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기누사이 해전

 

1. 개요
2. 전투 이전
2.1. 제국의 위기
2.2. 위기를 넘기는 아테네
2.3. 다시 위기가 닥치다
2.4. 아테네, 마지막 힘을 쥐어짜다
3. 아르기누사이 해전
3.1. 아르기누사이 제도에서의 접촉
3.2. 양측의 전력 및 전투 대열
3.3. 전투
4. 전투 이후
4.1. 장군들의 재판
4.2. 이후


1. 개요


아르기누사이[1] 해전(Battle of Arginusae, 406 BC)은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중 아테네의 마지막 승전이며, 이 승리로 인해 아테네의 패전은 최소 1년 이상 연기되었고, 최후의 전투였던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의 패전이 아니었다면 그 이상 연기시켰을 수도 있으며, 전후 대처만 잘했더라면 마지막으로 우세한 강화협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승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전투는 그 대신 '장군들의 재판' 으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으며,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중우정치의 대표적인 사례로 종종 거론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전투를 성립시킬 수 있는 전력을 긁어모은 것 자체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의 강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 '''아테네식 직접 민주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보여준 전투'''라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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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투 이전



2.1. 제국의 위기


시칠리아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에게는 너무나도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제국을 유지하던 최대의 힘이었던 거대한 아테네 함대, 종속국을 포함해 트라이림(삼단노선) 300여 척 이상을 어렵지 않게 동원할 수 있었던데다 질적으로 대단히 우수하여 동지중해에서 맞상대할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페르시아마저 마지못해 인정할 정도의 그 막강한 함대의 2/3, 213척에 달하는 함선이 2만~3만명 이상의 인적 자원과 함께 사라졌고(종속국의 인적 손실까지 감안하면 4만을 너머 5만에 육박한다), 기원전 413년 당시 아테네의 가용 재정인 5천 탈렌트는 1년만에 500탈렌트만이 남았다. 범유행전염병으로 간주되는 아테네 역병(Plague of Athens)으로 전체 인구의 1/3에 달하는 인원, 적게 잡아도 7~8만명 이상을 상실한 아테네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보이는 손실이었다. 또한 데모스테네스, 라마코스, 니키아스, 에우리메돈이 사망했고 알키비아데스가 망명하여 아테네는 당시 전쟁을 이끌던 지휘관들을 모두 잃었다.
여기에 더해 스파르타가 데켈레아에 요새를 건설하고 주둔한 결과 아테네는 다시 한번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못해도 2만 명의 노예들이 특히 아티카 남부의 은광산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지속적인 보이오이타 인들의 습격까지 더해지자 아테네 시민들의 재산 손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과거, 아테네의 부유층들은 독자적으로 전함과 승무원들을 조달하여 해군에 참여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사회적 미덕이자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았고, 아테네 정부는 종종 이를 강요하여 해군력을 보충하곤 했지만 이때에 접어들면 그런 게 가능한 부유층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전부 죽거나 재산의 상당수를 상실한 것이다. 그 결과 신트리에르아르키아(syntrierarchia), 즉 부유층으로 간주된 사람 둘이 전함 한척의 비용을 분담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했다.
말 그대로, 시칠리아에서의 재앙 이후 대부분의 그리스 인들은 기원전 1세기의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가 자신이 집필한 세계사 서적인 ≪역사 총서(Bibliotheca historica)≫에서 적었듯 '''"모든 사람들이 전쟁이 끝났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아테네인들이 이 같은 처참한 패배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라고 생각했다.

2.2. 위기를 넘기는 아테네


그러나 아테네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고, 끈덕지게 다시 7년여를 버텨내었다. 우선 각각의 데모스에서 40세 이상의 남자 1명씩 총 10명의 프로불로이(probouloi)를 선발, 특별회계감사원으로 남은 재정 지출을 감시하기로 하였다.[3] 그리고 남은 함대를 최대한으로 끌어모아 100여 척에 달하는 함대를 사모스로 파견해 동맹국들의 반란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비록 키오스와 밀레토스의 반란의 저지에는 실패하였지만 레스보스와 사모스의 반란을 막고 이쪽에서 충동질하던 스파르타의 시도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의 위기는 계속되어, 페르시아의 재정지원을 받은 스파르타 및 아테네 제국에서의 이탈을 꿈꾸는 종속국들은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도시국가들이 대거 스파르타 편에 가담하여 식량공급로를 차단하고, 아테네 시민들의 대부분의 재산을 옮겨놓았던 에우보이아까지 스파르타에 가담하면서 아테네는 멸망의 위기에 몰렸다.(BC 413~BC 411) 너무 상황이 열약하자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단정지은 과두정파가 400인 회를 통해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폐지하려 시도하였고, 이것이 사모스 섬의 아테네 함대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5000인 회라는, 이전에 비해 어느정도 민회의 정책 결정권에 대한 제한이 존재하는 정부가 잠시 들어서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테네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사모스 섬의 아테네 함대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진입, 비슷한 규모에 페르시아군의 지상 지원까지 받는 스파르타 함대를 키지코스 해전에서 큰 피해 없이 전멸시키는 괴력을 발휘하며 해협을 재장악하고[4] 에우보이아 등지에서도 압박을 통해 다시 복속시켜 내었다. 이후 아테네는 약해진 함대로도 장기간에 걸처 바다를 지배하였다.

