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문
1. 개요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출신 감독. 2019년부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2. 선수 및 코치 생활
인천 출신이며,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학창 시절 이사를 자주 다녔다. 위로 형이 많아서[3] 어린 시절부터 형들과 야구를 하면서 배웠다고 한다. 인천 송림초등학교에 다니다가 대구로 이사가 야구 명문인 옥산초등학교로 전학하고 여기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4] 이후 대구 경상중에 다니다가 가족들이 부산으로 이사하게 되어 부산 동성중으로 전학하게 된다. 동성중 시절 한 학년 후배였던 양상문과 선후배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훗날 양상문이 밝힌 바에 따르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김경문이 공주고로 오라고 권유도 했다고 한다.
부산 동성중을 졸업하고 부산고 야구부에 진학했다. 그런데 당시 야구부를 재창단한 공주고가 당시 야구 불모지였던 충청도에 선수층이 없어 외부 전학생들을 대거 모집하고 있었는데, 김경문에게도 숙식 및 학비 제공을 제시했다. 김경문 본인의 말에 따르면 부산고보다 공주고에서 주전 경쟁이 덜 할 것 같아서 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1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공주고로 스카우트되어 전학을 가면서 그의 야구 인생이 바뀌게 된다. 하지만 중간에 전학을 가는 바람에 전국대회에서 선수 이중등록이 되어 선수등록 취소라는 징계를 받게 되었고, 이때 김경문은 야구를 접을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김경문이 공주고로 전학 온 후에도 공주고는 계속 각지에서 선수를 모집했고, 야구부 해체설이 돌던 대구 대건고 야구부에서도 몇 명이 전학왔는데, 그중에 조범현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김경문이 먼저 와서 자리잡고 있고 성적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코칭스태프와 학교도 먼저 온 김경문을 더 편애하는 분위기도 있었기 때문에 조범현은 몇 개월만에 다시 대건고로 돌아갔다.[5] 당시 김경문은 타격에서도 고교 탑클래스였다고 한다. 하지만 신생팀이 갑자기 뜨자 원래 충청도의 전통 야구 명문고였던 대전고가 여기에 크게 위협을 느끼고 경기 때 고의로 김경문의 머리를 배트로 강타해버린다. 김경문은 뇌진탕으로 쓰러졌고, 회복 후 포수로서의 기량은 여전히 변함없었지만 타격 능력은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경문이 주축으로 활약한 공주고 야구부는 1977년 대통령배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그로 인해 고려대학교[6] 에 진학 할 수 있게 된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멤버로 프로에 입문했는데, 조범현도 동시에 OB에 입단하게 되어 원년부터 둘은 치열한 포지션 경쟁을 펼치게 되었다.[7]
현역 시절 타격은 좋게 말하면 그저 그랬다. 사실 말이 좋아 그저 그랬다는 거지, 프로 10년간 통산 타격성적이 타율 0.220, 6홈런(...), 126타점에 불과했다. 고교 시절에 입은 뇌진탕을 감안하면 저 정도 성적이나마 낸 것도 나름대로 애를 쓴 거겠지만, 냉정히 말해 타격 실력은 프로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9] 그러나 당시 주전경쟁을 하던 조범현도 타격 능력은 별반 다를 바가 없었고, 조범현과의 치열한 주전 경쟁은 김경문은 근소한 판정승으로 끝났다. 이는 출장 경기수에서 조범현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10]
김경문은 부족한 타격을 뛰어난 포수 수비력으로 메꾸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멤버로서 활약하면서 공을 받았던 선수다. 또 1988년 장호연의 공을 받으며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렇듯 OB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가 1990년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었지만 1년만에 다시 OB로 복귀하여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1992년 미국 애틀랜타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받았고,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삼성 라이온즈 배터리 코치를 지냈으며[11] 1998년부터 두산 베어스에서 배터리 코치[12] 를 맡았다.
2.1. 연도별 주요 성적
3. 지도자 경력
4. 스타일
5. 별명
가장 많이 불리는 별명은 김경문의 '문'(moon) 자를 딴 '''달감독''' 또는 '''세일러문'''이라 부른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달감독을 줄여 '''달감'''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좋은 페넌트레이스 성적을 내면서도 가장 중요한 우승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해서 '''콩경문'''이라고도 불리며, 삽질을 할 때는 '''돌경문''' 소리도 나온다. 2011년 시즌 중도에 사퇴한 이후의 행보 때문에 두산 팬들에게는 '''통갱문'''(통수+김경문), 런경문이라고 불린다.
