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수 의문사 사건

 



1. 깊은 산속 동굴에서 자살?
2. 간첩혐의로 체포된 남자
3. 의문스런 사건
4. 진상은 무엇인가?


1. 깊은 산속 동굴에서 자살?


1986년 6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시(당시는 여천군) 대미산에 산딸기를 따러 올라간 어느 방위병이 깊은 산속에서 그 전까지 전혀 몰랐던 어두운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을 들여다 본 방위병은 사색이 되었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는 '''한 남성이 거의 알몸인 채로 목을 매 죽어있었다.'''
당시 경찰의 조사로 이 남성은 인천 연안가스 공장에서 가스배달부로 일하던 23살 신호수로 밝혀졌다. 경찰의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결국 결론은 자살이라는 것. 목을 맸고 결심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자기 팔을 벨트로 꽁꽁 묶었으며 소지품을 불태웠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일사천리로 결론을 내린 경찰이 정작 신호수 가족에게 사망사실을 알린 때는 시신이 발견되고 2주나 지난 뒤였다. 게다가 신호수가 실종되었다[1]는 연락을 받고 헤매던 그의 아버지가 소식을 듣고 경찰서에 가보니 이미 시신은 매장해버린 뒤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2. 간첩혐의로 체포된 남자


신호수는 사체로 발견되기 약 열흘 전쯤, 배달을 마치고 공장에 돌아와 일하던 중 '''무전기가 장착된 승용차[2] '''를 타고 나타난 정체불명의 세 남자에게 강제로 끌려갔음을 아버지가 알았다. 아버지의 끈질긴 노력 끝에 그 세 남자는 '''서울시경 대공수사 담당 수사관들'''이었음을 밝혀내었다.
신호수는 방위병으로 복무했었는데, 당시 방위병들은 불온 삐라를 수거해오면 그것으로 포상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신호수는 그만 자취방 장판 밑에 불온 삐라를 모아놓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제대했고, 후에 그 자취방으로 이사 온 사람이 우연히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불온 삐라 때문에 신호수는 간첩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당시 그를 수사한 수사관에 의하면 대공용의 때문에 수사했지만, 불온 삐라를 모은 목적이 포상휴가를 가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불과 몇 시간만에 훈방조치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신호수를 서울역까지 태워주었고, 차비까지 줘서 보내줬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열흘쯤 지나서 신호수는 대미산 동굴 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어디서 뭘 하다가 죽었는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3. 의문스런 사건