2.3. 다시 위기가 닥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한 것은 스파르타 해군 사령관 리산드로스의 등장이다. 그는 침묵을 미덕으로 알던 스파르타인답지 않게 언변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보통의 스파르타인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천적으로 친근하게 대했다. 그리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과도한 권위도 기꺼이 참았다."[5]고 전한다. 즉 권력자에게 아첨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당시 소아시아 일대의 페르시아 총독은 젊은 왕자였던 키로스[6]였는데, 리산드로스는 그를 구워삶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키로스가 리산드로스에게 원하는 것을 묻자 리산드로스는 "당신께서 선원들의 급료에 1오볼로스를 더해주신다면."[7]이라고 답했다. 이는 당시 선원들의 평균 급여였던 3오볼로스에서 33%나 인상시킨 것이다. 그리고 키로스는 이에 동의하고 추가로 연체된 급여도 모두 지불한 데다 한 달치의 보수를 먼저 주기까지 하였다.
선원들의 봉급을 올리는 이러한 공세에 대해 아테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칠리아 재앙 이전의 아테네였다면 페르시아의 자금 지원에 대해 상당히 버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칠리아 이후의 아테네로써는 기존 급여를 유지하여 함대를 유지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결국 BC 407년 재정 확보를 위해 함대를 잠시 떠났던 당시 아테네 해군 사령관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떠난 사이에 펼쳐진 리산드로스의 공격에 패전을 겪고, 두번째 망명을 가야만 했다. 알키비아데스의 몰락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승리한 장군들이었던 트라시불로스와 테라메네스의 권위 또한 끌어내렸고, 그들은 이후 오랫동안 함장 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스파르타의 법률상 해군 사령관은 1년밖에는 복무할 수 없다. 리산드로스는 자신을 "바다의 지배자이며 바다의 전투에서 정복한 자."[8]로 과시하며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려 하였지만 결국 복종하여 후임자인 칼리크라티다스(Callicratidas)에게 함대를 넘겼다. 다만 리산드로스는 후임자를 곤욕스럽게 하기 위해 자금의 상당수를 키로스에게 반환해 재정 상황을 약화시켰다. 이에 칼리크라티다스는 페르시아의 기지였던 에페소스에서 아직 아테네에 대한 반란의 깃발을 내리지 않은 밀레토스로 스파르타 해군을 옮기고 페르시아보다는 이들의 협조를 받아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이 해에 아테네 해군을 이끌던 것은 코논이라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약 70여 척에 달하는 아테네 해군으로 제해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당시 아테네의 재정상 위에서 언급한 스파르타의 수당 공세에 대응하지 못해 30여 척을 운용할 승무원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상대인 칼리크라티다스는 리산드로스에게서 물려받은 170여 척에 달하는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테네의 최중요 복속국이었던 레스보스를 위협해 아테네 함대를 끌어내 습격하여 30여 척을 나포하고 나머지 40척의 함대에 대해서는 50척의 분함대를 배치하여 미틸레네에 봉쇄하였다.
이 소식은 BC 406년 6월 중순에 아테네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아테네는, 최후의 힘을 끌어모은다.

