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 제국

 



'''촐라국'''
'''சோழ நாடு'''

''Cōḻa nāṭu''[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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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년 ~ 1279년
수도
탄조르
강가이콘다촐라푸람
무디콘단
칸치
국가원수
왕 / 황제
주요 군주
라자라자 1세(985~1014)
라젠드라 1세(1014~1044)
언어
타밀어
종교
힌두교
종족
타밀족
성립 이전
팔라바 왕조, 중기판디아 왕조
멸망 이후
후기 판디아 왕조
1. 개요
2. 역사
3. 정치
3.1. 군사
3.2. 행정
4. 문화
5. 사회
6. 역대 국왕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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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세기경 팔라바 왕조로부터 독립한 남인도 힌두계 왕조로 13세기경까지 타밀지역에 큰 영향을 끼친 왕조다. 고대의 동명 왕조를 찾는다면 촐라 왕조 문서를 참조.

2. 역사


초기 촐라 왕조가 쇠퇴하고 수 세기가 지난 후 새로운 촐라 왕국의 기초를 만든 왕은 한때 팔라바 왕조의 영주였었던 비자야라야 였다. 그는 팔라바 왕조판디아 왕국사이의 전쟁이 벌어진 틈을 타 판디아 왕국의 영역이었던 탄조를 공격하고 점령했다. 이곳을 발판으로 세력을 확보했던 그는 여세를 몰아 콜사나 계곡과 카베리 계곡의 지역을 차지한다. 이로서 비자야라야는 탄조르에 새로운 촐라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의 아들 아디트야 1세는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던 팔라바 왕조의 아파라지타 왕을 도와 판디아 왕국을 물리친다. 하지만 이미 팔라바 왕조는 많이 쇠약해졌고, 이를 파악한 아디트야 1세는 893년경 팔라바 왕조의 통수를 쳐서 아파라지트 왕을 살해했다. 이로서 팔라바 왕조는 실질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촐라 왕국은 톤다이만달람을 비롯한 팔라바 지역들을 대부분 차지하였고 명실상부 남인도 최강 제국을 형성한다. 그 후 그는 탄조르에 시바신을 위한 사원들을 건립하면서 왕조의 기틀을 다져갔다.
파란타카 1세는 매우 야심만만했던 왕으로 처음부터 영토 확장에 힘을 쏟아부었다. 그는 당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판디아 왕국을 쳐서 마두라이 지역을 차지한다. 당시 판디아 왕국의 왕 라자싱하 2세는 이에 다급을 느끼고 실론의 왕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파란타카 1세는 계속해서 영토 확장을 시도했고 이에 북쪽에 이웃해 있던 라슈트라쿠타 왕조를 긴장시키게 된다. 결국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크라슈나 3세는 949년 타코람에서 촐라 제국을 무찌르게 된다. 이에 파란타카 1세는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이 좌절의 후유증은 그의 아들 파란타카 2세가 라슈트라쿠타 왕조를 무찌르면서 해결된다.
라자라자 1세 왕때는 촐라 제국의 군사력이 더더욱 강력해져 동찰루키아 왕조, 판디아 왕조, 강가 왕국, 체라 왕조[2] 등을 물리치고 남인도에서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게 된다. 라자라자 1세 왕은 해군력도 강화하여 쿠르카, 말라바바라 해안 지역, 실론의 일부 지역 등을 차지했다. 그는 계속에서 당시 해상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아랍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 말디베 섬과 남동 지역에 있는 섬들을 장악한다. 당신 아랍인들은 케랄라의 체라 왕조의 보호 아래 인도 서부 연안을 중심으로 한 무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에 서술했다시피 체라 왕국은 이미 촐라 제국에게 깨진 상태라 그들을 돕기는 힘들었다.
라자라자 1세의 뒤를 이은 라젠드라 1세는 아버지의 영토 확장 정택을 그대로 이어받은 왕이다. 그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위세를 펼치고 있던 스리비자야 왕국의 해군을 대파하여 아라비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도 막강한 해군력을 뽐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북으로 서찰루키아 왕조의 근거지 카루야니를 합병하고 남으로는 실론 지역까지 손을 뻗었다. 라젠드라 1세는 더 북쪽을 노려보려 했지만 북인도 세력은 그 저항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직접적인 영토 확장은 포기하고 영향력만 키워나가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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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젠드라 1세 이후에도 촐라 제국은 서찰루키아 왕조와 끊임없는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서찰루키아 왕조는 파멸하고 그 지역은 야다바 왕조를 비롯한 다른 왕조들이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촐라 제국 또한 경제적, 인적 등의 손실도 커서 멸망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12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촐라 제국은 예전의 위세를 거의 상실하게 되고 결국 1258년 라젠드라 3세가 판디아 왕국의 순다라 왕으로부터 패하게 된다. 그 세력은 더더욱 약화되며 결국 1279년 촐라 제국은 완전히 망하게 된다.

