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 덴노

 



'''
진무 천황
神武天皇
'''
<colbgcolor=#AF001F><colcolor=#C0A73F> '''출생
(추정)'''
기원전 721년 2월 13일(?)
'''사망
(추정)'''
기원전 585년 4월 9일(?) (127세?)
'''능묘'''
나라현 카시하라시 우네비야마우시토능 (畝傍山東北陵)
'''재위
(추정)'''
기원전 660년 2월 18일(?) ~ 기원전 585년 4월 9일(?)
(75년 5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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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F001F><colcolor=#C0A73F> '''한풍 시호'''
진무 덴노(神武 天皇, 신무 천황)
'''화풍 시호'''
카무야마토이와레히코토스메라메코토
(神日本磐余彦天皇)
칸야마토이와레히코노미코토(神日本磐余彦尊)
와카미케누노미코토(稚三毛野尊, 若御毛沼命[26])
사노노미코토(狹野尊)
하츠쿠니시라스스메라미코토(始馭天下之天皇)
이와레비코호호데미코토(磐余彦火々出見尊)
이와레비코노미코토(磐余彦尊)
이와레비코노미카도(磐余彦の帝)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尊)[27]
토요미케누노미코토(豊御毛沼命)
카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神倭伊波禮毘古命)[28]
우네비노카시하라노미야[29]
아메노시타시로시메스스메라미코토
(宇禰備能可志婆良能宮御宇天皇)
''''''
히코호호데미(彦火火出見), 사누(狭野)
'''부모'''
부친 히코나기사타케우가야후키아에즈(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命)
모친 타마요리히메(玉依姬命)
'''형제'''
4남 중 넷째
'''배우자'''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媛蹈鞴五十鈴媛命)
'''자녀'''
3남
타기시미미노미코토(手研耳命)
간야이미미노미코토(神八井耳命)
간누나카와미미노미코토(神沼河耳命)
'''황거'''
카시하라노미야(橿原宮)
우네비노카시하라노미야(畝火之白檮原宮)
카시하라노우네비노미야(可之波良能宇禰備乃宮)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내력과 진무동정
3.2. 나가스네히코의 공격
3.3. 야타가라스의 도움
3.4. 결정적인 일격과 승리
3.5. 천황 즉위와 사망
4. 능과 '궁전'
5. 진실
5.2. 카키모노토 히토마로의 노래 관련
5.3. 기타
6.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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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초대 천황. 이름이 《고사기》에는 카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神倭伊波禮毘古命)라고 기록되었는데, 고사기 표기를 표준으로 간주한다. 《일본서기》에는 칸야마토이와레히코노미코토(神日本磐余彦尊), 와카미케누노미코토(若御毛沼命), 사노노미코토(狹野尊),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尊) 등으로 나왔고 황명 또한 하츠쿠니시라스 천황(始馭天下之天皇)으로 불린다.
일본사에서 신화시대 인물들의 이름은 매우 길다. 진무로부터 44대 겐쇼 덴노까지는 시호를 나라 시대의 대문장가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 722-785)가 순식간에 지어냈다고 한다. 또 41대 지토 덴노 때까지는 오오키미(大王)로 불렸다 하니 진무대왕이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2. 상세


