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우

 


1. 개요
2. 생애
2.1. 공민왕의 공신
2.2. 홍건적의 침입
2.3. 정세운 암살 사건과 비극적 최후


1. 개요


安祐, ? ~ 1362년
고려 후기의 무신. 어릴 때 자는 발도(拔都)이고 본관은 탐진[1]이며, 아버지는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지낸 안원린이다.

2. 생애



2.1. 공민왕의 공신


안우는 공민왕 1년(1352년)에 군부판서 응양군 상호군에 임명되었고, 지추밀원사와 참지중서정사를 역임했다. 이후 공민왕 2년(1353년)에 밀직사 이야선첩목아(李也先帖木兒, 이에센테무르)와 함께 원으로 가서 원나라 황후의 탄일 예물과 방물을 바쳤으며, 공민왕 3년(1354년)에 정세운(고려), 유탁, 염제신, 권겸, 원호, 나영걸, 인당, 김용, 이권, 강윤충, 황상, 최영, 최운기, 이방실 등 40여 인과 서경 수군 300명, 그리고 날쌔고 용맹한 군사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서 장사성 토벌전에 참가했다.
이후 별성군(鼈城君)에 봉해진 그는 공민왕 5년(1356년) 지추밀원사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지문하성사, 참지중서정사에 봉해졌다. 공민왕 7년(1358년) 왜구가 교동(喬桐)을 불태우자, 공민왕은 개경에 계엄령을 내리고 각 방리(坊里)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전투에 동원할 군사로 삼았다. 이때 안우는 동강병마사로 임명되었으며, 뒤이어 안주군민만호부의 만호로 제수되었다. 이때 재추(宰樞)들이 도성의 성문 밖에서 환송회를 열었는데, 안우가 술에 취해 누워서 자는 바람에 해가 정오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아 휘하 군사들이 실망했다. 공민왕 8년(1359년)엔 기철 일당을 처형하는 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봉해졌으며, 서북면 부원수로 임명되었다.

2.2. 홍건적의 침입


공민왕 8년(1359년) 겨울, 홍건적 4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 정주, 인주를 함락시켰다. 이에 안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자, 홍건적은 무너져 달아났다. 안우가 추격하여 30여 명의 적을 주살하자, 홍건적은 철주로 들어갔다. 안우가 기병 70여 기를 거느리고 전장으로 가던 중 산에 올라 말을 쉬게 했는데, 갑자기 홍건적의 우두머리 모귀양(毛貴揚)의 군사가 쏟아져 나왔다. 장졸들이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변했지만, 안우는 태연자약하게 웃고 이야기하면서 대, 소변과 세수, 양치질을 마쳤다.
그 후 안우는 조용히 말에 올라 군사를 이끌고 바로 전진하여 청천강을 끼고 진을 쳤다. 홍건적 기병 몇 명이 다리에 올라 창을 휘두르면서 용맹을 자랑하자, 병마판관 정찬이 칼을 휘두르고 크게 소리치면서 먼저 다리에 올라 적장 1명을 베었더니 적이 조금 물러섰다. 안우는 그 틈을 타 이방실, 장군 이음, 이인우 등과 함께 분전하여 적을 크게 깨뜨렸고, 홍건적은 인주, 정주 등으로 물러나 주둔했다. 공민왕은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안우에게 금대(金帶)를 하사했다.
선주 관내 현의 백성들이 적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흩어지자, 홍건적이 1,000명을 보내 그 마을의 곡식들을 약탈했다. 이에 안우와 김득배가 보병과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다가 적의 주둔지에 이르렀는데, 홍건적이 정예병을 총동원해 반격했다. 결국 안우 등이 패하여 천호 오중흥과 장군 이인우는 전사했고 군사와 말을 많이 잃었다. 안우는 퇴각하여 정주에 주둔했고, 홍건적은 서경을 함락했다.
이듬해에 고려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홍건적 수천 명을 주살하자, 홍건적은 물러나 용강과 함종에 주둔했다. 안우는 안주군민만호도만호에 제수된 후 함종으로 진군했지만 홍건적이 고려군이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돌격하여 패퇴시켰다. 홍건적이 정예 기병으로 추격하자, 안우는 이방실, 김어진, 대장군 이순 등과 함께 군사 천 명을 이끌고 적과 죽기로 싸워 수십 명의 머리를 베어 적이 50리 쯤 쫓다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1,000명이 산으로 달아났다. 그 후 안우는 철수하는 홍건적을 맹추격해 연주강에서 적을 쳐 홍건적 수천 명이 강에 빠져 죽게 만들었다.
이에 적이 언덕에 올라 저항할 태세를 갖추자, 안우 등은 궁지에 몰린 적이 죽기로 싸울 것을 우려해 군사를 거두고 쫓지 않았다. 그날 밤 적이 달아나자, 이방실이 이른 아침에 병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그들을 추격해 선주에서 적병 수백명을 죽였다. 결국 홍건적은 불과 300명 만이 살아남아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안우는 김득배, 경천흥과 함께 이순과 김인언을 보내어 승전을 보고했고, 공민왕이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자 장계를 올려 하례했다.

