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진

 


'''노장진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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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2'''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2'''

[image] '''1992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s-2 MVP'''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28번'''
김대중(1989~1992)

'''노장진(1993)'''

신재웅(1995~2002)
'''한화 이글스 등번호 30번'''
김일혁(1992~1993)

'''노장진(1997~1998)'''

예상효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4번'''
성준(1986 ~ 1998)

'''노장진(1999)'''

훌리오 프랑코(200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8번'''
변대수(1997~1999)

'''노장진(2000~2004)'''

박석진(2004)
<color=#373a3c>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9번'''
박석진(1997~2004)

'''노장진(2004)'''

이왕기(2005~2006)
<color=#373a3c>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8번'''
박현승(1999~2004)

'''노장진(2005~2006)'''

옥기윤


'''이름'''
노장진(盧長震 / Jang-Jin Noh)
'''생년월일'''
1974년 8월 10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충청남도 공주시
'''학력'''
공주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3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빙그레)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1993, 1997~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4)
롯데 자이언츠 (2004~2006)
'''가족'''
부인 김태백[1],아들 노학준
1. 소개
2. 프로 시절
3. 은퇴 후
4. 기타
5. 연도별 성적


1. 소개


KBO 리그 선수. 현역 시절 등번호는 28번 - 14번 - 18번.
오승환이 나타나기 이전의 원조 돌직구였다. 묵직한 직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평균 140km대 중반, 최고 155km의 엄청난 속구를 팡팡 뿌려대었다. 게다가 중계화면으로 보면 공이 살짝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수직 무브먼트도 대단했다. 요즘처럼 회전수나 궤적 분석이 가능한 시대였다면 최강 직구 이야기에 반드시 등장했을 선수. 슬라이더와 커브도 준수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내구성도 대단해서 사생활 문제, 현역 군복무등 기량이 떨어질만한 사태가 계속 벌어졌음에도 강제 은퇴 직전까지도 140km대의 직구를 계속 뿌려대었다. 물론 선수 생활 말기에 제구력이 많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는데 훈련 부족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2]
하지만 임선동과 함께 프로야구계의 '''풍운아'''로 더 유명한데, 그 사람 좋다는 류중일이 노장진의 행패를 보다 못해 손을 댄 적도 있었다. 자세한건 류중일#s-6의 기타 문단 참고.
박찬호의 공주고등학교 1년 후배이다.

