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대장공주
[clearfix]
1. 개요
고려의 제31대 임금 공민왕의 1비.
원나라의 위왕(魏王) 베이르테무르의 딸로 남편과는 9촌[1] 으로 공민왕은 쿠빌라이 칸의 고손(4대손)이고 노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현손(5대손)이지만, 충숙왕의 2비 조국장공주(공민왕의 의붓 어머니)가 그녀의 고모라서 어떻게 보면 사촌 사이에 결혼한 셈이 된다. 참고로 대를 거듭하여 내려갈수록 9대째까지 자, 손, 증손, 고손, 현손, 내손, 곤손, 잉손, 운손 순으로 칭한다. 운손은 '구름과 같이 멀어진 자식'이라는 뜻.
엄밀히 말하면 당시 만악의 근원이었던 원나라에서 시집온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반원정책들을 지지하고 자기 나름으로는 공민왕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 했기 때문에 대중적인 이미지는 무척 좋은 편이다. 태생으로 따지면 외국인 왕비, 그것도 '''적국 공주 출신'''의 왕비였던 이가 후대의 사람들에게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특이한 경우. 공민왕과의 관계는 둘이 정략결혼과 정쟁으로 한 결혼인데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세기의 로맨스'''로서 창작물에서도 제법 잘 다뤄지고 현대까지도 여러 가지 이야기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이러한 로맨스 때문에 고려사에 대해 잘 모르고 이 두 사람의 로맨스만 알다가 정략결혼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사실에 이따끔 놀라기도 하고, 반대로 정략결혼인데 이런 로맨스가 있었다는 것에 놀라기도 한다. 가히 고려의 뭄타즈 마할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
당시 고려 왕족은 공민왕의 증조할아버지인 충렬왕 때부터 몇 번이나 통혼이 이루어져 원나라 황실의 방계이기도 했다.[2] 몽골 황실이 한배에 나온 형제 간에도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던 걸 생각하면, 노국공주의 행동은 전혀 이상할게 없었다. 다만 공민왕의 정책들이 명백하게 원나라의 이익에 반하는 것들이었음에도 공민왕과 정치적으로 함께 한 것을 보면 단순히 원 황실의 권력다툼의 연장선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근거가 빈약하다.
이름은 '''보르지긴 부다시리'''(ᠪᠣᠷᠵᠢᠭᠢᠨ ᠪᠦᠳᠬᠠᠱᠢᠷᠢ, Borjigin Budashiri, 孛兒只斤 寶塔實里/寶塔實憐, 패아지근 보탑실리/보탑실련). 공민왕이 친히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王佳珍)'''이다. 성은 고려 왕성(王姓)인 왕씨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이름을 해석해보면, '''아름다운 보배'''. 흔히 한자어를 우리식대로 읽어 '''보탑실리'''라고도 곧잘 일컫는 편.
또한 한국사의 왕비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외국계 인물이기도 하다. 영친왕과 혼인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는 대한제국이 멸망해 영친왕이 이왕세자가 된 후에 결혼했기에 좀 복잡하지만 굳이 대한제국에 맞추자면 황태자비가 된다.
2. 시호
최종 결정된 공식 시호는 '인덕 공명 자예 선안 휘의 노국대장공주(仁德 恭明 慈睿 宣安 徽懿 魯國大長公主)'.보통 이 시호를 줄여서 노국공주 또는 노국대장공주라고 불린다.
음력 1365년 2월 갑진일, 승의공주가 난산으로 인해 사망했다. 동년 4월 임진일, 고려는 독자적으로 '인덕 공명 자예 선안왕태후(仁德 恭明 慈睿 宣安王太后)' 시호를 추증했다.[3] 고려사 후비열전에 수록된 운암사 맹서에 따르면 '인덕 공명'은 공민왕이, '자예 선안'은 신료들이 정한 것으로 보인다.[4] 2년 뒤인 1367년 1월 정해일, 당시 북원 황제 혜종이 사신을 보내 승의공주를 '노국 휘익대장공주(魯國 徽翼大長公主)'로 추증했다.[5] 상국 북원이 시호를 보내 왔으니 고려는 독자적 시호를 쓰기가 애매해졌고, 고려는 절충해서 독자적 시호와 북원 시호를 합쳐 새 시호를 정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공민왕은 북원의 시호가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왕은 이인복과 이색을 시켜 시호를 고치게 했고, 이에 노국휘'익'대장공주는 노국휘'의'대장공주로 고쳐졌다.[6] 그렇게 최종적으로 시호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가 결정되었다.
