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박찬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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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금메달
1998

방송연예대상 버라이어티 부문 남자 신인상
육성재 & 슬리피
(2015)

<color=#373a3c> 박찬호
(2016)


이시언
(2017)





{{{#fff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1번}}}
얼 로빈슨
(1958)

박찬호
(1994~2001)


결번
{{{#fff [[텍사스 레인저스|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61번}}}
제임스 허스트
(1994)

박찬호
(2002~2005)


케빈 리차드슨
(2009)
{{{#fff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번호 61번}}}
결번

박찬호
(2005~2006)


닉 헌들리
(2008)
{{{#fff [[뉴욕 메츠|뉴욕 메츠]] 등번호 61번}}}
제프 던컨
(2003)

박찬호
(2007)


리반 에르난데스
(2009)
{{{#fff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61번}}}
결번

박찬호
(2008)


조시 베켓
(2012~2014)
{{{#fff [[필라델피아 필리스|필라델피아 필리스]] 등번호 61번}}}
케인 데이비스
(2007)

박찬호
(2009)


션 오설리반
(2014)
{{{#fff [[뉴욕 양키스|뉴욕 양키스]] 등번호 61번}}}
빌리 트레이버
(2008)

박찬호
(2010)


로이스 링
(2010)
{{{#fff [[피츠버그 파이리츠|피츠버그 파이리츠]] 등번호 61번}}}
앤서니 클라겟
(2009)

박찬호
(2010)


제프 로크
(2011)
{{{#fff [[오릭스 버팔로즈|오릭스 버팔로즈]] 등번호 61번}}}
이토 히카루
(2008~2010)

박찬호
(2011)


사카키바라 츠바사
(2018~)
{{{#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61번}}}
김경태
(2011)

박찬호
(2012)


김주
(2013)


<colbgcolor=#2f241d>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특별 고문
박찬호
(朴贊浩 / Chan-Ho Park)

생년월일
1973년 7월 28일[1] (50세)
출신지
충청남도 공주시
국적
대한민국
본관
충주 박씨
배우자
아내 박리혜(2005년 ~ 현재)[2]
자녀[3]
딸 박애린 (2006년생)
딸 박세린 (2008년생)
딸 박혜린 (2014년생)
학력
중동초 - 공주중 - 공주고 - 한양대[4]
신체
184.5cm[5] / 95kg / O형[6]
포지션
투수[7]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4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LAD)
소속팀
[image]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4~2001 / MLB)
[image] 텍사스 레인저스 (2002~2005 / MLB)
[image]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5~2006 / MLB)
[image] 뉴욕 메츠 (2007 / MLB)
[image]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8 / MLB)
[image]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9 / MLB)
[image] 뉴욕 양키스 (2010 / MLB)
[image]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0 / MLB)
[image] 오릭스 버팔로즈 (2011 / NPB)
[image] 한화 이글스 (2012 / KBO)
프런트
[image]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특별 고문 (2019~)
종교
불교
별명
코리안특급, 투머치토커
병역
예술체육요원
응원가
지누션 - A Yo[8]
서진필 - 사나이 순정[9]
SNS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3. 은퇴 이후
3.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4. 플레이 스타일
4.1. 박찬호 구속 100마일 관련
4.2. 투구폼
5. 여담
5.1. TV활동
5.1.1. CF
5.2. 역대 연봉
5.3. 기타
5.4. 가족
5.5. 작품 속 박찬호
5.6. 자서전
6. 주요기록
6.1. 좋은 기록들
6.3. 기타 기록
7. 어록
8. 연도별 성적

[clearfix]

1. 개요


저 녀석을 앞으로 10년 동안 상대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마크 그레이스[10]

한국의 前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 선수이자 KBO 국제홍보위원. 역대 두 번째 아시아인 메이저리거[11]이다. 불같은 강속구[12]와 낙차 큰 커브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한때 다저스의 1선발 급 에이스[13]까지 올라갔던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100승을 달성한 투수. 메이저리그 아시아인 최다승(124승)을 기록한 대투수이며, 2001년에는 다저스의 개막전 선발이었다.[14]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큰 이력을 남긴 투수 중 한명이다.[15][16] 또한 한국인 야구선수로서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때린 타자이기도 하다.[17]
한국에선 단순히 뛰어난 운동선수가 아닌 한국 스포츠의 상징이자 영웅으로 여겨진다. 뛰어난 실력, 어려움을 딛고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도 인기 요인이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어려웠던 국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는 점이 그가 영웅이라 불리는 까닭이다.[18] 외환위기로 나라가 폭삭 망하고 직장까지 잃으니 그 당시 사람들의 패배감과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박찬호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활약하는 것을 보며 국민들은 위로와 희망을 얻은 것이다.[19][20] 이러한 인기를 반영하듯이 박찬호 경기 중계의 시청률은 낮에도 25%가 나왔었다.“IMF시절 박찬호 중계 시청률 25%↑, 류현진 6배”(MBC에빠지다)

2. 생애



2.1. 유년기


1973년 7월 28일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전파사[21]를 하던 가정의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났는지 교사의 추천으로 공주중동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22]
공주중학교 3학년 시절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고,[23] 공주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image]
주간야구
어려웠던 집안 사정상 그렇게 배불리 먹지는 못했기에, 어릴 적부터 야구선수로 성공하겠다는 다짐으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공에 대한 공포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 공동묘지에 가서 담력훈련 겸 스윙훈련을 했다는 얘기는 요즘도 종종 회자되곤 한다. 또한 하체단련을 위해 공주산성을 토끼뜀을 하며 오르내렸다는 트레이닝 일화가 유명하다.[24]
동기생으로 홍원기손혁이 있었고, 이 셋은 당시 공주고등학교 야구부의 주축이었다. 특히 홍원기는 나중에 자신의 결혼식에 한국 야구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초대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25]

2.2. 선수 경력



참고로 출국 당시 에피소드가 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계약을 하고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 공항으로 몇 명 안되는 기자들과 관계자들이 배웅을 나왔다.

박찬호: "제가 100억을 벌어서 오겠습니다."

기자들: "100억?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찬호: "아 농담한 건데 너무 심하네ㅋㅋㅋㅋㅋㅋㅋ"

모두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찬호는 미국가서 1000억을 벌어 왔다.

2.3. 은퇴 이후


  • 단편영화 서울서칭에 출연한다. 그러나 결국 최종 편집본에선 등장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신 Special thanks to 에 이름을 올려서 제작에 참여했음이 밝혀졌다. 본 영화의 주연이 차인표인데 차인표와 박찬호는 박찬호가 부인 박리혜를 소개받아 처음 만나러 갈 때 같이 가서 옆 테이블에서 지켜보았다고 할 만큼 대단히 각별한 사이다. 그 인연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하게 된 듯 하다.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시절 도움을 받았던 구단주와의 친분으로 지도자 수업보다 구단 경영에 관심을 가져서 미국으로 구단 경영수업을 받으러 갈 거라고 한다. 현재 샌디에이고 구단 임원이라고 한다.
  • 친한 사이인 배우 차인표의 권유로 SBS의 땡큐라는 토크 프로그램에 공동 MC가 되었다. 추석 특집으로 파일럿으로 혜민스님 편이 반응이 좋아서 정규 프로그램으로 승격이 되었다. 매주 한국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을 캠프로 초청하여 하나의 테마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주는 힐링 프로그램 성격의 토크 프로(투 머치 토커)로, 워낙 굴곡진 선수생활을 많이 겪고 이겨낸 박찬호의 인생 경험과 철학이 그대로 토크에 녹아 있어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 첫 회 게스트로 만화가 이현세와 사진작가 김중만이 나와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는 매주 금요일 방송했으며 반고정으로 출연했다. 프로는 개편 때 시청률 저조로 폐지되었다.
  •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송재우 해설위원과 함께 JTBC의 한국전 중계 해설을 맡았다. 최고의 투수답게 매 상황마다 선수의 상태나 개인적인 경험 등을 살려 좋은 해설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 번은 투수가 어떤 구질로 승부할지 예측했는데 그게 그대로 이루어져 역시 박찬호라는 찬사도 받으면서 성공적으로 해설가의 길로도 안착했다. 중간 중간 소강상태 때마다 해주는 메이저리그 뒷얘기[26]는 덤.
  • 2012년에 유한양행 삐콤씨와 한화생명[27] 광고에 출연. 삐콤씨의 "궁금해 박찬호", "하루 두 알"이라는 구호와 대한생명 광고에서 (아내:야구 관두면 뭐하고 살까?)아내의 말에 콕콕!! (감독:어째 공이 예전과 다르다?)감독의 말에 콕콕!! 대충대충 인생살게?! 콕콕짚어 인생설계!! 라는 랩을 구사하며 프로야구 광고 때마다 등장하여 깨알같은 웃음을 주고 있다.[28] 워낙 건강하고 믿음직한 성실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광고에서 그를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다.
  • 2013년 메이저리그 NLCS 시리즈 3차전 다저스 홈경기에 등판하는 류현진을 응원하러 다저 스타디움을 찾았다.[29]
  • 2014년 5월 27일(미국시각 기준) 다저스 구단에서 개최된 한국의 밤 행사 기념으로 나타나서 경기 전에 한 시간 정도 팬들과 싸인회를 가졌고 시구를 했다. 포수는 류현진.시구영상 이날은 관람객들에게 류현진 바블헤드를 주는 날이기도 했는데 묘하게도 바블헤드는 류현진을 별로 닮지 않았고, 오히려 얼굴에 펜으로 수염을 그리면 오히려 박찬호와 많이 닮는다.
  • 2014년 시즌 중반부터서 은퇴식이 열린다는 소리가 돌았는데 결국 선수협에서 박찬호의 은퇴식이 없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2014년 올스타전에서 은퇴식이 열리는 걸로 확정이 되었다. 대체로 프로야구와는 인연이 깊진 않았지만 한 때 한국 야구인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여론. 다만 올스타전이 아니라 연고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올스타전이 열리는 경기장이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인지라, 광주광역시기아 타이거즈와 연고가 없는 박찬호가 이 곳에서 은퇴식을 여는 것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30] 올스타전에 비가 오고 있었지만 은퇴식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면서 박찬호는 공식적으로 야구를 은퇴하게 됐다.
  • 2014년 8월 미국에서 열리는 리틀 야구 월드 시리즈에서 한국 대표팀 대 푸에르토 리코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시구를 하고, 대표팀 선수단을 격려했다.
  • 2012 시즌, 박찬호의 한화 시절 선발 경기에서, 타석에 들어선 오재원은 평범한 땅볼을 쳤는데 발에 맞았다고 주장, 파울 판정을 받아낸 사례가 있었다. 그 후에 볼넷으로 출루. 박찬호는 이 일로 단단히 화가 나서 경기가 끝나고 두산 김진욱 감독과 벤치에 항의하고 오재원에게 사과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인천 아시안 게임기간 동안 SBS에서 특별 해설로 나선 박찬호는 국가대표팀 선발출장을 한 오재원을 보고 이 일을 얘기하면서 극딜을 했다.#,네이버 영상 1시간 51분 이후 참고 아프리카 고화질 영상 1:43 이후 참고 허나 오재원은 이에 대해 인터뷰에서 분명히 공에 맞았으며, 박찬호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박찬호와 같은 대선배를 상대로 할리우드 액션을 할 배짱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후 엠엘비파크에서 리플레이 캡쳐 사진을 합성해 타구의 궤도를 볼 수 있게 한 사진이 올라왔다. # 합성된 사진으로 보면 타구 궤적이 꺾이는 것이 확연히 보인다. 이로써 박찬호-오재원의 파울볼 논란은 박찬호의 착각이었음이 분명해졌다. 또한, 개인적인 일을 2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국가대표 경기 해설에서 이야기한 박찬호의 부주의를 지적하는 야구팬들이 많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해설자가 꺼낼 정도의 수위가 아니었고, 나중에는 오재원 쪽 주장이 맞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면서 야구 팬 사이에서 거의 절대적 존재였던 박찬호도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외에도 이거성 뺨치는 비난 해설(...)을 보여주며 거성#s-3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31]
  • 은퇴 기념 300개 한정 피규어가 제작되었다.120만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이지만 그 가격만큼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피규어 구입후기
  •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최종 성화 점화자인데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개막지인 광주광역시 출신인 양학선 선수와 함께 하게 되었다. 1993년 버팔로 유니버시아드에서 은메달을 딴 것이 큰 이유일 듯.[32]
  • 2015년 프리미어 12 한일전 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프리미어 12의 글로벌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활동했던 것이 주된 이유인 듯. 구속은 101km를 기록했다.
  • 2016년 동갑내기 전 농구선수 우지원과 함께 MBC 진짜사나이 동반입대 특집 편에 출연했다. 여담으로 박찬호는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금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아 예술체육요원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동갑내기 특집에 이어 남녀동반 해군부사관 특집에도 출연 고생을 하고있는 중이다. 계속 예능에 출연하는 것으로 봐선 안정환의 성공 사례처럼 방송인으로서 변모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측이 있다.
  • 2018년부터 키움 히어로즈의 스프링캠프에서 임시 투수 인스트럭터를 하고 있는데 친구인 홍원기 코치의 요청이라고 한다.[33]
  •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자유한국당의 영입 리스트에 있었으나, 본인은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다만 본인의 부정과는 달리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데, 박찬호가 갓 은퇴한 4~5년 전, 새누리당 시절에 박찬호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으로 정가와 지역사회에 소문이 파다하다. 박찬호 본인도 정치에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았는데, 정확히는 박찬호가 원한 것은 고향 공주의 지역구이고 새누리당이 제안한 것은 비례대표 자리였던 것. 새누리당으로서는 인지도는 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초짜인 박찬호에게 결과에 따라 낙선 가능성이 있는 지역구를 내주는 것은 시기상조라 생각해서 결렬되었다는 이야기가 이미 당시 정가에 파다했다. 박찬호는 딱히 정치적인 야심이나 특정 정당에 뜻이 있다기보단 그저 지역민의 최고 명예인 고향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던 것으로 현실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 것은 맞으니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말 또한 거짓말은 아니긴 하다. 여튼 2020년 총선을 앞둔 현재는 박찬호 본인도 방송인으로서, 구단 경영진으로서 바쁜 삶을 보내고 있기에 자연스레 사장된 이야기로 2020년 총선으로 정가 참여설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맞다. 결국 사실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현실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은 맞고 새누리당이 아닌 자유한국당으로부터 영입 의사가 없었던 것은 맞기에 박찬호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 김영삼 대통령 사망 당시 조문했다. 그러나 기독교장 예절을 몰랐던 듯하다.[34]