2.4. 아테네, 마지막 힘을 쥐어짜다


코논의 패배 소식이 들려왔을때 아테네에는 승무원 없는 40여 척 정도의 삼단노선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아테네는 사실상 구원함대를 꾸릴 여력이 없을 정도로 국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우선 함대를 꾸릴 재정이 없었다. 시칠리아의 재앙 이후 아테네 재정은 늘 바닥난 상태였고길어지기만 하는 전쟁에 리산드로스의 급여 공세까지 더해지자 최후의 예비금으로 남겨놓았던 1천 탈렌트마저 모두 써 버린 상태였다.
또 승무원이 없었다. 재정의 고갈로 베테랑 승무원들에게 줄 급여는 늘 연체된 상태였다. 아테네는 극약에 가까운 대책으로 높은 급여에 혹해 스파르타 함선으로 넘어간 노잡이들을 포로로 잡을 경우 그 팔을 잘라버린다는 정책까지 내세웠지만 그래도 승무원 부족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아테네 역병과 시칠리아 원정 이후 아테네 자체적인 승무원 고갈 현상 또한 심각하였기에 스스로 부족한 승무원을 조달할 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휘관도 없었다. 역병과 시칠리아 원정으로 지휘관급 유력 인사들 또한 대부분 사망했고, 이후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난 지휘관들 또한 알키비아데스의 몰락의 여파로 장군으로 임명되지 못했다. 남은 인물 중 아테네 최고의 제독은 코논이었으나 그는 미틸레네에 고립된 상태였다.
아테네에게는 그야말로 멸망의 기로에 놓여있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테네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거의 기적과도 같이 '''1개월만에 110척의 함대를 새로이 편성'''하는 데 성공한다.
먼저 아테네는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신전 지붕의 금박을 모조리 긁어냈고,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각종 신상들의 금박 또한 떼어냈으며, 통째로 금은으로 만든 신상이라면 아예 녹여서 주화를 제조, 2,000탈란트 이상의 금액을 조달하였다. 이때 이러한 신전과 신상을 만든 페라클레스 및 클레온 등의 선견지명이 빛났는데, 이들은 이러한 신전을 만들때 '''혹시나 해서 금박을 벗겨낼 수 있게 만들었기에'''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었다고 한다. 알키비아데스가 신성 모독 혐의로 고발되어 추방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찬가지라 볼 수 있는 이러한 행위를 한 것은 아테네가 그만큼 급박했다는 것을 뜻한다.
재정은 간신히 마련했지만 한달여 만에, 그것도 제해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노잡이를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에 아테네는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노잡이로 태웠다. 농부, 기병으로 나갈 능력이 없는 부자로도 모자라 결국에는 수천에 달하는 노예에게 자유와 아테네 시민권을 약속하고 노잡이로 탑승시켜야 했다. "그들은 군인이 될 수 있는 연령대의 모든 사람들을 '''자유인이든 노예든 가리지 않고''' 배에 태웠다."[9] 이렇게 머릿수는 채웠지만 숙련도 부족은 어쩔수 없었고, 아테네는 전쟁 기간중 최초로 '''숙련도 부족 및 이에서 나오는 전술적 열세''' 상황 속에서 해전을 벌여야 했다. 아테네 함대에는 미숙하고 몇 번 노를 저어본 적도 없는 노잡이들이 대부분인 반면 스파르타 함대에는 바로 얼마 전까지 아테네 함대에서 노를 저어온 능숙하고 경험 많은 노잡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결국 아테네는 단일한 지휘관에 의한 지휘권 통일을 이루어내는 데 실패했다. 이 함대에는 페리클레스의 아들을 포함한 8명의 장군들이 있었고, 어느 누구도 최고사령관 직을 맡지 않았다. 당시 아테네가 내보낼 수 있는 최고의 함대 지휘관인 코논을 물리친 스파르타의 함대 지휘관 칼리크라티다스와 싸워, 혹시 모를 패전의 책임을 어느 누구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모스 섬의 지원군 45척까지 더한다면 9명의 지휘관이 이 아테네 함대를 지휘한 셈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 이는 상당한 페널티였다. 비록 이들 모두 바다에 익숙한 뱃사람이었기에 전투 중의 문제는 없었지만 '''전투 후에 벌어진 일은 결국 최종적인 책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테네는 마지막 힘을 긁어모아 110척의 함대를 한달만에 찍어내다시피 하여 진수하는 데 성공했고, 사모스 섬의 지원함대와 합류하여 155척이라는, 비록 질적으로는 이전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일 지라도 규모만으로는 거의 전성기 시절에 필적하는 대함대를 편성, 406년 7월에 레스보스 섬으로 파견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일구어낸 위대한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고대 그리스의 여타 정치체제를 갖춘 국가들은 아테네가 당한 것과 같은 재난을 극복하지 못했으나, 오로지 아테네만이 이를 견뎌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부유층부터 시작하여 노예에 이르기까지 혼신의 힘을 끌어냈고, 최후의 대함대를 구축하였다.

