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배
1. 개요
金得培, 1312 ~ 1362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난계(蘭溪)이며, 아버지는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를 지냈던 김록이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김득배는 과거에 합격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임되었고, 여러 번 옮겨 전객부령(典客副令)에 임명되었다. 충혜왕이 경화공주를 강간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조적은 경화공주의 밀명을 받고 충혜왕을 폐위시키고자 고려국왕의 국인(國印)을 가져다가 영안궁에 두었다. 이때 예문검열 직책을 맡고 있던 김득배는 김득배는 전 군부총랑 류연, 좌사보 이달충, 군부좌랑 성원도와 함께 국인을 지켰다.
이후 공민왕이 즉위하기 전에 원나라에서 왕을 모셨고, 공민왕이 즉위한 해(1351년) 1월 29일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었으나, 공민왕 원년(1352년) 4월에 찬성사 조일신과 지신사 최덕림이 원나라 승상 탈탈이 보낸 사신을 맞이하면서 "유숙과 김득배가 안에 있으면서 권력을 행사한다."고 말해 사신이 공민왕에게 두 사람을 파면할 것을 청하는 바람에 직책에서 물러났다.
공민왕 6년(1357년) 8월 15일에 서북면 홍두왜적 방어 도지휘사로 임명되었고, 뒤이어 추밀원직학사에 제수되었으며, 11월 20일에 서북면도순문사 겸 서경운, 상만호가 되었다. 공민왕 7년(1358년)에 왜구가 교동을 침략하자, 공민왕은 공민왕은 개경에 계엄령을 내리고 각 방리(坊里)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전투에 동원할 군사로 삼았다. 이때 김득배는 부만호로 임명되어 안주군민 만호 부만호로 제수된 안우를 보필했다. 그 후 공민왕 8년(1359년) 정월에 첨서추밀원사로 임명되었으며, 6월엔 기철 일당을 처형한 공민왕에 의해 2등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8월 3일엔 손등, 김희조, 정휘 등과 함께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2.2. 홍건적의 침략
공민왕 8년(1359년) 겨울 홍건적 4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했다. 이에 김득배는 12월 11일에 도지휘사가 되어 홍건적 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안우와 함께 보병과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선주 관내를 약탈하고 돌아가는 홍건적 1,000명을 추격했다가 적의 주둔지 부근에서 홍건적 정예병들의 반격을 받고 패해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정주로 달아났고, 홍건적은 서경을 함락시켰다.
이듬해인 공민왕 9년(1360년) 정월에 고려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해 홍건적을 서경에서 몰아냈고, 이방실은 정예 기병 1,000기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해 연주강을 건너던 적병 수천 명을 주살하거나 익사시켰다. 김득배는 안우, 김어진과 함께 정예 기병을 이끌고 이방실과 합세했지만, 적이 언덕에 올라 저항할 태세를 갖추자 더이상 쫓지 않았다. 그날 밤 적이 달아나자, 이방실이 이른 아침에 병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그들을 추격해 선주에서 적병 수백명을 죽였다. 결국 홍건적은 불과 300명 만이 살아남아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이 소식을 접한 공민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고 벼슬을 내려줬는데, 이때 김득배는 수충보절정원공신 정당문학에 임명되었다. '목은집'에 따르면, 김득배는 그해 10월에 한방언과 함께 문과를 주관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민왕 10년(1361년) 겨울에 홍건적 10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 이성 등지를 약탈하자, 김득배는 도병마사로 제수되어 안우 등과 함께 절령책에서 홍건적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홍건적이 밤에 군사 10,000여 명을 책 근방에 매복시켰다가 닭이 울자 철기 5,000명으로 책문을 공격하여 부쉈다. 이에 고려군은 크게 무너지고, 김득배는 안우와 함께 단기로 도망쳐 돌아와 금교역에 주둔했다.