3.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


전성기 시절 새가슴이라는 일부 비난이 있었던데다,[35] 한만두처럼 잘 던지다 한 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 '멘탈이 약한 선수가 아닌가' 하는 이미지가 강했으며, 의외로 이 이미지는 아직도 많은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듯. 그러나 그가 홈페이지에 남기는 글이나 인터뷰[36] 등을 보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
사실 박찬호는 국가대표급 멘탈이다. 메이저리그 자체가 치열한 정글이다. 제 아무리 최고의 선수라도 잠시 부진하면 가차없이 팬들에게 질타를 당하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수 있기에 정신적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게다가 박찬호는 선발때마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엄청난 한국기자들이 항시 쫓아다녀서 심적 부담도 훨씬 컸을 것이다. 김병현은 기자와 싸움까지 벌여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김병현의 고백을 보면 가뜩이나 스트레스 받고 있는데 기자들이 자꾸 옆에 와서 사진 찍고 이런 것 자체만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또한 박찬호는 IMF당시 우상급이었기에 유혹도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헌데 10년 이상 큰 기복없는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았고 딱히 사생활적인 측면이나 언론과의 마찰 등 별다른 트러블 없이 묵묵히 야구에 정진했다라는 점에서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멘탈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축구 등 다른 분야에서 어린 나이에 과도한 관심과 집중을 받아서 부담감에 무너지거나 혹은 유혹에 넘어가 술이나 유흥에 빠져 막장테크 탄 선수들과 비교해보자.
부상부진에 시달리면서도 PED에 손대지 않았다는 점 또한 주목할만 하다. 박찬호가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뛰던 시기는 스테로이드 시대 중에서도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고, 메이저리거들 상당수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PED를 사용했지만, 박찬호는 그러지 않았다.
새가슴이란 비난을 받았던건 볼넷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면승부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피칭을 하다보니 겁이 많다고 안티들이 조롱했던 것인데, 그렇게 도망가는 피칭을 했어도 박찬호의 피홈런수는 꽤 많았다. 다저 스타디움은 투수친화적인 구장이라 점수가 잘 나지 않는 구장이다보니 홈런 맞고 점수를 내주면 치명적인지라 굳이 무리하게 정면승부를 하지 않고 안되면 내보냈던 것인데, 박찬호는 삼진도 많이 잡던 투수였다. 오히려 주자를 내보내면 부담스러워서 무리하게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다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헌데 박찬호는 주자를 내보내는걸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며 주자 내보내도 다음 타자 잡으면 그만이란 전략으로 무리하지 않았으며, 실제 볼넷 위기 상황에서도 볼넷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유인구를 던져 삼진도 많이 잡은 것을 보면 여유가 느껴지기도 하고 굳이 무리하게 승부하지 않았을 뿐이다.
올림픽 유도 김재범은 유도는 3초만에 결정된다는 명언을 남겼는데, 한번 상대를 맞잡아보면 '어 오늘 할만하다'라든지, '오늘은 좀 느낌이 안좋은데' 이런 식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이는 다른 스포츠 분야도 마찬가지인데, 박찬호도 일단 첫타자 상대해보면 오늘 제구와 구위가 괜찮다라든지, 컨디션이 안좋다라든지 느껴질텐데, 박찬호도 삘 받았을때는 상대를 윽박지르며 압도하는 강속구 투수로 변신한다. 완봉승을 거둔 날이라든지 컨디션이 최고조에 달한 날에는 메이저리그 강타자를 상대로 과감한 정면승부로 많은 삼진을 뽑아내는 등,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한국야구에선 타자를 압도했던 류현진도 떡대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선 기교파 투수에 가까워졌고, 박찬호 전성기때는 약물러들 전성기였는데 그때 동양인 박찬호가 힘좋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강속구로 압도하는 피칭을 했었다. 다만 박찬호가 제구가 안되는 날에는 여지없이 가운데로 몰리면 홈런을 맞았기에 이럴 때는 무리하지 않고 볼넷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가급적 유인구로 승부하는 전략을 취했을 뿐이다.
잘 던지다 한번에 무너지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멘탈이 약하다는 오해도 받았는데, 이는 멘탈에 과도한 환상을 갖는 한국인들의 잘못된 인식이다. UFC 김동현은 국내에 '멘탈전도사'로 유명했고 연승 중에 드디어 강자와의 대결이 잡히자 언론에서는 김동현이 구름을 넘어선 경지라는 둥 극찬했고 실제 경기 시작하자마자 백스핀엘보우를 날리며 '멘탈지존'의 모습을 보여줬으나, 상대가 가볍게 피하고 카운터 날리니까 한방에 뻗어버렸다. 멘탈은 신기루같은 것이다. 흔히 '전사의 심장'운운하는데, 그것도 맷집이 받쳐주니까 한대 맞고 두대 치는 전략으로 그렇게 나온 것일 뿐이다. UFC에서 K-1챔피언 출신 타격가 마크 헌트와 5라운드 내내 전율의 타격전을 벌이며 '전사의 심장' '최고의 멘탈'로 찬양받았던 안토니오 실바는 약물적발 뒤 맷집이 급격히 저하된 모습을 보이며 KO패를 당했고, 마크 헌트와 재대결때는 헌트의 주먹에 심하게 움찔거리며 심지어 뒷통수를 보이며 도망가는 모습까지 나오고 결국 무기력하게 KO패당했다. 결국 멘탈도 실력에서 파생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먹을 맞아도 맞을만하다고 느껴지면 '오 더 때려봐' 이렇게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고, 내가 한번 휘둘렀더니 상대가 데미지를 받고 휘청이는 모습을 보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내가 한대 때렸는데 상대가 반응이 없으면 멘탈붕괴가 일어날 수 있고, 실제 멘탈지존 맥그리거는 좀비파이터 디아즈에게 패했는데, 자신의 필살 펀치를 맞고서도 끄떡도 안하고 덤벼드는 모습에 멘탈붕괴됐다고 한다.
여하튼 박찬호가 종종 무너졌던건 멘탈이 약한게 아니고 그게 실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너졌어도 18승을 거두기도 하고, 방어율 3점대 초반을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무너진 경기들이 없었다면 메이저리그 사이영상급 투수가 된다. 원래 야구에선 투수들이 유리하다.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이라고 해봐야 3할인데, 즉 강타자들 상대해도 10번 중 7번은 투수들이 잡아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못하는 투수들을 보면 계속 안타 맞는게 아니고 잘 던지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등의 패턴을 보이는데, 그게 바로 정상급 투수냐, 아니냐를 가르는 요소인 것이다. 오히려 박찬호가 한계에 부딪힌 것은 피지컬 문제에 가깝다. 박찬호가 가장 빛나던 시절은 00~01년 전반기까지인데, 특히 올스타에 뽑혔던 01년 전반기에는 그야말로 괴물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허리문제로 후반기에 무너졌다. 박찬호의 피칭스타일은 신체에 상당히 무리가 가는 스타일이고, 타고난 피지컬이 (메이저리그치곤)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그의 스타일 상 이를 악물고 한계까지 쥐어짜는 스타일이었다. 실제로 박찬호는 90년대 후반~00년대에 활동한 메이저리그 파워피처치곤 체격이 큰 편이 아니다. 게다가 그가 활약하던 시기는 악명높은 스테로이드 시대로, 타자들이 전대미문의 파워를 자랑하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파워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던 로저 클레멘스가 193cm/107kg의 거구인데다 약의 힘까지 빌렸던 걸 생각해보자. 즉, 메이저리그 투수치고 평범한 체구인 박찬호가 역사상 타자들의 파워가 가장 강한 시대에 저렇게까지 버틸 수 있던 것도 피지컬의 한계를 정신력으로 버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계에 부딪히는 걸 이를 악물고 버텼으니 힘이 떨어지면 무너지는 건 당연한게 아니겠는가? 실제로 그는 FA전 부상을 참고 뛰었고, 이렇게 무리한 것은 나중에 심각한 기량 저하로 돌아왔다.
사실 박찬호는 큰 기복이 없는 투수인데, 대표적인 예로 퀄리티 스타트(6이닝 3실점 이하)도 많이 좋았다.[37] 퀄리티 스타트의 가치가 큰 기복없이 안정적으로 던질 수 있느냐를 측정하는 잣대이고, 특급투수들을 보면 반드시 퀄리티 스타트 성적이 좋고 무너지는 경기가 거의 없기에 방어율이 높은 것이다. 종종 무너졌다고 해도 방어율 3점대 초반도 기록한 적이 있는데, 그 시즌 무너진 경기 없애고 그때도 안정적인 피칭을 했다고 계산하면 방어율은 2점대를 마크할 것이고, 20승도 넘을 수 있고 이러면 특급투수가 돼버리는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고 그게 바로 실력이다. 멘탈 강하면 안무너지는게 아니고,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인 클레이튼 커쇼라도 컨디션이 안좋거나 부상이 있을 때는 제구가 안돼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 자기소개 밖에 할 줄 몰랐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구단에서 붙여준 통역을 과감히 사양했다든지[38], 첫 차를 사기 전에 교통비를 아끼려고 경기장에서 숙소까지 뛰어갔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보면 고생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자세가 엿보인다. 또한 메이저리그에서 생존하기 위해 프로 초창기 때 던졌던 슬라이더를 봉인한 대신 빠른 공과 궁합이 맞는 커브를 장착한 이야기나, 샌디에이고 시절 장출혈, 필라델피아 시절 신종 독감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자기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프로정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 중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생업에 정착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의 특별한 프로정신 덕분에 아메리칸 드림 하면 생각나는 첫 번째 한국인이 되었다. 물론 이민 정착이 아니라 한국에 귀국해 살고 있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사람에겐 최고의 롤모델로 손색없는 사람이 바로 박찬호. 미국 문화를 이해하면서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던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어떤 업계에 진출하더라도 저런 근성 없이 성공을 바라면 안 될 것이다.