고려국왕과 혼인한 원나라 황실의 여성은 원나라에서 공주 명칭이 붙은 시호를 주기 때문에[7] 고려 내에서 자체적으로 올린 시호가 기록에 있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 노국대장공주는 시호가 기록에 있는 몇 안 되는 경우 중 하나다. 그러나 원혜종이 내린 '휘익노국대장공주(徽翼魯國大長公主)' 시호와 합쳐지면서 '왕태후'가 삭제된 모양. 이런 사연 때문인지 인덕태후 또는 인덕왕후(仁德王后), 선안왕후(宣安王后)라고도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발견되지만, 가장 많이 알려진 명칭은 역시 노국공주 또는 노국대장공주다.
시호 중 '노국(魯國)'은 춘추전국시대 공자의 고향이었던 바로 그 노나라를 말한다. 옛 중국에서는 시집갈 때 받은 땅의 이름을 취해 공주의 칭호를 정했는데, 승의공주는 '노나라(魯國)'를 봉국으로 받은 것이다.[8] 시호 중 '대장공주(大長公主)'는 황제의 고모나 왕고모뻘인 공주라는 뜻이다.[9]
3. 생애
3.1. 출신
노국대장공주의 결혼 전 기록은 남겨진 것이 적어 언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는 어렵다. 중국 사서를 보면 원사에는 노국공주가 여럿 있어도 아버지가 다르게 나오기에 공민왕의 아내인 노국공주에 대한 기록이 없고 신원사에는 공주가 충숙왕의 계비 조국대장공주의 아버지 위왕 에무게/아목가의 딸이라는 기록과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맞이했다는 기록이다.
위왕 에무게/아목가는 원 세조의 손자 답랄마팔랄이 장성하자 원 세조가 자기 궁인이었던 곽씨를 내주었고 곽씨가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데, 아목가의 아들 아로는 지순 원년에 서정왕에 봉해졌고 나가 섬서를 지켰다. 다음 아들인 베이르테무르/패라첩목아는 아버지의 위왕 작위를 물려받았다. 위왕 아목가는 원 무종과 원 인종의 이복형인데, 원사에 의하면 충숙왕 11년에 죽었다고 나오기 때문에 에무게/아목가보다는 위왕 자리를 이어받은 차남인 위왕 베이르테무르/패라첩목아의 딸로 여겨진다.
위왕 아목가는 궁인 곽씨 소생으로 이복동생인 원 인종이 재위할 때 고려의 탐라로 유배되었고 곧 대청도로 옮겨졌으며, 충숙왕 5년 모반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충숙왕 11년에 소환되었지만 곧 죽었다. 또 위왕 패라첩목아도 공민왕 2년 하남의 홍건적 토벌하러 갔다가 술 마시고 대비를 소홀히 해 적에게 잡혀 해를 당했다고 한다. 즉 노국대장공주는 위왕 아목가의 처지를 볼 때 원 황녀였을 뿐 원 황실에서 그리 잘나가는 집안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3.2. 공민왕과의 만남과 결혼
1349년(충정왕 1년)에 충숙왕의 차남 강릉대군(공민왕)과 혼인했다. 처음 고려로 올 때는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어 있었는데, 원에서의 작명법을 고려할 때 노나라 땅 일대에 있는 승의 지역을 탕목읍으로 두고 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남편 강릉대군(공민왕)도 혼인 조건이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충혜왕 2년 열두 살의 나이에 왕의 친동생으로서 원으로 넘어가서 대원자라 불리며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충숙왕이 윤택에게 강릉대군을 부탁한 것을 볼 때 충혜왕 이후 왕위 계승자로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인 충혜왕이 죽고 조카 충목왕이 여덟 살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충목왕이 열두 살의 나이에 요절하자 충목왕의 이복동생 충정왕과 경쟁했고 생모 덕비 홍씨(명덕태후)와 이제현이 추대하려고 했음에도 다시금 열두 살의 조카에게 밀려 임금이 되지 못했다.
