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병
1. 개요
防衛兵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 국군의 병역제도.
보충역이지만 현재의 사회복무요원과 달리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 신분이었다. 지금의 상근예비역과 신분, 업무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으나, 당시의 현역과 비교하여 출퇴근하고 복무기간이 짧았다는 것[1] 이 큰 차이이다. 이러한 이유로 방위병이라는 이름 말고 "단기 사병"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2]
신규배치는 1994년 12월이 마지막이었고, 방위병의 업무를 신설된 사회복무요원과 상근예비역이 이어받고 이원화되었는데, 그러니까 방위병에서 국가 행정 보조[3] 는 사회복무요원, 국토방위는 상근예비역으로 갈라진 것이며, 참고로 방위병도 오늘날의 사회복무요원과 상근처럼 때때로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폐지 이유 중 하나는 급격한 도시화. 즉, 군부대 인근보다 도시에 대상 자원이 많이 거주한 것이었다. 또한 방위 부대의 전투력은 현역의 30%가량이었다고 한다.
2. 대상
당시 넘쳐나던 병역 대상자[4] 를 처리하기 위한 제도[5][6] 였으며, 현역 대상자들 가운데서도 학력과 급수에 따라 보충역 전환되어 방위병으로 소집되기도 했다.[7] 그리고 조혼이면서 어린 나이에 자녀가 있으면 역시 6개월 방위 대상으로 현역 복무하지 않았다. 특히 군부대가 밀집한 지역에서 사는 경우에 방위병으로 소집될 확률이 높았다. 또한 제주지역의 경우 200km가 넘는 제주 해안 경계 병력 확보를 위해서 많을 때는 한 해에 2000명 이상을 대한민국 해군 제주방어사령부 소속 해군, 해병 방위병으로 빼기도 했었다.
이마저도 넘쳐나면 소집이 계속 유예되다가 소집유예로 면제가 되기도 하였다.[8] 이를 당시 젊은이들은 속칭 '''"서류면제"'''라고 불렀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읍면동사무소 병역계 공무원들이 뇌물을 받거나 자기 관할 거주지의 친인척 혹은 친지들을 고의로 서류 누락시켜 면제자로 만드는 비리를 저지른 경우도 있었다. 어떤 증언으로는 동사무소에서 방위병으로 갈 사람을 모집했다(62년생)고도 한다.
육군 방위의 종류: 6개월 방위(6방, 육군 이병 전역), 12개월 방위(12방, 육군 일병 전역), 18개월 방위(18방, 육군 상병 전역).
상세히 설명하면 6개월 방위는 국가유공자의 후손만 해당되었으며 현재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6개월 사회복무요원 제도와 비슷하다. 또한 12개월 방위는 당시 똥방위로 많이 불렸다. 그리고 18개월 방위는 당시 상병이 생활관의 분대장을 맡았으며 이를 방위분대장이라 하였다(단기사병). 이는 현재 현역 육군병 복무 개월과 같다.
3. 복무
일단 방위병으로 소집되면 주소지에서 가장 가까운 육군 향토사단이나 해공군 부대[9] 에서 간단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10] 가까운 육해공군 및 해병대[11] 산하 부대, 예비군 중대, 예비군 대대나 경찰서에서 비전투병 임무나 시, 군, 구청이나 읍, 면, 주민센터에서 병무행정 보조 업무를 수행했다. 흔히들 전자는 '전투방위', 후자는 '동방위'라 불렸다. 훈련소를 마치고 전투방위로 가느냐 동방위로 가느냐는 군생활의 기로였다. 물론 전투방위도 행정병 등의 보직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군부대에서 군복을 착용하고 짬밥을 먹으면서 [12] 장교와 부사관, 선임들 아래 군기 잡힌 생활을 하는 데 반해, 주민센터에는 민간인(직속 상관은 예비역인 동대장)들과 같이 일하기 때문이다.
후방 향토사단의 경우 간부외 일부 현역 기간병들을 제외한 거의 전원이 방위병으로 편성되었으며 전투방위(기동대, 해안소초 경계병)와 향토방위(위병, 무기고 경계병, 동대행정병, 병무보조병 등)으로 나뉘었다. 줄여서 군방(전투방위), 향방(향토방위)으로 불렸다.