한국으로 치면 단군과 비슷한 포지션이다. 진무 대왕은 '''일본인의 비조(鼻祖)'''로 통한다. '''일본 황실의 시조'''이자 '''일본의 웬만큼 걸출한 모든 인물들의 비조'''로 그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진무 덴노가 나오기 때문이다. 일례로 50대 간무 덴노의 고손자인 타이라 타카무네오에게 시작된 '''타이라 가문'''은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비롯한 모든 타이라 사람이 진무의 후손이 된다.
그리고 타이라 가문의 영원한 맞수인 '''미나모토 家''' 또한 진무의 자손으로,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최초의 미나모토'인 미나모토 마코토를 시작으로 52대 사가 덴노의 황자 중 17명이 하사받은 사가 미나모토 가문과 사가 미나모토의 후손들에서 분파된 키타베 家, 히로하타 家, 히가시산죠 家, 요코가와 家, 시죠 家, 요인 家, 야기우메 家, 타나카 家, 니시시치죠 家, 타케다 가문이 그 후손들이다. 또 성을 하사받은 황자 중 12번째인 미나모토 토오루가 사가 미나모토 토오루류의 시조로서 거기서 분파된 미타 家, 와타나베 家, 마츠우라 家, 카마치 가문이 진무의 후손들이다.
또한 53대 닌묘 덴노의 자손에게 하사된 닌묘 미나모토 가문과 그 분파들인 하나부사 가문, 타테이시 가, 타테이시 가문의 분파인 우루시마 家, 키타야마 家, 스가 家, 우루시마 家, 와다 家, 나츠메 家, 타나카 家, 타치카와 家, 모리 家, 오오나 家, 칸부미 家, 이치마시마 가문이 진무의 후손들이다. 55대 몬토쿠 덴노의 후손들에게 하사된 몬토쿠 미나모토와 그 분파인 노로 家, 사카도 가문이 진무의 후손들이다.
게다가 56대 세이와 덴노의 6남 사다즈미 친왕의 두 아들 미나모토 츠네모토과 미나모토 츠네오가 하사받은 '''세이와 미나모토 가문'''이 특히 유명한데, 대표적 인물로 가마쿠라 막부미나모토 요리토모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있다. 세이와 미나모토는 미나모토 가문 중에 가장 분파가 많아서 다 거론할 수 없다(...). 또 대표적인 후손들이 미나모토 츠네모토의 손자 미나모토 요리노부를 시조로 두는 '''카와치 미나모토 가문'''에서 나오는데, 카와치 미나모토 가문에서 닛타 가, 아시카가 가문이 나왔고, 아시카가 가문은 후일 무로마치 막부를 세웠다.
또한 미나모토 요리노부의 8대손이 마츠다이라 가문의 시조 '마츠다이라 지카우지'고, 마츠다이라 지카우지의 9대손으로, 마츠다이라가(카와치 미나모토 가문의 분가인 닛타가의 분가)의 당주가 바로 에도 막부를 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오다 노부나가 집안도 아직 자세하게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천황가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호겐의 난, 오닌의 난, 센고쿠 시대세키가하라 전투는 집안 싸움이 된다(...). 천황가를 압박한 미나모토 가문, 아시카가 가문, 도쿠가와 가문이 각각 천황가의 분가, 천황가의 분가의 분가, 천황가의 분가의 분가의 분가(...)가 되기 때문.[1]
이러니 아무리 신화시대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일본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 진무 덴노를 시작으로 일본 역대 천황들을 주욱 살펴보다 보면 일본의 웬만한 모든 왕공가들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으니 참고할 사람들은 역대 천황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진무 덴노의 형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를 두고 9세기 초 일본 서적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서 신라왕과 조상이 같다고 주장했다.[2] 이 때문에 일본의 학자들이 일선동조론을 주장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3. 생애


※ 가독성을 위해서 존칭 미코토(命)를 한글 음역에서는 생략하고, 신명도 존칭 부분을 제외하고 '신'으로 대체한다.

