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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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노하몬(鷹の羽紋)
'''이름'''
아소씨(阿蘇氏)
'''씨성'''
아소군(阿蘇君)
'''시조'''
하야미카타마노미코토(速瓶玉命)
'''출신'''
우지 씨(宇治氏)[1]
'''종별'''
사가(社家), 무가(武家), 화족(남작)華族(男爵)
'''본관'''
히고 국 아소(肥後国阿蘇)
'''저명한 인물'''
아소 고레나오(阿蘇惟直), 아소 고레즈미(阿蘇惟澄)
'''링크'''
아소씨 블로그 일본어 위키
1. 개요
2. 상세
2.1. 아소씨의 발전
2.2. 시대의 풍파에 대응하다
2.3. 남북조(南北朝) 전쟁
2.4. 아소 고레즈미의 활약
2.5. 아소씨의 내부항쟁
2.6. 전국시대의 서막
2.7. 덧 없는 난세
2.8. 아소씨의 몰락 그리고 다시 일어서다
3. 관련 문서


1. 개요


아소씨는 히고(肥後, 현 구마모토현)에있는 이치노미야(一の宮) 신사[2]의 장을 맡는 대궁사직(大宮司職)을 고대부터 맡아온 명가이다. 『아소궁유래기(阿蘇宮由来記)』에 의하면 선조는 진무 천황의 황자 가무야이미미노미코토(神八井耳)로 2대 천황 스이제이 천황(綏靖天皇)의 동복형제이다. 그 후 가무야이미미노미코토의 아들 다케이와타쓰노미코토(健磐龍命)가 아소에 영지를 받아 아소쓰히코(阿蘇都彦)라 칭하고 아소에 토착해 아들 하야미카타마노미코토(速瓶玉命)가 아소고쿠조(阿蘇国造)에 임명되어 아소 성을 받았다고 한다. 『고사기(古事記)』에 보이는 「아소기미?(阿蘇君)」는 아소쓰히코라는 말도 있다. 이런 이유로 아소씨의 시작은 신화로 채색된 신들의 후예라는 말이 어울리는 가문인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아소씨는 이미 일본이 통합되기 이전부터 아소지방의 수장이었고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들어선 후에 씨성제도에 의해 아소 성을 칭하며 히고(肥後)의 아소고쿠조에 임명되어 아소지방을 지배했다. 또한 건령제로 인해 군을 다스리는 직책을 세습하여 화산 아소산을 받들어 모시며 아소신사를 건설해 대대로 신사의 제사를 맡는 일족이 되었다.

2. 상세



2.1. 아소씨의 발전


고대 화산활동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어 화산의 신은 국가의 재난을 예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왔다. 또한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는 음양도에 의해 길흉을 점치고 기도불교가 성행하였고 천재지변을 예지하는 화산신앙이 성행하였다. 아소신사는 화산신의 제사를 맡는 신사로 중요시되었고 이윽고 지방신이 아닌 국가의 신으로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한편 아소씨는 이런 상황 속에 아소산의 이변을 관찰하고 중앙에 보고하여 신의 지위를 상승시켜 중앙귀족과의 친분도 깊어졌다.
이리하여 아소씨는 신사의 사제와 건설을 담당하는 신주(神主)에서 신사의 땅까지 관리하는 대궁사가 되었다. 이 대궁사직은 엔기(延喜)년간(901 ~ 922)의 도모나리(友成) 때 임명된 것으로 추정되며 아소 도모나리는 다카사고(高砂)라는 요쿄쿠(謡曲)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대궁사직의 임명은 진기관(神祇官)을 경유해 다이조관부(太政官符)가 발행하고 고쿠시(國司)에 의해 집행되는 국가적인 권위를 갖춘 것이다. 즉 아소씨는 대궁사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 지위는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소신사의 땅을 무라카미 겐씨(村上源氏)를 통해 황실에 기증하고 황실령 장원으로 만들어 아소장원의 장관직을 받았다. 거기다 고사신사(甲佐神社), 겐군신사(健軍神社), 고노우라신사(郡浦神社) 등을 자신의 세력하에 두면서 장원의 확대를 꾀했으며 아소씨의 세력은 히고평야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아울러 난향(南郷)의 10개촌을 사유지로 만들어 이것을 기반으로 대궁사를 두령으로 하는 무사단이 형성되었다.
황실령의 아소장원은 영지의 주인은 무라카미 겐씨였기 때문에 헤이씨(平氏) 정권이 성립된 후 헤이씨는 아소씨를 경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거병했을 당시 아소씨가 기쿠치씨(菊池氏)와 오가타씨(緒方氏) 등과 같이 요리토모측에 가담한 요인이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때의 기록인 『오즈마카가미(吾妻鏡)』에는 아소 고레야스?(阿蘇惟泰)가 난향 대궁사 고레야스라 기록돼 있고 이것은 고레야스가 무사단의 중심점이 되어 난향에 저택을 가진 영주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머지않아 고레야스의 아들 고레쓰구(惟次) 때인 1207년에는 난향에서 야베(矢部)로 옮겨갔고 1222년에는 이와오성(岩尾城)과 오이토지성(愛藤寺城)을 쌓아 야베가 아소씨의 본거지가 되었다.