4. 플레이 스타일


아시아 야구 역사상 최강의 패스트볼을 뿌렸던 선발투수. 스테로이드 시대의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패스트볼 구위로 밀어버린 전형적인 파워 피처 스타일이었다.
주무기는 빠른 강속구와 파워 커브, 슬로 커브, 슬러브. 특히 파워 커브메이저 최고의 명품 구질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39] 그 외 오렐 허샤이저에게 전수받은 투심도 상당히 인정받고 있다.[40] 박찬호의 커브는 2000시즌과 2001시즌 2년 연속으로 메이저리그 단장과 감독들 선정 최고의 커브 부문 3위를 했을 정도로 대단한 구질이었다. 그리고 내야수(3루수) 출신답게 수비 실력도 훌륭한데, 특히 번트 대처능력은 귀신급.
게다가 저 기록들은 이른바 스테로이드 시대[41]에 세운 기록이라 더욱더 빛난다.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의 반열에 올라서지는 못했지만, 전성기 때는 리그에서도 1~2선발급 실력을 보유했던 선수이다. 박찬호가 1선발급이었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는데, 이는 결국 기준을 어디 두느냐에 달린 문제다.
메이저리그 팀이 30개이니 전체 30등 안에 들면 1선발급이라는 조금 유한 기준을 적용해 보면, 박찬호의 전성기라 볼 수 있는 1998, 2000-2001 세 시즌은 클래식 스탯은 물론이고 세이버로도 당연히 1선발급이 맞다. 반면 최소 올스타 수준, 리그 5위 안에 드는 선발이어야 1선발급이라는 조금 빡빡한 기준을 적용해 보면 클래식 스탯으로는 아슬아슬하고 세이버로는 어렵다.[42][43][44]
강력한 패스트볼과 커브볼을 기반으로 랜디 존슨에 이은 탈삼진 2위[45]를 마킹한 시즌이 있었을 정도로 삼진머신이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박찬호와 비슷한 수준의 통산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로는 노모 히데오로 실제로 선수 간의 커리어 유사성을 비교하는 Similarity Score가 952점으로 서로에게 가장 높은 점수다.
다만 구속만 따진다면 오타니가 데뷔 후에 100마일을 뻥뻥 던지고는 있어서 아시아 투수들 중 패스트볼 구속기록은 오타니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위에 영향을 미치는건 구속뿐만이 아니라 무브먼트도 있으니 단순비교는 좀 무리가 있다. [46] 게다가 경기 중 평균 구속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리그의 타자들을 그 구위로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특히 패스트볼의 경우 타자들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제구력에 대한 부담과 결정구에 대한 부담, 그리고 체력 문제 때문에 선발 투수들의 경우 구속을 최고 수위로 끌어 올리며 유지하기가 힘들다. 즉, 일본 타자들을 상대하는 오타니의 100마일과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하는 박찬호의 98마일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일본에서는 구속과 구위로 타자들을 압살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구속 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어서 제구력과 변화구를 장착하고 그 때문에 직구 구위와 구속이 떨어졌던 이라부 히데키다.
한편, 박찬호는 전성기 시절 97~98 마일을 최소 5번 이상은 나왔고 이러한 강속구에 80마일 중반의 파워커브 레퍼토리는 분명 기교파 투수와는 거리가 있다. 아니 사실 기교파는 말도 안되는 얘기고, 전성기 시절이었던 98시즌 전후 보다 오히려 직구의 구속과 구위가 더 압도적이었던 96~97시즌 연간의 박찬호는 경기 내내 평균 95마일 이상의 직구를 뿌리며 경기 후반까지도 97~98마일의 직구를 뿌리는 모습을 종종 보여줬었고, 내셔널 리그에서도 손 꼽히는 파이어볼러 중 한명이었다. 당시 박찬호의 투구를 두고 USA 투데이의 저 유명한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인 밥 나이팅게일은 '80년대 중후반을 장식했던 강속구 투수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클래식한 강속구 투수라고 평한 바가 있을 정도였다.
현재까지도 패스트볼의 구위만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압도한 동양인 선발투수는 박찬호와 노모[47] 뿐이고 그나마 구원투수 쪽에서는 사이토 다카시우에하라 고지가 있으며 현역 동양인 선발투수 중에서 다르빗슈 유의 패스트볼 구위가 박찬호에 가장 근접해 있다.[48]
'박찬호 악포심 던진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년에는 이를 악물고 괴성을 질러가며 포심을 던진 적도 있었다. LA필라델피아, 피츠버그 등에서 이런 일이 좀 잦았는데 해설자들이 이야깃거리로 삼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이러한 습관 때문에 어금니가 망가져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고, 남아있는 치아의 보호를 위해 대책으로 마우스가드(피스)를 착용하고 던진다.[49][50] 여담으로 이 때문인지 동양제과에서 박찬호를 모델로 '익사이팅'이란 이름의 껌을 출시하기도 했는데 일반 껌보다 두께가 두 배 정도 굵어 씹는 느낌이 헤비하다. 실제로 많은 야구선수들이 치아보호를 위해 껌을 씹기도 한다.
류현진미국 진출 후 은근히 류현진과 비교가 되거나 재평가되고 있는데 박찬호는 전형적인 구속, 무브먼트로 윽박지르는 파워피처이고, 류현진[51]은 다재다능함을 자랑하긴 하지만 박찬호처럼 우격다짐형 파워 피처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스타일이 완전 달라서 두 명의 다져스 한국선수의 경기를 모두 본 사람들에게 잔잔한 재미를 주고 있다. 젊을 적에는 사실상 패스트볼과 커브 투피치[52]로 A급 투수로 등극할 만큼 스터프로 먹고사는 스타일이었다. 90마일 초중반대에 무브먼트도 심해서 제구가 되는 날에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며 삼진의 산을 쌓는 원동력이었다. 이후 여러 구질을 배우고 보완하면서 다양한 구질을 던지게 되고 또 몇몇 구질은 부활의 원동력이 되긴 했으나 항상 박찬호를 상징하고 박찬호가 있게 한 것은 강력한 속구였다. KBO에서 류현진은 속구로 타자들을 윽박지를 수 있었지만 MLB에서는 힘으로 타자들을 압도할 수 없어서 박찬호보다는 압도적인 면이 떨어져 보일 수도 있지만 안정적으로 경기를 이끌어가는 타입이다. 그래도 힘으로 찍어누르는 압도적인 구속이 빠른 파이어볼러 투수가 인기도 높고 많은 야구팬의 로망이라 전형적인 정통파 우완투수로 리그를 호령하는 한국 투수인 박찬호는 선구자 타이틀이 없어도 매력적인 투수였고, 박찬호 이후 정통파 한국인 메이져리거를 다시 보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전성기때는 흔히 기억되는 박찬호와 달리 상당히 안정적인 투수였다. 특히 '퀄리티스타트'라는 단어를 한국에 처음 정착시켰으며 박찬호의 투구를 보고 퀄리티 스타트가 쉬운 걸로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매번 나오면 6이닝 3실점은 당연한거였다. 다만 삼진 아니면 볼넷일 정도로 제구되는 날과 안되는 날의 기복이 좀 있었고 볼넷으로 위기를 자초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경력이 쌓일 수록 위기관리능력이 늘어 삼진과 병살로 잘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투수치고는 타석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어 가끔씩 홈런을 치고는 했다. 연장 13회 때 선발출장한 투수를 대신하여 '대타' 박찬호가 나서는 일도 있었다. 1호 홈런2호 홈런. 가장 마지막 기록을 보자면 09/04/26 vs플로리다전에서 홈런을 쳤다.[53] 더 대단한건 3개의 홈런 모두 밀어서 넘긴 홈런이다. 시즌 타율은 투수 중에서도 높은 편인 1할 대 후반에서 2할 타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보내기 번트 능력은 메이저리그 투수 중 정상급이다.
사실 잘 믿기진 않지만 박찬호는 원래 3루수로 야구를 시작했고, 소속팀 감독으로 부터 타격에 제법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2학년때 투수로 전향한 이후에도[54] 공주고등학교에서도 클린업을 쳤었다. 고교야구에서는 강타자의 수비 위치가 투수인 경우가 종종 있다.
박찬호를 비롯한 당시 92학번은 '전설의 학번'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재들이 많은 학번이었다. 특히 투수쪽에는 조성민, 임선동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했었다. 근데 재미있는 건 당시에는 이 세 명의 투수 중 박찬호에 대한 평가가 가장 낮았다고 한다.[55] 공은 빠르지만 세세함이 부족하고 컨트롤이 잘 안되는데다 부상도 많았다는게 이유. 그래서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갔기 때문에 더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메이저리그는 선수의 단점을 고치는 한국 스타일보다 선수의 장점을 강화시키는 훈련 스타일인데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으로 선수의 몸관리를 해서 오랫동안 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는게 그 이유다.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다. 전성기 때 시범경기 성적이 썩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어코 10승 이상을 올리는 활약을 보여줬다. 시즌 초인 4~5월에 난타를 당하는 경기를 자주 보여주다가 6월 하순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 7~8월은 리그 특급 투수의 성적을 찍어줬다. 그래서 중계를 하던 iTV에서도 날이 더워질 즈음엔 여름의 사나이 라던가 뜨거운 이미지와 관련된 표현을 많이 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초창기 때 전담포수를 둘 정도로 포수와의 호흡은 상당히 민감했다. 방망이는 좋지만 수비와 리드가 시망인 마이크 피아자, 토드 헌들리, 폴 로두카[56] 대신에 찰스 존슨이나 채드 크루터 같은 수비형 포수를 선호했다. [57] 그러다 점점 연차가 찬 이후에는 그다지 까탈스럽지 않은 투수로 변했다.[58]
강했던 팀과 선수는 시카고 컵스, 밀워키 브루어스, 다저스 시절 필라델피아 필리스, 제프 켄트, 에드가르도 알폰소[59]. 약했던 팀과 선수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미네소타 트윈스,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배리 본즈, 블라디미르 게레로, 클리프 플로이드, 에릭 차베스, 미네소타의 자크 존스, 그리고 박찬호 잡는 귀신으로 불리던 브래드 풀머를 빼먹으면 섭하다.
2006년 WBC 일본전에 던진 박찬호의 공을 보고 일본 기자들이 "변화구를 많이 던진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박찬호가 "오늘 변화구는 던진 적 없고 투심 던졌다."라고 대답한 일화도 있다. 그만큼 공의 변화가 엄청났다는 얘기.
또 사족으로 일본마쓰이 히데키의 천적이다. 통산 전적에서도 마쓰이가 박찬호를 상대로 단 한개의 안타를 쳤을 뿐 거의 밥이라고 할 정도로 마쓰이에게 강하다. 통산 9타수 1안타. (그런데 그 1안타가 홈런이다) 실제로 마쓰이는 "박찬호의 공은 도저히 칠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 한 적도 있다.
다만 가장 많이 상대한 아시아 타자인 스즈키 이치로를 상대로는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상대전적은 35타석 .387/.457/.484이다.[60]
구질 욕심이 보통이 아니다. 전성기 시절 투피치 피처로 구분되긴 하나, 2000년부터 재미를 보던 슬러브를 비롯, 속도가 40km/h가 차이 나는 커브를 실전에 쓰기도 했다. 또한 상술된 바 투심도 수준급이며, 너클볼을 제외한 대부분의 구질을 실전에 사용하였다. 알고보면 팔색조 투수.
노모 히데오에게 메이저리그 시절 포크볼을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노모 히데오가 거절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당신의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었다면, 포크볼 따윈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오릭스에 가서도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는 건 여전하다. 오릭스의 동료 선발투수에게 체인지업을 가르쳐 주고 그에게 포크볼을 배우려고 하기도 했다.
타격도 투수 치고는 상당하여 통산 3홈런을 기록하였고, 번트가 특히 정교한 편이었다.[61] 2006년엔 시즌 중반까지 3할 초반대의 정교한 타율을 기록하면서 내셔널 리그 실버슬러거 투수부문 컨텐더로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었다.[62] 이 해에 박찬호는 선발투수로 풀시즌을 보냈음에도 대타로 2번 등장하여 한 번은 무사 1루에서 희생번트를 기록했고, 나머지 한 번은 연장전에서 2사 주자없을때 펜스앞에서 잡힐정도로 큰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을 정도. 그외 A.J 버넷의 99마일 직구를 깨끗하게 받아쳐서 안타를 만들었다거나, 브랜든 웹을 상대로 3타수 3안타 2타점을 올렸다거나 한 일이 모두 2005~2006년 즈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4.1. 박찬호 구속 100마일 관련


