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신녕전투
1. 개요
1950년 8월 6일부터 9월 22일까지 경상북도 포항시 북부 보현산 일대에서 유격대대와 국군 8사단과 7사단(5,8연대, 공병대 배속 지원)이, 후방[2] 기계면과 경주시 안강읍에선 수도사단과 1사단 11연대, 7사단 3연대, 육본직할 17연대,[3] 25연대가, 그리고 군위군 산성리의 조림산과 영천시 북서쪽 신녕면과 화산면 일대에서 6사단과 1사단 15연대가 영천과 경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8, 12, 15사단 및 기타 부속 부대들을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막아낸 전투들이다.
하여간 당시 참여한 국군 부대들이 많았고 상당수가 상황에 따라 여기저기 배속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일단 보병부대들을 종합하면 이렇다.
또한 이 문서에서는 영천지구 전투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혹은 연계적으로 일어난 보현산지구, 안강-기계 전투 및 신녕지구 전투를 함께 서술하고 있는데, 사실 이 전투들은 서로 이어지고 연계되듯 벌어졌기에 인과상 따로 구분지어 정리하기도 힘들다.
2. 전투 경과
전투경과 참고자료 1 참고자료2
2.1. 전초전 #1 - 보현산지구 전투 (8.6 ~ 8.8)
8월 6일 국군 제1유격대대가 청송 현동면까지 내려온 북한군 유격부대인 766부대의 거점인 보현산 정상을 기습 점령하였다.
8월 7일 북한군 766부대 잔존병과 북한군 12사단 선발대가 보현산 일대의 국군 진지를 돌파하려고 하였으나 격렬한 저항에 돈좌되었다.
8월 8일 북한 766부대와 12사단 선발대가 보현산 정상부를 향해 박격포 공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해군육전대(해병대) 및 공병들과 교전했다.
그리고 이 날 북한군 12사단이 영천 방면으로 남진하면서 안강-기계 전투가 시작되었다.
2.2. 전초전 #2 - 안강-기계 전투[7] (8.9 ~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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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 당시 국군 및 북한군 12사단의 배치 및 이동로 - 출처
8월 9일 국군 제1유격대대는 영천으로 남진중인 북한군 12사단 1개 연대를 기습해 이들의 남진을 상당기간 지연시켰다.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국군 제1유격대대는 포항 봉화봉 일대에서 공방전을 이어갔다.
8월 11일 육본직할 17연대가 남진중인 북한군 12사단의 경로를 예측하고 기계~포항간 도로를 차단함으로서 북한군 12사단의 불안감을 키웠다.
8월 12일 국군 제1유격대대는 논골 방향으로 남진중인 북한군 차량들을 공격해 야포2문, 차량 12대를 파괴했으며, 이 와중에 북한군 12사단은 기계 남쪽 구련봉과 인접한 445고지의 국군 25연대를 몰아내 기계의 안전을 도모했다.
8월 13일 도로를 따라 어찌어찌 기계까지 파고드는데 성공한[8] 북한군 12사단은 445고지를 되찾으려는 육본직할 17연대와 수도사단 1연대와 교전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1개 대대를 보현산으로 보내 그곳의 국군 유격대를 정리하려 했고, 이에 유격대원들은 428고지로 밀려났다. 이에 국군에서도 기갑연대와 18연대를 보현산으로 투입했고, 안동·의성전투에서 지연전을 펼치고 남하중인 국군 8사단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래서 국군에선 8사단에게 보현산을 일임했고, 이에 좌측엔 21연대를, 우측엔 10연대, 16연대를 예비로 하고 제1,2유격대대들은 보현산 기슭에 배치해 영천으로 침투하는 적을 격퇴하게끔 배치했다.
8월 14일 국군 수도사단 18연대는 무명고지에서 농성중인 북한군 12사단 수비대에 이어 계속 남진중인 나머지 병력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제압했다.
8월 15일 국군 8사단의 후방인 기계까지 깊숙히 침투 후 서쪽 운주산의 18연대와 접전중인[9] 북한군 12사단 주력을 괴멸시키기 위해 수도사단 18연대, 육본직할 17연대로 구성된 공격대가 결성(?)되었고, 18연대 1대대가 먼저 적 차량 10대를 파괴했고, 2대대는 한티제를 점령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동쪽 3사단 전선에선 포항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8월 16일 육본직할 17연대가 오후 4시 445고지를 점령했고, 수도사단 18연대도 용기동 고지를 점령해 북한 12사단의 측방을 위협했다.