3.1. 내력과 진무동정


진무는 히코호오리와 도요타마히메의 아들인 히코나기사타케우가야후키아에즈(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命)와 해신 와다츠미의 차녀 타마요리히메(玉依姬命)의 넷째로 태어났다. 15세 때 황태자가 되어 아히라츠히메(吾平津姬)와 결혼해 타기시미미(手硏耳命)와 키스미미(岐須美美命)를 낳았다.
이후 일본서기에 따르면 45세가 된 갑인년(기원전 667?)에 히무카노쿠니(日尙國)[3]의 다카치호노 궁(高千穗宮)에 형제들을 모아서 "천손강림 이후 179만 2470여 년[4]이 지났지만 아직도 서국 근처에서만 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로다. 동쪽에 아름다운 땅이 있어 푸른 산맥이 4바퀴에 걸쳐 형성된, 천하를 다스리기에 어울리는 토지이다. 따라서 이곳을 정벌하여야 한다."라고 말하니, 모든 형제들이 이에 동의하여 동쪽으로 진군했다. 이것을 '''진무동정(神武東征)'''이라 부른다. 이로써 3대째 살아온 휴우가쿠니를 뒤로 하고 기나긴 여행을 시작했다.
[image]
진무 덴노가 동정(동쪽 정벌)하며 갔다는 길을 표시한 지도.
츠쿠시(筑紫)[5]의 우사(宇佐)로부터 오카다궁(岡田宮), 아키(安芸)[6]의 타케리궁(タケリ宮)을 거쳐 이듬해 을묘년(기원전 666?)에 키비(吉備)[7]의 타카시마 궁(高島宮)에 도착했다. 진무는 그곳에서 3년간 군사와 무기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3년이 지나 무오년(기원전 663?)이 되자 나니와(難波)[8] 곶(岬)에서 카와치(河內)[9]의 오오쿠모(青雲), 시라카타(白肩) 나루터에 이르러 상륙하려고 하였다.

3.2. 나가스네히코의 공격


하지만 그 땅의 대호족 나가스네히코(長髄彦)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아 멀리 후퇴했다. 이때 맏형 이쓰세(彦五瀬命)가 적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진무는 "태양신의 자손인 우리가 태양이 뜨는 방위를 공격한 것이 좋지 않았다." 하며 깊이 후회하고는, 키이(紀伊)[10]로 상륙하여 카마야마(竈山)로 진군하였다. 그 와중에 이쓰세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진무는 형의 제사를 지낸 뒤 쿠마노(熊野)의 미와노무라(神邑)에 도착하여 바다를 건너지만 폭풍을 만나 남은 형들 이나히(稲氷命)와 미케이리(三毛入野命)를 잃었다.
진무가 이끄는 군대가 겨우 겨우 쿠마노(熊野)[11]라고 쿠마노시의 산중에 접어들자 토지신이 곰의 형상으로 변하여 갑자기 나타나 독기를 내뿜었다. 군사들이 독기에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이 모습을 보고 천계 타카마노하라에서 타카미무스비 신(高御産巣日神)과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 아마테라스[12]타케미카즈치 신(武甕槌神)을 원군으로 보내려 했지만, 타케미카즈치는 굳이 자기가 내려갈 필요가 없다면서 영검 후츠노미타마(布都御魂剣)를 내려보냈다. 영검은 쿠마노의 호족 타카쿠라지(高倉下)의 창고 지붕을 뚫고 마루에 우뚝 꽂혔다. 이튿날 아침 타카쿠라지가 검을 발견하고 진무에게 진상하자마자 군사들이 모두 회복되어 일대의 호족을 쳐부숴나가며 계속 진군하였다.

3.3. 야타가라스의 도움


허나 난관이 하나 있었다. 진무도 군사들도 규슈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주변 지리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부락이라면 모르겠지만, 산중에서 행군을 하는데 지리를 모름은 큰 문제였다. 결국 의기양양하게 진군하였던 것이 잘못이었는지 금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를 보고 타카미무스비 신이 즉시 카모노타케츠미누미(直ちに賀茂建角身命)를 호출하여 진무를 도우라고 명령하였다. 카모노타케츠미누미는 곧바로 다리가 3개 달린 까만(혹은 붉은) 까마귀 야타가라스의 형상으로 나타나서 동정군의 머리 위로 춤추듯이 내려갔다. 진무는 갑자기 나타난 이 희한한 까마귀를 신의 사자라고 확신하고, 전군에게 까마귀의 뒤를 쫓도록 명령하였다. 야타가라스 덕분에 진무군은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었다.
동정군은 이제 요시노(吉野), 우다(宇多)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에우카시(兄宇迦斯), 오토우카시(弟宇迦斯)라고 하는, 누가 봐도 형제임을 뻔히 알 수 있는 호족들이 통치하는 땅이었다. 에우카시는 진무에게 자청하여 이 땅을 양보하고 연회를 베풀 테니 참석하라고 권하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에우카시는 연회장에 장치를 설치하여 진무가 들어가면 천정이 떨어져내리도록 하였다. 하지만 형의 파렴치한 행동에 질려 동생 오토우카시가 진무에게 그 일을 밀고했다. 진무는 에우카시가 연회장에 제일 먼저 들어가게 했고, 연회장은 바로 에우카시의 무덤이 되었다.

