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최
1. 개요
'''安'''
'''姜/康'''
'''崔'''
고집이 세다는 성씨. 차례로 안씨, 강씨, 최씨이며 앞에 나올수록 강하다.
2. 유래
2.1. 안씨
조선 세조 시대 순흥 안씨 가문이 충절을 지키다가 멸문지화를 당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 태종의 후궁 선빈 안씨, 그리고 단종을 끝까지 추종하여 가문의 온 일원들이 학살되고 최고의 명문가에서 천민으로 전락된 순흥 안씨 집안의 멸문지화에서 유래되었다. 단종 복위와 관련된 정축지변이 대표적이다. 또 기묘사화에 이은 신사무옥에서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이 처형당했으며, 을사사화 때는 안명세가 참화를 당했다.
그중 가장 큰 화는 단종 복위 사건과 관련된 정축지변인데, 당시 순흥에 유배되어 왔던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영월에 유배되어 있는 단종과 연계하여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순흥도호부에 세거하고 있던 700명에 달하는 순흥 안씨가 멸문지화를 당하여 전국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는 정치적으로 낙인이 찍혀버려 크게 활약한 인물이 별로 없지만, 조선이 망해버린 뒤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안씨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
2.2. 강씨
고려 말의 충신 강회중에게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그는 고려의 유신으로 조선의 태조가 여러차례 벼슬을 권하였으나, 끝내 물리치고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에서 그 애국의 마음과 기개가 사람들에게 강씨고집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선 건국 후 이색과 난을 꾀하였다는 죄로 유배를 당했다. 1398년 10월 태조 집권기에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가 되었다. 1418년(태종 18) 경기도관찰사와 성부유후(開城府留後),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역임하였고, 다음해 한성부윤(漢城)과 공조참판(工曹參判),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1421년(세종 3) 4월 4일 총제(摠制)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
결론적으로 위의 이야기는 세간의 말일뿐. 속설 별로 믿을게 없다. 다 주장을 하고 같다붙이기식 일 뿐이다.
2.3. 최씨
고려 말의 충신 최영 장군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로 최영의 고집은 대단했다고 한다.
3. 관련 표현
'''산 김씨 3명이 죽은 최씨 1명을 못 이기고[1]
, 최씨 셋이 모여도 강씨 1명을 못 당하고, 강씨 셋이 모여도 안씨 앉은 자리를 못 넘본다.''' - 갈수록 3배씩 강해지는 걸 알 수 있다.
'''최씨 앉은 자리엔 풀도 안 난다.''' - 최영 장군의 유언에서 파생된 말인 듯하다.
'''최씨는 코로 고춧가루물 한 주전자 마시고 물 밑으로 십리를 헤엄친다.'''
'''안씨 뿔이 하나, 강씨는 2개, 최씨는 3개. 최뿔따구 강고집.''' - 각 성의 한자(安, 姜, 崔)에서 유래한 표현. 뿔이 많을수록 강하다, 뿔이 많으면 하수다 2가지 해석이 있다.
4. 여담
'그러나 그 최씨도 0씨는[2] 못 당한다.', '숨은 고집 어디 0씨에겐 최씨도 울고간다.'는 식으로 어떤 사람의 고집을 표현할 때 밑밥이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안강최란 말은 안씨, 강씨, 최씨 셋을 말하는게 아니라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안강읍의 최씨"만을 뜻한다는 말도 있다. 즉 경주 최씨라는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