8월 17일 새벽 수도사단 18연대 2대대가 기계 북쪽 288고지의 북한군들을 몰아냈지만 상당수의 사상자를 냈다. 한편 1대대도 고지 동북쪽의 253고지를 점령했다. 이렇게 기계 남쪽에 이어 북쪽 고지군을 모두 잃은 북한군 12사단은 슬슬 비학산과 운주산으로 숨어들기 시작했고, 국군은 이를 완전히 박멸하고자 1,2유격대대들과 8사단 10연대를 추가로 투입하기로 한다.
8월 18일 집중포화를 견디지 못한 북한군 12사단이 비학산과 운주산으로 뿔뿔히 흩어진 틈을 타 육본직할 17연대와 수도사단 18연대가 기계 탈환에 성공했고, 8사단 10연대는 구지동으로 진출했다.
8월 19일 안강-기계의 급한 불이 꺼지자 국군 8사단 10연대는 1사단에 배속돼 다부동 방어전에 투입되기 위해 떠났고, 대신 제1유격대대가 8사단에 배속되었다.
8월 20일 3연대가 7사단에 재예속[10] 되었다.
8월 26일 비학산에서 766부대 잔존병들을 규합해 군세를 늘린 북한 12사단 병력들이 야간에 기계를 점령했다. 뒤이어 경주 진출을 위해 운제산까지 점령했고, 이에 국군도 18연대와 26연대, 17연대를 차례대로 투입해 정리함으로서 이들의 발악은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무렵 다부동에서 동쪽으로 이동중인 북한군 15사단이 12사단이 그랬듯 자양~영천 쪽으로 내려올 계획을 세우기 시작함으로서 전황은 새 국면을 맞이했다.
8월 29일 북한군 15사단이 국군 8사단 16연대가 지키던 포항 봉화봉을 완전히 장악했다.
또한 이 당시 포항지구로 침투하려던 북한군 8사단은 안동·의성전투에서 1개 대대급 손실을 입고 비교적 저항이 적을 것이라 판단되는 신녕으로 인접 사단들과 합동 진출해 구멍을 만들고 대구를 우회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이곳은 7사단 5연대와 기갑연대를 배속받은 국군 6사단이 군위군 산성면에 있는 조림산 일대에서 신녕~화산~영천으로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2.3. 전초전 #3 - 신녕-조림산 전투 (8.30 ~ 9.4)
8월 30일 새벽 4시, 6사단 2연대 3대대가 지키고 있던 370고지를 시작으로 조림산 일대에서 교전이 격화되었고, 이 무렵 1사단 15연대는 모고산(558고지) 일대에 진지를 구축했고, 7사단 8연대는 괴산동 고지에서 적들의 화산면 침입을 저지하고 있었다.
8월 31일 아침, 6사단 19연대 3대대와 1사단 15연대 2대대는 적들을 조림산으로부터 몰아내기 위한 반격전을 개시했으나 오후 1시경 8부 능선에서 돈좌되었다. 이 무렵 북한군 8사단 측에서도 6사단 방어선을 뚫기 위해 남한에서 징집한 의용병들과 전차 21대를 증원받아 대대적 공세를 준비했고, 이에 6사단 진지들 뿐만 아니라 15연대와 8연대의 진지들에서도 적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9월 1일 조림산에서 대치중인 6사단 19연대는 새벽 2시부터 적의 공세를 견디지 못해 새벽 4시경 조림산 남쪽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10시경 7연대 1중대를 배속받아 탈환을 기도했으나 돈좌되었다. 한편 7연대 1대대와 15연대 1대대는 오후 2시경 화산면을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15연대 1, 3대대가 잔적들을 637고지까지 추격, 섬멸해 장병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그리고 이 와중에 19연대 1대대가 오후 9시경 적의 보전 합동공격을 받았으나 그 전에 화산면에 전차들이 있다는 주민들의 제보를 토대로 갑령 부근에 대전차지뢰[11] 를 설치하고 포격 좌표도 맞춰놓는 등 환영준비를 잘 해놨고, 그 결과 8~14대로 이루어진 적 전차행렬이 교량을 넘어 고개를 넘어오다 갑자기 선두전차가 폭음과 함께 전복되었다. 직후 1대대와 16포병대대의 집중포화가 20여분간 이어진 뒤 1중대 3소대장 변규영 소위와 병사 5명이 3.5인치 로켓포와 수류탄을 들고 전차사냥에 나섰다. 설상가상으로 후미 전차가 교량이 끊긴줄도 모르고 후진하다 로켓포에 맞고 전복돼 중간에 있던 나머지 전차 승조원들은 전차 속에서 죽든지 아니면 전차를 버리고 도주 혹은 투항할지를 강요받았다. 참고로 이 당시 전차 승조원들을 우선으로 하다보니 일부 파괴되지 않은 전차들이 있었는데 다음날 휘발유로 불태우거나 공군 폭격으로 모두 파괴했고, 총 8대를 파괴한 공으로 변규영 소위는 금성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고, 나머지 병사 전원은 1계급 특진했다.