3. 아르기누사이 해전


섬의 위치

3.1. 아르기누사이 제도에서의 접촉


아테네가 혼신의 힘을 다해 편성한 155척의 대함대가 레스보스 섬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파악한 칼리크라타다스는 이에 맞서기 위해 움직인다. 그는 40척의 아테네 함대가 있는 미틸레네 항구를 50척의 함대로 봉쇄한 채 120척을 이끌고 섬 동남단의 말레아 곶으로 가서 적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아테네 함대가 말레아 곶 동쪽 약 3km 지점인 아르기누사이 제도에서 주둔 중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칼리크라타디스는 야간 기습을 통해 아테네 함대를 격파하고자 했지만 폭풍이 불어 실패하자 그 대신 새벽에 아르기누사이로 함대를 움직인다. 비록 숫적으로 약간 열세이긴 했지만, 스파르타 함대가 노잡이 등 승무원도 질적으로 훨씬 앞서고, 급하게 건조한 함선이 대부분인 아테네 함대에 비해 함선 성능도 더 우수했다. 이렇게 전체적인 전력은 자신의 함대가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자신만만하게 나아갔다.

3.2. 양측의 전력 및 전투 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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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해군은 120척의 배를 가지고 있었으며, 칼리크라타디스는 이 함대로 좌익, 중앙, 우익의 전통적인 대열을 편성하였다. 120척의 배가 2,400야드, 즉 2km를 각각 18m의 간격을 두고 늘어선 것이다. 우익은 칼리크라타디스 본인이 맡았고 좌익은 트라손다스가 맡았다. 이는 육상 전투에서 팔랑크스 방진의 우익에 주력을 배치하는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 당시 스파르타 함대는 질적으로 아테네 함대를 뛰어넘었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자금을 끌어다 쓸 수 있었던 스파르타가 더 월급을 많이, 제때에 주었기 때문에 에게 해의 베테랑 선원들이 스파르타 쪽으로 고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상당수는 과거 아테네 함대에서 복무하였으며, 아테네 해군의 특기이던 페리플루스(periplous)와 디에크플루스(diekplous)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이 전술에 대해서는 하단에 추가 설명한다.
아테네 해군은 155척의 함대를 구축하였기에 스파르타 함대에 비해 숫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질적으로는 열세라는 사실을 당시 함대를 지휘하던 8명의 장군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국고가 바닥난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자금공세에 상대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승무원 부족에 시달려 미숙한 선원들을 다수 태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2중 대열이라는 변칙적인 함대 대열을 짰다. 즉 아르기누사이 제도의 서쪽 섬인 가리파디시를 가운데 두고, 그 앞에 35척의 함선을 두어 중앙으로 삼고 나머지 120척의 함선을 60척씩 2개 열로 나누어 8명의 장군들이 각각 15척씩 맡아 지휘하기로 한 것이다.
측면 공격을 막기 위해 각 함당 거리는 기준 간격의 2배인 32m로 하였고, 벌어진 빈틈은 각 함선들을 지그재그로 배치하여 틀어막았다. 그리고 8명의 장군들, 아리스토크라테스(Aristocrates), 아리스토게네스(Aristogenes), 디오메돈(Diomedon), 에라시니데스(Erasinides), 리시아스(Lysias), 페리클레스(Pericles)[10], 프로토마코스(Protomachus), 트라쉴로스(Thrasyllus)는 각각 15척씩 함선을 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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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테네 함대의 대형은 고대 그리스의 주요 삼단노선 전술인 페리플루스(periplous)와 디에크플루스(diekplous)를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페리플루스는 적 함선을 우회, 측면과 배후를 충각으로 공격하는 전술이고 디에크플루스는 두 함선 사이를 치고 들어가 충각으로 적 함선의 측면을 공격하고 노를 파괴하여 기동력을 삭감해 버리는 전술로, 과거 아테네의 주력 전술이었지만 뛰어난 항해술이 그 근간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질적으로 떨어지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는 아테네 해군이 이를 수행하기 힘들었고 오히려 스파르타 해군이 이런 전술을 구사하는 것을 억제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때문에 그들은 이중 전열을 구축하여 스파르타 함선이 디에크플루스를 위해 배 사이를 파고든다 해도 후열의 함선들이 이를 막을 수 있도록 했고, 함대 규모를 최대한 활용해 전열을 길게 늘여 페리플루스를 저지함과 동시에 측면 포위가 가능하게끔 전열을 구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스파르타 함대는 전력상 우위에 있다는 것 때문에 평범한 대열을 구축하였으며, 아테네 함대는 숫적으로 약간 더 많다는 것 빼면 모든 측면에서 열세였기에 숫적 우세의 강점을 살리고자 변칙적 대열을 구축하였다고 볼 수 있다.

