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전투
1. 개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5일부터 26일까지 경기도 포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북한군은 서울을 조기 점령하기 위해 동두천·포천에서 의정부로 이어지는 경로에 병력을 집중시켰는데, 북한군 제1군단 제3사단이 운천-포천 방면을, 제4사단이 연천-동두천 방면을 맡았다.
한편 이 당시 일대의 38선 경비는 (구)수도사단, 지금의 제7보병사단이 맡고 있었는데, 서쪽 동두천은 제1연대가, 동쪽의 포천 방면은 제9연대가 담당하고 3연대는 예비대로 이들의 후방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단예비인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대신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중인 제2사단 제25연대가 배속되어 6월 15일까지 의정부로 이동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제25연대는 병영 문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도 오지 못한 채 경상도 빨치산이나 소탕하고 있었고, 그렇게 (구)수도사단은 예비연대가 없는 상태와 주말 외출·외박으로 인해 4,500여 명만이 부대에 잔류한 채 6·25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2. 전투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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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1950년 6월 25일 오전 3시 40분을 전후해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북한군이 남하했고, 서쪽 동두천 방면에 이어 포천의 38°선 방어를 맡은 (구)수도사단 9연대 2대대 역시 추동리·사직리 일대를 경계하던 도중 북한군 제3사단 7연대의 기습을 받았다.
특히 북한군은 그동안 여러 충돌과 정찰을 거듭하여 국군의 전초 진지 위치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천 전방의 제6중대와 제7중대의 방어 진지를 집중적으로 포격하였고, 이로 인해 기관총 진지를 제외한 모든 교통호가 붕괴되면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후 북한 전차 3대가 양중교(일명, 삼팔교)까지 넘어 후방 방어 진지도 유린하였고, 이에 제7중대는 43번 국도를 적에게 내주고 823고지 서쪽 능선으로 후퇴해 분산 병력을 수습하였다.
한편 포천 서쪽을 담당한 6중대도 교전을 치렀는데, 3소대가 추동리에서 교전할 동안 나머지 소대는 287고지까지 이어지는 곳에 급편 방어 진지를 편성하였으나, 325번 도로를 따라 남하한 전차 공격을 받자 분산 철수하였다. 한편 12km 후방에 위치한 대대본부에서는 대대장 전순기 소령이 오전 4시 반 연대장에게 긴급 상황을 보고한 뒤 증원 병력과 특히 대전차 화기의 지원을 요청한 뒤 오전 6시 경 제8중대장 박기순 중위를 대동하고 만세교 초소로 올라가 전황을 살핀다.
이후 대대 예비로 대기중인 5중대에게 160고지와 208고지에 진지공사를 시켜 지연전을 하려고 했으나 일반 소총만으로는 전차를 감당할 수 없었고, 이렇게 전방의 2대대가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나머지 1,3대대는 천계산(424고지), 가랑산(350고지)에 방어선을 형성하게 된다.
한편 208고지 북쪽 기슭의 5중대 2소대 진지에서 만세교 북쪽 300m 거리까지 접근한 북한 전차를 향해 기관총을 사격해 관심을 이 쪽으로 돌리는데 성공했으나, 진지가 공격에 노출되었다. 그 와중 연대 대전차포 중대가 57mm 대전차포 3문과 대전차 로켓 12문을 가지고 만세교로 출동해 교량 남쪽 20m 도로변에 대전차포를 방열하였고, 오전 8시경 다가오는 북한 전차를 향해 초탄을 발사해 명중에 성공한다. 그러나 전차는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대전차포 진지를 유린했다. 이에 병사들은 황급히 포의 조준경을 빼 들고 신평리 쪽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오전 9시 40분 경 만세교 일대의 국군의 저항을 무력화한 북한군은 10시 반 경 공세를 재개하며 제7연대는 43번 국도로 정면공격을, 뒤따르던 제9연대는 서쪽 영송리~가양리 방면을 타고 87번 국도로 포천 중심까지 우회 진격해 9연대 주력을 괴멸시키고자 했고, 이를 위해 북한 7연대 측 전차들이 만세교를 통과한다. 한편 이를 저지할 수단이 없어진 5중대 장병들은 208고지 위에서 이를 하염없이 지켜보아야만 했으며, 이렇게 제2대대 방어선은 무력화됐다.
