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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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후기의 무신. 공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반역을 꾀한 간신.'''"가마에 타시는 분을 놀래키지 말라."'''
흥왕사의 변을 일으킨 뒤 임금이 죽지 않음을 확인한 후 한 말. 고려사 발췌.
1363년에 흥왕사의 변을 일으킨 주범. 하지만 토벌군이었던 최영에 진압된 후 체포되었고, 사지가 찢기는 극형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2. 행적
고려말에 대해 일반인의 인식이 [3] 다른 시대보다 덜해서 넘어가는데 사실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희대의 간신배 중 한 명이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사실상 인질로 묶여있을 때부터 그를 모시면서 같이 지냈기 때문에 왕의 총애를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온갖 패악질을 부려댔기 때문. 그럼에도 벌을 받지 않는 등 권세가 대단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업적(?)이라고 할 만한게 정세운 암살 사건인데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정세운과 안우가 홍건적 토벌에서 큰 공을 세우자 왕의 명령이라고 사칭해[4] 안우를 시켜 정세운을 암살하고는 안우에게 상관을 죽인 죄를 물어 그도 암살해버리고 이 일을 알고 있던 이방실, 김득배 등을 비롯한 사건에 연관된 이들을 대부분 죽여버렸다. 정세운을 비롯한 이들은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낸 명장들[5] 이었지만 김용의 흉계에 휘말려 실로 허망한 최후를 맞았고, 이 때문에 당시 백성들이 매우 슬퍼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들킬까 두려워 당시 오빠 기철의 죽음으로 고려에 크나큰 분노를 느끼던 기황후와 내통하여 덕흥군을 왕으로 세울 것을 계획한 다음 공민왕이 흥왕사에 머무르는 것을 기회로 난을 일으켜 당시 문하시중이었던 홍언박 등을 비롯한 수많은 관리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만 공민왕과 닮은 얼굴이었던 환관 안도치가 대신 미끼가 되어 죽으면서 암살이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반란 소식을 듣고 최영이 관군을 이끌고 오면서 되려 위기에 몰린다. 그런데 김용은 오히려 최영한테 먼저 가서 관군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부하들을 '''자기가 직접 죽여버린 다음 마치 진압하고 공을 세운 것 마냥 위장해 빠져나가려 했다. 공민왕은 김용이 설마 반란을 일으킬것이라 생각못한터라 김용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으며 그를 일등 공신으로 책봉한다.
그러나 김용이 정작 도망가다가 체포된 그의 부하들을 국문하지 않자 점점 의심을 사게 되었고 결국 임견미 등이 반란군을 국문하면서 그들이 모든것을 실토하여 진상이 밝혀지게 된다. 체포된 김용은 이 와중에도 "나는 단지 시중 홍언박 등을 제거하려고 했을 뿐 역심은 없었다."라고 변명했으나 임견미가 "그렇다면 전하의 침전에 누워있던 안도치는 왜 죽였냐?"고 반문하자 반박을 하지 못했고 결국 역모죄로 극형에 처해진다.[6]
김용은 간신이었지만 공민왕이 원에 있을 때부터 그를 호종해온 신하였고 공민왕의 신뢰를 받아온 최측근이었다. 이에 반역을 저지른 게 들통난 후에도 공민왕이 '''"김용이 그립다."'''고 탄식하곤 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다만 임용한은 김용의 행동이나 공민왕의 이 발언을 근거로, 이 사건은 공민왕이 김용을 이용해 일으킨 친위 쿠데타로 보고 있으며,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의 군부 실력자들과 홍언박 등의 부담스러운 원로 대신들을 김용을 이용해 숙청하고 난 후 모든 책임을 김용에게 뒤집어 씌워 김용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즉, '''모든 것은 공민왕의 음모'''였다는 것. 후일 신돈도 이렇게 공민왕에게 이용당해 악역을 맡은 후 그에게 버림받아 숙청당했으며, 홍륜(홍언박의 손자다)과 최만생이 공민왕을 암살한 것도 공민왕이 이렇게 신하를 악역으로 이용하고 나서 팽하는 짓에 당하기 전에 선수를 치자는 심정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 다만, 추측의 영역일뿐이며, 이 주장을 뒷받침 할만한 사료가 딱히 없다는 것 또한 맹점이다. 그러나 공민왕의 전후 활동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미약하나마 있을 수도 있겠다 정도는 추측해볼 수 있다. 김용 사후 최측근 세력이 크게 사라진 공민왕 권력 기반의 위태로움을 생각하면 심각한 자충수였을 가능성이 크고, 계속해서 혼란하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자작극이라 보기엔 너무나 무리수인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