9월 2일 조림산 일대에서 전투가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가운데 양측은 차후 공방을 위해 잠시 숨을 거른다.
9월 3일 북한군 8사단은 전차 12대를 앞세운 총 공격을 감행했고, 이에 19연대는 포격과 미 공군 폭격으로 공세를 꺾으려 했으나 적의 기세가 강해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편 조림산 남쪽에서 공방을 펼치던 19연대 3대대와 15연대 2대대, 7연대 3대대는 오전 11시경 적의 공세를 꺾고 조림산까지 추격했으나 일몰 때문에 추격을 단념하고 돌아와야 했다. 이 무렵 군위군 고로면 여덕리에 있던 1대대[12] 가 적 전차 6대를 발견하고 포격을 요청했으나 전차들은 공격받자마자 황급히 화수리 방면으로 퇴각했다.
9월 4일 6사단 7연대도 2개 대대급 공세를 맞이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이들은 진지로부터 약간 뒤로 물러나 매복했다가 미 공군과 포격 지원을 등에 업고 역습을 가해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렇게 북한군 8사단이 조림산과 신녕 일대에서 출혈과 돈좌를 거듭하며 공세종말점에 다다를 무렵, 동쪽에서도 북한군 15사단 및 그간 누적된 잔병들이 영천으로의 총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2.4. 북한군의 9월 공세 - 영천·신녕전투 (9.2 ~ 9.13)
9월 2일 북한군 15사단 주력이 자양~영천 방면으로 총 공격을 감행했고, 이에 호응하듯 포항과 기계 일대의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 잔존병들이 안강과 포항을 각각 공격했다.
9월 3일 피해가 계속 누적되자 국군 8사단 16연대는 철수를 결정했으나, 북한 15사단은 이들을 집요하게 추격해 더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 와중에 국군 8사단은 6사단에 배속돼 있었던 7사단 5연대를 배속받았으나, 이들도 자양에서 대대적 기습을 받고 허겁지겁 흩어져 철수했다. 한편 수도사단 역시 7사단 3연대를 배속받아 무릉산에 배치했다.
9월 4일 국군 8사단은 보현산을 포기했고, 그렇게 북한군 15사단은 영천으로 파죽지세로 밀려왔다. 그 뒤 자양면 기룡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한 채 공방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부족해서 7사단의 8연대와 공병대대를 더 배속받았다.
한편 경주시 안강읍에 있던 수도사단도 기갑연대, 3연대, 17연대, 미 17연대 3대대를 무릉산~칠보산 곤제봉(=곤계봉)~호명리 선에 배치해 이 일대에 흩어진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 잔존병들의 경주 침투를 저지하려고 했다.