호구라는 별명도 있는데, 이는 김성근에게 2007, 2008년 우승을 2년 연속으로 조공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SK 왕조의 1등 공신이라며 솩전드라 불리기도 한다.(...) 그 외에도 간통님[13] 이라는 감동님의 바리에이션이 있지만, 위에서 말한 돌경문이나 (가을)호구 등이 더 쓰인다. 과거 선수 시절에는 영화배우 실베스타 스텔론 씨와 닮아서 별명이 람보였다.
장성우 사건으로 NC 다이노스 갤러리 등지에서 비가오면 돌아버린다+감동님 해서 '''비동님'''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투수 혹사에 관해서도 그 분의 뒤를 잇는 콩이기에, 혹사 관련 논쟁에서는 세이'''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다잡은 경기를 쉴새없이 등판한 구원을 굳이 올려서 점수를 퍼주고 패하는 경기가 속출하자, 킬경문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6. 기타
6.1. 제2의 국민감독 후보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예선 7전 전승 포함 도합 9전 전승으로 팀을 금메달로 이끌었으며, 예선 및 준결승에서 대타 성공률이 50%를 기록하면서 작두 탄 김경문(기사보기)이 되었다. 이 때부터는 김인식 감독에 이은 국민 감독의 재목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일단 KBO 리그 페넌트레이스나 KBO 한국시리즈 우승경력이 없는 것이 아쉽다.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기간이 2007년, 2008년, 2019년, 2020년으로 김응룡(1977~1980, 2000), 김인식(2002, 2006, 2009, 2015, 2017)에 이어 세번재로 오랫동안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인물이며 주성노(12연승)에 이어 두번재로 오랜 기간 연승(10연승) 기록을 보유한 감독이기도 하다.
2019 WBSC 프리미어 12 대표팀을 이끈 수장이기도 한데 준우승을 거두며 2020 도쿄 올림픽 야구에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일부에서는 한일전의 대패와 대만전 대패를 근거로 조기 경질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과격한 주장이다. 전임 감독이던 선동렬 전 감독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대표팀 엔트리 논란과 더불어 자카르타 쇼크라는 참사를 맞으며 입방아에 올랐고 결국 국정감사에서 인격모욕까지 당한 후 자진 사퇴하는 등 대표팀 분위기가 매우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기존 목표였던 도쿄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한 감독을 경질하자고 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다.
같이 대만에게 패배한 전임감독인 선동렬보다는 낫다는 평이 많다. 선동렬 감독의 경우 이해가 가지 않는 선수선발로 논란이 되었으며, 대만의 실업 야구 선수인 우셩펑에게 지고 게다가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땄지만 동호회 수준인 홍콩 대표팀에게 3점이나 주는 등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김경문감독 역시 김재환이나 박세혁, 원종현 같은 선수 선발에 있어서 논란이 있었지만 김재환을 제외하고는 정규시즌 성적이 괜찮았기 때문에 여지가 있고 거의 대부분을 젋은 선수 위주로 그리고 성적을 위주로 뽑았기 때문에 크게 논란이 되진 않았다. 또 아시안게임 논란으로 분위기가 뒤숭숭 할때 이정후, 김하성, 이영하, 조상우, 고우석 등 젊은 선수들을 과감히 등용하며 야구대표팀의 분위기를 재정비 시킨뒤 선동렬 감독이 상대했던 아시아권 국가들 보다 훨씬 강한 미국 캐나다 쿠바 멕시코 같은 상대들을 안정적으로 꺾으며 도쿄올림픽 출전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6.2. 포스트시즌 잔혹사
콩경문, 돌경문이라 불리는 이유는 좋은 페넌트레이스 성적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에서 감독 부임 이래 계속 물을 먹은 것을 빗대어 부르는 것이다.
2004년은 플옵에서 1승 먼저 했지만 그 후로 3패해서 '''탈락''', 2005년은 KS에서 4패 스윕패로 '''탈락''', 2007년은 KS에서 2승 먼저 했지만 4연패로 '''탈락'''[14] , 2008년은 KS에서 1승 후 4패로 '''탈락''', 2009년은 PO에서 2승 후 3패로 '''탈락''', 2010년은 PO에서 2승 3패로 '''탈락''', 2014년은 준PO에서 1승 3패로 '''탈락''', 2015년은 PO에서 2승 3패로 '''탈락''', 2016년은 KS에서 4패 스윕패로 '''탈락''', 2017년은 PO에서 1승후 3연패로 '''탈락'''.