전투방위로는 사단본부 직할의 병참선경비대가 수색대대 역할을 했으며 (예: 31사단의 제 11병참선경비대대, 여수화학공업단지를 방어하던 제 35 병참선경비대대) 각 연대, 대대(예비군훈련도 수행)별로 기동대가 있었으며 충정훈련, 대간첩작전 기동타격 임무를 수행했다. 해안지역의 경우 해안대대가 해안소초경계, 대간첩작전 임무를 수행했으며 방위병이라도 상시 실탄 1기수, 수류탄 2발을 휴대했다. 방위병이 존재하던 군사정권 당시 사단본부 병참선경비대, 연대 기동대, 도시지역 대대 기동대의 경우 대학생, 시민들의 반정부 소요에 대비한 충정훈련의 비중이 컸기에 간부들을 매년 수도방위사령부에 파견하여 최신 충정교육을 이수한 후 병참선경비대와 기동대들에 전파했다. 안면부 철망, 방석복, 충정봉을 착용하고 착검한 상태로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매년 충정훈련 경연대회까지 했기에 사격훈련용 교탄을 행정구역 군소재 대대나 해안대대에 추가로 밀어주고 탄피만 받아오거나 자체 소모사격으로 소진시키는 경우가 잦았다. 초창기에는 체력등급 위주로 전투방위병을 차출했으나 훈련중 사고가 많이 발생하여 나중에는 고졸, 대재의 고학력자 위주로 선발하였다. 수색대대인 병참선경비대의 경우 신교대 교육 마지막 주에 휘장이 붙은 전투복을 입은 주임상사가 각 내무반을 돌며 짧지만 멋있는 군생활을 하고 싶은 훈련병이 있으면 지원하라고 하고 지원자가 없으면 차출하여 학력(대학교재학), 거주지(퇴근 후나 휴일에도 최단시간 내 부대로 출근이 가능하도록), 신체조건, 훈련기록 등을 고려하여 선발해갔다. 이들은 방위병임에도 충정훈련, 사격, 특공무술, 산악행군, 유격훈련, 폭파, 전투수영, 특전사 요원들을 상대로 대침투훈련 등을 받았다.
무기고경계병은 각 부대 내 무기고와 탄약고 경계, 위병소 경계, 부대 외곽 경계 외에 무기고 정비병도 겸했으며 향토방위(향방)병으로 구성되었고 식사가 지급되었다. 예비군 무기고가 경찰 지서에도 있었을 때에는 지서 무기고 경계임무도 수행했다. 대대 PX병도 무기고경계병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동대행정병은 각 동 예비군중대본부에 파견근무를 하는 향토방위병들로 소속은 대대 향방중대 소속이었으며 예비군중대장(대위, 소령으로 예편 후 5급군무사무관 선발시험에 합격한 예비역 장교)과 행정관(하사관 출신으로 7급 군무원 선발시험에 합격한 자이거나 5급 군무사무관 선발제도가 생기기 전 단기로 보병학교 교육을 수료한 후 에비역 소위 계급으로 예비군중대장 임무를 수행하던 자로 80년대에 5급군무사무관 선발고시가 시작된 후 이들의 보조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실제 업무지휘는 이들이 했고 업무처리능력도 더 나았다.)의 지휘를 받았으며 지역예비군 편성 및 훈련을 담당했다. 향방기본훈련, 향방순찰에 지원병력으로 참여하였으며 훈련통지서도 직접 돌렸다. 부대별로 차이는 있지만 매주 수요일 전투체육, 토요일 종교행사에 참여해야 했으며, 예비군 훈련이 없거나 적은 동절기에는 대대로 출퇴근하며 향방집체훈련(이라 하고 내용은 군기교육)을 받았고 하절기에는 모내기, 수해복구 등에 동원되었다. 예비군 중대본부는 동사무소나 파출소와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소속지역예비군 수에 따라 적으면 4~5명에서 많으면 8~9명이 근무하는 행정반과 예비군 타격소대(무술체육관 관장, 사범들로 구성된)용 군장을 보관하는 창고와 내무실을 함께 가지고 있다보니 구타, 얼차려 등 가혹행위가 특히 심했다. 향토방위는 전투방위에 비해 학력이나 신체등급이 낮거나 범죄(집시법 위반 포함)로 검거된 경험이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군에서는 최하위 자원이었다. 무기고경계병과 동대행정병으로 나뉘는 것은 생년월일이 빠른 경우 무기고경계병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복합적이었고 동대행정병들은 대대 군종병의 사고예방을 위한 상담 및 관리 대상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사무소(현 주민센터)나 구청에서 병무담당 공무원과 함께 근무하는 향토방위병이 병무보조병으로 주민들이 항상 보는 그 방위병이며 동사무소, 구청에 1명씩 배정되었다. 웬만한 빽으로는 불가능한 보직이라 동대행정병들은 고사하고 예비군중대장, 심지어 대대장도 건드리기 함든 방위병이었다. 동원훈련 업무를 보는 대신 앞서 서술한 동대행정병들의 과업과 의무들로부터 자유로웠다. 병무보조는 동원예비군이 일찍부터 전산화가 되었기에 학력수준이 높았고 한 명이 소집해제를 해야 새로 한 명이 충원되었다. 