는 유언에서 아내와 딸에게 자신의 유고들을 불태워달라고 부탁하며 "그것들이 매우 아름다울 수도 있었다고 믿어주오"라 말한다.
3. 작품
- 에로디아드 Hérodiade (1864-1867)
- 목신의 오후 L'après-midi d'un faune (1876)
- 시집 Poésies (1887)
-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없애지 못하리라 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 (1897)
- 이지튀르 Igitur (19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