두 번이나 조카에게 밀려난 이상 충정왕이 일찍 죽지 않는 한 강릉대군이 왕이 되기는 요원해 보였다. 즉 이 혼인은 강릉대군에게 있어 차기 왕위계승에서 자격을 얻기 위한 결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결혼으로부터 2년 뒤 1351년 원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을 고려의 왕위에 올리면서 승의공주는 고려국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공주의 친정 상황을 볼 때 공주와의 결혼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원 황실에서 그렇게까지 대단한 세력을 끌어모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강릉대군은 충혜왕 때부터 원에 머물렀기 때문에 시간도 있던 만큼 원에 머물며 만남을 가졌을 여러 황족 여자들 중에서 가장 자신과 잘 맞을 만한 사람과 결혼했을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의 아버지 충숙왕의 제2비 조국장공주가 노국대장공주의 고모라서 그게 인연이 된 것으로 보인다.
3.3. 고려의 왕비로 살다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의 공주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개혁정치나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야말로 공민왕의 정치적 동반자나 다름없었으며, 따라서 후대까지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흥왕사의 변 때는 공민왕이 숨은 방 앞에 앉아 반란군을 가로막은 걸로 유명할 정도. 비록 공민왕을 지지했지만 노국공주는 비록 그 세가 미약했다지만 엄연한 원나라의 공주 신분이었고 그 때문에 원나라를 등에 업고 있던 부원배, 反 공민왕 세력들은 서열상 자신들보다 높고 명분과 권위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전면에 나섰을 때 반발조차 할 수 없었다.
정작 노국공주 본인은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았지만, 앞서 말한 그녀의 입지 때문에 그 존재만으로도 공민왕의 든든한 정치적 뒷배경이 되어 주었고, 본인도 이런 자신의 입장을 남편의 개혁정책을 위해 적극 이용하였다. 이러한 공주의 역할은 공민왕은 물론 신하들도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원나라를 철저히 오랑캐 취급했던 조선왕조 개국 세력인 신진 사대부들조차 그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고로 조선 종묘에 있는 공민왕의 사당에는 노국공주가 같이 합사되어 있기도 하다.
만약 노국대장공주가 모른 척하거나 그때의 유력 권문세가들의 손을 들어줬다면 진작에 공민왕의 정책은 브레이크가 심하게 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손을 들어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방패막이가 되어줬기 때문에, 공민왕에게 정치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의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또 동문선의 기록에 따르면 공주는 국가가 어려울 때는 몸 바쳐 도와주면서도 다른 공주들처럼 권력을 행사하거나 사소한 청탁 등은 일체 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감격할 수밖에.
이러한 내조 덕분에 노국대장공주를 향한 공민왕의 사랑은 그야말로 유일무이해서 다른 여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둘이서 알콩달콩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금슬에 비해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기에, 1359년 '''결혼 10년 만에'''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중신이었던 이제현의 딸을 비로 들였고, 그녀가 바로 혜비 이씨이다. 사실 이것도 공민왕은 들이기 정말 꺼려했지만, 신료들은 물론 어머니인 명덕태후마저 간청을 하는지라 어쩔 수 없었다고.
들일 때는 노국대장공주의 허락까지 맡고 들였지만, 들이고 나서는 노국대장공주가 투기로 인해 식음을 전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사건 때문에 환관들과 여관들이 백 가지로 참소했기 때문에 투기하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정작 공민왕은 후사 문제로 인해 혜비 이씨를 들였음에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는데, 공주만 바라본 탓으로 보인다. 당연히 신하들은 더 들이라고 요구했지만 공민왕은 공주가 승하하기 전까지는 더 이상의 여자는 들이지 않았다.
3.4. 임신과 죽음
고려사에 따르면 공주를 시중들던 몽골인 내관 팔사불화가 구타당하는 장면을 보고 유산을 겪은 적이 있는데, 이후 오랫동안 임신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364년 드디어 아이를 가졌지만 다음 해 음력 2월 16일 난산으로 인해 승하하는 비운을 맞았다. 공민왕이 얼마나 절실하게 순산을 바랬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 사형수를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을 사면하고,[10] 공주가 위독해지자 산천과 사찰에 기원을 드리도록 했으며[11] 나중에는 사형수까지 모두 사면해주었을 정도.[12]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주는 승하했고, 태중에 있던 아이까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후 공민왕은 공주 생전에 들인 혜비 이씨(1359년)를 빼고 익비 한씨(1366년), 정비 안씨(1366년), 신비 염씨(1371년))는 대부분 후계자 문제 때문에 들였지만 이들도 그다지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중 혜비 이씨는 공민왕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보내다가 결국 공민왕 사후에는 출궁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그나마 반야가 유일한 소생이었던 우왕을 낳을 수 있었던 이유마저, 그녀가 노국공주와 닮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13]
3.5. 사후
'''괜히 세기의 로맨스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노국)공주가 죽은 지 '''8년 뒤''' 어느 날.