홍건적이 침입하여 매처럼 사납고 이리같이 탐욕스러우니 비록 흰 호랑이[白額]가 앞을 막더라도 여우처럼 약삭빠르고 토끼같이 교활하여 욕심을 부리면 반드시 얻었습니다. 홍건적은 험준한 요새라고 하더라도 맞닥뜨리면 도륙하지 않음이 없었고 사나운 불꽃처럼 모두 불살랐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기만 해도 간담이 무너지고 악취가 풍겨오는 듯해서 움직일 때마다 마음이 슬펐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태평을 누린 민(民)으로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는 적을 당해내기는 참으로 역시 어려웠습니다.

청천강(淸川江)과 안주(安州) 싸움에서 불리했던 것은 비록 신들이 부족한 탓이었습니다만, 서경(西京)과 함종(咸從)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은 사직(社稷)에 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들판에 쌓인 시체가 수만이었고 관문과 나루터로 돌격한 기병이 1,000명을 넘었습니다. 그 흉악한 괴수를 놓쳐 한이 남습니다만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한 자가 많았으니, 그들이 궁지에 몰렸음은 물을 것도 없습니다. 또한 남편과 부인이 서로 목을 찔러 죽은 자가 반이나 되었으니 꾀한 바가 이미 다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우리나라에 〈침입할〉 뜻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지만 적들 중에는 활과 말에 능숙한 자가 매우 많은데,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근년 사이에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만일 선성(宣城)에 있는 무리들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지 않으면 분명히 다시 장래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 등이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고생하고 죽음의 치욕에 내버려진 것을 염려하시어 개선하겠다는 보고를 윤허하시고 명령을 내려 소환하시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가슴을 적셨고 용안을 뵈올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변방의 일은 모두 여름철 방비에 돌렸습니다만, 이 지역의 형편을 돌아보건대 몇 해를 지나야 숨을 돌릴 것이니 지게미와 쌀겨를 얻어 입에 풀칠하는 것 또한 오히려 다행한 일입니다. 술과 고기를 민에게 요구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니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왕래하면 아침저녁의 죽과 밥을 제외하고 술자리의 비용은 일체 금지하십시오.