특히, 한국시리즈 진출을 4번 할 동안 잠실 경기 전적이 '''0승 10패'''. 잠실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경기는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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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3년여간 포스트 시즌에서 만난 SK팬들+대부분의 야갤러에게는 우리편이라는 의미로 솩경문이라고도 불린다. 오죽하면 SK에는 레전드가 없다고 까대는 야갤러들 마저도, 김경문이 SK 유니폼을 입은 합성사진을 올리면 모두 얄짤없이 솩전드라고 인정할 정도... 2010년 포스트시즌에는 파생별명으로 '''호구'''로 불린다. 두산이 포스트시즌에서 이길 때마다 두산을 기다리는(?) SK 김성근 감독의 입장에서 '''호구 오능가?'''라는 유행어가 야갤에서 유행했다. 하지만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5차전을 오가는 혈전끝에 결국 호구는 오지 못했다. 그리고 야갤러들의 걱정대로 2010년 한국시리즈는 망했다.
2004년 플레이오프에서 '''3연패''', 2005, 2007년, 2008년, 2016년 '''4년간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로 탈락'''(2005년 4연패, 2007년 2승 후 4연패, 2008년 1승 후 4연패, 2016년 4연패). 이후 2009년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에게 2승 후 '''3연패'''하여 탈락.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팬들의 지적도 있으나, 워낙 지지층이 두터워서 게시판 등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 대체로 실드치는 글들이 따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2010년에는 스윕 징크스는 깼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 무관의 한은 풀었지만,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1사 만루 역전패 위기에 처했을때는 본인도 ''''난 영원히 우승은 못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는 정도라고 하니 이걸 뭐라 위로해야할지(…).
사실 감독으로서 한국시리즈 우승만 못해서 그렇지 절대 콩라인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KBO 리그 원년 OB의 우승 당시 주전 포수였다.
1982년 원년 OB베어스 우승 당시 주전 포수 - '''선수시절 우승'''
2001년 두산 베어스 한국시리즈 우승당시 코치 - '''코치시절 우승'''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감독으로 금메달 - '''감독으로 국제대회 우승'''
한국시리즈만 우승하면 오히려 선수, 코치, 국가대표, 프로팀 감독으로 우승을 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김경문과 가장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류중일. 코치로서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과 감독으로서 2011-2014년 통합 4연패와 2014 인천AG에서 금메달 등등 지도자로서는 모든 영광을 얻었지만 정작 선수 시절에는 팀이 지독한 준우승 징크스에 시달리는 바람에 한번도 한국시리즈 우승[16] 을 경험하지 못했다. 다만 류중일이야 다시 현역으로 뛸 일이 없지만(...) 김경문은 큰 삽질만 없으면 무난하게 감독 커리어를 이어갈 테니.
현역 때 팀 내 포수 라이벌이였던 조범현 감독은 김경문 감독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1982년 OB 선수 시절의 원년 우승, 2002년 삼성 라이온즈 배터리 코치로 우승, 2009년 KIA 타이거즈 감독 우승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거기에 더불어서 2010년도에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국제대회까지 우승하며 한국프로야구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두산 감독에서 물러난 뒤 이런 호구 이미지는 한동안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지만 2014년 준플레이오프로 인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삽질하던 박민우, 이종욱의 기용, 1차전 이재학 선발카드, 4차전 잘치던 권희동 대신 박민우 대타카드, 7회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잡고 쳐맞고 있는 원종현, 이민호를 내리지 않는 점 등 이해가 안가는 기용과 함께 경험 부족으로 1승 3패로 패퇴하면서 가을야구 호구설이 다시 확인되었다. 지금까지는 상대가 산전수전 다 겪은 김성근감독이었지만, 이번 상대였던 양상문 감독의 경우는 감독 커리어 첫 포스트 시즌이었다(...). 그나마도 각축 끝에 진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털리고 탈락한 것이어서 타팀팬들은 물론이고 NC팬들 사이에서도 이쯤되면 진짜 문제있는 거 아니냐는 불만도 나올 정도였다. 