'''공원왕후''': "어찌하여 비빈들을 가까이하지 않습니까?"
'''공민왕''': '''"공주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눈물을 흘렸다.
'''공원왕후''':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왕 또한 결국은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하여 심히 슬퍼하십니까.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삼가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노국대장공주를 지극히 사랑했던 임금 공민왕은 공주 사후에도 그녀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식사를 차렸으며, 공주가 살아 있을 적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지고(至高)의 사랑. 노국대장공주의 요절로 인해 크게 상심한 공민왕은 그날 이후 정치에 뜻을 잃었고[14] , 고려 왕조의 운명도 그날부로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당시 왕의 보령(寶齡)[15] 은 고작 36세였다.
이러한 노국대장공주의 요절은 아이러니하게도 여러가지의 개혁을 시도하려던 공민왕에게 결정적인 좌절을 안겨주면서 고려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계기로 뜻하지 않게 작용하게 된다. 다만 이것이 단순히 공민왕의 순애보가 지나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권문세족들의 반발을 누르고 있었던 노국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의 개혁정책의 동력이 크게 약화됨을 상징하기도 한다.
물론 공민왕이 그녀의 승하 자체로 크게 슬퍼하며 상심한 것은 빼도 박도 못할 팩트고, 공주가 공민왕의 편을 최대한 들었던 것 역시 사랑의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요절은 다른 왕실 여인들의 죽음과 다르게 한국의 역사교과서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로 정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역사 교과서에까지 서술된 얼마 안 되는 역사 속의 로맨스라 할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민왕의 아내바보 기질은 한 나라의 군주로서는 오히려 좋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바로 후계 문제가 터져서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 실제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로맨스는 고려의 멸망을 앞당기는 촉진제가 됐다.[16] 국왕이 애처가일 때 아내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이후 늘 피가 튀기는 배틀로얄이 벌어진다.[17]
공주가 죽자 왕은 매우 비통해하며 4도감과 13色을 설치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고 각 관사에 명하여 전奠을 차리게 하여 풍성하고 정렬하게 차리는 자에게는 상을 주어 돈을 빌려다가 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불사를 크게 일으켰고 장례에는 제도를 그리게 하여 왕은 그것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상사를 제국대장공주의 예에 의하여 사치를 지나치게 하여 국고가 텅 비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슬픔을 이기지 못한 왕은 공주의 그림을 그려 밤낮으로 마주보며 밥을 먹으면서도 슬피 울고 3년 동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고 전한다.
장례는 제국대장공주의 예에 따라 진행되어 4월 임자일에 정릉에 장례지냈다. 또 왕은 자신이 죽으면 공주의 곁에 묻히고자 했다. 정릉을 유지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원찰의 지정과 중창에 문제가 되었다. 정릉 옆 운암사를 원찰로 삼았는데, 본래 운암사는 교종이었지만 공민왕은 선종이었기 때문에 원찰로 삼으며 이름을 광암사로 바꿨다. 광암사는 전국 10대 사찰에서 서열 2위에 이른다. 얼마 뒤 일대를 광암동으로 바꾸고 편액을 내걸기를 광통보제선사라고 했다.
광통보제선사를 원찰로 삼으면서 정릉 보호와 관리를 위해 원찰에 부속시킨 토지 및 세금 등 제반 재산들의 침탈과 도용을 막기 위해 신하들과 함께 맹세를 하고 그것을 사채겡 기록하여 명산에 보관하게 했다. 또한 원찰을 지정된 광통보제선사를 1372년부터 대규모 중창하게 하고, 이를 위한 비석은 공민왕이 직접 나서서 원에서 구했으며 공사는 공민왕 시해 이후에도 지속되어 1377년(우왕 5년)에 완성되었다.