속설로는 뒤에 높으신 분들이 계셔서 자대배치 후 대대장님이 일대일로 불러서 근무 잘 하라는 덕담까지 한 후 동사무소로 내려보내다보니 학력 미달, 신체등급 미달, 형사 처벌 등 군내 밑바닥 자원이었던 동대행정병들의 부러움과 질타를 받으면서도 만연했던 가혹행위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청의 경우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사복을 입고 근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속칭 '''방위복'''이라고 불리는 군복을 입었는데, 소속 군이나 시기마다 방위복의 디자인, 착용 여부가 다르다.[13] 육군이 민무늬 작업복을 입던 시기에 이 항목의 사진같은 예비군복과 같은 얼룩무늬 복장을 하기도 했다. 또 운전병의 업무를 맏은 방위병도 있었는데 티코를 운전한 방위병[14] 도 있었다. 1980-1990년대에는 육군 현역과 같은 민무늬 작업복이었고, 현역이 디지털 위장 무늬로 바뀐 이후에도 한도안 민무늬를 입었다.[15] 민무늬 시절엔 야전 상의도 현역 사병과 다른 것이 지급되었으며, 그나마 지역 방위병에겐 지급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가죽 전투화도 훈련소 퇴소 때 1켤레 지급하고 끝. 1년쯤 지나면 낡아서 사제로 사다 써야 했다. 탄띠도 지급하지 않았으며 내복 또한 주지 않아 사제로 써야 했다.[16]
군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근무 시간 외에 군복류를 입고 다닐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근무 시간 중에는 대개 "방위"라고 써붙인 군복을 입었지만 출퇴근시 반드시 사복을 입어야 했고[17] [18] [19] 예외적으로 휴가시에는 군복 착용이 허가되었다. (동네마다 다르다.) 시내가 아닌 외곽 군부대/동원사단 예비군 부대에 그런 경우가 있지만, 군복 (방위복)을 입고 출퇴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휴가중 또는 군부대 근무자라면 기간사병처럼 보일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였지만, 당시엔 사병은 명찰에 영문 성씨 대신 군번을 새기던 육군의 경우 군번의 첫자리를 보면 방위병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방위는 첫자리가 9로 시작. 육군 사병은 1로 시작) 옷 보고 현역인지 방위인지 민간인은 구분을 못 했지만, 사병/방위병끼리는 부대 내에서 멀리서 걸어오는 것만 봐도 알아볼수 있었다. 특히 지역 근무자는 현역과 똑같이 훈련하고 내무반도 있고[20] 각 잡고 생활해야 하는 군부대 근무자와 달리 티가 많이 났었다...
또한 점심식사가 제공되지 않는 읍면동 사무소, 구청 등 관공서 근무자의 경우 도시락을 지참해야 했다. (1987년 이후 군부대 근무자에게는 중식이 제공되고, 지역에서는 식비가 지원되었는데, 그 금액이 적었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따로 구내 식당이 있고 근무 인원이 함께 먹을 자리가 있는 곳이 아니면 그냥 계속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다.)
훈련소 기간이 끝나면 민간인 신분인 사회복무요원과 달리 당시 방위병은 군인 신분이었므로, 원칙적으로는 복무 기간 내에 영리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거의 유일한 예외로, 프로야구 선수들은 퇴근시간 후 '''홈 경기 한정으로''' 프로야구 경기에 출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21] 문제가 되자, 국방부에서 1996년부터는 상근예비역이나 기타 대체 복무자는 홈경기라도 출장할 수 없도록 못을 박았다.# 이 사건으로 직격탄을 맞은 선수가 장승질....
이외에도 이찬진이 현역 입영대상이었으면 한글을 때 맞춰 선보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찬진이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하기 전에 방위병으로 소집되고 방위병 복무 중 퇴근시간 때 한글을 드림엑스(당시 러브리컴퓨터)에 팔았다. [22] 그리고 그것으로 얻은 수입으로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했다는 일화가 있다.#
방위병들도 위수지역이 있었다! 그러니까 수도권에 살았던 방위병들은 서울(주거지역)과 소속 부대가 관할하는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던 셈.[23] 당시엔 시 도 경계 지역마다 군경 합동 검문소가 있어서 헌병이 시내버스든 시외버스든 세우고 올라와 군복 입은 사람, 머리 짧은 사람 신분증을 검사했는데, 휴가증 없이 위수 지역을 벗어나다 걸리면 얄짤없이 영창 신세였다.