9월 5일 오전 1시, 비가 내리는 가운데 북한군 15사단은 포격 지원 속에 전차 5대를 앞세우고 국군 8사단 방어선을 뚫으려 했다. 우선 16연대와 3연대 1대대의 중앙 방어선이, 뒤이어 21연대와 5연대의 좌우측 방어선도 공격받아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영천 동북쪽 외곽에 최후 방어선을 형성해야 할 정도가 되자 국군 8사단이 소속된 1군단에선 인접한 1사단과 6사단에 증원군을 요청했으나 이들도 급박하긴 마찬가지인데다 무엇보다 이들은 2군단으로 소속이 달라 요청에 응할 의무가 없었다. 그래서 육본에서 8사단을 2군단 소속으로 변경함으로서 2군단은 1,6,8사단 삼각 편제를 이루었고, 8사단 역시 증원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9월 6일 영천읍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에 국군 8사단은 공병대대와 3연대 1대대로 이를 탈환하려 했지만 돈좌된 채 오수동으로 물러났고, 이후 재공격을 감행해 탈환에 성공했다. 또한 신녕의 국군 6사단도 317고지 일대에서 (북한군 15사단의 성공 소식을 듣고) 또 내려오던 북한군 8사단을 포격 지원 속에 방어해 냈고, 공세에 실패한 북한군 8사단은 직후 전멸 상태로 패퇴하였다. 한편 수도사단도 전술지휘소가 습격당한 가운데 17연대는 곤제봉과 호명리, 낙산 일대에서 경주로 침투하려는 북한군 잔존병들을 맞이해 고지 쟁탈전을 치른다.[13]
그리고 이 와중 팔공산의 국군 1사단 11연대와 신녕의 국군 6사단 19연대가 8사단에 임시 배속되고, 뒤이어 유재흥 2군단장이 미 제1기병사단장에게 구걸하다시피 간청해 빌려온[14] 미군 전차 1개 소대(5대)도 배속되기로 결정됨으로서 8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한 숨 돌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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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새벽 2시 칠보산 곤제봉을 사수하던 국군 17연대와 무릉산의 3연대 정면으로 연대급 공세가 시작되었고, 새벽 4시경 소수의 적이 갑산리(구:산전리) 방면으로 침투를 시도했으나 격퇴되었다. 한편 무릉산의 3연대는 적의 주공이 집중되자 고전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적들 일부가 난전을 틈타 무릉산과 곤제봉 사이의 능선을 넘어 후방으로 침입해 버렸다. 그 중 몇몇은 17연대의 후방을 공격했고, 또 몇몇은 청령리까지 내려갔으나 여기엔 미 17연대 2대대가 집결중이어서 접전을 펼치기도 했다. 하여간 상황이 이렇게 되자 3연대는 병력 수습 후 후방 검단리 능선에서 저항을 이어갔고, 17연대도 갑산리로 진출한 병력들을 곤제봉으로 남하시켰다.
이 무렵 국군 19연대 2대대는 북한군 15사단의 보급차량 30여대를 발견하고 파괴했다. 한편 조림산과 운산동 일대에서도 국군 8사단 21연대 2대대가 북한군 73연대의 1개 대대급 병력들을 맞이했는데, 사전에 이 일대로 공격해 올 것을 파악한 유재흥 준장이 각 연대마다 되도록 예비대를 많이 두도록 지시했고, 또한 포병의 집중포격으로 수월하게 격퇴할 수 있었다. 한편 국군 11연대는 139고지-130고지로 진출했다.
9월 8일 북한군 15사단 45연대가 총공격을 감행하다 포격을 벗삼은 국군 19연대의 저항에 가로막혀 격멸당했다. 또한 수도사단 1연대도 적의 공세를 격퇴했는데, 시체들을 조사해보니 휴대한 식량들이 변변찮아서 산골 오지에서 약탈할 민가도 없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9월 9일 국군 8사단 21연대는 인접 부대들이 사라진 가운데 홀로 선천리 산악지대에서 북한 73, 103연대를 상대로 농성을 이어가며 북한군 15사단의 발목을 잡았으나,# 이때까지 사단본부와 통신이 안 돼 8사단 본부에선 한동안 이들을 전멸한 줄 알았다고 한다. 또한 이 날 국군 8연대는 대구 방면으로 향하던 북한군들을 저지하고 영천 시내로 진격했으며, 26연대는 안강에, 5연대는 경주시 아화에 각각 진지를 구축해 북한군의 경주 진출을 막으려 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5연대 2대대가 일대를 수색하던 중 중앙선 임포터널 속에 일부를 숨겨놓고 주간사격을 실시하던 북한군 15사단 포병연대를 발견하고 17, 18포병대대와 미 공군의 화력지원 속에 섬멸 후 곡사포 76문, 차량 59대를 노획하거나 파괴하는 성과를 냈다.