3.3. 전투


칼리크라티다스가 전진을 시작하자 "아테네군은 그에 대응하여 나섰고, 좌익을 넓은 바다를 향해 뻗었다." 이는 일반적으로는 전열이 분리되어 스파르타 군에게 이용할수 있는 틈을 남기겠지만, 아테네군이 구축한 이중 전열은 여기서도 효과를 발휘해 좌익을 최대한 늘리면서도 함열은 이어졌다. 거기다 더 길게 포진한 게 아테네 함대에게는 장점으로 다가와, 우익의 경우 전진하기만 해도 스파르타 함대를 반포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아테네 함대는 스파르타 함대가 숙련된 노잡이를 통해 페리플루스와 디에크플루스를 시도하는 것을 봉쇄하여 질적 열세를 커버하였고, 유일하게 우위에 있는 숫적 우세를 최대한으로 살려 스파르타 군의 포위 섬멸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칼리크라티다스는 이런 전황 속에서 퇴각하고 미틸레네의 함대와 합류하여 싸우자는 건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퇴각 대신 함대를 좌우로 나누어 아테네 군의 포위 시도에 대응하도록 하였다. 그는 경솔하게도 "그가 죽는다고 해서 스파르타가 더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망가는 것은 수치가 될 것이다."[크세노폰,]라고 생각하고 전투의 지속을 결정한 것이다.
당시 시간은 스파르타의 편이었다. 아테네가 신전을 치장하던 금은보화까지 모두 처분해 자금줄이 완전히 바닥난 반면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자금 지원을 받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페르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은 칼리크라티다스에게는 불가능했고, 그는 단기 결전을 생각했으므로 퇴각은 무의미하다. 아르기누사이에서 싸우나, 미틸레네로 퇴각해 항구를 봉쇄하던 스파르타 함대를 합류시킨 후 싸우나 숫적 열세는 마찬가지라 여기고 질적 우세를 바탕으로 여기서 싸워 이겨내는 것이 더 낫다고 본 것이다.
칼리크라티다스는 부대를 나누어 아테네 해군의 포위 기도를 최대한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중앙에 일렬로 늘어선 사모스 등 아테네 종속국 함대의 위험을 방기한 것이 되었다. 거기다 애초에 더 긴 전열을 구축한 아테네 함대는 반포위 상태를 차츰 좁혀들어와 스파르타 함대를 중앙으로 몰아세웠고, 이는 중앙의 아테네 종속국 함대들에게는 최적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칼리크라티다스가 결국 전사하고, 그 소식이 전해짐에 따라 스파르타군 우익은 전열을 무너뜨리고 아직 열려있는 후방으로 도주를 시도했다. 이는 아테네군 우익에 포위당하다시피 하면서도 싸우던 스파르타군 좌익을 버리다시피 한 행위였고, 중앙의 아테네 종속국 함대가 이를 보고 스파르타 함대의 중앙을 돌파해 이중포위망을 구축하면서 스파르타 함대는 완전히 괴멸당하게 된다. 거의 완전히 포위당해 있던 스파르타군 좌익은 단 한 척도 도망가지 못했고, 그나마 철수로가 열려 있었던 우익은 약간이나마 철수할 수 있었다.
달아나는 데 성공한 스파르타 함대는 키오스, 키메, 포카이아 등으로 흩어졌고 미틸레네의 스파르타 함대 지휘관은 전투소식을 듣자 마찬가지로 남은 함대라도 건지기 위해 철수하였고, 때마침 바다가 거칠어졌기 때문에 아테네 함대는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4. 전투 이후