소집해제시의 계급은 복무기간마다 다르지만, 보충역 이병, 일병, 상병. 육방(6개월 방위-2대이상 독자, 부선망독자 등)은 이병-일병, 14개월일 때는 상병으로 진급과 동시 소집 해제(→ 대부분 일병으로 소집해제했다. 약 10개월차에 분대장 집체교육을 받고 돌아오면 상병 진급을 하고, 나머지 기간을 보낸 후에 소집 해제했다. 분대장 교육은 지역병은 해당이 없고, 군 부대 전투 병과 방위병이나 지원할수 있었다.), 1986년 1월부터 복무기간이 18개월로 늘어났고, 18개월은 현역과 같은 시기에 상병을 달고, 상병으로 몇 달 근무하고 소집 해제였다. 집체 기본 훈련이 4주라 자대 배치가 이르기 때문에 자대에서 일이병으로 생활하는 기간이 현역보다 길었다. (그렇다고 나중에 자대 배치받은 현역이 선임 방위병에게 존대하거나 경례하는 일은 없었다. 깐깐한 지휘관은 현역이라도 방위병보다 계급이 낮으면 존대하고 경례하라고 지시하는 일은 있었지만. 신분이 달라도 타 부대 사람은 아니고 같은 지휘관(중대장급)의 명령을 받는 처지였으므로, 소속 부대가 다른 사병들에게 하듯 아저씨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주로 상호간 김 일병, 박 상병 등으로 호칭. 물론 고참인 병장이나 하사에게는 님짜를 붙여 줬다.) 현역병이 방위병을 무시하고 하대하는 문화가 전 군에 있었지만, 방위병은 그래도 매일 퇴근할수 있었고 복무 기간이 짧았기에 참고 지내는 형편이었다.
4. 복무 기간
4.1. 일반 방위병 대상자
4.2. 특수한 상황에 놓인 독자
1969년부터 1992년까지는 외아들이며 부모의 다음 상황 3가지 중 하나가 해당되면 신검에서 면제(전시근로역이나 병역면제)가 나오지 않는 이상 '''6개월간''' 방위병으로 복무하는 규정이 있었다. 일명 '''육방'''.
- 2대 독자(아버지가 외아들인 외아들)
- 부선망독자(아버지가 돌아가신 외아들)
- 부모 모두 60세 이상인 외아들
6개월 복무 이후 일병 진급이므로 육방의 전역시 계급은 이병으로 표시되었으나 80년대 후반부터는 일병으로 전역했으며 주민등록의 제대사유는 의가사제대로 표시된다. 아마도 가정환경사유로 인한 조기 전역의 뜻인 듯.
일반적으로 군복무를 하면 100일 지난 날, 절반 꺾인 날, 100일 남은 날들이 의미가 있는데 6개월 방위의 경우는 순서가 반대로 된다. 즉 소집후 3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100일 남은 날이 제일 먼저 오고, 뒤이어 절반 꺾인 날, 마지막에 100일 지난 날이 온다. 육방들은 군 복무기간 중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방위병 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육방은 독립유공자 자 나 참전용사 자손들에 대한 특혜 제도로 남아있다가 사라졌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참전자 중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은 사람의 아들 중 1사람은 6개월 동안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고 병역을 마치는 것. 이 사례로 군복무를 마친 대표적인 인물은 김영광이다.
5. 기타
5.1. 방위 개그
현역에 비해 참 폼 안 나는 병역이라서 90년대 당시 개그물의 단골소재로 등장했다. 북한군이 넘어왔을때 북한에는 있지도 않는 특수부대라 북한애들이 쫄아서 도망간다든가, 동사무소(지금의 주민센터) 옥상에 올라가 방위가 금속 도시락 뚜껑으로 적의 레이더를 교란시킨다든가, 육·해·공·방위가 싸우면 방위가 이긴다거나(지구'''방위'''대) 하는 자잘하고 안습한 개그가 많았다. 최불암 시리즈에도 방위 개그가 있다.[29]
이외에도 방위병을 다룬 개그물인 마지막 방위라는 영화도 있다.'''최불암'''이 오랜만에 국민학교 동창 6명을 만나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군대 이야기가 나왔다.
'''동창 A''': 나는 육군 알보병을 나왔어. 완전군장 행군해봤어? 나보다 힘든 사람은 없을 거야.
'''동창 D''': 나는 공군 운전병을 나왔어. 다들 비행기 운전하는 줄 알고 물어보더라. 매번 설명하느라 힘들었어.
'''동창 B''': 나는 해군 조리병을 나왔어. 임마, 군함 타고 요리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동창 F''': 배부른 소리들 하네. 군대인 듯 군대 아닌 군대 같은 나는 전경을 나왔어. 화염병 맞아봤어?
'''동창 C''': 별것도 아니네. 나는 해병을 나왔어 쨔샤들아, 개미집 파헤쳐서 여왕개미 먹어봤어?
'''동창 E''': 겨우 여왕개미? 나는 '''똥''' 먹고 면제 받았어. 면제 받기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동창 A''': 다들 힘들었구만, 근데 불암아 너는 어디 나왔어?
그러자 방위 출신인 우리 불암이 대답을 하는데
'''최불암''': 나는 UDT를 나왔어
'''동창 C''': 뭐, UDT? 그 힘든 데를 나왔다구? 거짓말!