2.2. 시대의 풍파에 대응하다


가마쿠라 막부 싯켄(執権)인 호조씨(北条氏)는 조큐의 난(承久の乱)을 계기로 자신들의 지위를 부동의 자리에 올려놨다. 호조씨는 히고의 전통적인 호족으로 광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아소씨의 세력을 소멸시키고 아소씨를 가신단에 넣으려 하였다. 호조씨는 무라카미 겐씨와 아소씨의 사이에 끼어들어 서가를 독립시키는 등 대궁사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후 호조씨에 의해 아소씨 분열 정책이 강화되어 아소씨는 가문의 대가 바뀔 때마다 소동이 일어났다.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와서는 서가연합군이 형성되었고 이것은 종가인 대궁사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 되어 일족의 내부관계는 점점 복잡해졌다.
그리고 얼마 후 겐고의 변(元弘の変)이 일어나 아소 고레나오(阿蘇惟直)는 기쿠치 다케토키(菊池武時)와 같이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칙서를 받아 진제이탄다이(鎮西探題) 호조 히데토키(北条英時)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이 누출되어 아소 고레나오와 기쿠치 다케토키는 오토모(大友)와 쇼니(少弐)와 연락하여 거병하려 하였으나 오토모와 쇼니는 그들을 배신하고 거병하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거병한 아소 고레나오와 기쿠치 다케토키는 단다이의 저택을 공격했지만 중과부적으로 기쿠치 다케토키와 요리타카(頼隆)가 전사하고 고레나오는 야베로 도망가 재기를 노렸다.
단다이 히데토키는 즉시 호조 다카마사(北条高政)를 대장으로 토벌군을 보내 기쿠치성과 아소 대궁사 저택을 공격하여 고레나오는 기쿠치 다케토시(菊池武敏)와 같이 휴가(日向) 구라오카성(鞍岡城)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이곳도 다카마사의 공격을 받아 구라오카성은 함락되고 성의 병사들은 전멸했고 고레나오와 다케토시는 구사일생으로 겨우 구라오카산으로 도망쳤다. 아소씨가 반 호조적 행동을 취한 것은 호조씨의 압박을 물리치고 자신의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이유였다.
그 후 막부의 유력무장인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고다이고 천황측으로 전향하여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가 있는 로쿠하라를 함락했고 규슈(九州)에는 진제이탄다이 호조 히데토키가 쇼니와 오토모씨에게 공격당해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였다. 진제이탄다이 공격에 아소씨와 기쿠치씨는 아직 피해가 회복되지 않아 참전하진 못하였다. 하지만 겐무신정(建武新政)은 아소씨의 공을 인정하고 옛 영지인 아소군의 영유와 고사, 겐군, 고노우라의 사원영지도 아소씨의 직접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거기다 분고(豊後), 지쿠젠(筑前) 등에 지토직(地頭職)을 얻었다. 기쿠치씨도 옛 영지를 안도받고 다케시게(武重)는 히고노카미(肥後守)에 임명되었다.
1335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에서 신정부에 반기를 들어 천황은 즉시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를 대장으로 토벌군을 보냈다. 이 진영에는 기쿠치 다케시게, 아소 고레토키(阿蘇惟時), 우에시마 고레요리?(上島惟頼), 아소품유정(阿蘇品惟定) 등의 아소 일족과 오토모 사다토시(大友貞載) 등의 규슈 세력도 참가하였다. 하지만 토벌군은 하코네타케노시타 전투(箱根竹の下の戦い)에서 패배하였고 다카우지는 패주하는 정부군을 쫓아 교토(京都)를 공격하였다.