물론 이 때야 선수단 대부분이 처음 포스트시즌에 나가는지라 감독만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와 정규리그 1위를 두고 끝까지 경쟁하다가 겨우 2게임 반차로 아슬아슬한 2위를 거머쥔 2015년, '''역시나 첫 포스트시즌을 치르던''' 김태형 감독의 두산 베어스에게 패승승패패로 완파당했다. NC가 이긴 2차전에서는 여러 과감한[17] 작전이 성공하여 이겼고 3차전은 선발 손민한의 호투에 힘입어서 어마어마한 점수차의 대승리를 거두었다. NC가 패배한 1차전에는 니퍼트의 압도적인 구위에 팀 타자들이 아무 것도 못했고, 그 니퍼트를 4차전에 다시 만났을 때도 니퍼트가 '''완봉승 뒤 3일 휴식 후 7이닝 무실점'''을 시전하는 동안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스무스하게 발렸다. 하지만 대망의 5차전에서는 초반 2대0 리드를 잡았으나, 2차전 완투승 후 피로가 누적되어 계속해서 정타를 맞는 스튜어트에게 그 놈의 믿음의 야구를 또다시 시전하다가 5회 초, 4회 말을 4구로 지워버린[18][19] 두산 선발 장원준에게 보답하는 듯한 두산 타자들의 김재호 2루타 - 정수빈 1타점 2루타 - 허경민 안타 - 민병헌 볼넷 - 김현수 2타점 2루타로 5타석 연속 출루를 기록하면서 스튜어트는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못 잡은''' 상태에서 3점을 내리 쳐맞고 멸망, 여기에다 경기 마지막에 나성범을 마운드에 올리면서 지명타자를 소멸시키는 쓰로잉까지 보여주며 가을야구에서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스파이를 끝까지 믿고 3번, 6번타자로 기용한 실책이 결과적으로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 또한 두산에 비해 상당히 두꺼웠던 불펜 뎁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태형 감독이 이현승의 2이닝, 3이닝 세이브라는 신의 한수로 불펜 약점을 커버한 데 비하면, 질적 양적으로 우세한 불펜이 있음에도 5차전에서 선발 스튜어트를 끝까지 믿었던 그의 선택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16년에도 팀에서 박석민을 영입하면서 나테이박이라는 강타선을 바탕으로 시즌 전 우승 전력이라는 평가를 들었지만, 선발진의 부진과 승부조작 홍역을 맞으면서 1위 두산과는 9게임차로 페넌트레이스 2위에 그쳤다. 그나마 플레이오프에서 LG를 3대 1로 이기면서 2년 전의 복수에 성공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4경기 2득점'''이라는 졸전 끝에 친정팀인 두산에게 우승 트로피를 또 헌납했다. 2017년에도 감독 생애 처음으로 업셋까지 하면서 또 두산을 만났지만, 또 이번에는 '''4경기 50실점'''이라는 기록으로 두산에게 맛집 단골이 되었다.
이렇게 프로팀 감독만 15년 가까이 하면서 가을야구에 10번 진출하여 시리즈를 19번이나 치렀고, 한국시리즈도 4번이나 갔지만 우승을 한 적은 한번도 없다. 또한 페넌트레이스 우승 경력 자체도 한 번도 없다. 감독 커리어는 우승 억제기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두산은 그가 떠나고 난 4년 뒤, 2015 PO KS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이후 두산왕조로 2016년과 2019년 KBO 페넌트레이스 & 코리안시리즈 동반 우승을 달성했다. 심지어 신생팀이었던 NC도 팀의 10년만이자 KBO 데뷔 8년만인 2020 시즌 KBO 페넌트레이스 & 코리안시리즈 첫 동반 우승을 달성했다. 김경문 감독 본인이 만든 전력으로 그렇게 좋은 성과를 냈기 때문에, 그만큼 본인도 우승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매번 그 기회를 날렸고 결국에는 남 좋은 일만 시켜준 꼴이 되었다.
이 문서와 이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결국엔 부실한 선발진과 본인이 정규시즌 때 혹사당한 불펜들로 인한 것이 김경문 감독의 발목을 매번 잡은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의외로 업셋을 한 적도 1번밖에 없지만, 업셋은 2번밖에 당하지 않은 걸로 봐선 가을호구가 아닌 제 전력대로 결과를 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내용처럼 단기전에 약한 게 아니라 장기전 운용을 애초에 못한다는 분석도 있다.
6.3. 김성근 감독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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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사진.
두 사람의 관계는 흔히 '''악연'''으로 묘사되고 있다. 2007년부터 SK와 두산의 라이벌 구도 속에 두 감독간에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 OB 시절 조범현과 주전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이 충암고등학교 시절 사제관계였던 조범현을 중용하느라 출장기회가 적었다고 하는 말이 있다. 여러가지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계형철 등은 조범현을 선호하고, 박철순은 김경문을 선호했다고. 두 포수는 번갈아 기용되었지만 처음에는 김경문이 더 많이 출장했다. 하지만 2년후 김영덕 감독이 물러나고 코치였던 김성근이 감독으로 승격되자 김경문의 출장기회가 줄고 조범현의 출장이 늘어났다.