완공된 광통보제선사는 미륵전, 관음전, 종루를 포함하여 백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대규모였다. 하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영전 공사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의 기록이 남아 있고 그것들은 모두 비판적인 것들이었다. 영전 조성 공사는 한 번 이전하고 여러 번 부속 건물들을 재공사했다.
1366년 5월 정릉 조성공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위치는 왕륜사 동남쪽이었다. 이때 모든 관원들로 하여금 등급에 따라 역부를 내어 나무와 돌을 운반하게 하였다. 사용한 부재들에 너무나도 신경을 써서 나무 하나를 수백이 끌어도 앞으로 나가지 않기도 했고, 죽은 소들이 길에 연이어 넘어져 있었다. 이 일에 국력이 얼마나 집중되었는지 왜구가 교동에 쳐들어와 주둔하고 물러가지 않는데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1368년 5월 영전의 불우가 협소하여 승려 삼천 명을 수용할 수가 없다고 해 새 터를 찾아본 뒤 왕륜사 영전은 그만두고 송악 동쪽에 있는 마암의 서쪽에 영전을 새로 조성하게 하였다. 다만 왕윤사 영전을 다시 조성했다는 것으로 보아 철거한 것 같지는 않다. 그 위치는 성균관 앞의 냇물 건너편 곧바로 지척이었는데, 신진사대부는 성균관 중영을 계기로 그곳에서 모임을 하게 된 것이 정치 세력으로 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서 영전 상황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암 영전의 조성에는 기초 공사를 하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1368년 6월 방리의 장정과 42도부를 총동원하여 정치 작업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전각을 세우는 데 기초가 되는 초석이 다음 해 9월에야 갖고 왔다는 것으로 보아 터 닦기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영전의 초석을 마암까지 끌어 오는데 크기가 집채 같아서 진동하고 울리는 소리가 소울음과 같았다 하고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 주현에서 정부를 징발하여 수로로 운반하는데 압사하고 익사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동원된 백성들의 수는 장정 오천이 넘었다. 이 때는 원에서 인정받은 목수들도 동원하였다. 원 순제가 탐라에 자신이 피난하여 살 궁궐을 조성하기 위해 보낸 원세가 원이 망해 일하지 않고 있었는데, 공민왕이 그를 불러 공사를 맡긴 것이다.
그런데 1370년 6월 신돈과 이춘부가 공사 중지를 재차 요구하자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왕륜사 영전을 다시 수리하게 했다. 그렇게 왕륜사 영전 공사 재개로부터 3개월 뒤 9월에 왕은 또다시 영전이 좁다고 철거하고 다시 짓게 했다. 이후 마암 영전 공사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마암 영전의 구체적인 규모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단편적으로 전하는 기록을 보면 마암 영전에는 관음전이 있었고 기둥이 아홉 개이며 규모가 매우 높고 넓었다고 한다. 또한 관음전 3층에 상량하다가 26명이 압사하고 그 때문에 명덕태후가 공사 중지를 요청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왕륜사 영전을 다시 조성한 이후 관음전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공민왕이 1372년 2월 관음전 구조가 낮고 협애하다 하여 다시 고쳐 지으라고 한 것을 보아 규모는 마암 영전 못지 않았던 모양이다. 관음전 이외의 영전에는 정문과 종루, 튼튼한 담장도 있었는데 공민왕은 담장을 만들 때 보병을 인솔하고 영전에 담을 쌓고 그 견고 여부를 송곳을 가지고 시험하게 했다. 화려한 영전의 취두[망새](전통 건물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도 있었다. 정문은 5월에 철거를 명령하고 종루는 7월에 고쳐 지으라고 명령했다.
1374년 6월 폭우로 인해 영전에 빗물 샌 곳이 생기자 왕이 크게 노해 동역관인 찬성사 한방신과 평리 노진을 옥에 내리고 곤장을 치기도 했다. 그 때 공사가 장기간 지속되어 노동력과 비용이 공급되지 않고 역부들 중 죽은 자가 길에 연했지만 재상들과 간관들은 감히 왕에게 고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공사는 완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직후에 영전을 둘러본 공민왕은 시해당하기 바로 전날 같은 해 9월 계미일에도 왕륜사 영전에 갔다올 정도의 애착을 보였다. 하지만 완공을 보기도 전에 왕은 시해당하는 실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기록을 보면 처음 왕륜사에 영전을 지을 때부터 공사를 매우 급하게 독려해 도망가는 이들이 속출했다. 백성들의 불만은 마암 영전공사를 하면서 심해졌는데, 그들은 가뭄도 영전 공사 탓이라고 돌릴 정도로 중단을 원했지만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전을 조성하는 데 공로를 세웠다고 하여 나홍유를 승진시키고 환관 김사행에게 상을 내려주었다. 가뭄이라도 비만 오면 공사에 지장 있다고 하여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보나마나였다.