변방의 역관(驛館)은 도로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역리[騶吏]가 주현(州縣)에서 출발하면 고을과 역의 거리가 가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고 물자 공급과 인원 교대도 거의 한 달이 걸립니다. 안주 이남을 제외한 가주(嘉州)·정주(定州)·수주(隨州)·곽주(郭州)·선주(宣州)·철주(鐵州)·용주(龍州)·인주(麟州)의 사람들은 마땅히 본주(本州)에서 나오지 않은 채 빈객을 대접하게 하고 당분간 그곳의 역관을 폐지하십시오. 인민들 가운데 부득이 오랑캐에게 노예처럼 욕을 당하거나 군관(軍官)들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산으로 도망하여 숨은 것은 형세가 구차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힘이 넉넉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의로 도모한 자들을 제외하고 마땅히 먼저 그 허물을 헤아리고 이를 용서하신다면, 은혜와 위엄을 함께 행사하시어 어긋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평민(平民)·노비(奴婢)·양가자손(良家子孫)·장사(將士)들 중에 스스로 공로를 세우려다가 혹 포로가 된 자가 있습니다. 주장(主將)이 비록 명령을 내렸더라도 어찌 매우 급하게 추궁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인 아이와 남녀를 제외한 사람들은 또한 마땅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세심하게 살피게 하여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하십시오. 신 등은 예전부터 전투를 치르면서 간간이 건의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이번 달 초하루에 군영을 떠나 조정으로 가게 되어 삼가 장계를 받들어 아룁니다.

공민왕이 답했다.

궁지에 몰린 도적이 와서 벌과 전갈처럼 독을 함부로 뿜었으나 의로운 병사가 가는 곳마다 평정하였으니 위엄이 어찌 우레와 천둥뿐이겠는가? 개선을 아뢰고 돌아오면서 장계를 올려 하례하니 가상하구나.

그 후 군사들이 개선하자, 공민왕은 장사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안우를 추충절의정난공신 중서평장정사에 임명했다. 그러나 공민왕 10년(1361년) 10월에 홍건적 1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해 삭주와 이성을 함락하자, 공민왕은 안우를 상원수로 삼아 적을 토벌하게 했다. 안우는 조천주, 정지, 장신보, 이원계, 홍선, 정선 등을 보내 보병과 4기병 400명을 거느리고 박주로 진격시켜 적병 100여 명을 참수시켰다. 이후 안우는 여러 부대를 거느리고 안주로 나아가 주둔하며 승전을 보고했다.

정찬, 왕안덕, 김인언, 허자린, 박수년, 김기, 정원보, 유지철, 변안렬, 권장수, 조린, 조인벽 등이 모두 힘써 싸워 공로가 있으니 상을 주어서 사기를 진작시키기 바랍니다.

공민왕이 안우를 도원수로 삼으며 말했다.

변방의 일은 장군이 다스릴 것이니, 그대는 명령을 듣는 자에게 상을 주고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벌을 주도록 하라.

그러나 홍건적이 안주를 습격해 고려군을 격파했고 상장군 이음과 조천주가 전사했다. 이후 적이 김경제를 사로잡아 그들의 원수로 삼고 글을 보냈다.

1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갈 것이니 속히 맞이하고 항복하라.

공민왕이 밀직제학 정사도와 김규를 보내 절령책을 지키게 했지만, 홍건적이 밤에 군사 10,000여 명을 책 근방에 매복시켰다가 닭이 울자 철기 5,000명으로 책문을 공격하여 부쉈다. 이에 고려군은 크게 무너지고 안우와 김득배 등은 단기로 도망쳐 돌아왔다. 안우는 군대를 수습하여 총병관 김용 등과 함께 금교역에 주둔했다. 이후 공민왕은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마침내 피난하기로 결정하고 경성의 부녀자와 노약자들을 먼저 성을 나가게 하니 민심이 흉흉해졌다. 얼마 후 적의 선봉이 홍의역에 이르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장차 남행하려 했다. 안우는 김용, 이방실 등과 함께 경성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의병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자가 얼마 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공민왕에게 자신들은 여기에 남아 적을 막을 테니 피할 것을 권유했다.
결국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시키고 소와 말을 죽여 가죽을 펴서 성에다 두르고 물을 부어 얼게 만들어 사람들이 타고 오를 수 없게 했다. 또 남녀를 붙잡아 불태워 죽이고 임신한 여자의 젖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자행했다. 이에 공민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모든 군사를 지휘하게 했다. 안우는 정세운의 부관으로서 이방실, 김득배, 황상, 한방신, 이여경, 안우경, 이구수, 최영, 이성계 등과 함께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개경 동교의 천수사 앞에 주둔했다. 그 후 안우는 공민왕 11년(1362년) 1월 17일에 제장들과 함께 총공격을 감행해 적병 10만 명을 몰살시켰다. 홍건적은 잔당 파두 반 등 1만 명만 살아남아 압록강을 건너 멀리 달아났다.