3. 정치


촐라 제국의 왕들은 행정의 수반으로 권력이 모두 자신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왕에 따라 수도를 탄조르, 강가이콘다촐라푸람, 무디콘단, 칸치 등으로 자주 옮겼다. 광활한 영토뿐만 아니라 풍부한 농산물과 무역을 바탕으로 상당히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왕권의 신성함을 믿은 그들은 왕과 왕비의 초상을 여러 사원에 남겨 놓았다. 왕들은 재위 기간중에 자신의 계승자를 선출하여 왕권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였다. 그러나 왕위 자체가 세습제 였기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장남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3.1. 군사


촐라 제국은 활발한 정복 사업을 위해 강한 군대를 보유했었다. 그 가운데는 기병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랍에 많은 양의 말들을 수입해야만 했다. 왕은 벨라이카라스라는 근위병을 두어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촐라 제국의 군사 제도 가운데 특이한 요소는 막강한 해군력에 있다고 볼 수가 있다. 촐라 제국은 해군력을 바탕으로 실론동남아시아스리비자야 왕국을 물리치는 등 동서 해상 무역의 안전을 확보하여 국가의 경제적 풍요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촐라 제국의 군대는 상당히 거칠었고 이로 인해 전쟁 기간 중에는 부녀자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상당히 허다했다고 한다.

3.2. 행정


국가의 주된 수입은 토지세로 라자라자 왕의 경우에 수확한 농산물의 1/3을 세금으로 거두었다. 세금은 현금과 산물로 거두었는데 토지는 생산되는 산물에 따라 각기 다르게 분류되었으며, 그에 대한 세금은 생산된 양에 의해 결정되었다. 세금은 주로 생산자에게서 직접 거두는 식으로 했으나, 경우에 따라서 한 마을을 단위로 한꺼번에 모았다가 거두었다. 왕은 농산물의 수확을 보다 증진시키기 위하여 카베리 강에 여러 개의 댐을 건설하고 호수를 만들었다. 이 밖에 무역과 광산, 염전 등을 통하여 얻는 세금을 국가의 경제에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국가의 영토는 7~8개의 만달로 나뉘고 만달은 다시 나두, 나두는 코람 등으로 세분되었다.[4] 코람은 행정의 가장 작은 단위인 몇 개의 촌락으로 이루어졌다.
촐라 제국의 행정 제도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지방자치제이다. 촐라 제국은 말단 촌락에서부터 만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지방자치적인 행정 제도를 실시했다. 촐라 왕조의 이 같은 행정 제도는 남인도는 물론이고 북인도까지 확대해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제도였다. 이 같은 제도하에 행정기구 마하사바라는 촌락행정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코람이나 나두, 만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촐라 제국의 이 같은 자치제도는 중앙 정부의 정치적 변화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마을의 행정과 문화를 유지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서, 타밀 고유 문화를 보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와 같은 지방자치제가 실시 될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인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무역과 농업을 통하여 촌락행정이 유지되기에 충분한 경제력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마하사바라를 형성하기 위하여 촌락은 30개의 구로 나뉘고 각구의 사람들 가운데 토지나 주택을 소유한 사람 35~70세 사이의 사람, 베다나 베다주석서에 관한 지식을 보유한 사람 등등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과거 3년 동안 위원회에 참석하여 의견을 제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제외하였다.

