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보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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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 제5군단 제3보병사단 예하 '''제18보병여단'''. 별칭은 '''진백골부대'''.
2. 상세
1948년 11월 20일 조선경비대 3여단[1] 이 창설될 때 예하 18연대로 창설된 후, 1949년 8월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그 후 6.25가 발발했고, 의정부 전투에서 다른 부대들과 함께 축차투입되기도 했다.
이후 수도가 함락당하고 수경사가 1, 8, 18연대 기반의 수도사단으로 재창설되는 우여곡절을 겪고는 수도사단 예하에서 진천 전투, 청주 전투 등을 치르며 남하해 안동·의성전투, 안강-기계 전투를 치룬다. 한편 공산측의 핍박을 못이겨 월남한 서북청년회 출신 병사들이 죽어 백골이 되더라도 공산당과 싸우겠다, 백골이 되어서라도 고향땅을 되찾겠다.. 라며 철모에 백골을 그려넣자, 이내 18연대의 유행이 되어 급기야 연대 자체가 백골부대로 불리고[2] 연대기도 졸리 로저 방패와 리본, 월계관으로 바뀌었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돼 계속 북진, 원산 전투를 치르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0년 12월 15일 흥남에서 철수할 때 3사단 26연대와 배를 바꿔타고 말았다. 게다가 철수의 난잡함 속에서 원대복귀를 위해 서로 목적지를 바꿀 수도 없어서 결국 연대를 맞교환 하는 식으로 당시 사자부대라 불리던 3사단에 예속되어 맹활약을 하나... 현리 전투, 금성 전투[3] 에서 전멸당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리고 전후 사단명칭을 보다 전투적으로 바꾸겠다는 사단장의 의지에 18연대 명칭이 사단에도 적용돼 사자 부대에서 백골 부대로, 18연대 역시 자신들이 원조 백골이라는 의미로 진백골로 바꾸었으며, 현재는 사단의 최전방 한축을 경계하고 있다.
참고로 국방개혁 2.0 기본계획에 의거, 상비사단과 지역방위사단이 개편돼 18보병연대 역시 2020년부로 18보병여단으로 격상되었다.
3. 근무환경
4. 예하부대
4.1. 여단 직할대
4.2. 군수지원대대 (구: 연대 수송대)
4.3. 제1대대 진백골
진백골 중에서도 원조를 자칭하는 의미로 진진백골로도 불린다. 사실 그럴만도 한 게 금성 전투 당시 여러 부대들이 쓸려나가 행방불명 되었고, 그 와중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백암산 자락에서 1대대만 겨우 수습됐기 때문.
4.4. 제2대대 아리랑
4.5. 제3대대 백혼
5. 출신인물
5.1. 여단장
5.2. 장교/부사관
5.3. 병
- 김칸비 - 18연대에서 복무했었다.
6. 기타
6.1. 부대영상
6.2. 여단가
7. 사건사고
8. 여담
- 수도사단 시절부터 공산당의 핍박을 못이겨 내려온 서북청년회 출신자들의 입김이 강한 부대다 보니 극도의 반공성향과 전투적 기질을 자랑했고, 게다가 이 때문에 바깥에서 애궂은 민간인들까지 때려잡던 다른 회원들과 한패라는 인식이 박혀 부대 역사를 대놓고 자랑하기 힘들다.
- 2009년 3월 18일에는 일본인이 월북시도하려고 했다가 철책에서 초병한테 잡혔다고 한다. 이는 3. 18완전작전으로 불린다. 최초로 발견한 초병은 18연대 소속의 이등병과 병장이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3야전군사령관으로부터 포상휴가 14박 15일을 각각 받았다고 한다. 덤으로 통역병과 상황병, 그 시각 5분대기조 인원들도 6박 7일씩은 받았고 대대장과 중대장, 소대장도 표창과 함께 4박5일 포상휴가를 받았다고.
[1] 3사단의 전신이다.[2] 참고로 채명신 장군이 이끌었던 유격 부대인 백골병단은 또다른 월남자들이 같은 동기로 자칭한 것 외엔 공통점이 없다.[3] 이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백암산에서 병력을 수습했을 땐 1대대만 남았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