박찬호에 대한 논란 중 하나가 그의 최고 구속이다. 박찬호가 한창 짱짱하던 96년도 무렵에 비공식적(infomally)으로 100마일을 던질 수 있다는 의견이 미국의 잡지에도 실린적이 있지만 실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100마일을 던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박찬호의 100마일에 대한 도시전설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직구 구속이 다소 빠르게 측정되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진 쿠어스 필드에서 100마일을 던졌다. 쿠어스 필드의 경우 타 구장에 비해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공기 밀도가 약간 더 희박하고 따라서 공이 받는 공기 저항 역시 감소한다. 실제로 쿠어스 필드는 '투수들의 무덤'이라 알려져 있는데, 공기 저항이 적은 만큼 타구의 비거리가 증가하여 타 구장에 비해 장타를 맞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쿠어스 필드를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팀컬러가 장타를 펑펑 쳐대는 대포군단인 것도 이러한 특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타구의 비거리를 늘릴 정도로 공기 저항이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니, 쿠어스 필드에서 평균 구속이 타 구장보다 높게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1. 100마일을 넘어 101(약 163km/h)마일을 던진적이 있으며 이는 당시 국내 스포츠신문에 대문짝하게 보도되었다. 이것이 실제 신문지면이었는지 TV광고에 나오는 그래픽이었는지 불확실하나 쿠어스 필드 160km라는 문자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것이 100마일 또는 101마일을 던지는 것을 봤다는 사람은 많은데 그 영상을 업로드하거나 링크를 제시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것을 보도한 스포츠 신문을 봤다는 사람은 많은데 (구체적으로 일간스포츠스포츠서울이네라고까지 말한다) 그 신문 기사의 링크를 제시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1997년에 쓰인 것인데, 이 시기까지 100mph를 기록한 투수는 놀란 라이언랜디 존슨 둘 뿐이라고 못박고 있다. 박찬호는 최대 구속이 99mph라고 적혀 있다.
흥미롭게도 2000년대에 들어서야 박찬호가 100마일을 던졌다는 기사들이 등장하는데, 시점도 1996년과 1997년으로 제각각이다가 나중에서야 1996년으로 통일되고 있다.
주로 박찬호가 100마일을 던졌다고 주장되는 쿠어스 필드 기록은 1996년 6월 27일 콜로라도전이다. 그런데 다음의 두 링크를 보면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시카고전 중앙일보 기사
콜로라도전 중앙일보 기사
위 기사는 최고구속 156.8km의 강속구를 뿌렸다고 나와 있으나 아래 기사는 구속 내용이 전혀 없다. 두 글을 송고한 기자가 LA지사 허종호 특파원으로 같은 사람임을 고려할 때, 156.8km의 강속구를 기사에 적시하는 사람이 100마일이라는 희대의 대기록을 적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이 상식적 추론일 것이다.
실제 많은 사람들은 박찬호의 메이저리그에서의 최고 구속이 98~99마일이라고 하고 있으며, 자신은 진짜 사나이에 출연하여 자신의 최고 구속은 160km/h (약 100마일)이라고 한 바가 있다[63].
한편 공식 사이트에서는 최고구속을 161km/h로, 1996년 5월 28일 콜로라도전에서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 161km/h라면 100.04마일이다. 다만 이 공식사이트 기록은 완전히 틀린 것이, 1996년 5월 28일 다저스의 상대팀은 콜로라도가 아닌 필라델피아였다. 1996년 박찬호의 콜로라도전 등판은 총 5경기인데 6월 말과 7월 초에 5경기 모두가 몰려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뒤져보면 1996년~97년 즈음부터 ‘박찬호 최고구속은 161km/h’라는 말이 등장한다.

4.2. 투구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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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의 투구폼
박찬호가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부터 장거리 달리기를 매일 같이 해와 하체가 튼실하다는 점과 국내에서는 금기시한[64] 하이 키킹 동작을 했다는 점이다. 다만 하이 키킹의 경우 선수생활 후기에는 그 크기가 전성기보다는 꽤 낮았었다.
  • 장거리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는 그를 다룬 책 <메이저리그와 정복자 박찬호>에서 나오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달리기를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마이너리그 시절 차가 없었을 때는 경기장에서 집까지 뛰어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 국내 지도자들이 금기시했던 하이 키킹을 시도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의 영원한 우상인 놀란 라이언 투구 동작 사진을 구해 부분부분 연습해 구속이 빨라졌다고 한다. 여기에는 한가지 사연이 있다. 1991년 한미일 청소년 대회를 마치고 귀국 후 도착하니 밤이어서 바로 공주로 버스타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날밤만 이태일 기자(前 NC 다이노스 사장)의 집에 머물렀는데, 이태일 기자집에는 연구를 위해 보던 야구서적들이 가득했고, 그 중 박찬호의 우상이던 놀란 라이언의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은 영어 원서이긴 했지만, 놀란 라이언이 구속을 높이는 트레이닝법이 그림으로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그래서 박찬호가 이 책에 관심을 보이자 이태일 기자가 그 책을 박찬호에게 선뜻 선물을 했다. 그리고 박찬호는 공주에 돌아와서 그 책에 있는 그림을 보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하이키킹 투구폼을 완성했다. 물론 마이너리그 서비스 타임시절에 이 극단적인 투구폼은 손을 보면서도 강속구를 살리는 방법으로 코칭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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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 시절에는 폼이 저렇게 극단적이었다. 이후 저 투구폼에서 든 다리의 무릎을 접은 형태로 폼을 바꾸고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데뷔하게 된다.

4.3. 부정투구 논란


선동열 감독에 따르면 머리에 무스나 젤 등을 발라놓고 머리를 만지는 식으로 상습 부정투구를 했다는 증언이 있다. #
2020년 후 오프시즌 메이저리그에서 파인타르 논란이 불거지면서, 부정투구가 어쩌네 저쩌네 왈가왈부하던 도중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박찬호 얘기도 끌려나온 것. 처음 기사가 나온 것은 알 수 있듯이 06년으로 이때는 최소한 한국 내에서는 부정투구가 크게 논란이 되던 시기도 아니었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우 아예 팀 닥터가 도핑을 시켜주려고 했다가 외국인 감독이 말려서 못 했다 뭐 이런 류의 이야기를 미담처럼 할 만큼 부정투구나 도핑 등에 대해 경각심이 옅었다. 여튼 한동안 묻혀 있던 이야기였는데, 2020년 파인타르 문제가 모든 팀이 다 얽힌 논란으로 불거지면서 박찬호의 부정투구 이야기도 오랜만에 커뮤니티에 돌게 되었다. 일단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본인의 언급은 없다.

5. 여담



5.1. TV활동


경인지역 민영방송의 밥줄이었다. iTV 때도 그랬고 OBSMLB중계를 시작했다. 그러나 돈이 안 돼서 결국 2010시즌의 중계권은 포기하는 듯 보였으나 결국 다시 중계를 시작했다. 2010시즌 중계권을 소리소문 없이 구매해서 잘 방영했다. 다만 추신수 위주의 중계방송을 시도하는지라 박찬호의 비중은 많이 줄었다.
2009년 초 1박 2일에 출연해 적극적으로 촬영에 참여[65]하여 여전히 많이 남아 있던 박까들을 팬으로 전향시키는 기적을 실현하기도 했다. 한겨울에 계곡의 얼음을 깨고 멤버들과 계곡물에 입수한 장면은 당시 최고 시청률을 찍었다. 멤버들과 돈독한 우정이 쌓였는지 녹화가 끝난 뒤에도 장문의 문자를 멤버들에게 일일이 보냈다고 하고[66] 그 해 KBS 연예대상에도 1박 2일 멤버들과 함께 참석했으며, 이로부터 2년 뒤에 혹한기 특집에도 다시 찾아와 멤버들을 한번 더 계곡에 입수시키기도 했다.[67] 2010년 시청자 투어 때도 치킨을 보내줬으며, 2011년에는 이승기 - 이수근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박찬호의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병뚜껑 복불복 게임에서 역대급 제구[68]를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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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2011년 12월 1일, 주병진 토크 콘서트 첫 방송의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2013년 7월 18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
2015년에 냉장고를 부탁해신승훈과 함께 출연했다. 그런데 훗날 2016년 9월 12일에 그의 아내 박리혜 셰프가 여성 셰프 최초로 냉장고를 부탁해스페셜 셰프로 참여하게 되었다.
배우 정준호와의 오랫동안 친분을 계기로 그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달콤살벌 패밀리에 특별출연했다. 영어쓰는 충청도 학부모 역.
2018년에는 SBS에서 방영한 빅픽처패밀리에도 출연하였다.
2019년 10월에는 집사부일체에 출연했다.
2020년 정글의 법칙IMF 금융위기 시절 국민영웅으로 같이 불린 박세리와 함께 출연했다.
2020년 축구선수 이영표, 오마이걸 승희와 함께 축구 야구 말구에 출연했다.
2021년 2월 14일부터 박세리,박지성과 함께 쓰리박에 출연한다.

5.1.1. CF


전성기였던 90년대 후반에는 대한민국 광고계의 블루칩이었다.
  • '익사이팅'이라는 '본격(?) 스포츠 껌: 광고가 '찬호형! 나에게 힘을 줘! 라는 어느 유망주의 기도에 응답, 익사이팅 껌을 건네준다. 꼬꼬마가 껌을 씹는 게 아니라 코에 갖다대고 냄새를 흡~맡자 갑자기 에이스 투수의 기운이 빙의한다는 스토리.
  • 게토레이: 근래의 영상에선 찾기 어려운 메이저리그 초창기시절의 하이키킹 동작을 확인해볼 수 있다. 해당 동작이 음료 캔에 직접 인쇄되어 있었을 정도.
  • 삼보컴퓨터 체인지업: 박찬호의 인지도에 더불어 무료로 업그레이드를 해준다는 제품 컨셉트 자체도 충격적이었기에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광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유니폼을 본딴 선수복을 입고 등장, "쳬인졉으로 업그뤠이드"하는 버터발음을 보여주었다.
  • : 취소선이 들어간 이유는, 광고에 그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언어유희로 그의 인지도만 이용한 것. 사실 진짜 호박맛이 나고, 아이스크림이라 차갑기 때문에 딱히 태클 걸기도 어렵다. 그래도 CF에 야구선수들이 등장하는데다, 이창명의 명대사인 "이걸 미국으로 보내버려?" 덕분에 인지도를 이용했다는 것 자체는 확실.
  • 이외에 오리온 썬칩, 나이키등 광속구를 구사하는 개척자, 정복자 이미지로 수많은 광고에 출연하였으며, 무려 화장품 광고를 하기도 했다.
2010년대에도 LG패션 타운젠트, 플렉스파워 등을 통해 여전히 활발한 CF 활동을 하고 있다.

나이키의 전속모델로도 활동했다. 위의 광고는 미국과 한국 모두 방영됐었다.

건설회사 KCC의 광고에 출연하였다. 투머치토커의 컨셉을 그대로 유지한채로 나와 큰 웃음을 선사하였다.

5.2. 역대 연봉


연도
액수
소속팀
소속리그
1994년
10만 9000 달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995년
11만 4000 달러
1996년
12만 4000 달러
1997년
27만 달러
1998년
70만 달러
1999년
230만 달러
2000년
395만 달러
2001년
990만 달러
2002년
688만 4803달러
텍사스 레인저스
2003년
1300만 달러
2004년
1400만 달러
2005년
1500만 달러
텍사스 레인저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6년
1550만 5142달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7년
60만 달러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마이너)
2008년
50만 달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9년
250만 달러
필라델피아 필리스
2010년
120만 달러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1년
2억 5천만엔
오릭스 버팔로스
일본프로야구
2012년
2,400만원[70]
한화 이글스
한국프로야구
박찬호가 여태껏 벌어들인 돈[71][72]
리그
금액
원화로 환전 시
메이저리그에서 번돈
8,665만 6,945달러
969억 9511만 8500원
일본프로야구에서 번 돈
2억 5천만 엔
28억 9,582만 5,000원
한국프로야구에서 번 돈
2,400만원
총액
999억 1,494만 3,500원
원래 94년경 첫 출국 당시 당당히 100억 벌어오겠다고 큰소리쳤는데 10배를 벌어 온 것이다!