3.4. 결정적인 일격과 승리


[image]
그리하여 우다까지 정벌한 뒤 진무는 드디어 야마토까지 쳐들어가 맏형 이쓰세를 죽인 숙명의 라이벌 나가스네히코와 다시 대립했다. 양자의 싸움은 태양신의 후손과 킨키(近畿) 일대를 다스리는 패자(覇者)의 대결이었다. 양군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원정에 지친 진무군이 밀려나 배수진을 치게 되었다. 이렇게 모두 죽음을 각오하는데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 전황이 뒤바뀌었다. 진무가 최후의 돌격을 각오하고 하늘을 올려다 본 바로 그때였다. 하늘에서 황금빛 솔개가 날아와 진무가 쏘려 하는 활을 막았다. 솔개는 마치 번갯불과도 같이 빛을 비추며 나가스네히코의 군대가 친 진을 바라보았다.
그 빛을 보고는 나가스네히코의 군사들이 모두 눈이 멀어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쳐버렸다. 바싹 뒤를 쫓는 추격군을 피해 어떻게든 체계를 바로 세우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나가스네히코의 앞으로 뛰쳐나온 자가 바로 그의 식객 니기하야히(饒速日尊)였다. 니기하야히가 십종신보(十種神宝) 중 야츠카노츠루기(八握剣)를 번쩍이며 한 번 휘두르자 나가스네히코의 머리가 경악한 표정을 띄운 채 땅으로 떨어졌다. 니기하야히는 처음부터 이때를 위해 나가스네히코의 곁에서 지냈던 것이다.
니기하야히는 그대로 진무의 진으로 향해 야마토의 지배권을 진무에게 헌상했다.

3.5. 천황 즉위와 사망


이로써 호노니니기로부터 대대로 숙원으로 삼은 전 국토 통일의 꿈이 이루어졌다. 진무는 52세 되던 해(기원전 660년?)에 카시하라 궁(橿原宮)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여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媛蹈鞴五十鈴媛命)와 결혼하여 98세에 카무야이미미(神八井耳命)와 카무누나카와미미(神渟名川耳尊, 스이제이 덴노), 그리고 히코야이(日子八井命)를 보았다. 이후 정사를 돌보다 재위 76년(기원전 585년?)에 죽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향년 127세, 고사기에서는 137세라고 서술한다.[13]

4. 능과 '궁전'


고사기에서는 진무 덴노가 나라현 우네비산[14] 카시하라 궁에 좌정하여 통치했다고 매우 짧게 서술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진무 덴노가 즉위하기 2년 전(기원전 662?)에 "우네비산 동남쪽 카시하라 땅은 안주할 만한 곳이니 거기에 도읍을 정하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무 덴노는 신화적 인물이니 당연히 능이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천황릉은 발굴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막부 말기에는 그래서 어느 고분이 진무 덴노의 능인가를 두고 학설이 분분했다. 분큐文久 2년(1862)에는 막부의 자금으로 전 천황릉을 수리하는 '분큐의 수복' 작업을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공적 영역에서 진무릉의 위치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크게 세 가지 설이 있었으나, 다니모리 요시오미(산조 사네토미의 국학 스승)의 설이 채택되니, 그것이 바로 우네비산 동남쪽 카시하라 되시겠다. 일본서기에서 우네비산 동남쪽 카시하라에서 즉위했다고 했는데, 바로 우네비산 동남쪽의 근처에 큰 무덤이 있으니 당연히 진무릉이라는 것이다. 그때 채택한 설이 현재까지도 궁내청의 공식 입장이다.[15]
메이지 정부는 1890년 진무천황릉 옆에 가시하라 신궁(橿原神宮)을 창건하였다. 창건시에는 면적이 20,195평(6.7 ha)이었지만 1911년 제1차 확장사업으로 30,600평(10.1 ha)으로 넓혔고, 1916년에는 총 13마을 208가구 1054명이 이주했다. 현재는 가시하라진구마에역이 근처에 세워져 있다.
이후 1938년에 진무 덴노 즉위기원(황기) 2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카시하라 신궁 전체를 발굴하는 대규모 조사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신궁 마당 지하에서 조몬 시대 후기~말기의 대규모 취락지와 소년 소녀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도쿄학예대학의 가누마케 이요우(鹿沼景揚)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물들의 대부분을 미국 미시간 대학에 반입하여 탄소연대측정법을 이용한 결과, 당대로부터 2600년 전의 물건들이며 그 전후오차는 ±200년이라고 하여, 실제로 카시하라 신궁 터가 진무 덴노의 도읍지라고 증명된 사례라고 주장했다. 그에 힘입어 1938~1940년 제2차 확장사업을 시작해 연못과 산림을 늘렸다고 한다. 2차 확장사업의 전액은 국비와 황기 2600년 기념 봉축헌금으로 충당했다고.

