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웅(1972)
1. 개요
前 한화 이글스 소속의 투수.
2. 선수 경력
아마추어 시절에는 150km/h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던지며 주목받았던 선수로, 1993년에 열린 니카라과 대륙간컵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무려 16개의 탈삼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같은 활약을 바탕으로 한화 이글스에 1차 지명받아[1] 당시 구단 역대 최고액인 2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지만,[2] 부상 때문에 프로에서는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며 평범한 투수로 뛰다가 2003년 시즌 중 웨이버 공시를 통해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133경기 474⅔이닝 3완투 3완봉 24승 37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5.44. 하지만 24승 중 3승이 완봉승이라는 건 나름대로 인상적인 부분이다.
3. 지도자 경력
2013시즌이 끝나고, 공주중 감독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논란이 있는데, 평소 극성인 학부모 둘과의 알력다툼이 있었고 소송까지 갔는데, 신재웅 감독이 소송에서 자격정지 1년을 먹게되어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후임 감독으로 온게 강귀태인데, 정작 이 사람은 폭행으로 시즌 초에 경질됐다... 망했어요.
그 후 2017년 3월 광저우 광둥 레오파즈의 투수코치를 맡았다가 연말에 귀국해 설악고 코치로 부임했다.
4. 여담
- 박찬호의 1년 선배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야구부에서 뛰었으며 이 때문에 서로 친분이 두텁다. 1박 2일에 출연한 박찬호가 공주중에 가서 카메라맨인 척 위장하고 후배들에게 공을 던지는 모습이 나왔는데, 그 당시 공주중 감독[3] 을 맡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첫 공을 뿌렸을 때 모습을 보고 박찬호인지 바로 알았다고 한다. 박찬호가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존경하는 선수로 신재웅의 이름을 대면서 "나보다 훨씬 잘 던졌다"고 말한 일 때문에 국내에서 신재웅이 대체 누구냐며 갑자기 유명세를 탔던 일화도 있다. 신재웅은 고3이었던 1990년에 공주고의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4] 에 크게 기여한 투수다. 전국대회 결승에 오른 것이 1977년 김경문이 이끌던 공주고의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5] 이후 13년만에 이룬 성과.
- 사회인야구에도 출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전한 투구폼으로 140km/h에 이르는 강속구를 뿌려대며 경기를 지배했다는 소문이 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사실 그의 고교 동기생들 중 1차지명이 가장 유력했던 선수는 대전고 출신의 초고교급 투수 안희봉이었다. 그러나 안희봉은 고교 졸업 당시 한화(당시는 빙그레)가 입단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연세대 진학 후로는 고교 때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투수로서의 가치가 거의 사라지고 사실상 타자로 정착하게 되어 결국 한화는 그에 대해 미련을 버렸다.[2] 현재 한화 구단 역사상 신인 계약금 최고액은 2011년 어느 주작범의 7억.[3] 공주고 동기인 강준기 감독(1990년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후임 감독을 맡았다.[4] 2년 뒤에는 노장진의 활약으로 청룡기를 품에 안았다.[5] 36년 후인 2013년에 공주고는 지역 라이벌 천안북일고를 꺾고 대통령배를 공주시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