- 2007년 김성근이 시즌 내내 두산 외국인 투수 리오스와 랜들의 투구폼이 보크라고 항의했다. 심판위원회에서 몇 차례 보크가 아니다라고 판정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까지 문제 삼았고 심지어 "리오스가 심판을 속이고 있다. 악질적이다. 한국야구를 우습게 알고 저러는 것이다."면서 리오스의 멘탈까지 지적하자 김경문 감독은 몇번 참다가 "이런 식으로 따지면 문제 되지 않는 투수가 없을 것이다. 괜한 트집으로 프로야구를 재미없게 만들고 있다." "저렇게 까지 해서 우승하고 싶나" 등으로 반박했다. 그 후 2008년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리오스가 4월에 보크판정을 무더기로 받자 김성근 감독의 지적이 옳았다는 주장이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멀쩡하게 던지던 박찬호가 일본에서 무더기로 보크판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면 알 수 있듯이 보크 판정의 기준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 2007년 한화와 2위 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SK가 만만한 한화를 밀어줄 수 있다"고 언론에 발언, 이에 대해 김성근 감독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당시 한화의 김인식감독이 "젊은 감독이 말을 너무 함부로 한다."며 크게 발끈하기도 했다.
- 2007년 두산과 SK가 맞붙은 한국시리즈에서 SK측의 비매너 플레이로 양측의 감정 싸움이 극에 달했다. 두산 안경현이 SK 채병용의 공에 맞아 손가락 골절상을 당하여 전력에서 이탈했고, 이종욱이 정근우의 스파이크에 찢겨 부상으로 당하고 또 정근우가 주루하는 이종욱의 다리를 붙잡았다. 또 1,2,3차전에서 도합 9회의 사구가 나왔는데, 그가운데 7개가 SK가 던진 것이었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을 위한 선수 차출 후 김성근 감독이 "선수관리를 엉망으로 했다. 애들 몸상태가 안 좋다. 대표팀에 선수들을 보내 줬는데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더라." 라고 비난하자 김경문 감독이 "그럼 직접 대표팀을 맡으시라.",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올림픽 본선에서 SK 선수는 뽑지 않겠다." 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 2008년 4월 19일 두산-SK 경기에서 빈볼 사건이 발생하자 이전부터 김성근 감독에게 감정이 쌓여있던 김경문 감독은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 라고 분개했는데, 이 때문에 김성근 감독 팬들에게 스승에게 예의를 갖추지 못한 기본이 안된 놈이라면서 맹공을 당했다. 게다가 김인식 감독이 끼여들어 김성근 감독 편을 들면서 김경문 감독이 예의가 없다고 디스한 것이 사태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작용했다. 결국 김경문 감독이 삭발을 하고 사태가 무마되는 듯 했으나, LG 김재박 감독이 다시 김경문 감독 편을 들면서, SK 야구가 2007년 이후 갑자기 비신사적으로 변했다, 스파이크를 드는 거친 수비로 상대방의 부상을 유발하는 수비 행태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동업자 정신이 없다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사태는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대결하여 SK에게 패하고, 2009년 플레이오프에서 SK와 다시 붙었으나 또 졌다. 김성근 감독과의 가을야구 감독 대결로 3연패. 2009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일찌감치 크게 지고 있자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 SK 투수들이 던진 무수한 빈볼들에 대한 항의로 두산 투수들이 SK 선수들에게 수차례 빈볼을 던지는 일이 있었는데, 경기가 끝난 후 SK 덕아웃으로 직접 찾아가 김성근 감독의 품에 썩소를 지으며 안기기도. 김경문 감독은 이 날 인터뷰에서 "경기를 엉망으로 만들어놨으니 찾아가서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는 묘한 인터뷰를 남겼다. 관련 기사
- 2000년대 후반부터 김성근 감독과의 라이벌 관계가 이어지고, 위에서 나왔듯이, 서로를 디스하는 치열한 감정 싸움이 여러번 있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노리타들의 주장이 있었다. 2010년 김동재 KIA 수비코치를 돕기 위한 일구회 올스타와 천하무적 야구단과의 자선시합에서 김성근 감독과 배터리를 이뤄 공을 받아준 것을 그 예로 든다. 이제는 인터뷰 등에서도 서로 좋은 말을 해주는 편이었다고. 이를 두고 야구들은 두 감독 사이에 화해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김성근 감독이 한화 감독으로 복귀한 후 양 감독의 경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 하지만 이는 단지 표면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007년, 2008년에 김성근 감독과 김경문 감독의 대립 과정에서 서로가 과거 사제지간이었다는 점 때문에 김경문 감독이 김성근 감독에게 당하고 있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맞대응하면 김성근 감독의 지지하는 팬들이 스승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며 맹공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2008년 4월 19일 두산-SK전 빈볼 사건 이후 김경문 감독은 이전보다 김성근 감독에 대한 맞대응을 삼가는 모습을 보였다.
- 2015년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가 다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신생팀 NC와 김성근 감독의 합류와 함께 대거 선수진을 보강한 한화가 치열한 순위 다툼을 벌이지 않을까 예상했으나...