4.1. 장군들의 재판


해전이 끝났을때 아테네 함대는 매우 거친 바다에서 약 6제곱킬로미터 면적에 걸처 흩어져 있었다. 해전 과정에서 아테네 함대는 약 25척을 상실했는데, 그 중 최소 12척 이상의 함선은 아직 수면 위에 떠 있었고 해당 함선의 승무원 약 천여명 정도가 잔해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폭풍이 몰아친다는 이유로 여타 함선들은 일단 항구로 철수한 후 추후의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시 그리스인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죽은 자를 합당하게 매장하는 것은 생존자 구조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고, 거룩한 의무로 여길 정도였는데 이를 방기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아테네 해군에 최고사령관이 없었고, 예기치 못하게 전투 면적이 매우 넓어진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아테네는 포위망 구축을 총해 해안선 근처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섬멸하고자 했지만 스파르타 우익의 분전으로 포위망은 완성되지 않았고, 많은 함선이 탈출했기 때문에 이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아테네 함대도 넓게 흩어져 버렸다. 거기다 책임을 지고 구출을 명해야 할 최고사령관이 없으니 장군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또한 도주한 스파르타 선박들이 미틸레네 항구의 함대와 합류한다면 스파르타는 다시 90척 규모의 함대를 구축하게 되며, 이를 가만히 둔다면 또 새로운 대함대를 구축해 아테네에게 도전할 지 모른다는 예측이 가능했고, 이를 어떻게 막아야 할까 하는 문제도 대두되었다.
결국 장군들과 선장들은 협의를 마치고 다시 아르기누사이 제도를 나섰다. 그들은 함대의 1/3인 47척을 테라메네스와 트라시불로스, 두 명의 트리에르아르코스(삼단노선 선장)의 지휘 아래 구조대로 편성해 아르기누사이 해협에서 구조 활동을 펼치고, 8명의 장군들은 함대를 이끌고 미틸레네로 이동해 잔존 스파르타 함대를 섬멸하고자 시도했다. 테라메네스와 트라시불로스는 비록 현직 장군은 아니었으나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의 전쟁 중 장군직을 맡아 추방된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스파르타 해군을 섬멸한 명성에 빛나는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장군이 아니라 해도 그들의 권위를 토대로 구조를 지휘할 수 있다고 보고 장군들은 스파르타 해군 섬멸에 나선 것이다. 이는 도널드 케이건 교수도 말했듯 군사적인 면만을 중시한다면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들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에게 해에서 종종 몰아치는 돌발적인 폭풍우로 바다 경험이 많지 않은 아테네 승무원들은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고, 장군도 아닌 두 선장의 명령에 대해 목숨을 걸면서까지 복종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결국 선원들은 테라메네스와 트라시불로스의 명령을 거부해버렸고, 스파르타 함대 추격 또한 폭풍 때문에 무산되었다. 이는 얼마 안 가 '장군들의 재판' 이라는 사건으로 비화된다.
아테네에서는 승리의 소식이 안도와 기쁨을 가져왔고, 민회는 처음에는 장군들을 칭송하는 제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분노하기 시작했다. 천여 명의 아테네인들, 바다에 익숙하지도 않건만 장군들의 지휘 하에 열심히 싸워 대승리를 가져온 바로 그들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건만 장군들은 대체 어디 있었는가? 하는 이유에서였다. 민회가 분노하고 있다는 소식이 사모스의 아테네 함대에게 전해지자 장군들은 구조 임무가 테라메네스와 트라시불로스에게 맡겨졌던 일임을 밝히는 편지를 보냈다.
이는 심각한 판단착오였다. 테라메네스와 트라시불로스는 그들이 장군을 맡았던 적이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뛰어난 연설력과 강력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갖춘 인물들이었으며,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망한 데 따른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일개 함장일 뿐이었고, 나름 노력했지만 장군으로서의 권위가 없었기에 선원들이 이를 결국 거부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장군들이 전투 직후 즉시 구조를 명하지 않고 먼저 철수했다가 나중에 폭풍우가 거세질 때가 되어서야 구조를 명했다는 변명까지도 가능했다. 또한 그들은 전투 이후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아테네로 귀환해 있었던 반면 장군들은 그저 편지만 보내고 말았다는 차이는 컸다.