'''최불암''': 진짠데.. 우리 (U) 동네 (D) 특공대 (T)
그날 이후로 '''최불암'''을 본 사람은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북한이 젤 두려워하는 게 방위였다는 말도 있다. 군인같지 않은 것들이 군복은 입고 있고, 도시락같이 보이면서도 아닐 거 같은 물건은 맨날 들고 다니니 고도의 훈련을 받은 비밀요원으로 착각했다나 뭐라나......
KGB(코리아 지역 방위),SS(쇼트타임 솔저)등등
5.2. 별칭과 속칭
- 6공수
6개월 공수부대 즉, 육방, 6개월 방위를 말한다.[30]
- 월남방위, 월남 스키부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그 때, 방위 생활 했으면서 월남에 간 것마냥 이빨을 까던 방위들이 많아 붙은 별명이다. 당연하지만 방위는 단기사병이기 때문에 해외파병에 절대 갈 수 없다. 꽤나 유래깊은 별명이라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도 나올 정도. 작중 등장인물인 택시기사 '인봉'이 주위에 이빨을 많이 까고 다녔는지 그와 붙어 다니던 용대가 '인봉이 월남 갔다왔다는데요?'라 하자 택시회사 사장이라 직원들 병역 여부를 잘 알던 흥수가 '방위도 월남에 가나?' 라는 드립을 치는 장면이 있다. 당연히 주변은 웃음바다가 된다.
- 방위장교
석사장교가 6개월 복무한다는 공통점에서 위의 육방과 연관되는데 그래서 일각에서는 석사장교를 방위장교라 부른다.
- 정당방위 : 빽 없이 정당하게 방위로 복무했다는 뜻이다.
- 꽃방위
방위를 가리키는 공식 명칭 중 하나이므로 별칭이나 속칭은 아니다.
- 동방불패
- 똥방위(주민센터에서 근무한다는 뜻)
- 송추방위
지금은 전설 속으로 사라졌지만 방위 시절 군복에 공수 휘장을 달고 다니던 무리도 있었다. 강하뿐 아니라 팀 스피리트, 군단합동훈련, 연대, 대대, 중대, 준비태세, 5분대기, 유격, 대침투, 행군 등 수많은 훈련을 받으며 해병도 털어버리는 방위로 유명했다. 당시 전방 부대가 경계나 이런저런 작업 등에 많이 소모되던 것에 비해 이러한 방위부대는 진지공사 등의 주요 작업을 제외하면 밥먹고 훈련만 해대고 집에 안 가기도 다반사였기 때문에 사실 전투기술만으로는 어지간한 부대에 맞먹는 정도였다.[32] 방위병에게 100㎞ 행군을 시키는 유일한 부대(현재 제72보병사단의 전신이다.)가 있었는데, 그 부대가 경기도 양주군의 송추 계곡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별칭. 모든 방위병을 부르는 별칭은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하던 부대이기도 했다. 다만 방위병이 자꾸 힘들다고 징징대면 "이새끼 이거 송추방위인가보다"라며 놀리는 경우는 있었다.
- 아르바이트 솔저
- 위관사병
- 조또방위
1970년대에 어느 방위가 근무끝나고 부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예쁜여자친구와 퇴근하자, 배아픈 현역병들이 뒤에다 대고 "저새끼 방위가 깔치는 삼삼한거 차고 다니네" 하고 놀렸다. 그러자 그여자친구가 확 돌아서더니 "이새끼덜아, X도 방위냐?" 하고 쏘아부치더라. 그때부터 방위들한테 "X또방위" 라는 별칭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5.3. 방위병 출신 유명인
가나다순입니다.
- 기형도
- 김경진[34]
- 김구라
- 김광석
- 김동률
- 김무성
- 김성주
- 김세연
- 김수로(고3 시절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부선망 독자가 되어 방위)
- 김C
- 김우영(정치인 김우영)
- 김진(연기자 김진)
- 김제동
- 김준선
- 김한석[35]
- 나도야: 육방위 출신 사유 3대독자
- 남경필
- 남성진(2대 독자, 진짜 사나이 여군특집 2기에 아내인 김지영이 들어갔는데, 이때 알려졌다.)
- 박광수: 헌병방위 출신. 광수생각 단행본 1권 코멘트에서 밝혔다.
- 박원순: 부선망 독자로 8개월 방위병 복무를 했다.
- 손창민
- 송운석: 단국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부선망독자로 방위병 복무를 했다. 복무지는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군.[36]
- 송일국: 과체중과 안 좋은 시력 때문에 방위병으로 갔다.
- 설운도: 부산 해운대 53사단에서 근무
- 신동엽
- 신해철
- 양용은 - 건설사에 들어갔다가 부상을 입고 방위 복무.