2.3. 남북조(南北朝) 전쟁


교토를 제압한 다카우지는 1336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의 연합군에 패배하여 규슈로 달아났다. 쇼니 요리나오(少弐頼尚)는 다카우지를 아카마세키(赤間関)에서 맞이하여 무나카타신사(宗像神社)로 안내하였다. 한편 아소 고레나오는 기쿠치 다케토시와 같이 다자이후(太宰府)를 공략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고 쇼니 사다쓰네(少弐貞経)를 우치산성(有智山城)에서 전사시켰고 하카타(博多)를 점령했다. 고레나오와 다케토시를 중심으로 하는 규슈 정부군은 다카우지를 토벌하기 위해 북상하여 다타라 해변(多々良浜)에 진을 세웠다. 다카우지군에는 쇼니, 시마즈(島津), 오토모, 우쓰노미야(宇都宮), 치바(千葉) 등이 가세했지만 병력은 압도적으로 정부군이 우세하였다. 정부군의 당당한 포진을 본 다카우지는 자살하려 했지만 동생 다다요시(直義)의 간언으로 용기를 얻어 직접 군을 지휘하여 정부군과 싸웠다.
전황은 정부군이 유리한 전개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북풍이 불기 시작했고 이것은 점점 정부군을 향해갔다. 정부군은 돌풍에 눈을 뜰 수 없게 되어 전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고 거기다 마쓰라당(松浦党)의 배신으로 인해 정부군은 붕괴되었다. 기쿠치 다케토시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퇴각했고 아키즈키 다네미치(秋月種道)는 다자이후에서 자살했으며 아소 고레나오는 동생 고레나리(惟成)와 같이 중상을 입고 히젠(肥前) 오기(小城)로 도망갔다. 하지만 다카우지군이 추격해오자 결국 가신들과 함께 자살하였다.
다타라 해변의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다카우지는 기쿠치씨와 아소씨를 추격했고 규슈를 평정하기 위해 다시 병사를 이끌고 교토로 나아갔다. 이 사태에 정부군은 교토에 있던 아소 고레토키를 사쓰마 슈고(薩摩守護)로 임명하고 다카우지 토벌을 명했지만 너무 늦은 조치였다. 교토로 나아간 다카우지는 셋쓰(摂津)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무찌르고 닛타 요시사다를 패배시킨 뒤 천황을 유폐하여 교토를 장악하였다. 그 후 천황은 요시노(吉野)로 도망가 남조라 하였고 다카우지는 북조를 세우고 아시카가 막부를 열었다. 이렇게 해서 반세기에 걸친 남북조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아소씨는 당주 고레나오와 그의 동생 고레나리를 잃고 종가의 핏줄이 끊겼다. 게다가 형제의 아버지인 고레토키가 교토에 있었고 사위인 고레즈미(惟澄)는 구라오카산에 숨어있는 신세로 아소씨의 존망에 위기가 다가왔다. 다카우지는 아소씨에 교서를 내려 서가인 사카나시(坂梨)의 아들인 마고쿠마마루(孫熊丸)를 대궁사에 임명하여 아소씨를 북조편으로 만들었다. 또한 장남을 잃은 고레토키의 태도도 명료하지 않아 이윽고 야베로 돌아가 대궁사에 복귀하였다. 이후 남북 쌍방의 권유에도 움직이지 않고 중립적 입장을 고수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아소씨는 북조측의 마고쿠마마루와 중립을 지지하는 고레토키 그리고 그리고 남조측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는 고레즈미 3개의 파로 분열되었다.