당시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자살이라고 일사천리의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연 자살이 맞는지 의문스러운 부분 투성이들이다.
우선 자살장소부터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비록 신호수의 고향이 여수긴 했어도, 시신이 발견된 된 대미산은 '''그의 아버지조차 잘 모르는''' 산이었다. 더욱이 그 산속에 어두운 동굴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신호수의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는 곳을 아들이 알고 자살장소로 택했을 리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실제로 근처 주민들도 잘 모르는 곳이었음을 감안하면 어릴 때만 여수에서 살고 서울로 올라간 신호수가 그 동굴을 알았을 개연성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인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장소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자기 소지품을 불태웠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발견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면 굳이 소지품을 태울 이유가 무엇인가?
또한 신호수의 자살이라는 것도 의문스러운 부분들이 많다. 사건현장은 빛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굴이었는데 당시의 기록 등에 의하면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2.2~2.5 m 정도였다고 한다. 과연 이런 동굴에서 자살을 할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더욱이 줄을 묶은 곳은 오르기도 쉽지 않았고, 불안정하게 돌을 몇 개 올려놓고 그 위에 서서 목을 맨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신호수의 팔은 허리띠로 결박된 채였는데, 당시 경찰은 자살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허리띠는 팔꿈치 쪽에 둘러져 있었는데, 이러면 팔을 높이 들어올릴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순전히 목을 쳐 올려서 끈에 목을 밀어넣고 자살한다니 그 자체로 곡예나 다름없다.
사건 당시의 부검 결과도 모순적인 부분들이 많다고 한다. 한국의 의문사 사건들에 대한 법의학 감정으로 유명한 도쿄의과대학 명예교수 카미야마 자타로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신호수의 시신 상태로 보면 자살이라기 보다는 타살의 정황이 더 많다고 한다. 발목에 상처가 있는데 이는 발목이 결박된 채로 고문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도 신호수씨의 자살은 매우 모순적이다. 외딴 곳에서도 으슥한 곳을 택하고 소지품까지 태울 정도라면 자살을 진지하게 오래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고, 또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자살을 계획해왔다면 자살방법부터 택하고 그 도구와 장소를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정작 자살을 위한 도구는 전혀 준비되지 않고 자기 옷과 허리띠를 이용한 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자살 장소가 실질적으로 신호수가 목을 메기에는 높이가 다소 맞지 않는데, 미리 준비한 자살이라면 이런 장소를 택하지 않거나 다른 발돋움 도구를 준비했어야 앞뒤가 맞다. 자기 흔적을 지우려 함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깨끗하게 죽고 싶다는 심리의 반영인데, 발가벗은 채로, 그것도 상처가 난 채 죽는다는 것도 앞뒤가 안 맞는다.
즉 이 사건은 충동적 자살과 계획적 자살을 암시하는 행태가 동시에 존재하며, 이는 이 사건이 타인에 의해 자살로 위장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3]
당시 부검 기록에도 사소하지만 몇 가지 미스가 분명히 존재한다. 사진상으로도 명백히 보이는 몇몇 상처를 놓쳤음은 물론, 두개골을 톱으로 절단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끌로 절개했다. 이것은 부검을 시행한 사람과 기록한 사람이 다를 가능성을 시사한다.
당시 수사관은 신호수를 훈방조치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에도 허점이 많다. 6월 항쟁 이후 80년대 의문사 사건들이 재부상하면서 신호수 사건도 다시 조명을 받았다. 신호수의 아버지와 당시 야당, 재야인사들의 추적 결과 신호수가 체포된 사건은 소위 ''''장흥공작''''이라는 이름으로 9달에 걸쳐 수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건 당시 경찰에서는 이 소위 장흥공작을 본격적으로 수사하기 전에 신호수의 동료 방위병을 먼저 조사해서 신호수가 삐라를 모은 목적이 단순히 포상휴가를 가기 위해서라는 것을 '''미리 알았음'''도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흥공작으로 상부에 신호수가 불순분자들과 접촉하며 간첩 행위를 하는 것 같으니 수사해야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는 것이다.
더 의문스러운 건 이렇게 9개월이 넘도록 수사한 사안을 가지고 고작 세 시간 정도 조사하고 훈방했다는 것. 이런 설명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또한 당시 수사관은 신호수가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고 해서''' 서울역으로 데려다 주고 차비까지 주었다고 주장했으나, 정작 신호수는 서울역 근처에서 '''중고등학교까지 졸업한[4]'''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지리를 잘 몰랐을까?
또한 당시 수사관과 경찰이 훈방조치의 근거라며 내놓은 것이 신호수가 자필로 작성했다는 각서와 진술서였지만, 이 각서와 진술서의 필적감정이 논란을 일으켰다. 91년 이 사건을 재조사한 검찰은 이 각서와 진술서가 신호수 필적이 맞다고 결론을 내리고 경찰의 훈방조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신호수의 아버지와 재야 쪽에서 사설감정기관 두 곳에 이 각서와 진술서를 그가 연안가스 공장에 입사할 때 낸 자필 원서와 비교한 필적 감정을 의뢰한 결과는 '''신호수의 필적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검찰은 국과수의 필적감정이 정확하고 사설감정기관은 믿을 수 없다며 필적이 맞다고 감정한 국과수의 편을 들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국과수 필적감정 결과가 2014년 재심 끝에 피고가 무죄판결을 받으며 조작 정황이 인정되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호수의 자필각서와 진술서의 필적 감정결과도 과연 정확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4. 진상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의문과 정황적인 근거로 미루어 본다면 신호수를 훈방조치 했다는 당시 경찰과 수사관의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한 가지 기묘한 점은 신호수씨가 죽은 대미산에 있다.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에 위치한 이 산은 지형적으로 볼 때 산세가 험하면서도 바로 해안에 접한 산으로 '''대공방첩의 시점'''에서 보면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침투하거나 접선지로 사용하기 알맞다. 특히 '''근처 주민들도 잘 몰랐다'''는 그 동굴은 그 옆에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운 붉은빛이 감도는 큰 바위가 있어, 간첩이 무인 포스트 방식으로 접선하기에 딱 알맞은 조건을 갖춘 곳으로 보고''' 경찰이 대공수사에 있어 주목하던 지점'''이었다. 과연 이런 곳에서 신호수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등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자살이 아닌 조작된 간첩사건으로 인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법원은 이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타살의 근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2012년 4월 14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그리고 그 당시에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를 3번 하면 특진을 시켜줬으며, 신호수를 연행했던 수사관도 비슷한 사건으로 특진을 했으며, 이런 제도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간 경우가 있었다는 전직 경찰의 인터뷰도 담겨 있다. 법의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타살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1]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조카(신호수의 사촌 여동생)1로부터 "오빠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2] 하얀색 포니 2. 번호판은 가려져 볼수 없었다고.[3] 단순히 자살을 주저한 심경적 변화라고 하기에는 취한 방법이 지나치게 집요하다. 굳이 따지자면 즉흥적 자살로 보이지만, 즉흥적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실패하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를 두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외딴 곳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다는 방법은 즉흥자살설에 치명적이다. 목을 맨다면 자기 집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강요된 자살일 가능성도 있다.[4] 정확히는 근처 학원에서 검정고시를 공부해 고졸학력을 취득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