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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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一仙
일제강점기의 배우, 가수
1912년 9월 21일-1990년 6월 3일
'''조선의 애인'''
1. 생애
1912년 9월 21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신용복의 1남 3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신삼순(申三順).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오빠인 신창운의 집에서 자라며 동덕여학교 보통과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신창운의 강권으로 5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1924년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배우가 되었다.1959년 10월 30일 동아일보 기사
신일선의 오빠 신창운은 원래 순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3.1운동 당시 일본 순사를 때려 구속되었으나 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그를 양자로 삼으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형무소에 있던 동안 고문이라도 당해 정신이 어떻게 된건지 이후 성격이 180도로 변한 그는 흑화하여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는데 그러던 중 그는 조선극장에서 공연하던 조선예술가극단의 이혜경이라는 여배우에게 한눈에 반하게 되었는데, 이혜경과 관계를 맺고 싶다는 생각에 빼어난 용모에 노래와 춤에도 어느 정도 소질이 있었던 막내 여동생 삼순을 강제로 극단에 입단 시키고, 자신은 매니저라는 명목으로 동생의 곁에 붙어 다녔는데, 이 막내 여동생 삼순이가 바로 신일선이다. 배우가 된 후 신일선으로 이름을 고쳤다.
신창운의 불순한 목적은 성공이었다. 이혜경과 가까워지는 데 성공하고, 급기야는 동거까지 하게 되었는데, 당연히 소문이 좋지 못하게 났고, 공연 때 마다 관객들과 단원들은 그들을 보며 수근거렸다. 자연히 극단의 단결력은 날로 떨어져 갔고, 결국 극단에서는 부산공연의 실패를 구실로 삼아 신창운과 신일선을 극단에서 쫓아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신일선은 헤화학원에 입학하여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했지만, 무대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한 그녀는 함흥의 문수성극단에 들어가 다시 배우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1] 한편 나운규는 <아리랑>에 출연할 새로운 신인 여배우를 찾고 있었는데 나운규와 친했던 여배우 복혜숙은 함흥에 갔다가 우연히 문수성극단의 공연을 보게 되었고, 함흥에 노래와 춤을 잘하는 여배우가 있으니 한 번 찾아가 보라고 나운규에게 권유하였다.
나운규는 당장 함흥으로 15세의 어린 여배우를 보기 위해 달려갔는데, 공교롭게도 나운규는 이미 부산에서 그녀의 공연을 한 번 본적이 있었고, 그 당시에도 이미 신일선을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문수성극단에서는 극단의 최고 스타로 인기를 끌고 있는 신일선을 내보낼 수 없었고, 그 때 까지도 매니저라는 명목으로 거머리처럼 신일선의 곁에 붙어 있던 오빠 신창운과 문수성극단의 단장 문수일 사이에서는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는데, 싸움은 점점 커져 급기야는 칼부림 까지 일어나고야 말았고, 이 소동을 틈타 나운규는 신일선을 데리고 그냥 무작정 경성으로 도망쳐 버렸고, 이런 우여곡절의 과정 끝에 그녀는 결국 뒷날 그녀의 최고의 작품이 되는 <아리랑>에 출연할 수 있었다.
<아리랑>에서 나운규가 연기한 주인공 영진의 여동생 영희 역을 연기한 신일선은 영화연기가 무엇인지도 몰라 그저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는식으로 어설프게 연기를 하였으나 그래도 정작 영화가 완성되자 타고난 비주얼이 워낙 청초했었고, 또 영화가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아리랑> 한편으로 신일선은 일약 조선의 애인이라 불리며 스타가 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국민 여동생이라고 할까?
<아리랑> 이후 이경손 감독의 <봉황의 면류관>, 나운규 감독의 <금붕어>, <들쥐>[2] , 김수로 감독의 <괴인의 정체>, 심훈 감독의 <먼동이 틀 때>[3]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1926년과 1927년 두해 동안 제작된 조선영화가 총 16편이었는데 그 중 7편에 신일선이 주연을 맡을 정도로 그야말로 신일선의 최전성기 였다.
이렇게 그녀의 인기가 넘쳐나다 보니 16세의 어린 여배우는 당시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는데 <봉황의 면류관>의 이경손 감독은 그녀를 생각하며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고, 박덕양이라는 사람은 그녀를 짝사랑한 나머지 급기야 기관차에 몸을 던져 자살까지 하는 흑역사도 있었다. 신일선은 <아리랑>에 출연한 이래 300여통이 넘는 팬레터를 받았는데, 팬레터의 대부분은 남자들에게서 온 것이었고, 그 편지의 내용들은 대개가 지저분한 구애 문구 뿐이었다.