그렇다고 영전 공사를 신하들이 제대로 말렸냐면 그건 아니었다. 명덕태후는 무시하는 걸로 끝났지만 '정지'를 요청한 유모를 쫓아내고 스스로는 말도 꺼내지 않은 정비를 집에 돌려보는 등 관련자들을 모두 처벌했다. 특히 시중으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공사 중지를 간언한 유탁의 경우에는 하옥시켰다가 죽이려고 하였다. 이색이 죽기를 각오하고 유탁의 무죄를 주장해 신돈까지 끌고 들어와 변명을 한 다음에야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고 공민왕은 1371년 신돈을 처단한 직후 유탁도 신돈파라며 명덕태후가 극구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형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저지른다. 이 때 공민왕은 "오랫동안 수상으로 있으면서 불의한 짓을 많이 하여 하늘이 큰 가뭄을 내리게 한 것이 첫째이고, 절의 토지를 빼앗은 것이 둘째이며, 공주가 죽었을 때 삼일 간 제사를 하지 않은 것이 셋째이며, 그 장례에서 격을 낮추어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예에 준한 것이 넷째이니, 이보다 더 불충불의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 공민왕은 다른 이유를 들었지만 공사 중지 논의 때문이라고 여겼다.
정작 영전 공사를 기점으로 세력화가 되어가던 신진사대부들은 이에 대한 간언을 올린 적이 없다. 정도전이 공양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공민왕이 일으킨 운암사와 영전 공사가 매우 화려하고 국력의 손실이 커서 백성들의 원망과 비난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진언하지는 않았다. 1366년에 이미 신돈을 쫓아낼 것을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리는가 하면 왕의 면전에서 대놓고 신돈에게 일갈까지 날린 스물다섯의 이존오의 행위와 비교하면 참으로 대조적인 처세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신돈이 평양 천도를 권했지만 영전공사 때문에 귀담아듣지 않자 다시는 권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공민왕의 의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민왕은 정치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공주가 죽은 뒤에도 신돈을 등용해 개혁을 펼치기도 하고, 북방 정세 변화를 받아들여 명나라와 교류했으며, 그 틈을 나아가 동녕부 정벌을 통해 북방 영토 회복에도 노력했다. 나아가 1371년 다시 개혁 교서를 반포하여 개혁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왕이 미친 사람처럼 변한다는 여러 기록이 나온다. 물론 이 기록은 조선 건국 세력이 공민왕의 행동을 다소 곡해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공민왕의 비극적인 최후는 공주에 대한 사랑에 집착해 백성들의 원성을 외면한 공민왕에게 1차적 책임이 있으나, 말리지 못한 신하들과 말리려고조차 하지 않은 신진사대부들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잘못되었다고 후일 비판했으나 당시에는 간언을 올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능은 정릉(正陵)으로, 고려시대 왕과 왕비를 합장한 유일한 쌍릉 형식이다. 공민왕의 능은 옆에 있는 현릉(玄陵)으로, 보통 '공민왕릉' 혹은 '현정릉(玄正陵)' 식으로 둘을 합쳐 부른다. 여기에는 두 능 사이를 잇는 조그만 구멍이 있는데, 이는 '영혼의 통로'라고 하며, 무덤 공사도 왕이 직접 주관했다고 한다.
4. 초상화
5. 노국대장공주가 등장한 작품
5.1. 드라마
자세한 건 노국공주(신의) 참고.
5.2. 영화
- 1967년 영화 《다정불심》 배우: 최은희
5.3. 소설
- 1942년 소설 《다정불심》
월탄 박종화의 소설이다. 영화 《다정불심》과 드라마 《신돈》의 원작 소설이다.
5.4. 게임
- 징기스칸 4: 1370년 시나리오에서 공민왕의 왕비로 구현됐지만 이 때 노국공주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고증에 맞지 않는다. 또한 문화권은 몽골이 아닌 고려로 나온다.