5.3. 기타


  • 미국 진출 첫해 마이너에서 고생할 때, 팀 동료들이 마늘 냄새가 난다며 피하기에 처음에는 인종차별인줄 알았다고 한다. 노이로제가 걸려서 하루에 대여섯 번씩 샤워를 했을 정도라고. 그러던 어느날 한 선수가 먼저 시비를 걸어 싸움이 붙고 감독에게 불려갔는데 영어를 하지 못해 오히려 원인 제공자로 몰려 벌금까지 물었다고 한다. 너무 분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으나 한국의 흔한 아들들이 그렇듯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원래 하려던 말은 다 집어넣고는 결국 잘 지낸다 거짓말을 하고 끊었고, 그 다음날부터 한국 음식을 완전히 끊고 냄새나는 치즈를 억지로 먹었다고,[73] 그런데 그 이후로는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고, 실제로 외국인들에겐 마늘 냄새가 견디기 힘들었던거지 자신을 따돌리는 것이 아니었다는걸 깨달았다고 한다.[74][75]
  • 10년차 베테랑 선수가 된 텍사스 시절에도 비슷하게 냄새로 서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는데, 선수단 비행기에서 어머니가 싸준 김밥을 초고추장에 찍어먹으려고 열었는데 옆에서 냄새를 맡은 선수들이 누가 방귀 끼었냐고 소리를 질렀다. 상한 것이 아니고 좋은 냄새라고 해명했으나 전부 버리라고 난리를 쳤고, 버릴 수가 없어서 결국 비행기 화장실에 가서 앉아서 먹었다고 한다.
  • 선수 시절 일본 출신인 노모 히데오와 라이벌 기믹이 잠깐 있었고, 한국 언론에서는 유독 박찬호와 노모 히데오를 비교하면서 깎아 내리는 경우가 많았었다[76]. 하지만 실제로는 노모가 박찬호의 비공개 결혼식에 참석할 정도로 개인적인 관계가 상당히 좋았다. 박찬호는 결혼식 하객을 약 30명만 초대했고 야구인은 두 명 뿐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노모였던 것. 야구팬들은 알겠지만 노모는 야구에 대한 구도자적 자세와 훌륭한 인품으로 유명하며, 박찬호보다 먼저 다저스에 적응한 아시아인 선배였다. 한일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라이벌이라 불렸을 뿐 실제로는 좋은 동료에 박찬호가 따라잡고 싶어하는 선배였다. 박찬호가 124승을 기록하며 노모의 123승 기록을 깨자 축하 메시지를 보냈으며, 박찬호 기념관 건립행사에도 참여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
  • 국가대표로서의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국가대표, 말 그대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경기에 나선다는 것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이 있고, 책임감까지 강하다. 현역 시절 한국 야구계가 참가하는 각종 국제 대회에 빠진 적이 없고, 빠질 경우에도 큰 아쉬움을 토로하는 등 한국 야구가 세계 수준에서 활약하는 데에 기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아무래도 한국인으로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첫 투수였고, "자신의 행동 = 한국에 대한 이미지" 공식처럼 지금 기준으로는 조금 고지식한 태도를 가질 만한 시기(90년대 초반)였기에 국가 대표 자리에 더 집착한 듯 하다. 여러모로 야구 뿐만 아니라 야구 외적으로도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소유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스포츠계에 영원한 전설로 남을 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
  • 전담포수였던 채드 크루터를 고소한 적이 있다. 사유는 빌려준 돈을 안 갚았다고. 그러나 나중엔 소송을 취하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선의의 라이벌 겸 절친 노모 히데오도 똑같은 이유로 킨테츠 시절 팀동료 사노 시게키를 고소한 적이 있다. 다만 이쪽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진 않은 듯..
  • 인천 자유공원 인근에 있는 야구 배팅장에는 투구 자세로 타격을 하는 괴랄한 모습의 그림이 있다. 이 의뢰를 받은 화백[77]은 본래 박찬호의 투구 자세를 그렸으나 타격을 연습하는 시설인 만큼 배팅장 사장님이 타자의 그림으로 다시 그려달라고 요청, 귀찮아진 화백이 어깨 너머로 방망이만 하나 덜렁 그려서 마무리했다는 설이 있다. 불암콩콩코믹스에서 패러디되기도... 자유공원 박찬호 웹툰 생활의 참견에서 작가 김양수는 자신의 선배 얘기라며 본 에피소드를 연재한 적이 있었다.
  •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활약하던 시절, 엑스포츠 개국 초기 딱히 광고수입이 없던 당시 박찬호의 등판경기 때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엑스포츠에서 우릴대로 우린 조여정의 송월타월 광고에서 본따 타월을 선물하자는 얘기도 있었다. 벅 쇼월터 감독을 '벅 송월터' 감독으로 불렀던 그 시절이다. 송월타월 광고를 보며 허벅지를 꼬집던 네티즌들은 박찬호가 삼진을 하나 잡으면 타월이 1cm 내려간다는 드립을 쳤다나(...). 이때 조여정과 송월타올 광고를 지긋지긋하게 본 탓에 메이저리그 통산 100승을 올릴 당시 국내 메이저리그 팬덤에서는 박찬호와 조여정을 맺어주자고 하는 여론까지 생겼었다.
  • 2009년 월드시리즈 때 독감에 걸린 채로 등판되었다고 보도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신종플루였다는 것이 본인 입에서 밝혀졌다.
  • 희한하게도 그가 공을 잘 던지면 나라가 곤경에 빠진 증거라는 설이 있다. 그냥 웃으면서 넘기기에는 참 미묘한 시기에만 잘 던지는 것이 또 나름의 아이러니.
  • 특이하게도 박찬호는 선수 시절 내내 미국 영주권이 없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구단의 협조까지 받아가면서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메이저리거라는 신분이 보장되는 확실한 직업이 있어서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 딸 수 있다. 그런데 박찬호는 어차피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끝낼 것이기 때문에 영주권을 따지 않았다는 식의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지만 정말인지 불분명했으나 어쨌든 이 때문에 계약이 새로 갱신될 때마다 노동비자를 새로 발급받는 불편함을 감수했다.
  • 뉴욕 양키스의 투수 조바 체임벌린이 위에 나온 박찬호의 폭풍설사 인터뷰를 듣고 폭소했다. 사실 당시 양키스 선수치고 이 영상을 안 본 선수가 없고 안 웃은 선수가 없는 지경이니 조바는 "박찬호는 오랜 시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난 투수였다. 어렸을 때 나는 박찬호의 투구를 자주 봤다. 그의 팬으로 나는 성장했다. 그런데 이제 같은 팀 불펜에서 선수생활을 한다는 것이 기쁘다"라고 말했다.
  • 해외야구 갤러리에선 박찬빈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정확하게는 찬빈님 or 챈빈님이라 불리며 숭배되고 있다.[78] 박찬호의 등판 때마다 갤은 페이지가 쉽게쉽게 넘어가며, 상대 팀에서 박찬호에게 좋은 타격을 한 선수나 삽질을 하는 한화 선수는 매국노 소리를 듣게 되고, 삽질을 하는 상대 선수는 애국자로 칭송받는다. 갤러리에서는 허구헌날 IMF 때의 채무 의식을 되새기라면서 찬빈님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그런데, 처음 찬빈 얘기가 나왔을 땐 정말로 박찬호한테 호의적인 분위기도 없진 않았으나, 은퇴한 뒤엔 찬빈이란 별명은 남았지만 원래 맹렬한 박찬호 까이던 해야갤의 특유한 분위기와 섞여 찬빈님이라 불리긴 하는데, 한만두, 볼질, 먹튀, 위의 설사 얘기 등을 갖고 허구헌날 놀림 받는 신세가 됐다.
  • 지누션의 두 멤버와 친구사이다. 박찬호가 마이너메이저를 오가던 시절 LA로 가면 자주 만났던 친구들이라고 한다. 2001년에 박찬호는 등장음악으로 지누션의 A-Yo!를 쓰기도 했다. 요즘은 서로 왕래가 뜸한 편이긴 하지만 예전에 지누션이 가지고 있던 의류브랜드 MF(메이저 플레이버)의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 2016년부터 MLB 명예의 전당 후보로 오를 수 있는 자격요건을 충족했으나 심사에서 탈락중이라 현재까지 정식후보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 팬서비스를 매우 잘해준다. 사인을 잘해주는 것은 물론 팬과 함께 신나게 만담까지 하는 걸로 유명해 "바쁜 팬의 시간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장난스런 찬양까지 받는다. 다만 처음 부터 잘해줬던 건 아니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에는 지금보다는 잘 안해줬다. 본인 말로도 그땐 건방졌다는 말을 꽤 들었다고. 사람이 바뀌기 시작한 건 텍사스 레인저스에서의 부진 때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 예능에서 이시영에게 운동으로 진 이후 경쟁심을 돋우는 글을 썼다가 여성혐오 문제로 공격받은 적이 있다.# 박찬호를 옹호하는 입장에선 박찬호가 정상급 스포츠 선수 출신이란 특성상 원래 승부욕이 엄청 강하다고 한다. 같은 프로에서 군함에서 다른 군함으로 로프 던지기를 하는 것도 사실 중요한게 아닌데 한 번에 못하자 재도전을 반복하면서 결국 해냈고 어퍼컷 세러모니까지 하면서 좋아했으며, 다른 출연자에게 뒤지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정도로 운동에 관해서는 승부욕이 강하다. 따라서 이시영이 여성이라고 공격한 게 아니라 경쟁심을 발현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반면 비판하는 입장에서 문제삼는 것은 역시 "여자가 아닐 겁니다!" 라는 발언. 아무리 남녀간 신체 차이가 있다지만 이시영과 박찬호는 9살 가량 나이 차이도 있거니와, 박찬호는 2012년 은퇴했고 이시영은 2015년까지 운동하던 사람이다. 자신의 영역에서 노력하며 얼마 전까지 아마추어 운동 선수로 활동하던 사람에게 운동으로 졌다고 삿대질하는 사진을 올리며 "여자가 아닐 것이다, 다시 해보자" 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따라서는 불쾌할 수 있다. 물론 상식적으로 이시영이 여자인 것을 모를 리가 없으니, 탈여성급 신체능력이라는 칭찬 반, 승부욕 반인 발언이다. 그리고 아무리 여성 운동선수라도 일반인 남자보다 신체능력이 떨어질 정도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남녀의 신체능력 차이는 월등하다. 실제로 여성 상위 7%가 남성 하위 7%와 근력이 비슷한 수준. 20대 여성이 60대 남성보다 운동능력이 떨어지는데 전세계 운동능력 상위 0.1%에 해당했던, 은퇴한지 10년도 안 지난 박찬호에게는 이시영이 아니라 더한 사람이 와도 박찬호가 이기는 것이 정상인 것.[79][80]

그래도 이로 인해 당사자 간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닌 듯하다. 이시영은 "박찬호가 못 다한 승부가 있으니 재입대를 하자고 하더라. 가끔 운동하고 있는 동영상을 보내기도 한다"# 라며 웃어 넘겼고, 이후 박찬호는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하며 이시영을 다음 주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 단월드 쪽과 연관이 있는 듯 하다. #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육체,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빠진 듯하다. 단월드 홍보물에도 박찬호 이름이 종종 들어가곤 했다. 박찬호의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가 신비주의에 빠진 박찬호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메이저리거 재활 경험이 없는 한의사와 '자칭 척추 전문가'를 언급하며, '허리 부상을 1류가 아닌 사람들에게 치료받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고 언급했는데 아마도 후자가 단월드일 가능성이 높다. 2018년에도 도복 입고 절체조니 명상이니 말하는 거 보면 아직도 빠져있는 듯.
  • 1997~1998년 본격적으로 잘 나갈 때 한국에 귀국해서 휴가를 보내다 급전이 필요해[81] 은행에 대출신청을 하려다 은행서 담당자가 다저스 구단에서 증명서류 다 떼오라는 등 너무 깐깐하게 굴어서 꽤 고생했던 적이 있다. 결국 어찌 처리하기는 했는데 그걸로 빡돈 박찬호가 그 은행과 거래를 다 끊고 다른 은행에 계좌를 뚫었다.
  • 어렸을 때 박찬호가 살았던 집은 지금 박찬호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2021년 KBS2의 예능 프로그램인 '축구 야구 말구'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5.4. 가족


부인 박리혜는 아버지가 일본 부동산 재벌 박충서다.[82] 이와 관련 거짓 소문으로는, 그가 박찬호에 대해서 "우리 사위가 야구하느라 돈은 별로(!) 못 벌었지만 사람은 좋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치로의 WBC 당시 발언이나, 2002 월드컵 당시 토티의 발언이 의도와 다르게 변질되어 한국 사회에 퍼진 것을 보면, 이 발언도 비슷한 기레기의 소행이 아닐까 싶을 정도. 이미 스포츠 신문이나 가십거리를 다루는 케이블 프로그램 등에 저런 말을 인터뷰에서 했다고 나오는데 해당 인터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박찬호가 장인이랑 비슷하게 벌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건 아니고 실제로 박찬호보다 장인이 부자는 맞다. 국내 기사에 따르면 장인도 야구를 좋아했다고 하니, 최소한 박찬호가 번 돈의 규모를 모를 리 없으며 일본 사회에서 프로야구 선수가 가지는 위상은 한국 사회에서보다 훨씬 대단하다. 그들보다 더 대단한 大리그(일본에선 메이저리그를 이렇게 부른다)에서 장기간 활약한 박찬호를 장인이 폄훼할 이유는 없다. 참고로 박찬호는 연봉으로 번 돈도 많지만 여기저기 산 건물들도 있는데 그 건물의 시세도 오르고, 임대료로 알차게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이 소문 자체는 워낙 많이 퍼지다 보니, 박찬호의 팬들조차 농담 삼아 말하기도 할 정도다.
부인인 박리혜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 요리사이며, CJ의 요리 전문 케이블 채널 O'live에서 홈메이드 쿡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부인이 요리사라는 사실을 두고 DC인사이드 야구갤러들은 박찬호 선발 경기에서 특별한 활약을 보이는 선수(박찬호의 선발승을 위해 적시타나 홈런을 치거나 호수비 등을 하는 팀원이나, 결정적 에러로 상대방 팀 분위기를 일순에 꺾는 상대 팀원)를 '박사장 회식 초청자 명단'에 추가하기도.
부인이 재일교포 2세이기 때문에 한국어 실력이 영 좋지 않다고 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일본어로 된 라벨링이 많이 나왔으며, 잘못 적은 한국어 라벨링도 보였다.[83] 맵고 짠 음식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듯하며, 박찬호도 현 시점에선 그 입맛에 길들여진 듯. 아내가 풀코스로 요리하는 걸 선호하는지라 러시아워인 아침밥 시간에는 싸움도 벌어진다고. 박찬호의 냉부 출연 이후 부인을 냉부의 스페셜 셰프로 등판시키기도 했다.
여담으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KLPGA에서 활약하던 프로골퍼 박현순이 박찬호의 사촌누나다.
KBS2 '축구 야구 말구'에 그의 사촌 동생인 박현용씨가 출연하였다. 고깃집을 운영중이며 단골. 한의사 경력자다.