장군들의 편지가 민회에서 낭독되었을 때 대중들은 즉시 선장들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그러나 선장들이 자신들을 변호하고 난 후에는 분노가 다시 장군들에게로 돌아갔다."[11] 민회는 이어서 장군들을 해임하고 아테네로 귀환시켜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군 두 명은 즉시 망명했는데, 이는 망명하지 않은 다른 장군들에 대한 민회의 분노를 더욱 가중시킬 따름이었다.
귀환한 장군들 중 검사 끝에 가장 먼저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에라시니데스였다. 그는 공금 횡령과 부정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 행위로 유죄를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남은 5명의 장군들은 500인 협의회에 출석하여 사건 정황을 보고했고, 구출 실패의 책임을 폭풍우에게 돌렸다. 그러나 협의회는 5명의 장군들을 투옥하고 민회의 사법기구에 의한 재판에 회부하였다.
민회에서의 재판은 여타 아테네의 재판들처럼 변론을 통해 시민들을 설득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테라메네스는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장군들을 공격했고, 장군들은 테라메네스와 트리시불로스가 생존자 구출과 시신 수습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리고 양측은 모두 폭풍우가 너무 거세다는 이유를 댔으며, 특히 장군들은 저 두 선장들이 임무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키잡이들과 선원들을 증인으로 세워 "폭풍우가 너무 거세서 구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고 답하였다. 크세노폰은 이런 변론을 통해 "이렇게 말함으로써 장군들은 인민을 거의 설득하기에 이르렀다"[12]고 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장군들의 설득이 먹혀들어갔다면 이 일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장군들은 운이 없었다. 표결 이전에 날이 저물었고, 민회는 다음날 결정하기로 하고 500인 협의회에 재판 진행 절차를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 재판기간은 아파투리아 제전[13]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이는 아티카 전역의 유력한 가문으로부터 시골에 거주하는 평민까지 거의 전부가 아테네로 귀향한다는 이야기였으며, 그들은 전부 자신, 또는 친지가 아르기누사이 해전에 참전한 사람이었다. 이는 폭풍우로 희생된 천여 명의 친지들도 다같이 올라온다는 이야기였고, 자신의 친지가 맞이한 비극에 분노한 이들이 강경한 처벌을 요구하자 장군들에게 거의 설득되었던 여론은 하룻밤만에 장군들에게 극히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결국 500인 협의회는 장군들에게 가장 불리한 재판 절차, 즉 변론 없이 유죄냐 무죄냐에 대한 표결만을 하자는 것이었고, 그 질문은 "해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병사들을 구조하지 않은 것"[14]이 유죄인가 아닌가 하는 극도로 편향된 질문이었다. 장군들에게는 변론의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이는 거의 결정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민회 내에서도 알키비아데스의 사촌인 에루이프톨레모스 등이 이견을 드러냈고, 민회를 주관하는 협의회인 프리타네이스의 일원들들의 일부도 이러한 질문과 표결의 절차는 불법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의 여론은 격양되었고, 프리타네이스들도 장군들의 고소에 포함시키겠다는 협박을 받자 이는 단 한 명,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를 제외하면 모두 자신의 의견을 접고 만다.[15] 마지막 순간, 개별적인 재판을 받게 해 주자는 에우리프톨레모스의 건의마저 무시되고, 장군들은 동시에 재판에 처해졌으며, 망명한 2명을 포함해 8명의 장군 모두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집행되었다.
아테네 인들은 '장군들의 재판'에 대해 오랫동안 비난을 받았으며, 심지어 아테네 인들 자신도 나중에는 이 일을 후회하였다.[16] 이는 아테네식 민주주의의 폐단으로 오랫동안 익히 전해져 내려온다. 일반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는 자체의 법과 절차에 집착했으며, 이를 통해 이런 행위를 오랫동안 막아온 것도 사실이나 이 사건을 통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감성적이고 무지한, 다수의 어리석은 대중에 의한 정치', 즉 중우정치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또한 아테네는 이 일로 인해 다시 한 번 숙련된 군사 지도자 다수를 상실하였으며, 이 재판을 후회하게 된다. 또 재판에서 상대편이었던 두 선장들, 테라메네스와 트라시불로스의 인기도 추락하여 전쟁이 끝날때까지 장군직을 역임하지 못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 이 둘 또한 뛰어난 능력과 그 실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는 아테네에게는 큰 손해였다.