2. 프로 시절



2.1. 빙그레-한화 이글스 시절


[image]
그의 프로 데뷔이자 빙그레 이글스의 마지막 해였던 1993년 시즌[3]의 모습. (출처 : 포토로)
[image]
임의탈퇴 이후 4년만에 다시 돌아온 한화 이글스의 현역 선수 시절 (출처 : 포토로)
공주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인 1992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선린상고를 상대로 승리투수(4:0 승), 그것도 노히트노런을 달성하여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4] 이듬해인 1993년 1월 원광대학교 합숙훈련 도중 뛰쳐나와 계약금 4천만원의 조건으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것도 이러한 활약에 따른 기대를 반영했던 것이었다.
1993년 빙그레 이글스에서 데뷔하여 그 해 100이닝 3승 10패 평균자책점 4.41로 공주고 시절보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놀기 좋아하는 성격과 지속적으로 선수단을 이탈하는 등 불성실한 생활 태도로 인해 1994년 초 임의탈퇴 공시되었고, 현역으로 입대하여 '''유격 조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군 복무를 마친 1997년 임의탈퇴가 해제되어 한화 이글스에 복귀했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1998년 말 최익성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어 고향 팀 한화를 떠나게 되었다.
여담으로 노장진 트레이드는 현장에서 반대했음에도 프런트의 독단으로 이루어졌다. 이남헌 사장이 최익성을 좋아해서 현장의 반대를 물리치고 강행한 것. 당시엔 프런트의 힘이 강했던지라[5] 이희수 감독은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애를 왜 트레이드시키냐고 반발했지만 막지 못했다.[6]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image]
(출처 : 포토로)
[image]
[image]
1999년 최익성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었고, 트레이드된 첫 해인 1999년 188⅓이닝 15승 9패 평균자책점 4.35로, 1999년은 타고투저가 극심했던 해였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삼성의 선발 에이스로 쏠쏠히 활약하며 잠재력을 대폭발시키며 한화 시절 사고뭉치 만년 유망주 이미지를 벗어나며 환골탈태하였고, 1999년의 노장진은 그야말로 구위 더 좋은 우완 차우찬. 사사구로 주자는 열심히 쌓지만 구위의 힘으로 실점은 최소화하는 타입이었다. 단적인 예로 2002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7회말 무사 만루를 막아낸 것이 있다. 그리고 당시 삼성은 이승엽, 찰스 스미스, 김기태 셋이 합쳐서 122홈런을 치는 클린업 트리오를 보유하고 있었고, 1루 이승엽 - 2루 정경배 - 3루 김한수 - 유격 김태균으로 구성된 철벽 내야진이 있었기에 100사사구의 제구력으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임창용이 2001년 선발로 전향한 뒤 마무리 자리에 공백이 생기자,[7] 2002년부터 팀의 마무리로 자리잡았고, 63경기에 출장해 127⅓이닝 11승 4패 23세이브 평균자책점 2.54로 활약하였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멤버와 삼성 라이온즈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 활약하며 프로 데뷔 처음이자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그러나 2002년 중무리 투수[8]이라는 무지막지한 혹사를 당했던 탓인지, 이듬해인 2003년에는 9승 10패 21세이브 평균자책점 '''4.12'''로 구원투수로 시즌 10패를 찍는 등 전년도에 비해 상당히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마무리에서 부진을 보이자, 이듬해 임창용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주고 다시 선발로 전향하게 된다.
그러나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환하였던 2004년에는 시즌 초부터 다시 잡음에 휘말렸다. 그 해 4월 7일 고지행과 함께 음주 사건으로 원정 숙소에서 '''무단 이탈'''하여 크게 물의를 빚었다.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밤새 술 마시고 새벽 6시에 들어오다가 산책 중이던 김응용 감독에게 걸렸다고 한다. 당시 자체벌금 300만 원으로 비공개로 결정했는데, 노장진이 1주일 동안 무단 이탈하면서 기자들도 알게 되어 파문이 커졌다고 한다. 그때 신인시절의 '''안지만'''도 옆에 있었는데 다행히 도망가서 징계를 면했다고 스스로 박명환야구TV에서 밝혔다.
결국 또 무단이탈이 원인이 되어 2004년 7월 12일 김승관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어 삼성과의 마지막을 좋지 못하게 끝내고 말았다. 이 때 그와 같이 이탈하였던 고지행은 2004 시즌 후 방출당했고 한화 이글스로 갔다. 그의 트레이드 상대는 김대익박석진이었다. 여러가지로 보면, 양쪽 모두 손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9]

2.3. 롯데 자이언츠 시절


[image]
말년을 보냈던 롯데 자이언츠의 현역 선수시절
트레이드 이후엔 잠시나마 정신차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롯데의 솔리드한 마무리로 활약한다. 팀 창단 이래 현재까지도 마무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롯데는 그가 활약했던 2004년 말~2005년 초까지 잠시나마 마무리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손승락 이전에 롯데에서 가장 뛰어났던 마무리 투수. 그러나 2005년 시즌 도중에 부인이 사망했고[10] 2006년 시즌 개막 전 윤학길 당시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긴 후 또 다시 팀을 '''무단 이탈'''하여 징계를 받고 복귀했다. 2006 시즌을 마치고 FA를 선언했으나 그가 무단 이탈한 전력 등 강하게 이미지가 남은 사생활 문제 때문에 롯데를 포함하여 다른 팀들과 계약하지 못해 FA 미아가 되어 은퇴하고 만다.

