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나운규
羅雲奎'''

'''생몰
년도'''

1902년 10월 17일 ~ 1937년 8월 9일
(34세)
'''출생지'''
대한제국 함경북도 회령시 회령읍 이동
'''사망지'''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현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 570 망우역사문화공원)
'''본관'''
나주 나씨
'''별칭'''
춘사(春史)
'''직업'''
독립운동가, 영화인
'''소속'''
대한국민회
[clearfix]
1. 개요
2. 활동
3. 아리랑
4. 성씨
5. 기타


1. 개요


[image]
교과서에 나운규 사진이 실려있다면 대부분 이 사진이다.
[image]
아리랑 2편의 스틸[1].
주인공 김영진이 오기호를 낫으로 찍어버리기 전 장면. 이 스틸컷 하나로 나운규의 연기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2]
일제강점기 한국의 영화 감독이자 배우. 호는 춘사(春史). 주제가 아리랑의 창작자이기도 하다.

2. 활동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읍 이동#에서 구한말의 군관을 지냈던 나형권(羅亨權)[3]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며 활동하거나 홍범도가 이끌던 독립군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4년에는 일본 자금으로 돌아가던 영화사 '조선 키네마'에 들어가 배우로 데뷔했다. 처음에는 엑스트라 배역만 맡다가 '농중조'에서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해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나도향의 단편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벙어리 삼룡이'에서 주인공 삼룡이역을 맡기도 했다.
1926년에는 직접 메가폰을 잡아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면서 스타급 감독으로 떠올랐고, 이 영화는 조선 영화의 황금기를 불러왔다. 그런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영화판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다는 평가를 듣고 이후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된 조희문이라는 인간은 "아리랑은 나운규가 만든 작품이 아니라 일본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라고 혼자 주장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다. 영화 아리랑은 애초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에 제작된 반일 영화였기 때문에 심의를 통과시키기 위해 일본인 이름으로 심의를 넣어 무삭제로 통과시킨 것이었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후 제작한 작품들은 심의 통과가 어려워진데다, 심의 통과를 해도 가위질이 엄청나게 당하는 등 영화 제작을 하면서 끊임없이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운규는 조선 키네마 영화사에서 독립하여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으나 여전히 심의 통과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통속적인 영화나 그동안 자신이 영화에서 보여줬던 정서와 동떨어진 일본 영화에 출연하는 등 어렵사리 활동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영화판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의 일환으로 작은 극단 소속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대표작이었던 아리랑 후속작으로 아리랑 2편과 3편을 제작하기도 했으나, 1편만 못한 후속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실패했다. 특히 3탄은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유성 영화로 제작 되었는데, 여러모로 유성 영화로서의 수준도 좋지 않았던 듯.
그렇게 영화인으로서의 경력이 끝나는 듯 했지만, 천만 다행히도 사망 직전 개봉한 영화 오몽녀가 대흥행하면서 영화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특히 기존의 작품들은 제작, 시나리오, 감독, 주연 등을 혼자 다 했다면, 오몽녀는 오로지 감독으로만 참여하여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난치병이던 결핵에 걸려 36세의 나이로 1937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 후 홍제동의 한 화장장에서 장례를 하고 한 암자에 안치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1993년 동료 영화인 윤봉춘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후에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나운규를 기리기 위해 한국영화감독협회 주관으로 1990년에 한국 영화/영화인을 대상으로 하는 '''춘사영화상'''이 제정되었다. 목록 특이한 점은, 그 해에 춘사영화상을 받을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면 시상하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어, 2014년에는 감독상 수상자가 없었다.
나운규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 나봉한도 1960~70년대에 영화감독으로 활동했다.
영화 아리랑 개봉 90주년을 맞아 나운규 사망 후 여배우들이 썼던 추모글이 최초로 공개되었다. #

3. 아리랑


나운규는 1926년 개봉한 영화 <아리랑>에서 주제가인 '아리랑'을 단성사 음악대와 함께 작곡, 작사하였다. '아라리',라는 노랫말을 담은 민요는 각 지역마다 널리 불리워지고 있었고 종류가 많으나,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해외에도 소개되고 있는 것은 나운규가 작곡, 작사한 '본조 아리랑(주제가 아리랑)' 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뒤, 이 노래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즐겨 불렀다는데, 아리랑이 만들어진 유래에 대해 나운규 본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기자 曰 : ​

“한동안은 그것이 벌써 10년은 되었지만, 그때 서울이든 시골이든 어디에서든지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즐겨 부르던 아리랑의 이 주제가를 누가 지었어요?”