그 뒤 제1대대 진지가 위치한 천계산 서쪽에도 집중포격이 시작되었으며, 43번 국도를 따라 2열로 열을 지어 거침없이 밀려왔다. 그 뒤 오후 2시경 적의 선두가 신북대교를 넘어왔는데, 진지 사수 과정에서 휴대한 탄약을 모두 소진한 1대대는 3대대와 연락도 되지 않다보니 연대 본부와 함께 퇴각하기로 했다. 한편 가랑산 진지를 지키던 제3대대는 이날 밤 단독으로 왕방산 기슭을 따라 회암령을 넘은 뒤 동두천 가도의 덕정 부근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대부분 낙오되어 다음날 아침에 옥정리로 집결한 병력이 100여명에 불과했으며, 이후 1연대와 합류하게 된다.
한편 제9연대가 고전을 치르고 있을 무렵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가 포천 방면으로 출동하고 있었고, 3연대장 이상근 중령은 전황을 파악하려고 수색소대장 김철순 중위에게 위력정찰을 시킨다. 그리고 오후 3시 반 포천시 남쪽 어룡동에 적의 전차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소흘읍 송우교에서 저지시키려고 1,3대대를 주축으로 한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134고지에 연대 관측소를 설치하고, 57mm 대전차포 2문을 동쪽에 방열해 공세에 대비한다.
이후 오후 5시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나무단으로 위장한 북한 전차들이 출몰했고, 이에 양 대대 진지에서 일제히 사격하였는데, 특히 연대의 중화기가 집결된 제 12중대는 중대장 대리 김현경 중위의 진두지휘로 81mm박격포, 고폭탄 등을 마구 쏴가며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 기계화 부대는 아랑곳없이 제3대대 관측소에 이어 중화기 진지에 집중 포격을 가해 사상자가 속출했고, 이렇다 할 대전차 수단까지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전차를 뒤따르는 보병을 대상으로 사격을 하였으나, 계속 꾸역꾸역 밀려들어와 송우교 방어선도 돌파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아무도 후퇴나 대전차 대응 지시를 내리지 않아 시간이 경과되었고, 오후 6시 30분 적의 전차와 보병들에게 중앙이 뚫려 양쪽이 분단되자 연대는 예하 대대들에게 철수를 명령한다. 이에 잔존 병력들은 의정부를 향해 쫓기듯 남하했고 적들은 이 뒤를 쫓아 의정부 전투를 치른다.
3. 결과
제9연대 2대대의 분투로 개전 당일 국군 제9연대 주력을 괴멸시키고 포천을 조기 점령하려던 북한군 제3사단의 기도가 일시 좌절되었고, 그 사이 제9연대의 나머지 대대는 가랑산과 천주산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해 시간을 추가로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북한 전차부대를 막아낼 수 없어 오후 5시 경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뒤이어 의정부 전투가 시작되었다. 한편 국군 제9연대 1대대의 잔여 병력들은 태릉에 집결해 그곳의 사관생도들과 함께 내촌-태릉 전투를 치른다.
또한 이 문서에 따르면 9연대장 윤춘근 중령에 따르면 이 당시 전방의 2대대를 빼고 외출/외박을 실시하려 해도 전방에 전차가 수시로 목격되는 등 적정이 워낙 수상해 1, 3대대 병사들의 외출을 연기하고 영내에서 휴무하도록 조치시켰다는데, 결국 이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4. 참고 자료
- 신오성, 『한국 전쟁』상 (국방 군사 연구소, 1995)
- 신오성, 『6·25 전쟁사』2 (국방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