3. 은퇴 후


빙그레 입단 시절 한솥밥을 먹은 바 있는 장정순 세한대학교 감독의 부름을 받아 세한대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장정순 감독이 청주고 감독으로 옮길 때 따라가지 않았다. 2016년에는 부산에서 노장진의 야구교실을 운영했다가, 한때 야구 외에 삼성중공업 협력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지금은 부산 신정중학교 야구부 코치로 야구인으로서의 인생을 다시 살고 있는 중이다.[11]

4. 기타


  • 사생활 문제로 말썽이 많았던 선수로 이와 같은 일이 없었으면 흑역사가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라는 건 결국 자기 관리와 절제가 필요한 것이라 결국 그 사적 문제를 참지 못하고 잦은 무단이탈을 한 것이 결국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잡음 많았던 선수로 기억된 것이다. 이 문서에서도 노장진의 투구 이야기보단 사생활로 인한 무단 이탈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는 걸 보면...
  • 선수 시절 무단이탈 등의 행보 때문에, 당시 수비코치인 류중일에게 혼났다. 류중일의 회고에 의하면 자기는 선수에게 손을 안 대는(때리지 않는) 스타일인데 선수 코치 생활 통틀어 때린 사람이 딱 2명, 노장진과 김진웅이었다고 하니 알 만하다. 제 버릇을 못고쳤고 결국은 FA미아가 되어 은퇴했으니 선수 본인이 문제였던 셈.
  • 2011년 1월 24일 200km/h로 광란의 폭주를 한 혐의로 입건되었다.
  • 야갤 등에서 불리는 별명은 노잦이(...)다. 은퇴 후 한 번씩 언급될 때마다 역시 불린다.
  • 살려조의 여파로 다시 알려진 사실은 2002년불펜 2천구 투구가 있다.
  • KIA 타이거즈 투수 김진우가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무단이탈 사건을 터뜨렸을 당시, 노장진과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돌며 후배를 버려놨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는 루머로, 김진우와 안면이 있긴 하지만 두어번 정도 만난 게 전부라고 한다. 여담으로 이 둘을 소개시켜준 사람이 전 LG, 기아 투수였던 장문석.
  • 아들인 노학준도 야구선수다. 2016년 새로 창단한 물금고등학교 야구부에 진학해 외야수 겸 투수로 뛰었다. 경주중학교를 나왔기에 NC 다이노스의 2019년 1차 지명 대상은 아니었으며, 결국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 못하고 질롱 코리아 창단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대학도 못 붙은 듯. 질롱 코리아에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하자 메이저리그 팀의 러브콜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나왔지만 이것이 정말로 관심이 있어서인지 단순한 립서비스일 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교 졸업 예정 선수들의 육성선수 입단이 막힌데다가 뒤늦게 대학으로 발을 돌린다고 해도 하위권 대학이나 2년제 대학 정도만 가능할 것으로 보이기에 그나마 가능한 선택지는 국내 독립리그행 아니면 마이너리그행 정도다. 결국 연천 미라클을 거쳐, 2019년 8월 29일 NC 다이노스 육성선수로 입단했으나 2020시즌 정규리그 종료 직후 방출되었다.
  • 박명환야구TV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다. 나오는 게스트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보니 더 그렇다. 강병철 감독한테 찍혀 호주에서 이탈한 노장진 찾으러 다닌 정수근이나, 아예 노장진과 술친구였던 오상민, 노장진한테 억지로 어울려 다니다가 운좋게 빠져나간 안지만 등등. 박명환도 신인 때 노장진한테 붙잡혀 강제로 술자리에 합석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5.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3
빙그레
26
100
3
10
3
-
0.231
4.41
88
4
62
93
57
49
1.47
1994
임의탈퇴 및 군복무(유격 조교)
1995
1996
1997
한화
35
133⅓
6
10
0
-
0.375
5.47
124
'''21'''
(2위)
91
81
'''84'''
(5위)
'''81'''
(공동 3위)
1.60
1998
35
149⅓
7
10
0
-