2.4. 아소 고레즈미의 활약


1337년 고레즈미는 남조세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고사산 정상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규슈탄다이(九州探題)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는 히고에 병사를 보냈고 고레즈미는 기쿠치 다케시게와 같이 단다이군을 이누쓰카바루?(犬塚原)에서 영격하여 잇시키 요리유키(一色頼行)를 전사시키는 승리를 얻었다. 거기다 야베의 북조측의 다이칸(代官)을 추방하고 야베를 회복하였다. 그 후 기쿠치 다케시게는 병으로 쓰러지고 장인인 고레토키는 움직이지 않아 고레즈미는 혼자서 남조를 위해 분전하였다. 그 후 쇼니 요리나오의 공격을 받은 고레즈미는 고전을 면치 못했고 거기다 닛키 요시나가(仁木義長)의 아소군 침략을 막지 못하였다. 1339년 닛키군을 격파하고 오토모군의 노쓰씨(野津氏)를 죽여 승리하고 아소군을 회복하였다.
그 후에도 고레즈미는 남조측에서 활약하여 1341년에는 북조측 대궁사 마고쿠마마루의 난고성(南郷城)을 공격하였다. 이 골육상잔의 싸움에서 고레즈미도 부상을 입었지만 끝내 마고쿠마마루를 처단하였다. 고레즈미의 활약은 아소씨의 분열을 걱정하던 고레토키에게 있어 환영할만한 것이 아니었고 고레토키는 결국 북조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한다.
고레토키는 야베를 점거하기 위해 고사에 들어가 쇼니 요리나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요리나오는 고레토키를 지원하고 히고를 지배하에 넣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다. 이에 대항하는 고레즈미는 쇼니군과 각지에서 싸웠고 1346년 쇼니씨의 공세를 격퇴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쇼니씨와 화친이 성립되었지만 쇼니씨는 오토모씨와 같이 고레즈미를 공격했고 고레즈미는 오토모군을 격퇴시켰다.
1351년 고레토키는 외손자인 고레즈미의 아들 고레무라(惟村)에게 북조 대궁사직을 양도하였고 신사의 영지와 종가 그리고 지토직 등을 주었다. 그리고 2년 뒤 고레토키가 죽고 아소 일족의 신망은 고레즈미에게 쏠렸다.
얼마 후 세이세이쇼군(征西将軍)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과 기쿠치 다케미쓰(菊池武光) 그리고 아소 고레즈미에 의해 규슈 남조측의 세력은 거대해졌고 1361년에는 다자이후를 지배하게 되었다. 고레즈미는 세이세이후(征西府)에서 대궁사직에 임명되었고 고레무라는 산속에 몸을 숨겼다. 이후 십수년에 걸쳐 규슈 남조측의 전성기가 시작되어 고레즈미는 대궁사직을 맡아 마시키(益城)와 아소 양군을 지배하게 되었다.
1364년 죽음이 가까워진 고레즈미는 장남 고레무라에게 대궁사직을 양도하고 남조측에 속한 차남 고레타케(惟武)에게 고레무라에게 복속 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고레즈미에게서 대궁사직을 양도받은 고레무라는 서가에 협력을 구했다. 하지만 세이세이후는 고레무라를 인정하지 않았고 고레타케를 대궁사에 임명하여 아소씨는 다시 두 개의 파로 분열되었다.