5.5. 작품 속 박찬호


1990년대 당시 아시아선수가 드물었던 메이저리그에서 노모 히데오와 함께 아시아 선수를 대표했으며 더불어 두자리 승수의 실력까지 겸비해서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만화 메이저에서는 본명이 아닌 '안종권'이라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한국팀 에이스의 모티브로 나왔으며, 일본 작품 답게 한국팀과 안종빈이 비열하게 나온다.[84] 그 바람에 여태까지 쌓아온 메이저의 이미지가 한국에서 완전히 꺾이게 되어버려서 지금은 이제 듣보잡이 되어버렸다.
김성모의 만화 스터프 166km에서는 박찬화라는 2차 창작 비슷한 캐릭터가 나오는데, 셰필드의 '박찬화에게 전해, 난 영원한 도우미라고!'라는 명대사가 유명하다. 그리고 이는 클로저 이상용에서 3차 창작으로 이어진다.

5.6. 자서전


  • “나의 꿈 나의 도전 박찬호”
초판 인쇄일이 1996년 12월 15일이다. 겨우 만 23세. 박찬호가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요인이 IMF로 한참 힘든 한국인에게 희망을 줬다는 것인데, 1996년은 IMF는커녕 박찬호가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고생하고 막 메이저리그로 올라온 시점이다. 책 내용도 1996년 4월 7일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첫승을 거둔 부분에서 끝난다. 즉, 이 책의 내용은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성공기가 아니라,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기인 것이다. 때문에 박찬호가 승승장구 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 어린시절, 공주고와 한양대학교 시절, 마이너리그때 힘들었던 일 등이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 특히 박찬호의 마이너리그 경험담과 메이저리그 도전이 당시 국내에는 워낙 생소했기 때문에 잘 팔린 편이다. 요즘에야 워낙 메이저리거가 늘어났고 인터넷이 발달하여 마이너리그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PC통신 시대였던 만큼 마이너리그에 대해서 개인 팬이 정보를 얻기는 정말 힘들었다. 당장 현업인인 자신도 마이너리그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던 상황에서 강등된 박찬호는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았고, 책에서 이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게 된다.
박찬호는 대망의 메이저리그 1승을 달성하고 나서 이 책의 초고를 완성했지만, 탈고를 마친 시점에서는 이미 10경기 출전에 5승이라는 전적을 올리고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채 시즌을 마무리한 상황이었다. 메이저리그 투수로서 올라서기 위한 중요한 기점들을 다 거치고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쯤 되면 책 한권 써도 되겠다 싶었을 것이다. 아직 리즈 시절이 오기 전 도전정신에 가득차 있던 시기의 박찬호를 알기 가장 좋은 책이다.
그리고 선구자, 개척자의 이미지와 국민적인 영웅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뭔가 '위인 박찬호'라는 느낌에 종종 '투수'라는 것을 잊게 되는데 이 책의 내용을 읽고 있으면 박찬호도 빼박 투수구나라는 어쩌면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즉, 그 정도로 투수라는 포지션에서 어떤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가, 투수는 어떤 플레이를 해야 하는가 등의 본인의 투수론이 잘 드러나 있어 투수 박찬호를 느낄 수 있다.

5.7. 투 머치 토커




6. 주요기록



6.1. 좋은 기록들


  •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입단. 그 해에 NL에서 두번째로 어린 선수였음 (만 21세)[85]
  • 1997년~2001년 5년 연속으로 13승 이상 기록
  •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드림팀 I) 소속으로 금메달 (병역특례)
  • 2000년 18승 10패, 평균자책점 3.27, 226이닝 기록, 다승 NL 5위
  • 2000년 피안타율 6.89개 - NL 1위 (다만 피출루율은 NL 10위권 밖)
  • 2000년 삼진 217개 - NL 2위
  • 2000~2001시즌에 걸쳐 34이닝 연속 무실점 피칭.[86]
  • 2001년 35경기 선발 출전 - NL 1위 (15승 11패, 평균자책점 3.50, 234이닝)[87]
  • 2001년 올스타전 출전
  • 2001년 234이닝 & 삼진 218개 - NL 3위[88]
  • 통산 국제대회 성적 2승 3세이브 26⅔이닝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0.68[89]
  • 2009년 월드 시리즈에 4경기 3⅓이닝 등판해서 평균자책점 0 기록
  • 통산 홈런 총 3회 기록[90]
  • 2010년 9월 13일까지 메이저리그 통산 123승 97패, 노모와 더불어 아시아 최다승 타이기록.
  • 2010년 10월 2일 124승 98패로 아시아 최다승 달성

6.2. 영 좋지 않은 기록들


  • 1999년 한 시즌 피만루홈런 4개 허용(한만두 포함). 단일시즌 1위 기록이다.
    • 1999년 4월 23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홈경기에서 세인트루이스의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한 이닝 만루홈런 2회 허용.
    • 나머지 두 홈런은 1999년 4월 12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원정경기에서 트래비스 리, 6월 5일 애너하임 에인절스와의 홈경기에서 맷 월백 등에게 허용한 만루홈런.
      • 특히 1999년 6월 5일 애너하임과의 경기에서 상대 선발투수 팀 벨처에게 그 유명한 이단옆차기를 시전,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켜 퇴장당했다.[91] 웃긴 건 그 날 팀 벨처 역시 6회 데본 화이트에게 만루홈런을 맞았다. 공교롭게 박찬호, 팀 벨처 모두 만루포를 맞았다.
2006년 샌디에고전에서 1이닝 3루타 2개를 맞았다. 이는 메이저리그 역대 타이 기록이다.
  • 2000년 124 볼넷으로 NL 볼넷 2위. 그런데 볼넷 1위인 당시 샌디에이고의 맷 클레멘트와는 단 1개 차이다.
[image]
[image]
  • 2001년 올스타전에서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맞았다. 다만 칼 립켄 주니어에게 사실상 홈런을 헌납한 것이라고 후에 밝혔다. 영상으로 보면 92마일짜리 직구를 한복판에 던졌다.[92][93]
[image]
  • 2002년 몸에 맞는 공 17개 - AL 1위[94]
여러 모로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기록을 많이 세웠다. 좋은 기록이든 나쁜 기록이든 간에.

6.3. 기타 기록


  • ML 통산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 .228,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 .271
  • 우타자 상대 피홈런 99개, 좌타자 상대 피홈런 131개
  • 데뷔 첫 피홈런: 1994년 4월 14일 브라이언 조던(STL)
  • 마지막 피홈런: 2010년 8월 15일 크리스 존슨(HOU)
  • 박찬호 상대로 타석에서 홈런을 친 투수: 앤디 페티트, C.C.사바시아

7. 어록


"저에게 있어서 야구장은 학교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야구는 제가 선택한 인생 과목이었습니다."

ㅡ 박찬호. 2014년 7월 18일, 올스타전 은퇴식에서.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전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자기 자신을 믿으면 시행착오는 겪을지 모릅니다. (강한 어조로) 그러나 그걸 통해 분명히 성장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제가 절 믿고 이 자리에 섰듯이요.

ㅡ 201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야구의 정신-개척자 상을 수상한 후 인터뷰 中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며 살 겁니다. 그리고 목표를 세울 거에요. 전 목표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봐요. 목표를 향해 오늘과 내일 똑같은 스텝을 밟아 걷는 것. 전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생 최고의 목표가 아닐까 싶어요. 어쩌면 현역시절의 제 목표도 통산 124승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요. 제 가장 큰 목표는 오늘도 내일처럼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거였어요.

매거진S 인터뷰에서


8. 연도별 성적


NPB와 KBO에서는 홀드세이브를 기록한 적이 없다.
MLB 기록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1994
LAD
2
0
0
0
4
0
0
-
0
11.25
5
6
6
2.50
1995
2
1
0
0
4
0
0
-
0
4.50
2
2
7
1.00
1996
48
10
0
0
108⅔
5
5
-
0
3.64
82
75
119
1.41
1997
32
29
2
0
192
14
8
-
0
3.38
149
78
166
1.14
1998
34
34
(5위)
2
0
220⅔
15
9
-
0
3.71
199
108
191
1.34
1999
33
33
0
0
194⅓
13
11
0
0
5.23
208
114
174
1.58
2000
34
34
3
1
226
18
(5위)
10
0
0
3.27
173
136
217
(2위)
1.31
2001
36
35
(1위)
2
1
234
(3위)
15
11
0
0
3.50
183
111
218
(3위)
1.17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2
TEX
25
25
0
0
145⅔
9
8
0
0
5.75
154
95
121
1.59
2003
7
7
0
0
29⅔
1
3
0
0
7.58
34
31
16
1.99
2004
16
16
0
0
95⅔
4
7
0
0
5.46
105
46
63
1.44
2005
20
20
0
0
109⅔
8
5
0
0
5.66
130
60
80
1.68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5
SD
10
9
0
0
45⅔
4
3
0
0
5.91
50
30
33
1.66
2005 시즌 합계
30
29
0
0
155⅓
12
8
0
0
5.74
180
90
113
1.67
2006
SD
24
21
1
1
136⅔
7
7
0
0
4.81
146
54
96
1.39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7
NYM
1
1
0
0
4
0
1
0
0
15.75
6
2
4
2.00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8
LAD
54
5
0
0
95⅓
4
4
5
2
3.40
97
40
79
1.40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09
PHI
45
7
0
0
83⅓
3
3
14
0
4.43
84
38
73
1.40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10
NYY
27
0
0
0
35⅓
2
1
0
0
5.60
40
13
29
1.47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10
PIT
26
0
0
0
28⅓
2
2
1
0
3.49
25
9
23
1.13
2010 시즌 합계
53
0
0
0
63⅔
4
3
1
0
4.66
65
22
52
1.32
<color=#373a3c> MLB 통산(17시즌)
<color=#373a3c> 476
<color=#373a3c> 287
<color=#373a3c> 10
<color=#373a3c> 3
<color=#373a3c> 1993
<color=#373a3c> 124
<color=#373a3c> 98
<color=#373a3c> 20
<color=#373a3c> 2
<color=#373a3c> 4.36
<color=#373a3c> 1872
<color=#373a3c> 1048
<color=#373a3c> 1715
<color=#373a3c> 1.40
NPB 기록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11
오릭스 버팔로즈
7
7
1
0
42
1
5
4.29
44
16
21
1.33
KBO 기록
연도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2012
한화 이글스
23
23
1
0
121
5
10
5.06
134
63
68
1.54
개인 통산
통산
출장
선발
완투
완봉
이닝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WHIP
19시즌
506
316
12
3
2156
130
113
20
2
4.40
2050
1127
1804
1.41
역대 기록(MiLB)
연도