0.412
5.24
150
'''20'''
(공동 2위)
84
104
'''91'''
(3위)
'''87'''
(공동 2위)
1.5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삼성
33
'''188⅓'''
(5위)
'''15'''
(5위)
9
0
-
0.625
4.35
180
17
116
'''173'''
(4위)
'''100'''
(5위)
'''91'''
(5위)
1.50
2000
28
138⅓
11
8
0
0
0.579
4.29
142
15
89
103
72
66
1.65
2001
22
85⅔
7
2
1
1
0.778
4.62
88
10
67
57
47
44
1.74
2002
63
127⅓
11
4
'''23'''
(3위)
1
0.688
2.54
98
15
54
146
38
36
1.19
2003
53
83
9
10
'''21'''
(4위)
1
0.474
4.12
73
8
53
87
40
38
1.46
<color=#373a3c> 연도
<color=#373a3c> 소속팀
<color=#373a3c> 경기수
<color=#373a3c> 이닝
<color=#373a3c> 승
<color=#373a3c> 패
<color=#373a3c> 세
<color=#373a3c> 홀
<color=#373a3c> 승률
<color=#373a3c> ERA
<color=#373a3c> 피안타
<color=#373a3c> 피홈런
<color=#373a3c> 4사구
<color=#373a3c> 탈삼진
<color=#373a3c> 실점
<color=#373a3c> 자책점
<color=#373a3c> WHIP
2004
삼성 / 롯데
34
46
1
0
'''17'''
(4위)
1
1.000
4.11
51
7
30
55
22
21
1.72
2005
롯데
35
33
1
2
'''18'''
(4위)
0
0.333
2.45
19
3
9
52
9
9
0.79
2006
42
48⅓
3
4
6
5
0.429
4.66
44
5
39
32
25
25
1.66
<color=#373a3c> '''KBO 통산'''
(11시즌)
<color=#373a3c> 406
<color=#373a3c> 1132⅔
<color=#373a3c> 74
<color=#373a3c> 70
<color=#373a3c> 89
<color=#373a3c> 9
<color=#373a3c> 0.514
<color=#373a3c> 4.35
<color=#373a3c> 1057
<color=#373a3c> 125
<color=#373a3c> 694
<color=#373a3c> 983
<color=#373a3c> 585
<color=#373a3c> 547
<color=#373a3c> 1.51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3년
1완투
0완봉
1998년
1완투
0완봉
1999년
2완투
1완봉
2000년
1완투
0완봉
<color=#373a3c> '''KBO 통산'''
<color=#373a3c> 5완투
<color=#373a3c> 1완봉
[1] 1974년생으로 2005년에 음독 자살기도를 하고 병원에 후송됐지만 결국 세상을 떠났다.[2] 단 밑의 통산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제구가 그렇게 좋은 선수는 아니였다. 선수 생활 초반과 후반의 방황을 감안하더라도, 좋지않은 제구력을 구위로 버티는 투수인 차우찬보다 적은 이닝을 소화했음에도 사사구는 더 많이 내줬다.[3] 같은 해에 이글스의 레전드 '''구대성'''도 데뷔를 했다.[4] 공주고의 전국대회 3회 우승 중 유일한 청룡기 우승이다. 1977년과 2013년에는 대통령배를 제패했다.[5] 당장 강병철 감독 중도해임이 바로 그해 일이었다.[6]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희수 감독은 최익성이 준수한 활약을 보였음에도 그의 역할을 대타 혹은 2군에만 박아두는 것으로 제한하며 최익성의 선수 생활이 꼬이는 원인을 제공했다.[7] 2001년에는 외국인 투수 벤 리베라가 마무리를 맡았으나, 허리 부상과 개인 사정 등을 이유로 시즌 중 임의탈퇴 처리되었고, 후반기에는 선발 요원이었던 김진웅이 마무리를 맡았다.[8] 아래 기록을 보면 2천구가 와전된 듯하다. 160경기 9이닝 하면 총 1440이닝인데 한 시즌 2천 이닝은 말이 안 되는 것[9] 박석진은 2006년 다시 롯데로 돌아갔고, 김대익 역시 2006년에 은퇴했다. 노장진은 2006년 FA미아가 되어서, 김승관은 리빌딩 차원에서 2007년 방출됐다.[10] 향년 31세, 부부싸움 이후 부인이 음독하여 병원 입원 치료 중 사망했다. 그러나 음독 이전 부부싸움에서의 폭력의 강도에 대한 의문도 있으며, 이는 KBO 홈페이지에 부인 김씨의 가족을 주장하는 자의 글에서 비롯된 것이다.[11] 신정중학교 감독이 전 롯데 투수 박지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