-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김경문 감독은 한화전에서 다른 팀과의 경기에서는 안하는 항의를 하거나,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능욕 투수 교체를 하거나 하는 일이 때때로 있었다. 이처럼 소위 김성근의 더러운 야구에 대해 이에는 이 방식으로 맞대응 하는 방식은 SK 시절에도 크게 유행하기도 했는데, 당시 김재박, 로이스터, 김시진 등 여러 감독들이 김성근 감독에게 항의하기 위해 SK 전에서 잦은 투수 교체를 하는 맞대응을 한 바 있었다.
- 2016년, NC 다이노스의 15연승을 리그 꼴찌였던 한화 이글스가 저지해 내면서, 다시 이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 2016년 8월 7일 대전에서 열린 NC 대 한화전에서 김성근 감독의 이중동작 항의로 한번 크게 충돌한 일이 생겼다.
김성근 감독은 전부터 좋지 않게 보던 헤커의 투구동작에 대해 이중동작이 아냐냐 항의하였고, 심판들은 3년이상 던지고 있는 해커의 동작이 문제 없다고 하였다.
다음 항의는 김경문 감독이었다. 3-3으로 맞선 6회초. 2사 1, 2루 득점 기회. 이종욱의 타구가 유격수 글러브를 맞은 뒤 중견수 쪽으로 굴절됐다. 이때 3루 송구가 이어졌고, 3루에 있던 테임즈가 홈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어진 홈 송구. 홈에서 접전이 벌어졌으나 허도환의 태그가 빨랐다. 태그 아웃. 그런데 이 과정에서 NC가 테임즈의 홈 태그 아웃 과정과 관련해 합의 판정을 요청했다. 비디오 판독 결과, 허도환이 공을 잡은 이후 테임즈가 홈플레이트를 가로막은 허도환의 발을 차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심판들은 포구 후 자연스러운 태그동작에 의해 홈플레이트를 가로막은데다가 충돌 전 이미 태그가 된 것으로 본 것인지 첫 판정 결과는 번복되지 않았다. 태그 아웃. 이닝 종료. 이때 NC 김경문 감독이 심판조장인 나광남 3루심에게 가서 홈충돌방지 조항을 위반한 것이 아니냐며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항의는 약 4분 간 이어졌다. 그러나 규정상 합의 판정 결과는 번복될 수 없었다. 김경문 감독은 다소 강한 어조로 항의한 뒤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이번엔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성근 감독이 박종철 구심에게 다가왔다. 이어 나광남 3루심 쪽으로 자리를 옮겨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김경문 감독의 항의에 대한 어필로 풀이됐다. '2016 KBO리그 규정' 28조 11항 합의판정 신청 및 결과는 최종적 '3'에 따르면 '합의판정이 실시되면 선수단 및 양 구단의 관계자는 더 이상 심판팀장의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 조항을 위반할 경우 심판은 선수단 및 관계자에게 퇴장을 명한다'고 명기돼 있다. 그러나 심판진은 김 감독에게 퇴장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김 감독 역시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경기 후 심판진들은 경기가 과열될 위험이 있어 김경문 감독을 퇴장시킬 수 없었다고 하였다.
다음 항의는 김경문 감독이었다. 3-3으로 맞선 6회초. 2사 1, 2루 득점 기회. 이종욱의 타구가 유격수 글러브를 맞은 뒤 중견수 쪽으로 굴절됐다. 이때 3루 송구가 이어졌고, 3루에 있던 테임즈가 홈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어진 홈 송구. 홈에서 접전이 벌어졌으나 허도환의 태그가 빨랐다. 태그 아웃. 그런데 이 과정에서 NC가 테임즈의 홈 태그 아웃 과정과 관련해 합의 판정을 요청했다. 비디오 판독 결과, 허도환이 공을 잡은 이후 테임즈가 홈플레이트를 가로막은 허도환의 발을 차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심판들은 포구 후 자연스러운 태그동작에 의해 홈플레이트를 가로막은데다가 충돌 전 이미 태그가 된 것으로 본 것인지 첫 판정 결과는 번복되지 않았다. 태그 아웃. 이닝 종료. 이때 NC 김경문 감독이 심판조장인 나광남 3루심에게 가서 홈충돌방지 조항을 위반한 것이 아니냐며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항의는 약 4분 간 이어졌다. 그러나 규정상 합의 판정 결과는 번복될 수 없었다. 김경문 감독은 다소 강한 어조로 항의한 뒤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이번엔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성근 감독이 박종철 구심에게 다가왔다. 이어 나광남 3루심 쪽으로 자리를 옮겨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김경문 감독의 항의에 대한 어필로 풀이됐다. '2016 KBO리그 규정' 28조 11항 합의판정 신청 및 결과는 최종적 '3'에 따르면 '합의판정이 실시되면 선수단 및 양 구단의 관계자는 더 이상 심판팀장의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 조항을 위반할 경우 심판은 선수단 및 관계자에게 퇴장을 명한다'고 명기돼 있다. 그러나 심판진은 김 감독에게 퇴장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김 감독 역시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경기 후 심판진들은 경기가 과열될 위험이 있어 김경문 감독을 퇴장시킬 수 없었다고 하였다.