5. 진실


'''진무 덴노의 실존성은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
1868년 왕정복고 때는 선언문(대호령)에 '진무 천황께서 창업하신 당초에 근거하여...'라는 문구가 들어가기도 했다. 고다이고 천황 항목 참조. 메이지 5년(1872)에는 기원절을 제정했다. 처음엔 당시 음력 1월 1일이었던 1월 29일이었으나, 음력은 불편하다는 이유 + 이듬해부터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유로 진무 천황의 즉위일을 양력으로 계산하여 2월 11일로 했다. 이는 GHQ가 폐지시키나 60년대 들어서서 건국기념일이란 이름으로 재탄생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과거 일본 사학계는 진무 덴노를 비롯한 상고시대의 천황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치부하여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이쇼 시대의 역사학자인 와세다대학의 츠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가 '일본 최초의 천황은 제10대 스진 덴노다. 초대 진무(神武) 덴노부터 제9대 카이카 덴노까지는 역사에 없는 조작된 인물'이라고 저서에서 주장했다가[16][17] 이후 《고사기》와 《일본서기》 또한 엄격한 사료 비판을 받았다. 또한 다이쇼 덴노의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915-2016)도 '''"진무 덴노는 신화이지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다카히토 친왕은 '빨갱이 왕자님'이라는 비난을 들었다고….
그는 일본에서 가장 큰 역사학회 중 하나인 사학회 자리에서, 앞서 언급한 건국기념일 제정에 대해 사학회가 결의를 해서 공식적으로 그에 대해 반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가(이른바 '사학회 발언')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도 한다.
중세사학자로 유명한 아미노 요시히코도 2000년에 발간한 저서 <일본이란 무엇인가>[18]에서 전혀 사실과는 상관없는 허구의 천황을 기념하여 국가에서 따로 날까지 지정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다카히토 친왕도 그러한 맥락에서 반대했을 것이다.

5.1. 스진 덴노 관련


현재 일본 역사학계에서 그 실체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10대 스진 덴노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19] 진무 덴노가 즉위했다고 기록된 기원전 660년은 조몬 시대 말기에서 야요이 시대 초에 해당한다. 이때의 일본은 토기 만들고, 물고기 사냥해 먹고, 도래인 집단에 의해 농사가 시작된 부족국가 시대로, 정사(正史)에서 교차검증이 가능한 최초의 기록은 후한 광무제 때(57년)이다. 지금의 규슈 북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노쿠니(奴國)의 왕이 후한에 조공하여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20]이라는 칭호와 금인[21]을 하사받고 나서이다. 그 후에도 후한 안제 때(107년) 왜왕 수승(帥升: 스이쇼)이 후한에 입조하여 노예 160명과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
이후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야마타이국의 히미코(기원후 2세기)이다. 진무 덴노 이후 결사팔대에 속하는 천황은 업적이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뿐만 아니라 재위기간 또한 비정상적으로 길다. 오래 사는 것이야 있을 수 있다 해도, 어지간히 후사를 늦게 보지 않는 한 왕이 오래 살면 그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재위기간이 짧아진다. 청나라에서 강희제가 61년간이나 재위하는 바람에 아들 옹정제는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고작 13년에 불과했듯이.
기원전 660년이 60갑자로 신유년이기 때문에, 후대의 신유혁명설을 의식하여 연대를 만들어냈으리란 설도 유력하다. 현대 역사학계에서 진무 덴노는 가상의 존재로 간주되긴 하지만, 아직도 많은 신사의 신관들과 몇몇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무를 실존인물로 여긴다. 물론 스진 덴노가 속한 부족의 선대 부족장 정도의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또 신화적인 의미에서 진무 덴노와 아마테라스의 손자라는 호노니니기, 아마테라스는 같은 존재이다.