- 크루세이더 킹즈 2: 1337년 시나리오에서 본명인 부다시리(Budashiri)로 등장하며 게임에서는 중국과 고려가 영토로서 등장하지 않으므로 차가타이 한국의 바미안 백작령에 있다. 시나리오 시작 시점에서의 나이는 6세로 되어 있다.[19]
6. 관련 문서
[1] 노국대장공주의 고조부인 친킴(쿠빌라이 칸의 장남)과 공민왕의 증조모인 제국대장공주가 남매지간이므로, 공민왕이 아저씨뻘인 9촌지간이다.[2] 그리고 마냥 방계라고 할 수도 없는 게, 공민왕의 아버지가 충숙왕, 할아버지가 충선왕이다. 충선왕은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고 제국대장공주는 그 유명한 쿠빌라이 칸의 딸이다. 알다시피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고. 즉, 공민왕은 칭기즈 칸의 직계 자손이다. 정리하자면, 칭기즈 칸-툴루이-쿠빌라이 칸-제국대장공주(충렬왕과 혼인)-충선왕-충숙왕-공민왕.[3] 특이하게 왕후 시호가 아닌 태후 시호로 올려졌다.[4] 고려사 후비열전의 설명으론 '인덕 공명 자예 선안' 전부 신료들이 정했다고 하지만 운암사 맹서엔 '자예 선안'만 신료가 정했다고 나온다.[5] 즉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 시호가 공식 시호로 쓰인 기간은 2년이다.[6] 여기서도 공민왕의 반원 기질을 알 수 있는데, 명목상이래도 상국인 북원이 보낸 시호를 고려가 임의로 고친 것이다.[7] 혼인 전부터 공주였던 제국대장공주 이외엔 대체로 고려 왕족과 혼인한 종친의 딸에게 공주의 칭호를 내렸다. 보통은 황제가 양녀로 삼아서 주는 식. 이에 의해 사후엔 따로 공주로서의 시호를 준 것.[8] 국내에서도 조선시대 때 공주나 옹주, 군주(왕세자의 정실 딸.), 현주(왕세자의 측실 딸.)의 칭호를 지을 때 영지를 봉했으니 이와 비슷한 이치.[9] 한 단계 밑으로는 그냥 장공주(長公主)가 있다.[10] 왕실에 경사가 있으면 사면을 내리는 일은 흔했다.[11] 조선시대에도 역시 왕이나 왕비가 위독하면 종묘사직이나 명산대천 등 여러 곳에 기도를 드리곤 했다.[12] 이 부분은 정말 공주를 아끼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보통 사면령을 내려도 사형수를 사면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에 아기가 태어날 때 사람을 죽이면 그 원혼이 아기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이 있어서 사형을 미루기도 했다.[13] 다만 최근에는 왕후로 추존된 궁녀 한씨 소생이라는 말이 많다.[14] 사실 이 부분도 좀 애매한 것이 이후에도 원이 축출되고 명나라가 들어서자 재빠르게 칭신을 하여 주원장의 호감을 사는가 하면 요동 지역의 힘의 공백을 틈타 군대를 보내 요동성을 차지하기도 했고 신돈을 전면에 내세워 꾸준히 권문세족 세력들과 힘싸움을 벌이면서 개혁을 단행하는 등 정치를 놓진 않았다.[15] 임금의 나이를 높여 이르는 말.[16] 실제로 신라 말에 들어와 그나마 제대로 임금 노릇을 했다는 평을 받는 흥덕왕도 엄청난 애처가였고 왕비 장화 부인이 졸하자 그 이후부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후계자를 두지 못했고 몇 십년만에 진골 귀족들 사이의 피 튀기는 왕위 싸움이 벌어지고 만다.[17] 이 때문에 바로 후대 왕인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핏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게 되는데 한 몫 한다. 물론 이 설은 조선건국 당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주장이지만.[18] 난산으로 자궁이 열리지 않자 "내 배를 갈라야 아이가 숨을 쉴 것이니 칼을 가져오라."고 절규한다.[19] steamapps/common/Crusader Kings II/history/mongol.txt를 찾아 보면 name="Budashiri" # Queen Noguk of Goryeo 및 1351.3.23 = {name="Noguk"}# Queen of Goryeo라는 설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