6.4. 그 외
- 지병인 두통을 앓고 있는데, 비만 오면 특히나 아프다고 한다. 이렇게 된 원인은 고교 시절 경기중 상대학교 선수의 고의로 추정되는 배트 스윙에 머리를 강타당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20] 당시 김경문은 경기장에서 실신했으며 김경문의 어머니가 해당 선수를 경찰에 고소했을 정도로 당시에 크게 뉴스에 나왔던 일화. 사실 이건 웬만한 내공의 야구골수팬들도 전혀 알지 못하던 건데 장성우가 김경문이 비가 오면 돌아버린다고 뒷담을 까버리면서 이 일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 위에도 나온 고교시절 배트강타로 중상을 입은 이후 김경문의 타격성적은 급전직하했다. 부상 이전에만 해도 4번타자를 맡을 정도로 타격이 빼어났고 공수겸장 포수 유망주로 각광받았었으나 그 부상이후 수비가 빼어난 수비형 포수에 그쳐버린점은 두고두고 아쉬운 점. 뇌진탕 이후 야구선수 커리어가 박살나는 케이스가 적지 않은데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야구에서는 특히 치명적. 간혹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김경문이 고교시절 상대선수의 배트 강타를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한국 야구 역사가 어찌 바뀌었을지 if 놀이가 간혹 나오기도 한다.
- 박석민의 어머니가 김경문 감독의 팬이다. 그래서인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 박석민을 통해 김경문 감독에게 꽃다발을 전했다. 정작 박석민과 김경문은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박석민이 NC로 이적하면서 같은 팀의 선수와 감독이라는 인연이 생겼다. 김경문도 꽃다발을 받은 걸 기억해서인지 박석민 이적 관련 인터뷰 때 언급.
- 대단한 커피광으로,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부근(올림픽공원 남문 대로 맞은편)에 'MOON CAFE(문카페)'라는 본인의 커피숍도 운영하고 있다. 까페 이름 'Moon'은 본인의 이름 끝글자이면서, 별명인 'Moon'에서 따온 것으로, 처음 개업했을 때에 비해 지금은 인테리어와 외관이 많이 화려해졌다. 2층에 올라가면 다양한 야구용품과 사인볼을 비롯해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대표팀이 사인한 유니폼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이곳이 야구와 관련된 공간임을 느낄 수 있다. 비시즌, 비전지훈련 기간에는 가게에도 자주 나가서, 본인이 직접 커피를 다리고 나른다고 한다. 그러나 2018년 4월 현재 폐업한 상태.
- 2017년 기준 60세로 KBO 감독 최연장자였었다.[21] 또 감독 경험(년수)이 가장 많기도 하다. 선술했듯 KBO 리그의 감독 평균 수명이 3년이 채 안되는데 비해 맡은 팀에서 6년 이상 임기를 유지하는 걸 보면 나름 능력자라고 볼 수 있다.
- 인천 출신이지만 영남 지방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이유에서인지 말투에 경상도 억양이 살짝 묻어 나온다.
-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인 테리 프랑코나와 은근 닮았다. 감독 스타일도 은근 비슷한 면이 있어서 일부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프랑코나를 클갱문이라 부른다.[22] 하지만 결정적 차이로, 프랑코나는 밤비노의 저주를 깼다.
- NC에서 경질된 이후에도 구단과의 사이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닌지 김택진 구단주랑 함께 창원 NC 파크 개막경기를 봤다. #, #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도 구단 초청으로 이태일 前 사장과 같이 직관을 같이 했다.
- 한 기사에서는 본인 인생을 스스로 장돌뱅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럴 만도 한 것이 인천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에는 대구-부산-공주-서울을 다 거쳤고, 프로 선수 때는 대전-서울-인천을 거쳐서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며, 지도자로서는 대구와 서울에 이어 창원까지 계속 옮겨다니면서 커리어를 쌓았다. 물론 사람이 자주 바뀌는 프로야구 특성상 이런 사례는 흔하다. 이 분야의 끝판왕으로는 강원도와 제주도 빼고 다 돌아본 김성근 감독.
