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영화)
1. 개요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처음 상연된 무성 영화로 국내 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고있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1] 를 통해 영화계에 뛰어든 춘사 나운규가 주연 겸 감독 겸 제작 겸 각본으로 참여하였다.
주연은 나운규, 신일선, 홍개명, 주인규, 이규설, 남궁운 등이며, 엑스트라만 800여명이 나왔다.
2. 내용
주인공은 3.1 운동 당시의 충격으로 미쳐버린 김영진이다. 친구 윤현구는 방학으로 고향에 돌아와 그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그는 여전히 미치광이일 뿐이다. 그러는 사이 현구와 영진의 동생 영희 간에 사랑이 싹트지만, 악덕지주 천가의 머슴이자 왜경의 앞잡이인 오기호가 영희를 범하려 하자 현구와 기호는 싸움을 벌인다. 그러던 중 영진은 낫을 들어 기호를 찍어 버리고 그 순간 그는 정신을 되찾는다. 영진은 끌려 가면서도 '나는 이 삼천리에 태어나 미쳤다'고 외치고, 이 때 주제가인 아리랑이 흐르면서 영화가 끝나게 되어 있다.
나운규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해 수감된 경력이 있을 정도였던만큼 일제강점기 민족주의가 곳곳에 들어간다. 첫 장면에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과 함께 두 동물이 투닥거리는 장면을 도입하여 일제강점기를 은유하였으며, 친일파이자 악덕지주의 하수인이 악역으로 등장하고 이를 살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영진을 '미치광이'로 설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마지막 주인공의 절규와 함께 이 설정을 생각해보면 일제강점기는 '미치광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시대임을 암시한다.
3. 흥행
상영 당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927년에는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여담이지만 나운규는 이후로 <아리랑>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후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며, 재정난 문제도 계속 따라다녔다고 한다. 1945년 8.15 해방 뒤에도 1950년 6.25 전쟁 전까지 전국을 돌며 상영돼 서울에서만 9번이나 개봉됐고, 1952년 9월 <영남일보> 광고에 따르면 만경관에서도 1주간 상영됐다고 한다.
4. 주제가
영화 주제가인 <아리랑>도 크게 인기를 끌며, 한국의 민족정서를 대표하는 노래가 되었다. 국민들 대다수가 잘 모르는 사실인데, 우리가 흔히 부르는 가사 '십리도 못가 발병난다'는 아리랑 노래는 전통 민요가 아니라 나운규가 창작한 노래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5. 후속작
후속작으론 <아리랑 2>, <아리랑 3>이 있다. 물론 이 영화들도 필름과 관련 자료들이 모두 소실된 상태다. 여담이지만 폐병에 시달렸던 나운규는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아리랑 3>를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로 기획하였으나 영화의 촬영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 라는 타이틀도 먼저 개봉한 이명우의 <춘향전>에 뺏기고 영화의 흥행도 대차게 말아먹었다. 거기다가 평단에서도 연일 <아리랑 3>에 대해 혹평을 하였으며,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6. 필름의 행방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필름이 소실돼 '''현재 필름이 없으며,''' 남아 있는 거라곤 1987년에 문헌학자 김종욱이 월간 <로드쇼> 지를 통해 공개한 시나리오와 스틸사진 5장, 1995년에 신나라레코드가 KBS를 통해 공개한 음반만 있을 뿐이다. 영화의 내용도 주연인 신일선의 증언 등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각종 기록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한국 영화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영화라서 많은 영화인들이 국내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자료센터까지 찾아가 필름의 행방을 찾았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80년대 초반에 NHK의 한 프로듀서가 <아리랑 산하를 가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일본 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의 산기슭 허름한 집에서 필름더미에 묻혀 부인과 함께 거주하던 영화수집가 아베 요시시게(安部善重)[2] 가 '아리랑'의 필름을 가지고 있는데 공개를 안 한다고 언급하면서 아리랑 원본 필름이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고, 1993년에 <선데이 마이니치>지에 아베가 아리랑 필름을 가진 사실을 밝힌 인터뷰 기사가 보도된 게 국내 언론에 일파만파 퍼지면서 파장은 더욱 커졌다. 아베의 주장에 따르면 이 영화 필름은 아버지가 가져온 것이라 하며, 실제로 목격한 때가 1935년과 1946년이라 밝혔다. 전자는 어렸을 적 영사기를 갖고 놀며 이 영화를 보다가 부친이 '좌익분자들의 눈으로 본 위험한 영화'라며 보지 못하게 한 적 있었고, 후자는 필름 정리 당시 다른 일제하 조선기 영화들과 함께 우연찮게 발견했으나 이후 필름더미에 섞여 들어갔다고 한다.