한강변에서 나운규의 <금붕어>를 촬영하면서 발이 미끄러져 물에 빠져 하마터면 익사할뻔 하는 큰 사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 사고를 두고 시중에서는 신일선이 물에 빠져 자살하려 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이렇듯 화려한 전성기를 보내던 신일선은 1927년 음력 9월 뜬금없이 호남의 부호 양승환과 결혼하면서 연예계를 돌연 은퇴하는데, 평소에도 20세를 넘기기 전에 시집을 가겠다고 말해왔었던 그녀였지만[4] 이 결혼은 상당히 뜬금없는 결혼이었는데, 이 뜬금없는 결혼으로 이후 그녀의 삶은 끝없는 어둠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사실 이 결혼은 신일선이 원하지 않은 결혼이었는데, 신일선의 오빠 신창운이 양승환에게 돈을 받고 신일선을 팔아 버린 것이었다.[5]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돈에 팔려 결혼을 한다는 것 자체도 한편의 막장 드라마 였지만, 더 막장 드라마 같은 일들은 이후에도 계속 벌어지게 된다.
우선 나중에 알고 봤더니 양승환이라는 작자는 애딸린 유부남이었고,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일선은 "광대 며느리가 들어오면 집안이 망한다."고 결혼을 극구 반대하던 시어머니의 모진 학대와 구박을 견뎌내며 지옥과도 같은 시집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도 양승환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게 된다.
그러나 미두[6] 에 손을 대기 시작한 양승환이 사기꾼에게 속아 전재산을 탕진하게 되고, 결국 신일선은 시누이의 집에 얹혀 사는 신세가 되었고, 급기야는 자살까지 기도하게 된다. 그렇지만 다행히(그녀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안타깝게도) 죽지 못했고, 결국 그녀는 남편이 없는 틈을 다 경성으로 도망치게 된다.
그렇게 상처 밖에 남지 않은 7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낸 신일선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은 결국 연예계 밖에 없었다. 안종화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7] , <은하수에 흐르는 정열>에 출연하는 것으로 영화출연을 재개했으나, <아리랑> 으로 얻은 어리고 가냘픈 누이동생의 이미지는 더이상 지속되지 않았고[8] , 설상가상으로 연기력에 있어서도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데다가[9] 영화계의 판도도 7년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나운규는 더 이상 예전의 나운규가 아니었으며, 신일선이 있던 자리는 전옥[10] , 문예봉, 김신재, 김소영 같은 배우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일선이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는건 불가능했다. 궁여지책으로 신일선은 포리돌 레코드에서 음반을 취입하여 가수로 변신했지만, 이 역시 신통치 않았으며, 나운규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영화 <아리랑3>[11] 에 출연하였으나 영화는 흥행에 크게 실패하였고 평단에서도 혹평에 시달리며 연일 가루가 되도록 씹혔다.[12] 이후 나운규는 <칠번통소사건>[13] 라는 영화를 한 번 더 말아 먹고, <오몽녀> 라는 영화를 유작으로 남긴채 1937년 8월 9일 타계한다.[14]
나운규가 죽자 신일선은 결국 연예계를 다시 은퇴하였다. 이후 생활고 때문에 기생이 되었다가[15] , 유곽포주의 첩으로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16] 그러나 첫남편인 양승환이가 죽었기 때문에 자식들과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신일선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난게 아니었다. 둘째 아들이 일본군에 끌려가 죽었고, 유일하게 남은 큰아들 조차 한국전쟁때 그만 헤어지고 말았다.
1957년 나운규의 타계 20주기를 맞아 <아리랑>이 리메이크 되었고, 연출을 맡은 감독 김소동은 잠적한 신일선을 찾기 위해 신문광고를 내었고, 약 20년 만에 신일선은 리메이크 된 <아리랑>에 특별출연 하는 것으로 오랜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를 계기로 전쟁 중에 헤어진 큰아들과도 상봉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선술집,[17] 여관등을 운영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한국전쟁 전에 평택에서 결혼한 세번째 남편의 사업도 실패하면서 경제적으로 굉장히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건강 까지 나빠져 1968년부터는 다시 은둔 생활에 들어갔고, 1977년에는 한 차례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고, 이후 불가에 귀의하여 암자에서 말년을 보내던 신일선은 1990년 6월 3일 영면하였다.
