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성전투
1. 개요
1950년 8월1일부터 8월 13일까지 국군 8사단과 임시 배속된 제18보병여단이 북한군 8사단을 상대로 경상북도 안동과 의성 일대에서 싸운 전투.
2. 전투 전 상황
7월 31일 국군 8사단은 안동 시내까지 밀려났고, 이 와중에 사단 병력 전체가 낙동강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안동대교가 아군 공병대에 의해 폭파되었다.[1] 그래서 후속 도착한 부대원들은 멀쩡한 부분들을 밟고 도하하려 했으나 북한군 저격수가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통에 포기하고 중장비와 짐들을 땅에 묻은 뒤 야음을 틈타 제각기 도하를 시작했다.
3. 전투 경과 (1950.8.1 ~ 8.13)
참고#1, 참고#2 - 전쟁기념관
8월 1일 낙동강 이남으로 밀려난 국군 8사단은 일직면 운산리에 CP를 설치하고 부대를 수습했다.
8월 3일 국군 8사단은 안동 이남 산악지대로 남하하며 21연대에게 향로봉,[2] 10연대에겐 기룡산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한편 8사단 동쪽에 있는 수도사단은 길안면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서쪽 풍천면은 사실상 무주공산으로 방치된 상태였고, 이를 노리고 북한군 8사단이 야음을 틈타 하희리 ~ 인금리로 도하해 8사단 진지를 유린할 준비를 시작했다.
8월 4일 오전 8시 북한군 8사단 83연대 1개 대대가 우선 가장 서쪽에 있던 향로봉의 국군 21연대 진지들을 먼저 공격해 상대의 무장과 위치를 파악했다.
8월 5일 오전 10시 북한군 83연대 1개 대대가 국군 21연대 1대대 진지를 공격해 쟁탈전이 시작되었으며, 오후 4시엔 2대대와 3대대 진지들도 공격받아 교전이 시작되었다. 한편 예비로 있던 16연대는 향로봉 동쪽 세촌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8월 6일 향로봉의 교전이 장기화되자 국군 8사단은 오후 3시, 21연대와 16연대를 동원해 향로봉 탈환전을 개시했으나 돈좌되었다.
8월 7일 오전 2시 북한군은 향로봉에서 국군 21연대를 몰아내려고 화력지원 속에 각 대대 진지들을 공격했고, 이는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되어 결국 향로봉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8월 8일 오전 3시 30분 국군 21연대 1대대를 배속받은 16연대가 향로봉 탈환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쌍방 포격전과 백병전을 벌였음에도 돈좌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임익순 21연대 1대대장이 부상당해 채명신[3] 대위가 1대대를 맡게 되었다. 게다가 기세가 오른 북한군 8사단이 향로봉과 기룡산 사이의 도로를 따라 의성으로 기습 남하하려 했으나 하화터널 일대에 진지를 구축한 10연대 1대대의 집중 포격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국군 8사단 측은 모든 탈환이 실패하자 안동과 의성 사이의 능선군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한다.
8월 9일 동쪽 수도사단 방어선이 북한군 12사단에게 돌파당해 후방 포항 기계면이 위험해졌다. 또한 이 와중에 수도사단 18연대가 8사단을 지원하고자 임시 배속되었다.
8월 10일 오후 6시 안동으로 북진하려는 국군 8사단의 대 반격이 시작되었다. 우선 10연대는 의성군 단촌면, 16연대는 은행리, 18연대는 단촌면 장림리, 21연대는 점곡면 매봉산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움직였다.
8월 11일 전날에 시작된 전투는 새벽에도 이어졌고, 오전 5시 18연대, 오전 9시 21연대, 오후 5시 10연대 순으로 완료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21연대와 10연대는 서로 경쟁하듯 점령지 주변을 정리해 나갔다. 한편 이 와중에 국군 18연대는 군단 명령에 따라 장림리를 10연대와 21연대에게 맡기고 수도사단으로 복귀했다.
8월 12일 오전 1시 10연대 3대대 방면으로 북한군 전차 3대가 접근하자 대전차포를 퍼부었으나, 개전 초기와 마찬가지로 전차 격파에 실패했다. 한편 송내리의 16연대도 오전 4시 1개 중대를 맞이해 교전을 시작했다. 한편 21연대 역시 각지에서 간헐적인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8월 13일 새벽을 기점으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국군 8사단 진지들을 강타했다. 또한 이 와중에 북한군 전차 2대가 사전 매설된 대전차 지뢰에 격파당했고, 뒤따르던 전차와 자주포들은 뒤로 돌아가려다 미 전투기의 공격에 전투불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걸로는 북한군의 공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기에 국군 8사단은 의성을 내주고 포항시 보현산 방면으로 축차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