출장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이닝
1994
샌안토니오 미션스(더블 A)
20
5
5
0
0
3.55
91
57
100
101⅓
1995
앨버커키 듀크스(트리플 A)
23
6
6
0
0
4.91
93
76
101
110
2002
오클라호마 레드호크스(트리플 A)
1
0
1
0
0
9.00
9
76
3
3
2003
프리스코 러프라이더스(더블 A)
2
1
0
0
0
2.45
10
3
3
11
2003
오클라호마 레드호크스(트리플 A)
3
3
0
0
0
4.89
27
8
12
18⅓
2004
애리조나 래인저스(루키)
4
1
1
0
0
1.71
15
15
20
21
2004
프리스코 러프라이더스(더블 A)
2
0
2
0
0
8.74
16
5
5
11⅓
2004
호클라호마 레드호커스(트리플 A)
4
0
2
0
0
3.72
21
3
19
19⅓
2007
라운드 락 익스프레스(트리플 A)
9
4
4
0
0
5.57
64
18
49
51⅔
2007
뉴올리언즈 제피어즈(트리플 A)
15
2
10
0
0
6.21
100
27
70
84
2010
스크랜턴 양키스(트리플 A)
1
0
0
0
0
0.00
1
0
2
1
<color=#373a3c> 타격 기록[95]
통산
타석
타수
안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통산
479
430
77
3
27
31
20
155
0.179
0.215
0.240
[1] 음력 1973년 6월 29일[2] 재일한국인 2세이며 일본 중앙토지 부동산 회사 사장 박충서의 딸이다. 참고로 외가는 반남 박씨라고 한다. [3] 박찬호의 세 딸은 모두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출생 당시 부모 중 한명이라도 한국 국적이면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한국 국적을 부여하고 있다.[4] 경영학과 / 명예 졸업[5] MLB시절 키는 188cm이었고, 최근에는 키가 줄어 직접 줄자로 재서 나온 184.5cm으로 보고 있으나, 190에 육박하는양준혁유지태하고 섰을 때 같은 걸로 보아 실제로는 186 이상으로 보인다. 양준혁과 유지태와 선 웬만한 키 180중, 후반대 남자들은 박찬호와 반대로 확연히 작아 보일 때가 많았다.[6] #[7] 선발 투수[8] 초구 던지기 전 / 완투승 / 완봉승[9] 묻지 마라. 욕하지 마라. 찬호는 계속 던진다. 야구와 함께 살아왔다. 나의 과거를 묻지를 마라. 던지고 던진 인생이었다. 후회 없지만 눈물이 난다. 야구를 하면서 난 너를 만났고 사랑을 알았고 꿈을 가졌다...이 생명 다 바쳐 널 위해 던진다. 사나이 한평생 내 사랑 팬을 위해 실패를 해도 욕하지 마라. 찬호의 도전이란다. 박찬호 순정이란다.[10] 1997년 컵스전에서 완투승을 한 박찬호를 보고 당시 컵스의 1루수였던 그레이스가 한국인 기자에게 박찬호의 나이를 물어봤는데 기자가 24살이라고 답하자 한 말이라고 한다. 참고로 최희섭이 은퇴 당시 후배를 위해 길을 비켜주는 마크 그레이스처럼 되고 싶다고 회고한 바있다.[11] 첫 번째는 1963년 난카이 호크스 소속의 신인으로 마이너리그로 유학을 갔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어 얘 뭐냐?"라며 메이저리그로 콜업했던 무라카미 마사노리(村上 雅則). 다만 당시 난카이 호크스에서 "쟤 우리 선수인데 왜 너희가 맘대로 콜업하냐"라며 더 데리고 싶어했던 자이언츠의 요구를 무시하고 일본으로 강제소환(...)하며 메이저리거 경력은 단 2년에 불과했다. 중간계투로 활약하며 54경기 5승 1패 9세이브 3.4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실제로 2년차 때는 45경기(1경기 선발 출전) 4승 1패 8세이브 3.08를 기록하며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12] 단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000-2001시즌에는 속구 구위가 상당 부분 감소한 상태였다.[13] 케빈 브라운 때문에 에이스까지는 차지하지 못 했지만 그래도 다른 중하위권 팀에서는 에이스 노릇해도 이상하지 않은 성적이었다.[14] 21세기에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 위에서 공을 뿌린 첫번째 선수가 되는 것이다.[15] 추신수가 박찬호의 통산 fWAR를 넘었기에 역대 최고의 한국인 메이저리거는 아니다. 박찬호의 투타 통산 fWAR는 22.6(투 20.8 + 타 1.8)이고 추신수는 2018시즌까지 fWAR 34를 기록했다. 또한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 1억 3000만 달러의 계약으로 박찬호의 FA 기록까지 깨뜨렸다. 다만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라는 상징성 측면에서 볼 때 그 위대함을 논할 수는 있을것이다.[16] 아시아 지역으로 범위를 넒혀도 박찬호와 비교할 수 있거나 분명히 뛰어넘었다고 평가할 만한 선발투수는 노모 히데오 뿐이다.[17] 최희섭이 아니다. 박찬호가 선수 초기부터 텍사스로 이적하기 전까지 뛰었던 내셔널 리그에는 투수도 타석에 들어서는 규정이 있다. 그러다 보니 돈트렐 윌리스잭 그레인키처럼 수준급 타격 실력을 뽐내는 투수도 곧잘 등장한다.[18] 당시 한국인들이 국제정세에 어둡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기로 인한 경제성장, 1996년 OECD 가입으로 인해 국민들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었다. 일각에서는 일본을 넘는다고 까지할 정도로 국민들의 자긍심이 높았었다.[19] 당시 골프선수 박세리가 LPGA에서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서 스윙을 하는 투혼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과 박찬호가 "코리안 특급"으로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20] 최전성기인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그의 인기는 거의 스포츠계에서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반까지 가요계 원탑 자리를 차례대로 차지했던 H.O.T., 조성모, god 급의 위상과 비슷할 정도의 인기였다.[21] 지금의 가전제품 판매 및 수리 점포. 전자기기 업체 노릇을 하던 전파사도 있었고, 웬만한 동네에는 개인이 직접 운영하는 전파사가 하나 둘 정도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 거의 사장된 점포 형태이다.[22] 2013년 출연한 무릎팍도사에서 한 발언에 따르면 그 당시 야구부는 라면을 먹을수 있어 그 라면이 먹고 싶어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를 계산해 보면 1982년도인데, 그 시절까지도 라면은 집에서 만만하게 사먹을 물건이 아니었다는 얘기다.[23] 투수 전업 전까지 박찬호는 3루수였는데, 얼마나 잘 했는지 오죽했으면 당시 야구부 감독이 학부모들에게 왜 전향시키냐고 욕을 먹고 경질까지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박찬호의 반대급부로 3루수 전업을 했던 홍원기는 당시 공주중 야구부의 에이스였다.[24] 그 때문인지, 도로명주소 개편 당시 박찬호가 살았던 공주산성 근처 있는 작은 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산성찬호길이 생기기도 했다.[25] 그리고 이 두 친구는 감독까지 하게 된다 같은 팀에서 차례대로 물론 손혁은...[26] 변화구가 땅바닥에 튀자 '피아자는 블로킹을 못해서 항상 2스트라이크 잡고는 직구를 요구했었죠.' 라든가[27] 2002년 한화그룹에 인수된 뒤 2012년 10월 9일부로 사명이 바뀌었다.[28] 이 광고가 나가던 시기 한화 성적현시창이었기에 한화 경기를 보며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을 대비한 고단수 보험 마케팅이라는 드립이 성행했었다.[29] 그리고 미국 진출을 위해 미국으로 온 윤석민도 이날 경기를 보러왔다고 한다. 하지만 둘이 만났다거나 사전에 이곳에 오기로 했다는 걸 알고있던 건 아니었으며, 박찬호는 현장에서 윤석민이 왔다는 걸 기자가 알려줘서 알았다고 말했다. 이날 박찬호와 함께 류현진 경기를 응원한 건 피터 오말리 전 구단주.[30] 박찬호가 고향팀인 한화 이글스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밝혀왔으며 대전에서 은퇴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한국 프로야구의 올스타들이 모이는 올스타전에 은퇴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대전에서 올스타전을 하려면 6년 뒤라.. 대전에서 올스타전은 박찬호의 현역 시절인 2012년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 올스타전 은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한화 이글스에서도 공식 은퇴식 외에도 홈구장인 한밭구장에서 박찬호의 은퇴와 관련된 컨텐츠를 박찬호와 조율하고 있다고 하니 한화 팬이라면 크게 실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31] 다소 졸렬한 일이긴 하지만 아래 이시영의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박찬호의 엄청난 승부욕 때문에 생긴 일로 봐야 할 듯하다. 이미 레전드급 커리어를 쌓고 사실상 은퇴투어 중이던 박찬호 입장에선 까마득한 후배인 오재원을 상대로 신경전을 벌일 필요는 없지만, 경기에 나선 이상 승부욕을 불태우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 입장에서 경쟁자가 부당하게 이득을 본 일(이라고 본인이 착각한 일)해 앙금이 남은 것.[32] 양학선 선수는 카잔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33] 밥 두 끼에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34] YS는 개신교 신자로 장도 당연히 개신교 식인데 절을 했다. 뭐가 문제냐면, 기독교장은 절을 하지 않는다[35] 실제 박찬호는 고등학교 때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밤에 공동묘지에 혼자 가서 방망이질(?)을 하거나(이 일화는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일부러 미팅에 나가는 등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대학 1학년때는 선배였던 구대성이 뻔뻔함을 길러주기 위해 지하철 잡상인을 시키기도 했다고. 그런데 잡상인은 불법이라 현 시점에서 한다면 바로 철도보안관이 승차하여 제재한다.[36] 내가 원하는 것은 선발투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꿈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현실을 이해하고, 그 현실 속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37] 한창때는 그 랜디 존슨보다도 많이 기록해본 적이 있다.[38] 이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메이저리그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은 뒤에는 히스패닉 선수들과 제대로 소통을 하기 위해 스페인어를 추가로 공부했다고 한다.[39] 여기에 슬라이더체인지업이 함께 들어갈 수 있겠으나, 슬라이더마이너리그 시절 통타 당하던 구질이라 이후에는 구사를 자제하다 2008시즌부터야 적극 활용했고, 체인지업은 그가 던질 수 있는 구질 중에서 민감하고도 완성된 시간도 꽤 오래 필요했던 구질이다.[40] 미국 폭스TV 중계방송 당시 아나운서가 박찬호의 투심을 보고 '저런 투심은 플레이스테이션 2에서나 볼 수 있다.'라며 칭찬하기도 하였다.[41] 사실 MLB에서 약물의 시대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베이브 루스가 양의 고환 추출물을 복용했다는 기록이나 미키 맨틀스테로이드 주사를 맞다가 종기가 나서 결장한 사건, 행크 애런암페타민을 복용했다고 밝힌 것 등 약물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는채로 약물 복용이 성행했으며, 미첼 리포트가 터지며 선수들의 금지약물 사용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된 이후에도 약쟁이는 꾸준히 적발되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통상적으로 스테로이드 시대를 일컫는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2007년까지를 일컫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금지약물을 대놓고 복용하는 선수들이 존재하던 시기 자체는 이 때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전 시기는 금지 약물에 대한 생각 자체가 희박했고(암페타민조차 금지 약물이 아니었다.) 이후 시기에는 약을 빨다 걸리면 그대로 철퇴를 맞기 때문에...[42] 박찬호는 2000년 NL bWAR 7위, 2001년 10위를 기록했다. fWAR로는 1998, 2000년은 양 리그 통합 20위대, 2001년은 19위다.[43] 혹자는 텍사스 시절 1선발이었지만 그에 걸맞는 실력을 올리지 못했고, 다저스 시절은 케빈 브라운에 이은 2선발이었으므로 2선발급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딱히 적절한 분석은 아니다. 커트 실링랜디 존슨 다음, 잭 그레인키클레이튼 커쇼 다음 2선발로 나왔다고 해서 이들이 1선발급 투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분석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선수가 1선발급인지 아닌지는 팀에서 1선발로 나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성적을 냈는지로 평가해야 한다.[44] 박찬호의 마이너리그 시절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면 빅리그 선발진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다는 평을 내렸다. '확실한 유망주', '미래의 메이저리그 프런트라인 급 투수'로 평한 부분은 새삼 박찬호가 대단했다는 걸 방증해준다.#[45] 물론 큰 차이가 있긴 하다. 2000 시즌 217K를 잡아내는 위엄을 보였지만 그분은 347K. 다만 이 시즌에 볼넷도 124개로 리그 2위를 기록하여 삼진/볼넷이 1.75였다.[46] 오타니는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생각보다 그렇게 좋지 않다. 경기 시 공의 움직임을 보아도 물론이고, 2018년 성적을 보면 패스트볼 구사율 46.3% 피안타율 .382, 슬라이더 구사율 24.6% 피안타율 .140, 스플리터 구사율 22.4% 피안타율 .036, 커브 구사율 6.6% 피안타율 .000인데 패스트볼의 구속이 MLB 선발 최고 수준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많이 얻어맞는 편이다.[47] 물론 두 선수 모두 각자 리그에서 손꼽히는 슬러브와 포크볼로 재미를 보기는 했다.[48] 하지만 정작 다르빗슈는 자신을 다양한 구질로 타자를 상대하는 유형의 투수로 생각하는 듯 하다.[49] 이미 어금니는 심하게 마모되었다고 한다.