5.2. 카키모노토 히토마로의 노래 관련


또한 7세기 후반에 궁중 가인 카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가 지은 빈궁 반카(장례용 노래)에 따르면 아마노하라[22]에서 덴무 덴노가 내려와 아스카에서 다스리고, 석실 문을 열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하는데, 여기에는 진무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을 뿐더러 아마테라스 신화 내용 일부까지 있다. 이 노래는 《고사기》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아는 일본의 기기신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일본에 소중화사상이 대두될 때[23] 진무천황이 사실 춘추시대 오나라 시조인 태백의 후손, 혹은 형제라는 속설이 주목받기도 했다.[24]
이외에도 근대 일본에서 몇몇 역사학자들이 진무가 한반도-신라 계열의 도래인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답게(...) 한반도는 일본의 일부였으며 일본이 주도적인 위치였다는 내선일체 로 결론을 내렸다.

5.3. 기타


1882년, 미에현에서 활동하던 민권운동가 오니와 시게아키(大庭成章)[25]가 연설을 하면서 '진무 덴노는 외국에서 힘을 키운 뒤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의 겁쟁이들을 제압하고 일본 전체를 먹은 큰 도적이요, 그 후손인 금상 덴노(메이지)는 물론 고관대작들도 모두 큰 도적'이라는 논조로 주장하다가 불경죄로 잡혀들어가 재판을 받기도 했다.

6. 계보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5대손이라고 전한다.
......이자나기───────────이자나미
...................................
...........................아마테라스
...................................
.......................아메노오시호미미
...................................
..............................니니기
...................................
..............................호오리
...................................
.....................우가야후키아에즈
...................................├────────────┬──────────────┬─────────────┐
........................이쓰세노미코토........이나히노미코토............미케누노미코토...............'''진무 덴노'''
  • 부친 : 아마쓰히타카히코나기사타케 우가야 후키아에즈노미코토(天津日高日子波限建鵜草葺不合命)
  • 모친 : 타마요리히메미코토(玉依姫命)
    • 형제 : 이쓰세노미코토(彦五瀬命) - 진무 덴노의 첫째 형이다. 나가스네히코(長髄彦)의 세력에게 화살을 맞고 중상으로 죽었다.
    • 형제 :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 - 진무 덴노의 둘째 형이다.
    • 형제 : 미케누노미코토(三毛入野命) - 진무 덴노의 셋째 형이다.
  • 001대 진무 덴노
  • 제1비 아히라츠히메(吾平津姬)
    • 01남 : 타기시미미노미코토(手硏耳命, ?~기원전 585?) - 아버지 진무 덴노가 죽은 뒤, 의붓어머니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미코토를 아내로 삼고, 이복동생 3명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 전에 이복동생들인 카무야이미미노미코토와 스이제이 덴노에게 살해됨.
    • 02남 : 키스미미노미코토(岐須美美命) - 고사기에서만 나옴.
  • 제2비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미코토(媛蹈鞴五十鈴媛命) 황후
    • 03남 : 히코야이노미코토(日子八井命)
    • 04남 : 카무야이미미노미코토 또는 카무누나카와미미노미코토(神八井耳命 또는 神渟名川耳尊, ?~기원전 578?) - 타기시미미의 반역사건 때 동생 스이제이 덴노와 함께 타기시미미노미코토를 죽임.
    • 05남 : 히코야이노미코토(日子八井命) - 002대 스이제이 덴노