2.5. 아소씨의 내부항쟁


규슈의 정세를 주시하던 막부는 1370년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를 규슈탄다이에 임명하여 규슈 남조측과 대치하게 하였다. 규슈에 들어간 료슌은 탁월한 능력으로 서서히 상황을 북조측의 우세로 바꿔놓기 시작하였다. 1376년 아소 고레타케는 기쿠치 다케토모(菊池武朝)와 같이 히젠 고쿠후(国府)에 포진했고 다음 해에는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와 오토모 지카요(大友親世) 등과 히젠 고쿠후 근처의 니나우치(蜷打)에서 대진하였다. 이윽고 양군이 격돌하였지만 병력의 수에서 뒤지는 남조측은 차례로 토벌당했고 고레타케도 기쿠치 다케요시(菊池武義)와 다케야스(武安)와 같이 전사하였다. 고레타케의 뒤는 장남 고레마사(惟政)가 이었다.
이후 규슈 남조측은 힘을 잃어 결국 1392년에 남북조가 통합된다. 규슈탄다이로서 엄청난 공을 세운 료슌도 오우치씨의 모함으로 해임당하고 교토로 소환된다. 료슌의 후임으론 시부카와 미쓰요리(渋川満頼)가 임명되었고 오우치 요시히로가 보좌역에 임명되었다. 기쿠치 다케토모는 이에 저항하지만 1398년 다케토모도 결국 막부에 굴복했고 규슈의 남북조 전쟁도 끝이 났다.
남북조가 통합되었기 때문에 아소씨는 남조계 대궁사와 북조계 대궁사의 가독을 둘러싼 싸움이 계속되었다. 단다이 시부카와씨는 고레무라를 지지하여 히고 슈고에 임명하고 고레마사의 세력은 쇠퇴의 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 후 고레무라는 고레사토(惟郷)에게 대궁사직을 양도하였고 고레마사의 뒤는 고레카네(惟兼)가 이었다. 1417년 막부는 고레사토에게 교서를 내려 그의 입장을 공인하였다. 이것에 반대한 고레카네는 난향의 미나쿠치성(水口城)에서 농성하였고 무력으로 대궁사직을 빼앗으려 했다.
막부의 개입에 의해 무력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후 둘은 소송을 걸어 대궁사직을 얻기 위해 다투었다. 1431년 고레사토는 고레타다(惟忠)에게 대궁사직을 양도했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이후 고레타다는 고레카네의 아들 고레토시(惟歳)를 양자로 삼아 가문을 물려주었고 아소씨가 통합되어 1451년 아소씨는 긴 내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1467년 교토에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일어나 세상은 하극상이 횡행하는 세상이 되었다.
고레타다는 고레토시에게 대궁사직을 양도했지만 정치적 실권은 고레타다가 장악하고 있었다. 서서히 고레타다와 고레토시의 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겨났고 고레토시는 기쿠치 시게토모(菊池重朝)와 손을 잡고 아소씨의 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대항해 고레타다는 일족과 여러 가신들을 규합하여 외부세력과 손을 잡은 고레토시와 고레이에(惟家) 부자를 쫓아냈다. 하지만 이 와중에 고레타다는 병을 얻었고 결국 1485년에 70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 뒤는 아들인 고레노리(惟憲)가 이었다. 고레토시와 고레이에는 기쿠치 시게토모의 지원을 받아 고레노리를 공격하였고 고레노리측은 사가라씨(相良氏)의 지원을 받아 고레토시와 고레이에에게 대항하였다. 양자는 마쿠노히라(幕の平)에서 격돌했고 고레노리측의 대승리로 끝났다.
이 싸움으로 인해 히고 슈고 기쿠치씨의 권위는 급속도로 추락하였고 아소씨는 고레타다계가 대궁사직을 계승하여 세력을 확대해 히고는 전국시대(戦國時代)에 돌입하였다.