- 2010년 이용찬이 음주뺑소니 사고를 저질렀을 때,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야구 이외의 것에 대해서 판단력을 상실했는지 두산은 롯데를 꺾고 PO에 오를 경우 이용찬을 엔트리에 합류시켜 '사죄의 투구' 기회를 부여할 예정이다.라는 정신나간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이용찬이 빠진 마무리가 무너지며 두산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였으니, 야구의 정확한 판단력이 상식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셈.
- 최지만을 대표팀에 발탁하려는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누군가가 알려준 최지만이 병역 면제라는 헛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정도. 물론 MLB 사무국의 방침상 최지만이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에 국가대표로 참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나 프리미어 12는 가능하지만 약물 복용 이력 및 잦은 언론플레이로 얼룩진 선수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1] 음력 11월 1일[2] 감독직에선 물러났으나 잔여 시즌 기간에는 고문직을 맡는다고 한다. 선동열의 선례 등을 볼 때 사실상 잔여연봉을 챙겨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3] 8형제 중 막내# 첫째 형과는 17살 차이가 난다고. 김경문의 모친은 1917년생이다.[4] 같이 활약했던 직속후배로 김성래가 있는데 프로에 와선 코치와 선수로 재회했다.[5] 이후 알다시피 조범현은 대건고가 결국 해체되면서 다시 충암고로 옮기게 되었다.[6] 동기로는 박종훈 한 학년 아래로 양상문이 있었으며, 방장 시절에는 여드름으로 고생하던 신입생 방졸 선동열을 데리고 피부과에 간 일화도 있다. #[7] 공주고 출신 김경문은 OB의 충청도 연고지 출신 선수로 먼저 입단이 결정되었고, 충암고 출신 조범현은 MBC와의 서울 연고 2:1 드래프트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둘다 지도자 생활은 대구에서 시작했다.[8] 과거 젊었던 선수 시절에 영화배우 손창민씨의 청년 시절의 외모를 보면 매우 비슷하게 닮았던 터라 예나 지금이나 손창민과 형/동생처럼 지낼 정도로 친분이 매우 깊다. 게다가 손창민씨도 달감독님 왕팬이시다.[9] 야구친구의 2014년 3월 6일자 상식과는 조금 다른 야구 이야기 코너에 의하면 김경문이 500경기 이상 출전했던 은퇴 선수들 중 타율이 가장 낮은 '역대 최악의 타자 10위'라고 한다.[10] 역대 통산 최저 타율 2위가 바로 조범현(0.201), 1위는 SK 와이번스의 감독인 염경엽(0.195).[11] 이때의 삼성은 1차 암흑기로 양준혁, 이승엽, 외에는 돋보이는 이가 없을 정도의 부진을 겪었다. 좀 뒤로 가면 신동주, 이동수 밖에 없었다.[12] 98년도 까지 두산 베어스는 팀명을 OB로 사용을 했다.[13] 삼성 코치 시절 2차례 간통 혐의로 고소당한 걸 빗대서 붙은 별명. 소문으로는 이혼 3번, 간통 4번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삼성은 김경문이 코치로 재임했던 기간인 94 ~ 96년 도에 1차 암흑기를 겪는다. 물론 전체적인 책임자는 김성근이지만....[14] 한국시리즈 사상 첫 2연승 후 4연패 기록이기도 하다.[15] 2005년 2패, 2007년 3패, 2008년 3패, 2016년 2패.[16] 페넌트 우승은 데뷔시즌이던 1987년에 한번 경험했지만 최종보스 해태를 못넘어서...[17] 번트 앤 슬래시와 런 앤 히트, 하나라도 실패했다면 감독이 욕만 먹었을 엄청난 작전들이다.[18] 손시헌 '''초구''' 2루수 뜬공 - 지석훈 '''초구''' 2루수 뜬공 - 김태군 '''2구''' 중견수 뜬공[19] 이게 결정적이었다. 스튜어트가 4회에 양의지에게 홈런을 맞는 등 불안했는데, 4회 말이 단 4구로 끝나버리면서 스튜어트는 페이스 조절에 치명타를 맞게 되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20] 이 당시만 해도 포수들은 헬멧을 쓰지 않고 그냥 야구모자를 뒤집어 썼다. 당연히 외부 충격에 약할 수밖에 없던 환경. 고의로 머리를 향해 스윙을 한 것도 있지만 포수 헬멧이 없어서 사고가 더 커진 셈. 프로와 아마를 막론하고 포수들에게 헬멧이 지급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21] 알다시피 시즌 초에는 76세의 김성근이 최연장자 감독이었지만, 박종훈 단장에게 욕설을 하고 경질당하면서 김경문이 최고령 감독이 되었다.[22] 이 때문에 돡갤에서는 2016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으로 시카고 컵스를 밀어주기도 했다. 물론 컵스의 상징이 곰이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