아리랑 필름 찾기 시도를 먼저 한 쪽은 북한인데, 1970년대 초반 조총련 영화제작소장 여운각[3] 을 시켜 아베를 만나 북한 우표 세트와 개성 인삼, 시가 천만엔짜리 소니 영상 편집기 등을 들고 가 필름 반환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한국측도 1980년경 정수웅 감독이 아베를 찾아온 이래 나운규의 차남 나봉한 감독, 호현찬 전 영화진흥공사 사장, 아리랑 연구회, 아리랑 되찾기 100인회, 우리 민족영화 발굴 모임 등 여러 민간단체와 언론사들이 찾아왔으나 아베는 '김대중 대통령이 덴노에게 반환을 요청하면 돌려줄 수도 있다'[4] , '통일이 되면 주겠다', '내가 죽고나서 주겠다'며 '아리랑'이 적힌 필름 소장 목록만 넘겨주는 등등 차일피일 시간만 끌다가 흐지부지 되었다. 1992년에는 남북간 필름찾기 경쟁이 치열해지자 아베는 정수웅-여운각-신기수를 남-북-재일동포 대표로 하고 아베의 식민지 때 필름을 찾도록 협정을 맺었는데, 이 과정에서 발굴한 게 1930년대 후반 무성영화 <인인애(隣人愛)> 정도였다.
그리고 아베는 1995년에 필름을 찾으러 온 아리랑 보존회장 김연갑에게 반환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일본은 미국에 패전했지만 적대적이지 않는데, 한국은 왜 일본에 유독 적대적이냐?" 느니, "나운규는 너희(한국)에는 영웅이었겠지만, 우리(일본)에게는 한 사람의 반일분자일 뿐이다." 등 보수 우익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아베의 이런 능구렁이 같은 행태에 분개한 나머지 한때 재일동포 청년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으며, 한국의 한 방송국 취재팀은 허락 없이 멋대로 필름더미를 뒤지다가 아베를 화나게 만들기도 했다. 또, 1998년 시사저널 전화 인터뷰 당시 아베는 “<아리랑> 필름을 발견하더라도 ‘일제 시대에 수탈해간 전리품’이니까 돌려 달라는 한국측에는 절대로 돌려줄 수 없다. <아리랑> 필름이 발견되면 즉각 불태워 버리겠다”라는 극언을 퍼붓기도 했다. (참고 1, 참고 2, 참고 3)
이렇게 양국간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흐지부지 된 채로 결국 2005년 2월 11일에 그가 상속인 없이 사망하고 나서 필름들은 일본 문화청에 귀속됐고, 일본 국립필름센터로 넘어가고 난 뒤 소장품을 조사해 봤으나 조사 결과 아베의 자택에서 필름이 발견되지 못했고, 이후 2010년에 김연갑 씨가 일본 국립필름센터를 다시 방문한 결과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김연갑은 아베가 나봉한에게 "오사카 인근 섬 3~4곳에 필름이 있을 것"이란 말과 아베와 같이 필름을 가진 사람이 고베에 있다는 주장으로 보아 제3의 장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게다가 북한에도 아리랑 필름이 남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었으며 2016년에 광복 직후인 1946년에 아리랑을 보았다는 미국군인 테프로의 증언이 나오면서 미군정기 미군이 아리랑 필름 복사본을 가져갔을 것이란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7. 여담
1954, 1957, 1968년에 세 차례 리메이크가 되었는데, 이강천과 김소동 감독이 각각 맡은 1954~57년작은 시대적 배경을 적용해 북한군이 갈등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유현목 감독의 68년작은 원작 플롯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한편 나운규가 본래 항일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본문의 중반 이후에 나와 있듯 검열을 피하기 위해 모호성을 삽입(+ 변사의 재량을 활용)했을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이는 나운규 영화의 문제라기보다는 1920년대 소위 문화통치의 파급을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8. 참고 자료
[1] 경성 혼마치(현 서울 충무로)의 모자점 '요도야(淀屋)' 주인 요도 토라조(淀虎藏)가 1910년에 설립한 영화사로, 1926년에 첫 작품 <농중조>를 제작했다.[2] 이 사람이 아리랑 이외에도 한국, 일본이나 동남아 등지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모으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여운각에 따르면 우표 수집광이기도 했다. 부친 아베 카나에(安部鼎)는 교토부립의대 출신으로, 영화에 흥미가 많아 일제강점기인 1919년부터 1930년까지 경찰 촉탁의사로 한국 호남지역에서 전염병 전문의로 활동하며 홍보영화를 제작하게 되어 조선의 영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이들에게 제작비를 대주고 회수가 안될 때는 필름으로 받으며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본인은 태평양전쟁 시기에 군속으로 일하면서 필름을 압축시켜 폭약 실험용으로 사용했고, 그런 목적으로 조선이나 대만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거하여 이를 1945년 패전 직후 전쟁미망인회로부터 오락용으로 수집한 필름들을 자신과 동호인들이 불하를 받아 보관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던 바 있다. 그러나 죽고난 후 문화청이 유품들을 파악해보니 상당수가 일본 영화였는데, 영화 수집가들 사이에선 '전설의 수집가'로 일컬어졌다.[3] 몽양 여운형의 6촌 동생.[4] 그러나 1998년 시사저널 보도 당시 아베와의 전화 인터뷰에 의하면 아베 본인은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