- 엄태웅
- 염종석
- 원유철
- 유용원(유용원의 군사세계 운영자)
- 유재석[38]
- 윤도현
- [39][40]
- 이근갑
- 이대진
- 이승철
- 이완구
- 이종범
- 이정재(평발이라 방위)
- 이종원
- 이찬진
- 임재범
- 임형준: 안 좋은 시력과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아버지 때문에 방위병으로 갔다.
- 저격수해병tv
- 정민철
- 정재호
- 정훈이
- [41]
- 조경규: 시력이 아주 나빠서 방위병이 되었다고 한다. 아내분께서는 어디가서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를 만화로 그렸다(...). 반면 방위병의 실체(...)를 아직 모르는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복무 당시 사진을 보고 멋지다고 했다.
- 조용필
- 차승원: 경기도 금곡 73사단에서 18개월 근무.
- 최민수
- 최현석
- 태진아
- 홍석천
- 홍준표: 일병전역
- 1995년 이전에 데뷔한 상당수의 KBO 선수들
6. 관련 문서
[1] 6개월, 1년, 1년 2개월, 1년 6개월로 신검 등급, 사유나 복무 시절에 따라 달랐다.[2] 80년대 당시, 수방사 예하 일부 향토사단에서는 방위병이란 이름이 놀림감이 되자 "전투병"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썼고, 방위라고 크게 군복에 붙인 표식도 없앴다. 뭐 사회에는 다들 방위라고 불렀고 처우나 위상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지만.[3] 이후 사회복지 보조까지 확대. 정신건강의학과 사유는 사회복지 보조 분야 지원 불가.[4] 1950년대 중반~1960년대 중반생들이 태어나던 시기에 합계출산율이 5-6명대 정도를 기록했고, 60년대 말~70년대 초반생들이 출생했을 시기에 4명대 정도의 출산율을 기록했다. 출산율이 굉장히 높다보니 당시 젊은층 인구가 아주 많았다.[5] 원래 신검 급수와 병역 처분은 당해 병역자원에 따라 유동적이다. 잠깐 2005년에 대학 이상 학력의 신검 4급 대상자를 현역으로 소집했지만 욕만 대차게 먹고 다시 사회복무요원으로 환원한 적도 있으며, 반대로 현역자원이 넘쳐나면(출산율이 높아서 병역자원이 넘쳐나거나 현역병을 많이 유지할 필요가 없어서 현역입영자원이 넘쳐나는 경우에 상관없이) 당장에라도 신검 3급 대상자(고졸학력이거나, 대학 이상 학력도 포함)도 보충역으로 처분해 사회복무요원으로 소집될 가능성도 법적으로는 있다.[6] 이 주석은 반만 맞는다. 당시 기준 원래 3급은 방위복무가 맞다. 90년대 초반 잠시 현역이 넘쳐서 '''2급''' 중 대학생 아닌 고졸이 방위로 복무하던 시대가 있을 뿐. 그런데 당시의 입시제도 때문에 재수생이 양산되었고 재수중 징병검사를 받으면 서류상으로는 대학생 아닌 고졸이였으므로 2급 방위대상이 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 대학진학율은 30% 정도였다.[7] 예를 들면 중졸~대학1급은 현역, 중졸~고퇴 1급은 보충역/혹은 고졸~대학1급은 현역, 중졸~고퇴2급은 보충역/혹은 고졸~대학2급은 현역, 중졸~고졸3급은 보충역/혹은 대학이상3급은 현역, 중졸~대학은3급 보충역 식. 연도별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확실히 기재하기는 어렵다. 확실히 기재한 내용을 보려면 병역판정검사의 병역처분 역사를 참조하면 되는데, 1995년 이전의 보충역이 방위병이다.[8] 현 병역법 상으로도 입영자동연기가 정지된 다음 해부터 3년간 소집이 유예되면 면제된다. 물론 그 3년 동안 병무청이 놀고 있지는 않는다. 현재는 현역병 자원이 징병 계획보다 점점 줄고 있는 상황이라 확률 제로다. 추가로 입영연기와는 상관 없이 병역판정검사 이후 4년째 되는 해의 12월 31일까지 소집하지 않는 경우 5년째 되는 해에 재 병역판정검사를 받아야 한다.[9] 해공군 및 해병대는 신병교육기관이 각 1개씩밖에 없으나, 방위병의 경우는 그냥 이들을 운용한 부대에서 소규모로 자체 훈련했다고 한다.[10] 주로 거주하는 시군구별로 받았다고 한다. 충남 당진군이면 당진군 출신들끼리, 전북 이리시 출신은 이리시 출신들끼리 받는 식.[11] 이와 달리 현 상근예비역은 공군을 제외한 육군, 해군, 해병대에만 존재한다.