2. 기타
1980년대 즈음, 신일선의 불행한 말년[18] 은 언론을 통해 보도 되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는데, 이로 인해 뜻하지 않은 수혜를 본 사람이 있으니 바로 문예봉이다. 월북한 문예봉은 1960년대 말 숙청 되어 안주협동농장으로 쫓겨 났으나, 신일선의 소식을 접한 북한에서는 문예봉을 잘 대해주어 선전공작에 이용하고, 신일선을 불행하게 방치한 남한을 비난하기 위해 문예봉을 복귀 시켰고, 이후 김일성과 김정일 돼지부자에게 충성을 다 바친 문예봉은 북한에서 죽을 때 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19] 신일선의 사연이 보도 되지 않았다면 복귀하지 못하고 안주협동농장에서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일선은 <아리랑>의 배우로서 나운규와 한국 영화사 초창기에 대해서 많은 증언을 남겼다. 이는 오늘날 나운규와 그의 영화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20] 한편, <아리랑>을 나운규가 연출한게 아니라 일본인 감독이 연출했다고 주장하는 뇌물수수 범죄자 조희문에 따르면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면서 남긴 증언에는 잘못된 기억이 적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1] 문수일은 문예봉의 아버지다.[2] 어떤 남자가 악덕부호의 폭력과 금력으로 연인을 빼았기는데, 결혼식날 들쥐라고 불리는 정의의 청년이 결혼식장에 나타나 폭력배를 물리치고 신부를 다시 찾아 잃어버린 연인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의 액션활극이다.[3] 감옥에서 출소한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여자와 여자의 연인을 괴롭히는 불량배와 결투를 하다 불량배를 죽이고 감옥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의 액션활극이다.[4] 당시에 사회통념으로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5] 신일선을 양승환에게 팔도록 옆에서 신창운을 꼬드긴 사람이 바로 심영이라고 한다.[6] 일종의 쌀 선물거래인데,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사실상 시세를 기반으로 하는 투기, 도박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걸로 패가망신한 사람들 엄청 많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4992&cid=46630&categoryId=46630[7] 이 영화는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필름이 보존되어 있는 영화들 중에서 제작년도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즉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 또한 신일선의 출연작 중 현재 유일하게 남겨진 작품이다.[8] 당시 <청춘의 십자로>를 보던 관객들은 영화에서 담배를 피우며 남자를 유혹하는 그녀를 보고 충공깽의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김유정이나 김소현 같은 아역 스타들이 은퇴했다 10년만에 복귀한 영화에서 배드씬을 찍는 뭐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9] 심지어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준 나운규 조차 한 잡지에서 "그에게는 교양이 부족하다. 보통 학식도 동덕여학교를 3년급까지인가 다녔다니까, 충분하다고 볼 수 없는데 더구나 극예술에 대한 지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옛날에는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옛날의 환영이란 얼굴에 대한 환영이 대부분이었다. 인격이나 배우로서의 기량에 대한 환영이 아니었다. 시대는 나아갔다. 이제는 얼굴만 가지고 명배우 노릇할 때는 이미 지나갔다" 라고 가열차게 깠다.[10] 최민수의 외할머니[11] 폐병에 시달리던 나운규는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이 영화를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로 기획하였으나 영화의 촬영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조선 최초의 유성영화 라는 타이틀도 이명우의 <춘향전>에 뺐기고 영화의 흥행도 대차게 말아먹었다. 안습..[12] 매일신보에서는 "신일선의 재기는 석일의 발랄했던 신선미를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 그 평면적인 연기도. 그래도 재기를 꾀하는 것이 일종 연민의 느낌을 주었다." 라고 가열차게 깠다.[13] 유랑극단의 여배우가 아편소굴에 팔아 넘겨지자 우리의 주인공(?) 나운규가 악당들을 격파하고 여배우를 구해 다시 유랑길에 오른다는 내용의 액션활극이다.[14] <칠번통소사건>과 <오몽녀>는 신일선의 출연작이 아니다.[15] 당시에는 여배우가 기생이 되는 일이 흔한 일이었고, 기생이 여배우가 되는 일도 흔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6-70년대 까지만 해도 연예계에서 일한다고 하면 화류계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세월이 지나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많이 개선되었다[16] 위키백과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나 출처가 없으므로 사실여부는 불분명하다.[17] 시인인 서정주는 자신의 수필 '가을이면 생각나는 영화’에서 1960년대 후반기 신일선이 운영하던 술집을 방문했었던 경험을 회고하기도 했다.[18] 재혼하여 얻은 아들이 미국에서 적은 액수나마 생활비를 보내주었으나 병원비를 감당하기에도 부족한 액수였고, 결국 돈이 없어서 치료도 제대로 못 받는 형편이었다고 한다.[19] 문예봉의 팔순잔치 상을 김정일이 직접 하사(?)했을 정도다.[20] 나운규의 영화의 필름이 남아 있는 작품이 없고, 그의 영화를 보았던 세대들도 다 죽고 없는 요즘에는 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