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용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심용준'''
'''沈龍俊'''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6년 5월 10일
평안북도 희천군 서면 극성리
<color=#fff> '''사망'''
1949년 8월 3일
중국 지린성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심용준은 1896년 5월 10일 평안북도 희천군 서면 극성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심용제(沈龍濟), 심사율(沈士律)이다. 그는 3.1 운동 발발 이듬해인 1920년 최시흥, 최지풍(崔志豊) 등과 함께 평북 천마산중에서 무장항일결사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조직하여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일경과 부일배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3년 6월 3일에는 천마산대 대표로서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를 비판하는 성명 발표에 서명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서간도(西間島)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기관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양세봉, 문학빈(文學斌) 등과 함께 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대한통의부에서 참의부(參議府)가 새로이 독립하자 참의부에 가담했다. 1925년 2월 25일 참의장 최석순 등 29명의 간부들이 초산 일본경찰대의 습격으로 전사하면서 참의부의 세력이 기울어지자, 그는 진동도독부(鎭東都督府)를 설립 참의부의 수습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1925년 5월 통의부의 문학빈(文學彬)·오동진(吳東振) 등과 회담해 참의부와 통의부의 재통합을 시도하였다.
참의부로 다시 개명된 1926년부터 참의부 제3중대장을 맡아 참의장 윤세용, 사령장 박응백과 함께 활동했다. 또한 참의부·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의 3부통합을 주도해, 정의부 주력과 신민부 민정파와 힘을 합쳐 단체본위통합론을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통합 방식에 불만을 품고 1928년 9월 임병무(林炳武) 등과 쿠데타를 일으켜 참의부 중앙호위대장 차천리를 살해했다.
이후 그는 1929년 4월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참의부를 탈퇴한 뒤 정의부(正義府) 대표 현익철, 신민부(新民府) 대표 송상하(宋尙夏) 등과 함께 참의부 대표로서 국민부(國民府) 결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국민부는 군정부나 유일당의 결성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의 주도로 조직된 것이었다.국민부에서는 1929년 5월 28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을 결정하였는데, 이때 심용준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1929년 12월에 창당된 이 정당은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이 발전하여 이룩된 것이다. 조선혁명당의 기본 임무는 민족적 대당을 형성하여 혁명사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당면 과업은 국민부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지도 육성하는 일이었다. 조선혁명당은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혁명수행의 새로운 기반 형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후 1933년 4월 25일 환인현(桓仁縣) 북전자(北甸子)의 산속에서 개최된 국민부 장교회의에서 제3중대장으로 무송현(撫松縣)에서 활동하도록 결정되어 부하 40여명을 거느리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만주사변 후 일제의 탄압이 가속화되자 만주에 은거했고, 8.15 광복 후에도 중국 지린성에 남아 있다가 1949년 8월 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심용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