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 왕국

 

1. 1차 아르메니아 왕국
2.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1. 1차 아르메니아 왕국


고대의 오론테스 왕조, 예르반드 왕조, 아르탁세스 왕조 등을 일컫는 단어다. 그 중 티그라네스 2세 시절 대 아르메니아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2.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고전 아르메니아어: Կիլիկիոյ Հայոց Թագաւորութիւն Kilikio Hayots Tagavorutyun; 프랑스어: Le Royaume Arménien de Cilicie.
1080년 조지아아르메니아의 왕가인 바그라티 왕조의 분파라고 주장하는 루벤 가문이 세운 국가. 다만 루벤 가문의 주장은 근거가 없이 스스로 자처한 것이었다. 아르메니아 본토와는 멀리 떨어진 현재의 터키 남동부 해안지대 킬리키아에 건국되었으며, 이 국가 때문에 해당 지역은 소 아르메니아라고 불리기도 했다. 수도는 본래 타르소스였으나 나중에는 시스로 옮겨갔다. 처음부터 왕을 칭한 것은 아니며 건국 당시에는 공국이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십자군 편을 들었지만, 동로마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안티오키아 공국과도 사이가 나뻐 전쟁을 벌이면서 안 그대로 셀주크 투르크에게도 시달리던 와중에 기독교군과도 연이어 싸워야 했다. 유달리 동로마에게도 허구헌날 털렸는데 공작 레본 1세는 동로마군에게 잡혀 3년동안 갇혀있다가 죽었으며 동로마 측은 사로잡은 세자인 루벤을 두 눈을 멀게하고 절망 속에 죽게 했다. 그나마 둘째인 도로스가 탈출하여 도로스 2세로 제위하여 동로마 제국군을 한번 물리치기도 했지만 곧 반격당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1158년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며 충성을 다짐하면서 동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도로스 2세가 죽고 나서 레본 2세는 십자군과의 관계 개선 및 서방 측과 우호 관계를 맺으며 동로마 정교회가톨릭 측에게 중립적으로 나서는 외교를 했다. 동로마의 반발에 이슬람군 견제를 내세워 명분화했고 아르메니아 공국에서 이름도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바꾼다. 이 시절에 그래도 안정적인 통치를 벌이기도 했지만 이후, 후계자 내분으로 또 동로마 및 기타 세력의 분열과 침공을 받아야 했다. 또한 국민의 다수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였지만, 왕실[1]은 가톨릭과 우호적이었고 1198년에는 가톨릭과의 일치를 선언하여 민심을 크게 잃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3세기 접어들어 셀주크를 뭉개던 몽골에게 협력하며 일단 몽골의 속국이지만 침략을 받지않고, 몽골군과 같이 손잡고 1260년 다마스쿠스를 뭉개기도 해다. 그러나 새로 일어난 맘루크 왕조에게 보복당해 거꾸로 1275년 수도인 타르소스가 함락되어 수만여 명이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르메니아를 도우러 온 몽골, 즉 일 칸국군도 1281년 맘루크군에게 참패하면서 이제는 맘루크 왕조에게 굴복하여 속국이 된다. 칼라운에게 온갖 굴욕적인 요구를 당하며 이를 갈던 아르메니아는 1298년 다시 일 칸국군과 손잡고 맘루크군을 뭉개며 설욕했지만 또다시 맘루크군에게 제대로 공격받는다. 1303~04년까지 벌인 홈스 전투를 비롯한 시리아 전선에서 아르메니아-일 칸국 연합군은 참패했고 이후 맘루크의 속국이 되어 시달리다가 십자군을 다시 일으켜 연합하려고 했지만 사전에 들켜 왕이 폐위당하고 맘루크군에게 또 나라가 털리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국왕인 레본 4세는 키프로스 왕국과 손잡으려고 했지만 키프로스 측의 강압적인 요구[2]에 백성들은 반발했고, 많은 백성을 억누르며 불만을 탄압하던 레본 4세는 결국 반대파에게 1341년 암살당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레본 4세의 사촌인 기 드 뤼지냥이 콘스탄틴 2세로 새롭게 제위하지만 이 양반은 가톨릭 신자라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대다수인 아르메니아 백성들과 충돌이 벌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어 같은 기독교끼리 내분에 시달리던 와중에 맘루크군의 대대적인 공격까지 이어지며 1375년 허무하게 멸망했고 마지막 왕인 레본 5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거기에서 1393년 죽었다.
[1] 마지막 왕조인 뤼지냥 가문은 당연히 가톨릭이었고, 아르메니아계인 루벤과 파르티아 계인 헤툼 가문 또한 대체적으로 친 가톨릭 정책을 폈다. 헤툼 2세는 퇴위 후 가톨릭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되었을 정도.[2]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다수인 아르메니아 왕조에 국교로 동방 정교를 삼고 개종하라든지 조공을 바치라든지 굴욕적인 요구 사항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