2.6. 전국시대의 서막


히고슈고 기쿠치씨는 일족의 내분과 중신의 모반에 어지러워졌고 점전 세력을 일어갔다. 이 혼란속에 다케유키(武運)가 나타나 우도 다메미쓰(宇土為光)의 반란을 진압하고 히고 슈고가 됐지만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 기쿠치씨는 절망에 빠졌다. 다케유키의 뒤는 일족인 마사타카(政隆)가 추대되었지만 오토모씨의 정치적 압력과 가신단의 반항에 의해 당주자리에서 쫓겨났다.
아소 고레노리의 아들 고레나가(惟長)는 유명무실화된 히고 슈고직에 집착하여 오토모씨의 지원을 받아 기쿠치 가신단과 같이 마사타카를 추방하였다. 그리고 고레나가는 동셍 고레토요(惟豊)에게 대궁사직을 양도하고 직접 와이후(隈府)에 들어가 슈고가 되어 기쿠치 다케쓰네(菊池武経)로 이름을 바꾸고 기쿠치씨를 계승하였다. 하지만 슈고는 그저 이름뿐인 직책으로 오토모씨의 괴뢰에 지나지 않았고 가신들의 통제도 생각대로 되지 않아 자포자기한 다케쓰네는 교만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기쿠치씨의 중신들은 다케쓰네를 멀리하게 되었고 결국 1511년 다케쓰네는 와이후성에서 야베로 도망갔다. 하지만 야베에는 대궁사인 동생 고레토요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다케쓰네는 식객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이후 다케쓰네는 시마즈씨와 내통하여 대궁사직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고 1513년 시마즈씨의 지원을 받아 야베를 공격하여 고레토요를 휴가로 추방하였다. 다케쓰네는 장남 고레사키(惟前)를 대궁사에 올리고 이름을 다시 고레나가로 바꾸고 만휴제(万休斎)라 칭하며 실권을 장악하였다.
1517년 가이 지카노부(甲斐親宣)의 지원을 받은 고레토요는 야베를 공격하여 고레나가와 고레사키 부자를 사쓰마(薩摩)로 추방하였다. 대궁사직에 복귀한 고레토요는 내란으로 황폐화된 아소씨의 재건을 시작하였고 이 내란에서 공을 세운 가신들에게 은상을 지급했다. 그리고 가이 지카노부를 필두로 하는 가신단을 재편성하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으며 내정을 정돈하여 아소씨는 센고쿠 다이묘(戦國大名)로의 일보를 걷게 되었다.
한편 고레나가의 히고 슈고직에는 다케카네(武包)가 추대되어 1520년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의 동생 시게하루(重治)가 기쿠치씨에 들어가 히고 슈고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시게하루는 요시아키에 반항을 획책하여 추방되고 히고 슈고는 요시아키가 역임하였다.

2.7. 덧 없는 난세


그 후 히고를 둘러싼 오토모씨와 시마즈씨가 대립하게 되어 아소씨도 큰 영향을 받았다. 1541년 미후네 후사유키(御船房行)가 시마즈씨의 권유에 응하여 고레토요에게 반역을 꾀했다. 고레토요는 장남 고레마사(惟将)를 대장으로 가이 소운(甲斐宗運)을 부관으로 임명해 토벌군을 보냈고 미후네성은 함락되었다. 1543년에는 고레사키와 고레카타(惟賢) 부자가 야베를 침공했지만 만자카 고개(万坂峠)에서 격파당하고 사쓰마로 도망갔다.
이렇게 해서 아소씨는 시마즈씨의 개입으로 내부항쟁을 진압하였고 아소, 겐군, 고사, 고노우라 4개의 신사영지를 시작으로 아소, 마시키, 우토 3군을 지배하는 약 35만석의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1549년 고쇼(御所) 수리비 1만필을 진상하여 고나라 천황(後奈良天皇)에게 종2위(従二位)에 임명되었다. 덧붙여 오토모 요시아키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종사위하(従四位下)로 아소 고레토요의 위치는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1550년 오토모씨에 니카이쿠즈레의 변(二階崩れの変)이 일어나 요시아키가 사망하였다. 이것을 호기로 본 기쿠치씨는 옛 가신과 지쿠고(筑後)의 고쿠슈(国衆)의 지원을 받아 구마모토성(隈本城)으로 복귀하였다. 요시아키의 뒤를 이은 요시시게(義鎮)는 약 2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쿠치씨를 공격해 히고를 완전히 제압하였다. 사가라씨에게 도망간 시게하루는 1554년 요시시게에게 살해당했고 기쿠치씨는 멸망하였다.
기쿠치씨가 없어진 히고는 아소씨와 사가라씨가 쌍벽을 이루었다. 사가라씨는 처음에는 시마즈측에 있었지만 오토모씨의 압력으로 인해 오토모씨의 지해아에 들어가 히고는 오토모씨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1559년 아소씨의 번역을 이룩한 고레토요가 죽고 고레마사가 대궁사가 되었다. 그 후 시마즈씨가 착실히 세력을 확대해 히고도 파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1578년 오토모 요시시게는 휴가로 진군하여 시마즈군과 싸웠지만 미미강 전투(耳川の戦い)에서 괴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전으로 인해 오토모씨의 위세는 땅으로 추락했고 막하에 있던 여러 영주들도 동요하였다. 히고는 히젠의 류조지씨(龍造寺氏)와 사쓰마의 시마즈씨에 끼어 오토모씨와 손을 잡은 아소씨에게 위기가 다가왔다. 이 이소씨의 위기를 홀홀단신으로 짊어진 인물이 가이 소운이다.
가이 소운은 사가라 요시히(相良義陽)와 맹세의 문서를 교환하고 함께 시마즈군에 대항할 것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1581년 시마즈군의 공격에 패배한 사가라 요시히는 시마즈군에게 아소씨 공격의 선봉을 명받아 소운과 싸우게 되었다. 요시히는 맹우 소운을 배신한 죄를 묘켄사(妙見社)에 빌며 출진하였다. 사가라씨와 가이씨는 히비키가하라(響ヶ原)에서 격돌하였고 싸움은 소운의 승리로 끝났다.