2.3. 정세운 암살 사건과 비극적 최후


김용(고려)은 정세운이 총병관으로서 홍건적을 궤멸시키고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우자 공민왕의 총애가 그쪽으로 쏠릴 것을 두려워해 안우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만들려 했다. 그는 왕지를 꾸며 글을 써서 조카인 전 공부상서 김림으로 하여금 몰래 안우 등을 찾아가 정세운을 죽일 것을 도모하도록 했다. 이때 김림은 안우 등에게 말했다.

정세운이 평소에 경들을 꺼려했으니 적을 격파한 후에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 먼저 그를 도모하지 않는가.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의 장막에 찾아가 말했다.

지금 정세운이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으며, 김용의 글이 이와 같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소.

김득배가 말렸다.

이제 겨우 적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마땅히 우리끼리 서로를 죽이겠는가. 옛날 사마양저(司馬穰苴)는 마음대로 장가(莊賈)를 죽였으나, 위청(衛靑)은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은 것은 고금의 밝은 귀감이니,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소. 만약 부득이하면 그를 잡아서 궁궐 아래에 이르게 하여 상(上)의 처분을 듣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안우와 이방실은 이에 물러나와 병영으로 돌아갔으나 밤이 되어 다시 와서 말했다.

정세운을 토벌하는 것은 군주의 명령이오. 우리들이 공을 세우고 군주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가, 그 후환을 어찌하겠는가.

김득배는 그래도 끝까지 거부했지만, 안우 등이 그를 강요했다. 결국 세 사람은 술 자리를 차려두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불러서 오게 했다. 이윽고 정세운이 오자, 안우가 장사들에게 눈짓을 해 좌석에서 그를 때려 죽이게 했다. 이후 장군 목충이 군전으로부터 행재소로 찾아와 말했다.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을 살해하고 비밀로 하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공민왕은 문하시중 홍언박, 김용, 경천흥, 찬성사 유탁, 추밀원사 유숙을 불러서 의논하고 직문하 김전을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용서한다는 뜻을 반포하고, 이어서 행재소로 올 것을 독려해 그 마음을 안심시키도록 했다. 이때 복주 수령 박지영이 재추소에서 와서 말했다.

이방실이 홀로 정세운을 벨 것을 모의했고, 안우 등 또한 해를 당했습니다.

이에 인심이 위태롭고 흉흉하자, 공민왕은 김전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군사를 보내 토벌하려 했다. 얼마 후 판태의감사 김현과 상장군 홍사우가 와서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을 비난한 글을 바치자, 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금, 은, 포, 비단을 하사했다. 공민왕은 다시 김전 등을 보내 용서한다는 뜻을 반포하고, 박지영을 불러 책망한 후 관직을 파면시키고 향리로 돌아가게 했다. 또한 지주사 원송수를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옷과 술을 하사했다.
안우가 함창현에 이르자, 공민왕은 대신 가운데 꾀가 있는 사람을 택하여 가서 맞이하게 하고 비상시를 대비해 시중 유탁을 보냈다. 유탁이 가서 술을 올리며 서서 마시기를 청했지만 안우는 예가 아니라며 이를 거부했다. 이에 유탁이 울며 "지금 공께서 삼한을 수습하여 회복하였으니 내가 감히 작위를 마음쓰겠습니까? 한 잔을 올린 후에 어찌 다시 서서 마시기를 청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튿날 안우가 개선하여 행궁으로 나아가 공민왕을 알현하려 했는데, 김용이 목인길을 시켜 중문으로 인도하게 하고 문지기에게 그의 머리를 내리치게 했다. 안우는 몽둥이를 얻어맞았으나 말과 얼굴색이 변하지 않고 차고 있던 주머니를 3번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조금만 늦추어라. 주상 앞에 가서 주머니 속의 글을 올리고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공민왕이 미처 듣지 못한 사이에 내리친 자가 안우를 다시 쳐 죽이고 뜰로 끌어내렸다. 이후 공민왕은 교지를 내렸다.

