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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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6남으로 문종과 세조의 친동생. 단종의 주공단이라 불렸던 인물. 세조를 증오하던 조선인들은 단종이 죽고 안평대군의 남계 혈통도 단절된 이후부터는 금성대군의 후손들을 적법한 왕위 요구자로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화포 발사 시험에 둘째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참가한 기록도 있다. 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당한 이방석의 양자가 되어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이방석의 제사는 금성대군 사망 후 이복형제 중 하나인 밀성군 집안에서 이어받았다.
계유정난 이후 모반 혐의를 받아 경기도 삭녕에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광주로 이배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의 아들 중에서 단종과 가장 가까운 관계로 추측된다. 아버지 세종과 세자 문종이 온천행이나 강무 등으로 함께 궁궐을 비울 때 세손 단종을 금성대군의 집에서 지내도록 한 적도 몇 차례 있었다.
사육신이 단종을 복위하려던 운동이 실패하자 연루되어 순흥부(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안치되었고 거기에서 다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했다. 사육신과는 달리 금성대군의 시도는 조선왕조실록에 전말이 확실하지 않아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편인데 당시에는 상당히 큰 고을이었던 순흥의 부사와 연결을 맺었다는 점, 무사(武士)를 모았다는 기록, 사민(士民)들이 동조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를 가진 봉기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결국 기밀이 누설되어 풍기군수의 고변으로 사사되었다. 세조실록에서는 이보흠이 고변했다고 나오지만 금성대군 사건 전후의 기록은 흐름이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고 이보흠도 유배당했다가 사망한다. 사실 이보흠 역시 문종과 가까운 인물이며 금성대군이 유배된 순흥은 단종이 있는 강원도 영월과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사실 모든 것이 한명회가 금성대군을 제거하려고 짜놓은 계략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도 있다.
실록의 해당 사건 내역과 처벌 내역을 보면, 해당 사건은 금성대군이 주도한 것이 맞으며, '''이보흠은 간을 봤다''' 쪽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보흠은 문종과 가까운 인물이 아니라 안평대군쪽 인물로 묘사된다[4] .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처음에는 뇌물을 줬고, 나중에는 칼을 빼들고 위협했다. 이보흠은 명시적 거절은 하지 않고 간을 봤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금성대군의 관상을 본 것인데, 이 때 관상결과는 망할 상. 결국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하다가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발을 한 것이다. 이 때 같이 고발한 향리 정중재는 처음부터 처벌 대상으로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보흠은 처음에는 금성대군이 칼로 협박한 것을 중시해서 고발자로 더 취급을 받다가 후에 신문과정에서 간을 본 사실이 드러나면서 처벌 대상이 된 것이다.
민담에 의하면 원래 사약을 받을 때 죽기 전에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하는데 금성대군은 "내 임금은 북쪽에 계신다"고 하며 한양(현재의 서울특별시)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결국 순흥부가 해체된 사건을 정축지변이라고 부르며 자세한 사항은 피끝마을 참조.
사후에 후손들은 관노로 전락했으나 안평대군의 자손들과는 다르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후 복권되어 대를 이을 수 있었고 지금도 전주 이씨 금성대군파로 이어지고 있다. 사사 후 금성대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금성대군의 묘는 없으며 대신 금성대군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제단을 만들어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금성단이라고 한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으며 영주시에서 매년 제사를 지낸다. 이와는 별개로 금성대군파 문중에서 금성대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는데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에 위치해 있으며 전주 이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원래 금성대군은 의안대군 이방석의 봉사손으로 지명되었는데#, 계유정난으로 인해 봉사손 지명이 철회되었다. 결국 의안대군의 봉사손은 금성대군의 서조카이자 밀성군의 차남인 춘성군이 잇게 되었으며[5] , 춘성군은 금성대군의 양자가 되지는 않아 결국 의안대군의 후손은 춘성군 후손들이 계속 잇게 되고, 금성대군의 후손들은 그대로 금성대군파로 남게 되었다.[6]
이후 영조의 명으로 절손된 안평대군파의 제사를 금성대군파에서 잇게 되었다. 결국 현 안평대군파도 본류는 금성대군파인 셈. 참고로 금성대군파의 이억수가 안평대군의 봉사손이 된 것은 안평대군이 죽고 무려 200여 년이나 지난 후였다.
금성대군에게는 적자 이맹한(李孟漢)과 서자 이동(李銅)이 있었는데, 이맹한은 화원군(花原君)[7] 에 추봉되었고, 이동은 함원군(咸原君)에 추증되었다.
2. 기타
세종의 적자 중에서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된 사람은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적된 안평대군과 폐세자 이방석의 양손자로 입적된 금성대군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양자로 입적된 두명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방번의 양손자로 입적된 광평대군은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전에 죽어서 계유정난의 화를 입지는 않았으나 한참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니 이 경우도 썩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금성대군은 그의 할아버지 정안대군(태종)에게 자기 자리를 빼앗기고 죽임당한 작은할아버지 의안대군 이방석의 양손자인데 자신의 둘째 형 수양대군이 그 옛날 반란을 일으켜 작은할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은 할아버지처럼 하는 것을 보고 금성대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3. 창작물에서
[1] 군호는 전라도 나주의 옛 지명인 금성(錦城)에서 따왔다.[2] 세조의 휘 유(瑈)와는 독음이 같다. [3] 주유와 이름이 같고 주자유와 이름이 겹친다.[4] 이 때 대화 내용을 보면 금성 대군이, '나, 계양군이 고발해서 별 증거 없이 여기 왔고 요즘은 대접도 별로 못 받거든? 너도 안평대군하고 친했는데 니가 지금 지방관 하고 있다고 얼마나 갈 것 같냐?'라고 하니, 이보흠도 '확실히 계유정난 때 보면 별로 근거 없이 처벌 받은 사람이 많긴 했음.ㅇㅇ'라고 대답한다.[5] 의안대군 이방석과 춘성군 간의 가계도를 따지면 증조손관계이다.[6] 선원속보 의안대군편을 보면 계후(系後)에 춘성군이 들어가 있다.선원속보 의안대군파보[7] 함종군(咸從君)이라고도 일컬음[8] 용의 눈물에서는 태조의 이복동생 이화를 연기했다.[9] 재밌게도 이 드라마에서 금성대군의 동복형 안평대군 역을 맡은 배우는 태조 왕건에서 이복형 신검을 맡았던 이광기이다. 그래서 신검과 금강이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으로 환생했다는 배우개그가 성립한다. 물론 여기서는 동복형제이고 후계자 문제로 서로 대립했던 신검과 금강과는 달리 여기서는 대립할 이유가 없으니 서로 적대하지는 않으나 둘 다 수양대군에게 져서 역사의 패배자가 되는 것은 신검과 금강하고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