[1] 족보를 날조하기 쉬운 난세의 인물들임은 감안해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조상을 갈아치울 수 있는 시대였다. 예를 들어 오다 가문이 타이라 가문의 후손을 칭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 때 시작되었다.[2] 흘해 이사금 시기 일본의 왕자빈이 된 아찬 급리(急利)의 딸 소생이 아닌가 추측한다.[3] 현재의 미야자키현.[4] 호노니니기가 31만 8543년, 야마사치히코가 63만 7892년, 우가야 후키아에즈가 83만 6042년을 다스린 기간을 합치면 179만 2477년이다.[5] 현재의 후쿠오카[6] 현재의 히로시마[7] 현재의 오카야마오카야마시[8] 현재의 오사카시. 오사카시 키타구(北区)에 있는 오사카 텐만궁(大阪天満宮)에는 1940년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신무천황성적난파지기현창비(神武天皇聖蹟難波之碕顯彰碑)'라고 새겼다. 진무와 군대가 무오년(기원전 663?)에 나니와(難波 난파)곶에 들렀음을 기념한다.[9] 현재의 오사카부[10] 지금의 와카야마현 오노미나토(雄水門)[11] 오늘날 미에현 쿠마노시(熊野市)의 어딘가.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1937년 지역민들이 호보정(甫母町)의 남쪽 곶에 기념비를 세웠으나 1959년 태풍 때문에 유실되었다. 지역민들이 위치를 조금 바꾸어 2019년에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세부 모습은 달라졌다. 쿠마노 아라사카 나루(熊野荒坂津)라고 새긴 비석과 신무천황최종어상륙지(神武天皇最終御上陸地)라고 새긴 조금 작은 비석이 같이 있다.[12] 구태여 신화의 기록에 따라 촌수를 따지면, 아마테라스는 진무의 5대조가 된다.[13] 기원전 585년에 죽었는데 세는 나이로 향년 127세라면 진무의 생년은 기원전 711년, 향년 137세라면 생년은 기원전 721년이다. [14] 나라현 카시하라시(橿原市)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정상의 높이가 해발 220 m 불과할 정도지만, 야마토 3산 중 하나로 손꼽히며 헤이안 시대에는 중요한 곳이었다.[15] 여담으로, 당시 전 천황릉 중에 가장 시간과 돈을 많이 들인 곳이 진무 덴노의 능이다. 천황릉이 100여 기가 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무 덴노 능에만 전체 자금의 17.7%를 쏟아부었다고... 그만큼 진무 덴노가 중요하게 인식되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같은 해 11월에는 진무 덴노 능의 수리를 시작하자, 고다이고 덴노의 능이 '명동(鳴動)'해서 담이나 석물 등이 무너져 부서졌다는 기록도 있다.[16] 日本上代史硏究, 1930[17] 이 때문에 츠다 소우키치는 일본 정부로부터 '황실을 모독했다.'는 지탄과 함께 3개월 금고형의 유죄 선고를 받는 등 엄청난 탄압을 받고, 학문의 자유를 유린당하자, 흑화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18] 원제: 「日本」とは何か 日本の歴史00. 강담사 발행. 우리나라에는 2003년 창작과 비평사가 <일본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했다.[19] 천황제 50문 50답, 歴史教育者協議会(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36p.[20] 실물 사진[21] 단, 지금 현재 에도 시대 때 발견되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이라는 현존하는 '금인'은 날조 조작 논란이 있다.[22] 타가마노하라와 표기가 다르다.[23] 조선왕조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비판을 받긴 했지만 사실 조선, 일본, 베트남 모두 중화계승사상이 존재했다.[24] 대표적인 경우가 하야시 라잔[25] 일본어 자료에도 흔히 한자만 나오고 독음이 없어서 음이 틀렸을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