4.2. 이후


비록 '장군들의 재판'이라는 불행을 겪었지만, 아르기누사이의 승리는 위대했다. 아테네 함대가 고작 25척의 함대를 잃을 때 스파르타 함대는 77척, 전체 전력의 64%를 상실했으며, 이는 키치코스 전투를 제외하면 단일 해전으로 스파르타가 입은 최대의 손실이었다. 삼단노선 1척당 150~170명이 탑승하므로 이 해전 한번에 스파르타는 1만 1천~1만 3천의 인적 자원을 상실한 것이다.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의 전투에서의 손실까지 합치면 스파르타는 거의 시칠리아 원정에서 아테네가 입은 것 이상의 피해를 입고 말았다. 아테네의 최후의 함대는 바다를 완전히 지배했으며, 이는 아테네에게 다시 오랫동안 버틸 힘을 제공해 주었다.
거기다 더해, 그렇게 질적 우세를 잡고도 졌다는 것은 스파르타를 다시한번 낙담시켰다. 스파르타 또한 재정이 바닥을 드러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리산드로스를 복귀시키고 그를 통해 페르시아의 지원을 다시 얻어야 했고, 이는 리산드로스의 정적들에게 그리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스파르타는 전쟁 중 마지막으로 아테네에게 평화 협정을 요청하였다. 그것은 데켈레아의 스파르타 요새를 철거하고, 그외의 지역에서는 현재의 점령지를 그대로 유지한채로 전쟁을 끝내자는 것이었다. 이는 아테네가 바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였다. 그러나 아테네는 이를 거부한다. 대승리 이후 다시 호전성을 되찾은 아테네 민회는, 니키아스의 평화 이후 더이상 스파르타를 믿을 수 없다고 여겼으며, 평화보다는 차라리 완전한 승리가 더 낫다고 여긴 것이다.
이는 실책이었다. 결국 스파르타는 리산드로스를 다시 내세워 페르시아의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페르시아의 자금 지원 하에서 함대를 복구하였다. 그리고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전멸시키면서 결국 최종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1] Ἀργινούσ(σ)αι, 오늘날의 이름은 Garip Island이다.[2] 디오도로스 13.37-8, 투키디데스(8.2), 빅터 데이비슨 핸슨 저, 임 웅 역 <고대 그리스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p376에서 재인용[3] 이 10명 중 이름이 알려진 것은 하그논과 소포클레스의 둘인데, 둘 다 페리클레스와 가까운 사이로 경력과 명성이 대단했다고 한다. 또한 나이가 매우 많았다.[4] 키지코스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은 스파르타 함대의 함선 80척 전부를 박살내고 스파르타 지휘관 민다루스를 포함한 1만 이상을 섬멸했으며, 이를 지원하던 상당한 수의 페르시아 육군마저 패주시켰다. 당시 아테네 해군은 스파르타군과 비슷한 수의 병력과 함대만을 가지고 있었고, 지상군 지원같은 것은 당연히 없어 선원들로 육상전까지 수행해야 했으며, 숙련도도 그닥이었고, 재정상황도 열악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도 상당히 흠좀무한 전과.[5]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리산드로스) 2.1-3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10에서 재인용[6] 그는 나중에 그리스 용병들의 힘을 빌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자리를 노리는 내전을 벌였다가 전사한다. 이 때 용병대장이었던 크세노폰은 용병들을 이끌고 그리스로 귀환한 후 페르시아 내부 정세를 기술한 <헬레니카>를 저술한다.[7] 크세노폰, <헬레니카> 1.5-7 /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12에서 재인용[8] 크세노폰, <헬레니카> 1.6.2,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21에서 재인용[9] 크세노폰, <헬레니카> 1.6.24 /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25에서 재인용[10] 아테네 민주주의의 극을 달성한 페리클레스의 아들[크세노폰,] <헬레니카> 1.6.32 /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29에서 재인용[11] 디오도로스 13.101-4,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35에서 재인용[12] 크세노폰, <헬레니카> 1.7.6,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36에서 재인용[13] 탄생, 성인식, 결혼의 의례를 수행하고, 축복하는 제전[14] 크세노폰, <헬레니카> 1.7.11, 도널드 케이건 저, 허승일, 박재욱 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p537에서 재인용[15] 소크라테스는 우연히도(제비뽑기로 이를 선출하기 때문에) 당시 프리타네이스였는데, 그는 몇 년 후 자신의 재판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나는 프리타네이스 중에서 유일하게 그 불법 행위에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 반대하여 투표했습니다. 그리고 연설가들이 나를 기소하고 체포하겠다고 협박하고 여러분이 고집을 부리며 고함을 칠 때, 나는 투옥이나 처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의에 반대하여 여러분 편에 서느니 차라리 법과 정의의 편에 서는 두려움을 감수하겠노라 결심했습니다."라고 하였다.(<변명> 32b-c)[16] 위에서 인용된 소크라테스 재판 사건에서, 소크라테스는 장군들에 대한 불법적 재판에서 자신이 장군들을 옹호했던 경력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도덕성을 배심원들에게 어필한다. 이를 보더라도 이미 당대인들에게 흑역사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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