[12] 그런데 군 부대 방위도 1986년까지는 중식이 지급되지 않아 도시락을 싸들고 다녀야 했다. 1987년부터 부대 근무자는 현역과 같은 중식이, 지역(동사무소 등) 근무자는 식비가 지급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향토방위병의 급여는 연초비(1일 군솔 1갑 지급 기준 100원×한달 일수)+교통비(군전령 1회 버스비 60원을 기준으로한 한달 출퇴근 버스비) 뿐이었다.[13] 해군 방위병, 또는 1985년입소 대상부터는 민무늬 전투복이 지급되었고, 수병들에게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해상병전투복(샘브레이/당가리)과 정복 등은 지급되지 않았다. 공군과 해병대 방위병 또한 정복 대용으로 지급되는 근무복 등이 나오지 않았다.[14] 첨부된 사진만 봐도, 방위병이지만 일반 육군 병들과 동일한 민무늬 작업복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15] 90년대초 2군사령부 예하 방위병들의 사기앙양을 위해 얼룩무늬 전투복 착용이 허용되었으나 지급하지는 않아 단체로 맞춰입어야 했다.[16]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 기준으로 야전상의 및 방상내피의 경우 현역병과 동일한 것이 지급되었고 속옷, 동내의, 양말 모두 현역과 동일한 것이 지급되었다. 향토사단 신병교육대 수료시 전투방위는 여벌의 전투복, 내의, 전투화 등 물품들을 추가지급받아 더플백에 담아서 퇴소했으나, 향토방위의 경우 야전상의 1벌, 방상내피 1벌, 전투복 1벌, 전투화 1켤레 등이 지급되어 퇴소시 야전상의로 임시백을 만들어 지급받은 물품들을 담아서 나가야 했다. 결국 향방의 경우 전투화가 닳게 되면 사제, PX, 전경 기동화, 간부용 전투화 등을 구해서 신어야 했으나 내무검사에 통과해야 했다.[17] 사실 방위병 입장에선 군복을 입고 출퇴근을 하는 것이 편하지만, 군복 입은 무리가 우르르 시내를 돌아다니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18] 하지만 잦은 군기문란의 발생으로 90년대 초에는 출퇴근시 무조건 전투복 착용으로 바뀌었다. [19]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시기에는 방위병은 물론 현역마저도 서울 시내에 나갈 때는 사복을 입도록 하였고, 위장 도색을 하는 군용차 중 일부도 청색이나 회색 단색으로 도색하여 군용차량임을 숨겼다. 당시 군사 정권이 해외에서 오는 많은 외국인에게 길거리에 군인들이 많이 보이면 위화감을 준다는 (실은 군사 정권임이 드러난다는) 이유였다.[20] 물론 군부대 전투방위도 출퇴근은 하지만, 평소 훈련 때와 중식 후 쉴 곳, 향방작계, 혹한기 등 훈련 시에는 철야 근무 해 가며 1주일씩 집에 못 가는 경우가 있어 내무실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런 훈련 기간이 끝나면 부대장 재량으로 하루이틀 휴가를 주곤 했다. 이는 지역 근무자도 마찬가지였는데, 철야하면 꼭 다음날 집에 일찍 보내주거나 휴가를 줘야 한다는 건 아니라 동대장이 안 보내주면 휴가 못 갔다.[21] 당시 소속 부대장의 전화 한 통에 조기 강판당한 일이 있다.[22] 약간 다르지만 오늘날 사회복무요원의 경우 기관장 허가만 있으면 겸직이 가능하다.[23] 그래서 1990년대 초에 서울 송파구에 살았던 방위병들은 퇴근 후 공원에 산책을 가거나 주말에 놀이공원에 가는 것 정도는 허용되었으나, 주말에 서울 시계를 벗어나 과천이나 성남이라도 간다면 엄밀히 말해 위수 지역 이탈이었다.[24] 다만 이때 1년이라는 건 출근한 날을 다 계산해서 1년이란 이야기... 초기에는 일수도 아니고 시간으로 계산해서 2,920시간이었다. 공휴일이나 일요일은 복무기간에 포함이 안 되었었다. 이걸 다시 바꾼 게 복무기간 기준 14개월... 여기에 그 당시에는 비록 오전근무였지만 토요일에도 출근했으므로 토요일 (공휴일과 겹치는 토요일은 제외)도 복무기간에 들어갔다. 월별 복무일수는 차이가 있으나 23~27일이었으며 이 시기 1월의 복무일수는 항상 24일이었고 1월을 제외한 다른 달은 일요일과 공휴일의 개수에 따라 복무일수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나 한 달이 최대 31일이고 한 달에 일요일이 최소 4번 들어가므로 27일을 넘을 수 없었다. 27일인 경우는 31일까지 있는 달에 일요일이 4번 있고 공휴일이 없거나 있어도 모두 일요일에 겹치는 경우였는데, 1969년 5월, 1972~1974년 5월 (당시 5월은 휴일 없는 달이었다.)과 1977년 12월 (당시 크리스마스는 일요일이었으며 12월의 일요일은 4, 11, 18, 25일이었다.)