[50] 2008년 12월 28일에 방송된 1박 2일에서 밥을 먹기 위해 치아 보조기를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51] 류현진이 KBO 에 있을 때에는 최고의 파워 피처에 컨트롤도 최고의 피네스 피처라 부를 수 있는 완전체였다. 메이저리그로 와서는 양쪽 모두가 정점인 완전체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정교한 제구력과 섬세한 운영이 장점으로 평가받는다.[52] 사실 패스트볼을 포심투심으로 나눈다면 3피치. 그런데 주무기를 패스트볼과 커브로 단순화했을 뿐이지, 다른 구종을 못 던지는 것은 아니었다.[53] 2000년에 2개의 홈런을 날린 후 9년만에 쳐낸 통산 3호 홈런. 세 홈런 다 홈런이 나오기 힘든 구장(1호 다저 스타디움, 2호 퀄컴 스타디움, 3호 돌핀 스타디움(댄 매리노의 집))에서 쳐낸 것도 대단한 기록이다.[54] 박찬호를 투수로 전향 시킨 감독은 당시 학교내에서 수많은 반대의견, 특히 다른 투수들의 학부모의 반대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박찬호를 기어이 투수로 전향 시켰는데, 후에 졸업 이후 이로 인한 말썽으로 인해 감독직에서 해임 당하고, 이후 교편을 잡게 된다. 이 감독은 박찬호 본인이 가장 존경했던 은인이자 스승 중의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참고로 박찬호가 투수로 전향하자, 원래 투수였다가 박찬호의 포지션이었던 3루로 전향한 선수가 바로 홍원기다.[55] 사실 92학번 전체를 이야기해보면 더 많은데 손경수, 정민철, 염종석, 차명주, 전병호, 안병원 그리고 타자로 박재홍, 송지만, 이영우, 김종국 등이 있다.[56] 다만, 토드 헌들리가 다저스의 주전 포수를 보던 1999 시즌에는 채드 크루터 영입 전까지 일시적으로 박찬호의 전담포수를 맡기도 했다.[57] 조인성이 까였던건 투수진과의 불화가 주된 요인이고 그 외에 리드 때문이지 수비 능력 자체는 좋다.[58] 짬이 차면 포수 리드를 따르기보단 포수와 조율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던지는 경향이 많아지기 때문. 이런 점 때문에 신인급 포수는 그 팀의 최고 베테랑 선발의 경기에 주로 투입되곤 한다. 아예 그냥 투수가 리드까지 전담하게 되는 것.[59] 뉴욕 메츠에서 2루수로 뛰다 나중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뛰었던 그 선수 맞다.[60] 류현진또한 이치로를 상대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상대전적은 .667/.667/1.667이다.)[61] 경기의 절반 가량을 책임져야하는 선발 투수가 출루를 했다가 괜히 부상을 당하거나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공수교대를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괜히 병살타 치지 말고 빠르게 아웃을 당하거나 희생 번트를 잘 대는 것을 좋게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2할 이상의 타율을 보여주는 투수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62] 최종 0.268/0.268/0.268 하지만 볼넷 0개에 장타가 없어서 출루율,장타율이 낮았기 때문인지 결국 그해 실버슬러거는 타율은 0.151에 그쳤지만 그해에만 80타석에서 6개의 홈런을 쳐낸 카를로스 잠브라노가 가져갔다.(0.151/0.160/0.397)[63] 참고로 160km/h는 약 99.4MPH다. 다시 말해,설령 100마일 투구 기록이 없다고 해도 박찬호의 말이 그대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64] 다만 금기시라고 하기에는 당대에도 쓰는 선수들은 꽤 있던 편. 최동원이라거나, 박철순이라거나, 조계현이라거나... [65] 박찬호의 고향인 공주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66] 멤버들과 일상적인 통화도 했다고.[67]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던 은지원이 가장 먼저 입수를 함으로서 다른 멤버들은 빼도박도못하고 전원 입수를 하게 되었다.[68] 실제 게임장면은 09분26초부터[69] 이 때 나 PD와 협상하면서 탁구대 맨 끝 선에 걸치면 얻는 혜택이 걸친 사람 1명 빼고 나머지 야외취침,혹은 다 밖에서 취침이였다가 전원 구제로 바뀐 건데, 안 바꿨으면 박찬호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이 밖에서 잘 뻔했다. 참고로 1명 빼고 야외취침을 제안했던 사람은 은지원, 나영석 PD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자 얼빠진 상태로 전원 실내취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텐트 걷자는 자막은 덤. 그래도 1박 2일 역사에 손꼽히는 명장면을 건졌으니 야외취침으로 재미를 뽑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득은 봤다. 이 장면이 조작논란이 생길까봐 앞타자 이수근이 치는 장면부터 노컷으로 한 앵글로만 내보낸건 덤.그러니까 이수근이 갑자기 선에 걸쳤을때의 내기를 제안한 순간부터 실내 취침으로 결정한 것과 박찬호가 진짜로 선에 붙여버린 이 상황이,통째로 조작없이 일어난 실제라는 것.[70] 한국프로야구 최저 연봉이다. 박찬호/2012년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사실상 연봉 0원이다. 한화는 박찬호를 영입하면서 적지 않은 연봉을 준비하였었는데, 박찬호가 오히려 연봉 0원으로 하겠다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규정상 선수에게는 최저연봉은 줘야 하므로, 딱 그만큼만 받은 것. 대신, 한화는 박찬호에게 주려고 했던 6억 원 상당의 금액을 유소년 야구에 사용하라고 기부를 했다. 박찬호 역시 연봉 전액을 같이 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사비를 더 기부하였다고 한다. 사실상 박찬호는 자기 돈을 써가며 KBO에 봉사하면서 뛴 셈. 덤으로 박찬호는 KBO 최저연봉이 이렇게 적은 줄 몰랐다고 언급하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대략 2000이닝을 던지면서 969억을 벌었으며, 이닝당 4,800만원 정도로 계산할 수 있다. 박찬호가 2,400만원을 어떻게 보는지 대충 가늠할 수 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은 5억이 넘는다.[71] 달러와 엔화는 모두 2013년 3월 16일 환율 기준으로, 해당 시절 가치가 반영되지 않았으니 참조만 하길 바란다. 광고 등의 추가 수익도 있으니 오차범위도 생각하시길.[72] '외화벌이'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박찬호를 보기 위한 야구 팬들의 입장료, 한국에서 박찬호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들어간 돈 등등을 제외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메이저 당시 세금은 미국에 낸다. 물론 단순 외화벌이로 국위 선양하는 선수들의 가치를 폄하할 순 없다.[73] 막상 본인은 다른 선수들에게서 나는 치즈 냄새가 더 역겨웠었다고, 그래서 너희들도 니네 몸에서 나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당해보라는 의도였다고 한다.[74] 마늘 항목에 나와있다시피, 알리신은 입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특유의 냄새를 발산한다. 그런데 마늘은 한국 음식의 아이덴티티로 여겨질 만큼 거의 모든 한국 음식에 들어가며, 한국인의 1인당 마늘 소비량은 외국인에 비해 넘사벽 수준이다. 보통 적응하여 느끼지 못하지만, 외국에서 오랜 기간 살다 입국한 사람이나 오신채를 먹지 않는 승려의 경우, 그냥 거리에서조차 약간의 마늘 향을 느낄 정도라고 한다.[75] 치즈냄새도 그렇지만 특히 덩치가 크고 땀이 많이 나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인들 입장에선 아주 심한 암내가 난다.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이들과 땀 흘리면서 운동하는 건 여간 곤욕이 아니다. 근데 반대로 외국인 입장에서 마늘은 안 그래도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인데 마늘 좋아하는 사람도 한국사람처럼 몸에 배어있는 정도로 나면 엄청나게 괴롭다. (치즈 좋아하는 외국인도 백인들 냄새는 괴롭듯이) 이걸 갖고 인종차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식습관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몸에 배어있는 냄새는 진짜 견디기 힘들다.[76] 당시 이런 분위기와 언론을 비판했던 딴지일보의 기사 제목은 '박찬호가 노모를 줘패란 말이냐?'였다.[77] 당시 동인천 인근에는 미림극장, 애관극장 등 오래된 극장들이 많아 옛날식 영화 판넬을 그리는 화백들이 많았다.[78] 한때 박찬호가 부진했을 때 역술인이 이름을 바꿔야한다고 했는데 바꾸면 좋은 이름중 하나가 찬빈이었다.[79]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 남녀 사이에 넘사벽 차이가 있는 건 차별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테니스 여성 올타임 넘버원을 다툴 만한 레전드인 세레나 윌리엄스는 남자 세계랭킹 200위 선수와 성대결을 펼쳐 완패했고, 여자농구에선 마이클 조던급 레전드인 쉐릴 밀러가 남자 하부리그에서 지명된것만 해도 화제가 될 정도다. 한국 여자 국대 축구팀은 남자 고교 축구팀(청대가 아니라 그냥 한 고등학교 팀)과 연습경기를 해도 이길 수가 없고, 여자 복싱 세계 챔피언은 남자 시 5위(세계 5위, 국내 5위가 아니라 한 도시의 5위)와 스파링을 해도 상대가 안 된다. 그나마 차이가 적은 골프에서조차 최강급 여자선수가 남자대회에선 컷오프 통과하냐 마냐를 따질 수준이다. 하다못해 바둑이나 게임도 오래 앉아 집중해야 하는 관계로 평균 체력이 떨어지는 여자는 남자보다 경기력이 더 부족한 편이다. 이렇다보니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하는 여성 선수가 있다 해도 메이저리그는커녕 KBO, 아니 대만 리그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80] 즉, 박찬호는 순수 운동능력만으로 평가하고 있기에 저 말은 "저 녀석 왜 저렇게 잘해?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아냐?" 수준으로 남녀 사이의 운동능력 격차를 뛰어넘을 정도로 이시영이 뛰어나다는, 칭찬이 포함된 징징이다. 아마추어 상대로 저러는 박찬호의 승부욕이 과하다고 하면 모를까, 저걸 갖고 성차별 운운하는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81] 당시 자기 월급을 꼬박꼬박 한국 가족한테 송금한터라 박찬호 자신한테는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82] 여담이지만 박충서의 아버지 박용구는 개혁 성향의 인물로 조용수의 민족일보 창간에 큰 기여를 한 결정적 후원자였다. 훗날 이와 관련해 시국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박정희로부터 모종의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 이후 박정희가 박용구 대신 선택한 사람이 신격호라는 이야기가 있다. 박용구는 재능 있는 유학생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고 아들 박충서가 이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혁 성향의 박용구가 세운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인물 중 하나가 허문도. 이래저래 박찬호는 한국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집안에 사위로 들어간 셈.[83] 흑마늘을 훅마늘로 적어놨다.[84] 굳이 따지면 한국팀과 이승엽을 모티브로 한 선수가 비열하게 나오는 건 사실이지만 박찬호를 모티브로 한 선수는 비열한 건 아니다. 얼굴이 완전 엑스트라 악역 1 수준인 게 문제지만 작중 취급은 일본팀에게도 크게 인정받는 모습. 경기 내용도 사기캐 토시야에게 허용한 솔로 홈런을 제외하면 실점이 없었고(7이닝 1실점은 확정이나 이후 이닝까지 던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승엽과 달리 비겁한 수를 쓰는 묘사도 없다. 애니에서는 6기에서 한번더 등장, 고로와 맞대결을 펼치는 화가 있다. [85] 가장 어린 선수는 당시 다저스의 동갑내기 팀 동료 이스마엘 발데스였다.[86] 애리조나 전 8이닝, 샌디에이고 전 17이닝, 밀워키 전 7이닝, 샌프란시스코 2회 실점까지 무실점 피칭을 펼쳤으며 당시 타고투저시대에 나온 값진 기록, 참고로 ML최고기록은 오렐 허샤이저의 59이닝 무실점[87] 당시 다저스 선발 최다이닝. 2013년 클레이튼 커쇼가 236이닝으로 경신한다.[88] 랜디 존슨은 이닝 2위, 삼진 1위였고 커트 실링은 이닝 1위, 삼진 2위였다.[89] 자책점 2점은 당시 알루미늄 배트가 허용된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허용한 실점이었고 이후 참가한 국제대회에서 13이닝 무실점 3세이브 활약을 펼쳐 합법적 병역브로커의 면모를 보여주었다.[90] 1호 2000년 8월 24일 몬트리올 엑스포스 홈경기(허용 투수 하비에르 바스케스), 2호 2000년 9월 30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원정경기(허용 투수 우디 윌리엄스), 3호 2009년 4월 25일 플로리다 말린스 원정경기(허용 투수 크리스 볼스태드). 재미있게도 세 홈런 모두 투수에게 극도로 유리한 구장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홈런을 달성한 경기와 얽힌 사연도 있는데, 1호 홈런 경기가 있던 날 경기 전 행사로 당시 유학중이던 가수 양파다저 스타디움에 공식 초청되어 미국 국가를 불렀고, 2호 홈런 경기는 박찬호의 프로 첫 완봉승 경기였다.[91] 사실 옆으로 안 차고 돌려차기했다고 밝혔다.[92] 레전드에 대한 예우라고 할 수 있는것이 이 당시 주니어는 자신의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 상태였고 따라서 레전드 선수의 마지막 올스타전이 된 것이었다. 현지에서도 다들 박찬호가 이 홈런을 선물한 것으로 생각했고[93] 민훈기 기자의 저서 메이저리그 124승의 신화 박찬호에 따르면 박찬호는 올스타전 2일전에도 모두가 큰 한방을 노리고 있을테니 변화구의 효과가 클것이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고,올스타전 이후 사석에서도 "변화구로 승부를 시작할 예정이었다.분명히 직구를 노리고 있을 테니 커브를 던지면 헛스윙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물론 고의 홈런은 투수도 타자도 불가능에 가까운일이지만 어느정도 쉬운 공을 던져줄수는 있다.아마 립켄을 맞이한 순간 노장에 대한 예우로 마음을 바꾼 것 같다.[94] 참고로 양대리그 연속 힛바이피치 기록 1위는 박찬호가 최초이고 심지어 2002년은 145.2이닝 소화로 규정이닝 미달이었다.[95] 투수치고는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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