나운규 曰 :

“내가 지었소이다. 내가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서 회령까지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철로 길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을 울려서 길 가다가도 그 노랫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그리고는 애련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외어 보았답니다. ​(……)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어서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나운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고향 함경북도에서 살던 어린 시절 남쪽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부르던 구슬픈 곡조를 기억하고, 여기서 모티브를 얻어 멜로디는 단성사 음악대가, 가사는 본인이 쓴 창작곡이라는 것이다. 흔히 나운규 아리랑을 '경기 아리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영화가 개봉된 서울이 경기도 지역에 속하기 때문이고, 또한 남쪽에서 올라왔다는 노동자들이 당연히 경기도 출신이겠거니 하는데서 이름 붙인것이다. 하지만, 그 노동요가 현재 그 흔적도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오직 추정속에서만 존재하는 이상, 나운규의 아리랑은 그가 작사 작곡한 순수 창작곡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1940년대 말에, 성경린·장사훈이 최초의 민요 개론서인 『조선의 민요』에서도 나운규 아리랑을 '본조 아리랑'이라고 체계화시켜 소개하고, 그것이 다른 지역의 아리랑과는 달리 나운규 개인의 노력에 의해 독창적으로 유래한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한국민속대백과


4. 성씨


참고로 실제 성은 ''씨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라운규'라고 하는 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라씨를 나씨로 기록하던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때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나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나운규'라고 쓰며 살았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도 많은 라씨들이 행정상 나씨로 살고 있다.[4]
2007년 법이 개정되어 대법원이 호적 예규 변경을 통해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성씨에 예외를 둠에 따라 나씨를 라씨로 정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청한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신청할 때 아버지 호적까지 라씨로 바꿔야 하는 규정이 있어 행정상 복잡한 부분도 있기에 대부분의 라씨들이 안 했다고 한다.[5] 자세한 사항은 나(성씨) 문서 참고.

5. 기타


[image]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나운규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강렬한 시선'''이다. 딱 봐도 포스가 느껴진다. 실제로 같은 영화사 소속의 선배 배우가 이 눈빛을 보고 "너는 악역이나 범죄자 같은 배역이 어울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image][6]
그런데 의외로 평상시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윗사진처럼 강렬하지는 않은 편이다.
한편으로는 무절제한 여자관계로 인해 비난도 받았다. 가정이 있었지만 오향선이라는 기생과 동거하였으며, 심지어 기생과 뱃놀이를 하기 위해 촬영 장비들을 팔았다는 루머도 있을 정도였다.[7] 이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도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나운규는 결혼을 하고서도 윤마리아라는 여자와 사귀었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던 친일파 허진종(許振鍾)[8]의 협박과 구타 등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윤마리아와 헤어졌다.
나운규의 말기 작품들에 출연했던 원로배우 전택이가 남긴 증언에 의하면, 어떤 여성이 배우가 되고 싶어서 나운규가 묵는 여관까지 찾아 왔는데, 그러다가 어느새 나운규와 눈이 맞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 여성의 남편이 격분하여 여관에 쳐들어와 각목을 휘두르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전택이가 일본도를 휘두르며(...) 나운규를 보호한 덕분에 나운규가 간신히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고. 그야말로 평가가 카멜레온처럼 다양하다. 어쩔 때는 천재적인 영화감독, 어쩔 때는 여자관계가 문란했던 사람, 어쩔 때는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던 독립운동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갔다.
1991년 MBC에서 광복절 기념으로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특집 2부작 드라마를 방영했다. 이덕화가 나운규 역으로 출연했다.
[1] 흔히 아리랑 1편의 스틸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아리랑 2편의 스틸이다.[2] 모르겠다면 '''저 주인공과 하나된 광기에 찬 눈을 보자.'''[3] 1869년 1월 18일 ~ ?. 구한말 부교(副校)로 있었다가 군대해산 이후 교원검정에 합격하여 1907년 7월 23일부터 그해 9월 17일까지 공립장진보통학교 부교원으로 재직, 9월 26일 공립회령보통학교 부교원에 임명되어 11월 28일 동교 본과 부훈도에 임명되었으며 1909년 12월 29일까지 근무했다.# 한편, 1914년 5월 28일 이전에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일종의 종두의사)으로 근무한 사실이 있으며 그해 9월 4일 의사면허 1499호로 회령군 부남면 이리에서 개업한 사실이 나타난다.# 그밖에 1910년 2월 5일 대한흥학회에 의연금 50전을 기부한 사실로 보아 당시 애국계몽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4] 라미란의 경우에도 과거 데뷔 초 언론에서 '나미란''이라고 표기한 적이 많았다.[5] 라미란의 경우에는 이를 신청하여 이후 언론에서 나미란이 아닌 라미란으로 표기되게 된 것.[6] 세상을 떠나기 불과 두 달 전인 1937년 6월에 찍은 사진.[7] 오향선은 유신방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까칠한 편이어서 당대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좋지 않았다. [8] 일본 헌병 보조원으로 악명이 높았던 사람이다.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마을주민들뿐만 아니라 독립군도 그를 죽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중에 허진종은 독립군의 함정과 주민들의 모함으로 일본의 신임을 잃고 그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하다가 가차없이 버려졌다. 이후 윤마리아와도 헤어졌으며, 그렇게 그를 싫어하고 원망하던 사람들에게 쫓겨 노숙 생활을 하면서 일본에 대한 원망과 증오, 분노를 품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결국 비참하게 길바닥에서 죽었고, 그의 시체를 발견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실컷 침뱉고 짓밟은 다음, 강물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또는 어떤 야사에서는 일본 밀정이나 마을 주민 또는 독립군이 준 독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독살당해 그 시체가 까마귀들의 밥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