너희들은 함부로 정세운을 죽여 몸과 머리를 떨어뜨려 놓았으나 지금 너희들을 목 베지 않는 것은 큰 공이 있기 때문이다.

주머니 속의 글은 김용이 안우 등을 속여 정세운을 죽이라고 한 글이었다. 김용은 조카인 김림이 음모를 누설할까 두려워하여 김림을 죽이고 공민왕에게 아뢰었다.

안우 등이 함부로 지휘관을 죽인 것은 바로 전하를 무시한 것이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후 공민왕은 안우의 휘하 군사들이 놀라 동요하자 불러서 술과 음식을 하사해 위로한 후 김용에게 교지를 받들어 방문을 걸게 했다.

안우 등이 불충하여 정세운을 함부로 죽였다. 안우는 이미 처형당하였으니 김득배와 이방실을 잡는 사람은 3등급을 올려 임명하겠다.

결국 김득배와 이방실도 주살되니, 개경을 수복한 지 12일 만에 세 장수들이 주살되었다. 그 후 공민왕은 정세운 암살 사건과 관련된 교서를 발표했다.

불행하게도 국가가 외적의 침략을 당하여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였으니, 생각건대 이것은 임금인 나의 부덕(不德)의 소치이고, 또한 장수들이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 군율이 서지 않아 적의 침략을 제대로 막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쓸개를 씹는 괴로움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먼저 패전한 군대에 대한 벌을 일단 중지하고, 이어서 문하평장사 상의회의도감사 응양군상장군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절월을 하사하여 나를 대신해 모든 일을 집행하도록 했다. 이어서 칙서를 내려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는 뜻을 선포함으로써, 대장과 소장들이 모두 약속에 따라 감히 군율을 어기지 않게 하려고 했다.

과연 조종의 영령들이 위에서 인도해 주시고 충성스런 군사들이 아래에서 노력해 준 덕분에 사방에서 협동 공격하여 적의 무리를 거의 다 섬멸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개선을 기다려 두둑하게 상을 주어 공로에 보답하려고 하였는데, 뜻밖에도 안우 등이 자기의 공로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정세운과 사이가 나빠지니 국가의 법률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아침의 분노를 풀어버렸다. 총병관이 나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집행하는데 아랫사람이 감히 함부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를 무시한 것이다. 윗사람을 능욕하고 침범한 죄보다 큰 것이 무엇이냐? 돌이켜보건대, 안우 등은 나라의 군인이 되어 수년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하여 공로를 크게 세웠는데도, 한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앞서의 공적을 모두 버렸으니 내가 진실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이다.

비록 그러하나 적을 격파한 공로는 한 때 간혹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토록 용납할 수 없는 바로서, 그 경중은 너무나 명백하여 도저히 덮어줄 수 없는 것이니, 이 자를 석방하고 죽이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무엇으로써 옳고 그름을 보이겠는가? 그러므로 유사에 명령하여 도원수 안우와 원수 김득배, 이방실, 민환, 김림 등을 법에 따라 처벌한 것이다. 또한 그들의 옛 노고를 생각하여 처자식에게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지휘하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모두 유사에게 명령하여 공로를 헤아려 서용할 것이다.

악당으로서 공로를 배반하고 손수 정세운을 해친 낭장 정찬은 도주 중에 있으니 사면시킬 수 없으나, 그 나머지 실정을 알면서도 자수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죄를 용서하고 사면하니, 전국에 포고하여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하라. 생각건대 너희 장병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힘써서 너희 직분을 넘지 않도록 함으로써, 끝까지 몸을 보전하도록 하라.

이떄 안우의 아들은 겨우 10여 살이었는데, 그가 저잣거리에서 놀고 있으면 사람들이 다투어 먹을 것을 주면서 "지금 우리들이 편안히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세 원수의 공이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1]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