9월 10일, 한 숨 돌린 국군은 8사단과 7사단을 주축으로 남, 서, 북쪽 방면으로 반격전을 개시했다. 우선 7사단의 각 연대들을 원대복귀시키고,[15] 여기에 포항 전투에 투입됐었던 8사단 10연대[16] 를 7사단에 배속시켜 임포를 공격 후 자포동으로 진출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7사단 5연대와 8사단 10연대가 새벽 3시경 임포를 정리했고, 뒤이어 10시 30분경 북한군 15사단 50연대본부까지 발견하고 털어버렸다. 한편 국군 8사단 역시 188고지-영천역 일대를 점령하고 완산터널을 수색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영천~자천간 도로를 방어하던 국군 8사단 21연대가 전차로 이동중인 군관을 포함, 4명을 생포하는 성과를 냈다.[17] 또한 이 과정에서 신속한 증원을 요청하는 전문도 입수했는데, 이를 토대로 북한 15사단 역시 12사단과 마찬가지로 무리하게 깊숙히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9월 11일, 어젯밤 북한군 군관으로부터 알아낸 정보로 국군 19연대와 16연대가 북한군 15사단 사령부를 협공해 박살냈다. 한편 국군 7사단은 225고지-243고지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또한 8사단의 급한 불이 꺼지자 8사단에 배속되었던 11연대와 19연대는 각자 소속 부대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9월 12일, 북한군 15사단은 전차와 자주포 모두와 병력의 50%를 상실해 전멸 상태가 되었고, 이 틈을 타 국군 8사단 21연대가 자천을 탈환했다. 한편 곤제봉을 두고 대치중인 국군 17연대 2대대는 신임 대대장인 류창훈 소령[18] 을 맞이한 뒤 오후 4시경 특공대 12명으로 곤제봉 정상부를 확보하였으나, 직후 관측반의 실수로 포격이 곤제봉 정상부에 집중되어 특공대가 전멸하고 만다.
9월 13일, 국군 8사단 10연대가 384고지-372고지로 진출했고, 이 과정에서 후퇴중인 북한군들은 국군에 의해 퇴로가 막혀 큰 타격을 입었다. 한편 영천에서 북한군의 위협이 사라지자 국군 8사단은 전술지휘소를 영천으로 북상시켰고, 또한 오후 3시 국군 17연대 2대대가 2시간 가량 접전 끝에 곤제봉의 북한군들을 완전히 축출하자 육군본부는 반격명령을 하달했고, 미 8군도 총공격을 위한 전투편성을 끝마쳤다.
2.5. 인천상륙작전 이후 안강-기계의 수도사단과 신녕지구의 6사단의 반격 (9.15 ~ 9.22)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치중인 북한군들은 우물대었다.
9월 18일 수도사단은 어래산~445고지~145고지~236고지를 연하는 방어선을 형성했고, 이에 북한군 잔존병[19] 들도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서 고지 쟁탈전이 새로이 시작되었다.
9월 19일 안강면을 완전히 탈환하기 위한 시가전이 벌어져 이 과정에서 17연대 김용식 일병 등이 전사한다.
9월 22일 이 날 수도사단은 대반격을 가했고, 18연대가 어래산을, 기갑연대는 기계를 재탈환했고, 6사단 역시 적들과 공방을 펼쳤던 조림산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기나긴 전투도 이로서 끝났다.[20]
3. 의의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이 영천의 거점을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필사적으로 지켜내지 못했다면 동쪽으로는 동해안의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이, 서쪽으로는 대구-팔공산의 국군 6사단,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포위당해 낙동강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졌을 수도 있었다.
북한군 15사단은 영천에서 예상치 못한 돌파를 성공시켰으나, 전과확대를 수행할 2제대가 후속하지 않아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데 실패했다. 이는 북한군 8월 공세와 구분되는 9월 공세의 특징으로, 북한군은 특정 정면에 전력을 집중한 공격을 실시하는 대신 다정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가해 혼란을 유발하고 미 해공군의 공습을 회피하고자 했다. 초기 단계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발휘돼 전선에 돌파구를 여는 데 성공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한 한국군 2군단이 인접 사단에서 가용 전력을 끌어모아 반격을 시작하자 돌파 단계에서 심각한 전투력 손실을 경험한 북한군 15사단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채 밀려나 돌파구가 닫히고 만다.
영천 전투는 미 극동군 사령부와 8군 사령부가 일시적으로 방심한 결과 벌어진 위기라고 볼 수도 있다. 미군은 8월 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후 북한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고 판단,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표되는 공세이전 계획 수립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 해병대는 상륙 준비를 위해 아예 후방 부산항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정도. 이런 상황에서 북한군이 갑작스런 총공세를 가해오자 허를 찔린 유엔군 방어선 곳곳에서 일시적으로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심지어 8군 사령부 예비대가 모조리 동나 후방 부산항에서 승함 대기중이던 미 해병 1여단을 미 2사단 정면에 끌어다 쓸 때도 인천 상륙 준비를 해야한다며 딱 이틀만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4. 기타
- 한편 후방인 안강-기계면 일대에 해군육전대(해병대) 1개 대대와 학도병들이 경계를 하고 있었으나, 초병 역할에만 집중되었기에 언급되는 일이 드물다. 또한 김두한 휘하 건달패와 학도병들이 수도사단 방면에서 전개된 고지쟁탈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 여담으로 당시 미국은 영천을 빼앗기고 전선이 무너지면 한반도를 포기하는 'New Korea Plan'을 실행할 예정이었다. 한국정부와 일부병력을 서사모아 제도로 이주시켜 아시아 방어에 이용하겠다는 구상이었다.