4. 문화


촐라 제국 시대에 타밀문화는 황금기를 맞게 된다. 대부분의 문헌은 시적인 형태로 많이 쓰여졌으며,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왕의 보호 아래 자신들의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이 시대에 유명한 학자로는 지와나친타마니를 쓴 티루타케바다라, 슐라마니를 쓴 톨라목티, 칼링가툽파니를 쓴 자야고다르, 라마바트라마를 쓴 캄바바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캄바바는 타밀 문학의 거장으로 캄바 라마야나로 알려 있는 그의 라마야나는 타밀 문학상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불교학자인 부다미트라는 라소리얀이라는 작품을 썼으며, 이 밖에 쿤달라케사와 칼라다마라는 불교 작품도 이 시대에 속한다. 작품들은 주로 타밀어로 이루어 졌었지만 산스크리트어로 이루어진 작품들도 꽤 있었다. 파란타카 1세때 벤카트마다바는 리그베다 의 주석서를 산스크리트어로 저술했다.
또한 촐라 제국은 수만은 도시, 호수, , 저수지 등을 건설했으며 이 가운데 라젠드라 1가 수도에 만든 강가이콘다촐라푸람이라는 호수가 특히 유명하다. 또한 언덕과 바위를 깎아 크고 아름다운 사원을 만드는 건축술이 발달했다. 촐라 제국의 건축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로는 비자야라야촐레슈와라, 나게슈와라코랑가나타, 무발라코비타 사원 등을 들 수가 있다. 촐라 제국의 이 같은 건축술은 팔라바 왕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이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타밀 건축술이 절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5. 사회


촐라 제국의 사회 구성원은 신분상의 계급 제도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계급간의 통혼이 허용되었고 이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계급들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여성의 지위도 비교적 좋은 편으로 아직까지는 후기 힌두교 사회의 수많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여러 행사들에 있어 자유롭게 참가할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상속권이 보장되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도 있었다. 촐라 제국에서는 여성의 자띠가 그리 성행하지 않았으며 결혼은 대체로 일부일처제였지만 왕이나 부유한 몇몇 사람들은 예외적으로 일부다처제를 했었다. 그리고 노예제도는 농업과 상공업 및 무역업의 발달로 상당히 성행하였다.
촐라 제국의 왕들은 힌두교도로 바가바타 종파나 시바 종파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 양 종파는 촐라 제국의 각별한 보호 아래 남인도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 수많은 힌두 사원이 건립되면서 종교적인 장소뿐만 아니라 교육의 장소로도 활용 되기도 하였다.

6. 역대 국왕


  • 1대 비자야라야 (848년 ~ 871년)[5]
  • 2대 아디트야 1세 (871년 ~ 907년)
  • 3대 파란타카 1세 (907년 ~ 950년)
  • 4대 간다라디트야 (950년 ~ 956년)
  • 5대 아린자야 (956년 ~ 957년)
  • 6대 순다라 (957년 ~ 970년)
  • 7대 아디트야 2세 (970년 ~ ?)
  • 8대 우따마 (? ~ 985년)
  • 9대 라자라자 1세 (985년 ~ 1014년)
  • 10대 라젠드라 1세 (1014년 ~ 1044년)
  • 11대 라자드히라자 (1044년 ~ 1054년)
  • 12대 라젠드라 2세 (1054년 ~ 1063년)
  • 13대 비라라젠드라 (1063년 ~ 1067년)
  • 14대 아띠라젠드라 (1067년 ~ 1070년)
  • 15대 쿠로쑨가 1세 (1070년 ~ 1120년)
  • 16대 비크라마 (1120년 ~ 1135년)
  • 17대 쿠로쑨가 2세 (1135년 ~ 1150년)
  • 18대 라자라자 2세 (1146년 ~ 1173년)
  • 19대 쿠로쑨가 3세 (1178년 ~ 1218년)
  • 20대 라자라자 3세 (1216년 ~ 1246년)
  • 21대 라젠드라 3세 (1246년 ~ 1279년)

7. 여담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플레이 가능한데, 867년부터 독립국이며 769년 시나리오에서는 팔라바의 봉신국으로 나온다. 1071년부터는 찰루키아 촐라 가문으로 나오며 일반 촐라가문의 대는 1080년경이면 끊어져 있다. 1220년부터는 독립국이었으나 사실상 판디아 왕국의 봉신국으로 나오며 그전까지는 통일왕국으로 나온다.

[1] 콜라가 아니고 촐라로 읽는다.[2]체라 왕조도 고대가 아닌 후기 체라 왕조이다.[3] 라젠드라 1세때 촐라 제국의 영향력[4] 현대식으로 설명하면 도, 시, 군 형태로 전국을 행정 분류 했다는 뜻[5] 위키백과에서는 891년이 생몰년도로 나오는데 정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