2.8. 아소씨의 몰락 그리고 다시 일어서다


아소씨는 사가라씨를 격파했지만 사가라씨가 시마즈씨로 전향한 것은 직접 시마즈씨의 공세를 받아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오토모씨는 쇠퇴의 색이 점점 더 깊어졌고 1583년에 소운의 노력으로 아소씨는 겨우 시마즈씨와 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운과 아소 고레마사가 차례로 사망하고 고레마사에게는 사내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 고레타네(惟種)가 대궁사를 계승하였다. 하지만 고레타네는 병약하여 1584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장남인 고레미쓰(惟光)가 3살의 나이로 대궁사를 계승하였다.
이런 아소씨의 난국의 가운데 가이 소운의 뒤를 이은 가이 지카히데(甲斐親秀)는 소운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인물로 아소씨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상태가 되었다. 소운은 생전에 「창끝을 거두고 다른 성을 버리고 민심을 얻어 3년간 버티면 천하가 정해질 것이다」라고 말하며 병사를 움직이는 것을 경고하였다. 한편 시마즈씨는 어떻게든 아소씨를 공략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런 와중의 1585년 지카히데는 시마즈측의 가산성(華山城)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곧바로 시마즈군의 보복공격을 받아 패배하여 시마즈씨의 아소령 진출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소씨의 영지는 시마즈군에 의해 붕괴 되었고 아소 고레미쓰는 동생 고레요시(惟善)와 같이 야베를 빠져나와 메마루산(目丸山)으로 피난하였다. 아소의 영지는 시마즈의 영지가 되어 아소씨의 배하에 있던 고쿠진슈(国人衆)도 몰락하였다.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정벌이 시작되었고 1587년에는 히데요시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규슈로 들어왔다. 시마즈씨는 히데요시군에게 항복하였고 히고는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가 새로운 영주가 되었다. 아소씨도 영지를 받아 나리마사의 요리키(与力)가 되어 고레미쓰는 고레요시와 같이 구마모토성에 들어가 나리마사의 보호하에 놓였다. 하지만 대궁사로서의 권위는 인정되지 않았고 단순히 신주로서 다른 고쿠슈와 동등한 취급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아소씨의 중세적 권위는 사라졌다.
이후 히고 고쿠슈들의 잇키(一揆)로 삿사 나리마사는 몰락하고 히고는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이분되어 아소 본사의 땅은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가 되었다. 그리고 대궁사 고레미쓰는 구마모토성에 동생 고레요시는 우토성에 억류되었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으로의 출병에 반대하는 우메키타의 난(梅北の乱)이 일어났다. 이 난에 고레미쓰가 관계돼 있다는 모함이 있어 히데요시는 12살의 고레미쓰를 살해하고 아소 대궁사가는 멸망하였다.
히데요시의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 히고는 완전히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가 되었다. 기요마사는 고레요시를 아소 신사 신주로서 아소군에 350석의 영지를 주고 아소씨를 재흥시켰다. 가토씨가 개역(改易) 당한 후 히고 번주가 된 호소카와씨(細川氏)도 이것을 인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소씨는 아소 신사의 신주로서 지위를 보존하고, 메이지 유신 후 남작이 되었다.

3. 관련 문서



[1] 京都府 宇治[2] 현재 아소시에 있는 아소신사(阿蘇神社)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