[1] 다만 북한군이 경주로 침투하려는 걸 두고 싸워서 경주 전투로도 불린다.[2] 정확히 말하면 서쪽의 8사단과 동쪽의 3사단 사이의 V자 전선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후방인 기계 일대도 맡게 된 것.[3] 이 당시 해당 연대는 포항지구전투사령부 예속이었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뒤 2사단에 예속되었다. 그리고 2019년 10월, 2사단의 재편 과정에서 12사단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4] 영천·신녕전투 때 수도사단에 배속되기도 했다.[5] 전투 내내 서쪽 1사단과 동쪽 3사단, 그리고 후반 반격전 때 7사단에 배속되기도 했다.[6] 신녕 전투 때 6사단 배속.[7] 다만 북한군이 경주로 침투하려는 걸 두고 싸워서 경주 전투로도 불린다.[8] 그런데 이 당시 도로 양쪽 산속에선 북한군과 국군들이 교전을 이어가고 있었고, (위 항목에서 상술했듯) 북한군이 딱히 유리한 상황도 아니라 국군이 이들이 내려온 도로를 차단하고 포위할 위험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 당시 북한군은 김일성의 독촉을 받고 있었으며, 개전 초기에도 나름 유효했던 전략이고, 무엇보다 후속부대가 계속 밀고 내려오면 경주~포항~부산으로의 돌파구 형성도 가능했기에 이런 판단을 내린 듯 보인다.[9] 이들은 17연대와 18연대에 각각 공격을 가해 전투지경선을 파악한 뒤 이를 따라 1개 소대를 운주산 정상부까지 침투시켰지만, 그곳에 있던 연대본부 경계병들이 이를 발견한 뒤 장교들과 위생병, 통신병, 헌병 같은 비전투 병력들과 함께 교전을 벌여 격퇴시켰다.#[10] 1950년 1월 25일 (구)수도사단(현: 7사단) 예비대로 예속된 뒤, 전쟁이 일어난 6월 25일 수경사로 예속이 변경돼 떠나버렸고, 대타로 올 25연대까지 오지 못하는 바람에 (구)수도사단은 가뜩이나 극심한 전력의 격차가 더 벌어져 포천과 동두천부터 비참하게 밀려나고 말았었다.[11] 서술자에 따라 도로대화구로도 서술하며, 날짜 역시 9월 1일 혹은 4일로 나뉘므로 교차검증 필요.[12] 일부 자료에선 18대대라고 서술하나, 이 당시 국군 보병연대가 대대를 18개까지 운용하지도 않았고 바로 앞에서는 1대대로 서술했기에 일단 오타로 보고 1대대로 서술.[13] 참고로 곤제봉 쟁탈전은 13일까지 이어졌으며, 이를 곤제봉(=곤계봉) 전투로 별칭하기도 한다.[14] 정확히는 영천의 상황이 급박하니 전차 1개 소대만 빌려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으나, 왜관도 일촉즉발이라며 퇴짜맞은 직후 월튼 워커 장군이 이를 듣고 배속을 지시한 것이다.[15] 단, 3연대는 수도사단 쪽이 아직 일촉즉발이기에 1대대만 복귀시켰다.[16] 다만 이들은 3사단 22연대가 교대를 위해 도착하기도 전에 빠졌기에 북한군이 무주공산을 접수했을 수도 있었다.[17]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이들은 어이없게 잡혔다. 정확히는 패잔병같이 어수룩한 차림의 신병이 혼자 전차 앞을 몸으로 막아선 뒤 내리라는 몸짓언어를 했는데, 북한군 군관은 주변에 신병 뿐인 걸 보고 '포위했으니 항복하라'는 권고로 받아들이고 다 내려서 신병을 따라갔다가 주변에 있던 고참병들에게 붙들렸다.[18] 당시 17연대 2대대장은 조영구 소령이었는데, 2대대의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이 연대를 배속받은 송요찬 대령이 3대대장이었던 류창훈 소령으로 지휘관 교체를 한 것.[19] 12, 15사단.[20] 다만 영천-신녕을 지켜낸 뒤 이어진 수도사단의 분투를 안강-기계 전투에 포함시킬지, 영천-신녕 전투에 포함시킬지는 사람마다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