이 여기에 해당했다. 30일인 달은 26일이 최대였는데 1971년과 1976년 6월 (당시 현충일은 일요일), 1970년 4월 (당시 식목일은 일요일), 거의 대부분의 11월이 여기에 해당했다. 설날이 공휴일이 아니었으므로 당시 2월의 근무일수는 23~25일.[25] 이때는 공휴일 포함 14개월이었다. 종전에 매일 일수를 계산하는 것이 번거로우므로 근무일수가 365일이면 공휴일과 일요일을 포함하여 대략 14개월이 되는 것으로 보아 14개월로 정했다는 말이 있었다.[26] 1986년 1월 입소자부터 해당. 재수 없이 이때 걸린 사람은 한 달 전 들어간 전 기수보다 무려 5개월 후에 소집해제가 되었다.[27] 이 시기의 단기사병은 복무기간이 현역병의 1/2을 넘어선다. 당시 해,공군을 제외한 육군 현역 복무기은 3년이 아니라 2년 6개월이었다. 현역보다 1년 짧았던 시기.[28] 대학교에서 교련을 받으면 1년차 이수 후 입대자(문무대 입소 1주 필히 포함)는 10일, 2년차 이수(전방 입소 훈련 1주 필히 포함) 후 입대자는 1개월 일찍 소집해제 해 줬다. 2년차 이수한 현역은 27개월 복무로, 무려 3개월이나 먼저 제대할수 있었다. 감면 혜택 받은 현역 27개월과 만근 방위병 18개월의 차이는 9개월밖에 안 되는데, 멸시, 조롱, 부대 내 차별 대우는 받을 대로 다 받았다. 그나마 몸이 편한 지역 방위는 덜 억울하였으나, 군부대 내의 전투방위는 훈련은 현역과 똑같이 하며 차별은 다 당하던 시절. 그나마 예비 사단은 현역이 주로 행정 업무였고 방위가 전투 훈련 보직이었기 때문에 방위병도 고생한다고 차별을 덜 받았았다.[29] 당연한 얘기지만 실제 최불암은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그것도 원래 외아들이라 안 갈 수 있음에도 일부러 지원을 해서 갔다.[30] 참고로 특전사의 부대 번호는 모두 홀수다.[31] 그러나 실제로는 간부들의 보는 눈이 없어 더 많이 팼다. 군부대는 구타근절이니 하면서 간부들의 점검이 심했지만 소수 파견근무이고 향방예비군 타격소대 장비(방탄헬멧, 캔상태의 미개봉 방독면, 요대, X밴드, 탄입대, 군장배낭, 전투화, PRC-77 무전기, 압박분대,경찰봉 등 군장)를 보관하는 창고가 필수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구타, 얼차려 등 가혹행위가 무척 심했다. 유명 영화 제목에 빗댄 속칭일 뿐이다. [32] 야전훈련이 있는 기간에는 현역병들과 함께 며칠이고 먹고 자며 훈련을 뛰었다고 한다. 훈련이 끝난 뒤에도 훈련 후 부대정비를 당연히 함께 했기 때문에 플러스 알파로 2~3일 정도 집에 못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훈련기간이 끝나고 정리가 다 끝나면 그래도 집에 갈 수도 있고, 의정부나 연신내역 근처에 있는 소주집에서 소주도 한잔 하고 집에 가서 TV도 보고 책도 읽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시말해 군생활의 가장 난제인 내무생활이 없거나 적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33] [34] 저서 데프콘 시리즈의 한일전쟁 편에서 스스로 밝혔다. [35]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 MC대격돌 공포의 쿵쿵따에서 PX 방위병으로 복무했다고 밝혔었다.[36] 당진군의 시 승격은 방위병 폐지 이후인 2012년.[37]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 MC대격돌 공포의 쿵쿵따 내무반 편에서 나왔다.[38] 이정재와 방위병 동기로, 광명시에 있는 52사단 민심처에 근무했다. 마지막 전투방위 군번이라 군생활 얘기가 나와도 자부심을 보인다. 참고로 방위복 모자에 18개월 점을 일일이 찍었다고 한다...[37] [39] 시사저널의 보도에 의하면 이건희 회장이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고 한다. #링크.[40] 한편, 정신질환으로 병역면제받았다는 언론도 있고 #링크 다른 언론은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고 한다. #링크 정확히는 알 수 없으니, 일단 취소선을 친다.[41] 주방에서 단기사병이였다고 밝힌다. 다만 본인은 해적집안의 해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