공민왕이 파천하고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해 갖은 만행을 자행한 후, 김득배는 공민왕 11년(1362년) 1월 17일에 총병관 정세운과 안우, 이방실, 황상, 한방신, 이여경, 안우경, 이구수, 최영, 이성계 등과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을 에워쌌다. 이후 고려군은 이튿날 새벽에 총공격을 감행해 홍건적을 섬멸하고 개경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2.3. 정세운 암살 사건과 최후
김용은 정세운이 총병관으로서 홍건적을 궤멸시키고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우자 공민왕의 총애가 그쪽으로 쏠릴 것을 두려워해 안우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만들려 했다. 그는 왕지를 꾸며 글을 써서 조카인 전 공부상서 김림으로 하여금 몰래 안우 등을 찾아가 정세운을 죽일 것을 도모하도록 했다. 이때 김림은 안우 등에게 말했다.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의 장막에 찾아가 말했다.정세운이 평소에 경들을 꺼려했으니 적을 격파한 후에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 먼저 그를 도모하지 않는가.
김득배가 말렸다.지금 정세운이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으며, 김용의 글이 이와 같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소.
안우와 이방실은 이에 물러나와 병영으로 돌아갔으나 밤이 되어 다시 와서 말했다.이제 겨우 적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마땅히 우리끼리 서로를 죽이겠는가. 옛날 사마양저(司馬穰苴)는 마음대로 장가(莊賈)를 죽였으나, 위청(衛靑)은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은 것은 고금의 밝은 귀감이니,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소. 만약 부득이하면 그를 잡아서 궁궐 아래에 이르게 하여 상(上)의 처분을 듣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김득배는 그래도 끝까지 거부했지만, 안우 등이 그를 강요했다. 결국 세 사람은 술 자리를 차려두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불러서 오게 했다. 이윽고 정세운이 오자, 안우가 장사들에게 눈짓을 해 좌석에서 그를 때려 죽이게 했다. 이후 안우는 공민왕을 뵈러 행재소로 갔다가 김용에 의해 살해되었고, 공민왕은 김용 등에게 교지를 내려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문을 걸게 했다.정세운을 토벌하는 것은 군주의 명령이오. 우리들이 공을 세우고 군주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가, 그 후환을 어찌하겠는가.
김득배는 기주에 이르러 안우와 이방실이 잇달아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기병 몇 명을 거느리고 도망쳐 산양현의 선영 곁에 숨었다. 이에 공민왕은 김득배의 아우 김득제를 화산으로 유배보내고 김득배의 아내와 자식을 잡아 가두고 국문했다. 이때 김득배의 사위인 직강 조운흘이 김득배의 아내에게 말했다.안우 등이 불충하여 정세운을 함부로 죽였다. 안우는 이미 처형당하였으니 김득배와 이방실을 잡는 사람은 3등급을 올려 임명하겠다.
김득배의 아내는 오랫동안 고문을 참다가 마침내 그가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실토했다. 이에 김유, 박춘, 정지상, 성원규 등이 김득배를 체포하여 목을 벤 뒤에 상주에서 효수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51살이었고, 그의 목이 효수된 것을 보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득배의 문생이었던 정몽주는 왕에게 청해 시체를 수습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지냈다. 그가 지은 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바른대로 말하여 고초당하지 마십시오.
아아 하늘이시여! 나의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아 하늘이시여!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듣건대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은 하늘이요,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이치이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는 것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지난날에 홍건적이 난입하자 주상께서 어가를 타고 피난가시니 나라의 운명이 마치 실에 매달린 듯이 위태로웠습니다. 오직 공께서 앞장서 대의(大義)를 부르짖으시니 온 나라가 호응하였고, 몸소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삼한(三韓)의 대업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누구의 공로입니까?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로로 덮어주어야 옳습니다.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죄를 자복시킨 뒤에 처형해야 옳습니다.
어찌하여 전쟁터에서 흘린 땀[汗馬]이 마르지 않았고 개선하는 노래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침내 태산 같은 공로를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게 하였습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에게 묻는 것입니다. 나는 그의 충성스럽고 장한 혼백이 천추만세토록 반드시 구천(九泉)의 지하에서 눈물을 삼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아! 운명이란 것이 어찌 이러합니까? 어찌 이러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