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실

 


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홍건적의 침략
2.3. 정세운 암살 사건과 최후
3. 여담

이방실(李芳實)
[image]
이방실 장군의 초상화.

1. 개요


李芳實, 1298년 ~ 1362년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함안(咸安)으로, 조부는 함안 이씨[1]의 시조인 이상(李尙)[2]이고, 아버지는 이원(李源)[3]이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이방실은 일찍이 충목왕을 따라 원에 들어가 시종한 공로가 있었고, 충목왕이 즉위하자 중랑장에 보임되었다가 호군으로 옮겨졌고 토지 100결을 하사받았다. 이후 공민왕 3년(1354년)에 대호군으로 전임되었고, 선성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 노연상(魯連祥)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방실이 용주(龍州)의 군사를 이끌고 몰래 강을 건너 노연상의 집으로 바로 들어가 아버지와 아들을 찔러 죽이고 머리를 개경으로 보냈다.
이후 정세운, 유탁, 염제신, 권겸, 원호, 나영걸, 인당, 김용, 이권, 강윤충, 황상, 최영[4], 최운기, 안우 등 40여 인과 서경 수군 300명, 그리고 날쌔고 용맹한 군사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서 장사성 토벌전에 참가했다. 또한 공민왕 7년(1358년) 왜구가 교동을 침범하자, 안주군민 만호부만호로 발탁된 안우의 부관으로서 편비(偏裨)에 제수되어 왜구의 침입에 맞섰다.

2.2. 홍건적의 침략


공민왕 8년(1359년) 겨울, 홍건적 4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 정주, 인주를 함락시켰다. 이에 이방실은 안우와 함께 분전하여 적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서경이 함락되는 걸 막지 못했다. 이듬해에 고려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홍건적 수천 명을 주살하자, 홍건적은 물러나 용강과 함종에 주둔했다. 이방실은 철화에서 맞닥뜨린 홍건적 100여 명을 주살했고, 1월 27일에 상만호가 되어 용강과 함종에 주둔한 홍건적을 공격했다.
그러나 홍건적이 고려군이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 돌격하여 패퇴시켰다. 홍건적이 정예 기병으로 추격하자, 이방실은 안우, 김어진, 대장군 이순 등과 함께 군사 천 명을 이끌고 적과 죽기로 싸워 수십 명의 머리를 베어 적이 50리 쯤 쫓다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1,000명이 산으로 달아났다. 그 후 이방실은 안우 등과 함께 철수하는 적을 맹추격해 연주강에서 적을 쳐 홍건적 수천 명이 강에 빠져 죽게 만들었다.
이에 적이 언덕에 올라 저항할 태세를 갖추자, 안우 등은 궁지에 몰린 적이 죽기로 싸울 것을 우려해 군사를 거두고 쫓지 않았다. 그날 밤 적이 달아나자, 이방실이 이른 아침에 병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그들을 추격해 선주에서 적병 수백명을 죽였다. 결국 홍건적은 불과 300명 만이 살아남아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이방실은 공로를 인정받아 개경에 개선한 직후 추성협보공신 추밀원부사에 임명되었다.
공민왕 9년(1360년) 4월, 홍건적이 다시 70여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서해도의 풍주, 벽달포와 서경의 덕도, 석도 등지에 정박해 봉주의 성문을 불태웠다. 이에 이방실이 출격하여 풍주에서 적을 격퇴해 30여 명의 목을 베었고 살아남은 적은 배를 타고 도망쳤다. 공민왕은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며 이방실에게 옥대(玉帶)와 옥영(玉纓)을 하사했다. 이에 노국대장공주가 물었다.

어찌 귀중한 보물을 아끼지 않고 가벼이 남에게 주십니까?

공민왕이 답했다.

우리의 종묘사직이 병란으로 폐허가 되지 않게 하고 백성들이 어육(魚肉)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방실의 공로입니다. 내가 비록 살을 베어 주더라도 오히려 보답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까짓 물건 따위겠습니까?

공민왕 10년(1361년) 10월, 홍건적 10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 나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이방실은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도병마사 김득배 등과 함께 출정했다. 홍건적이 무주에 이르자, 이방실은 적은 많고 아군은 적으니 함부로 싸워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멈춘 뒤 공민왕에게 은주, 순주, 성주의 3주와 양암현, 수덕현, 강동현, 삼등현, 상원현의 5현의 백성과 곡식을 절령책으로 옮기자고 요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그 후 이방실은 판사농사 조천주, 좌승 유계조, 대장군 최준 등을 보내 홍건적을 박주에서 격파했다. 또한 지휘사 김경제와 함께 개주에 진군하여 적 병 15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친히 1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연주로 진격하여 2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안주에서 홍건적이 습격해 고려군은 패하고 상장군 이음과 조천주도 전사했으며 김경제는 사로잡혔다. 공민왕은 밀직제학 정사도, 김두를 파견해 절령책을 지키게 했지만, 홍건적이 밤에 군사 10,000여 명을 책 근방에 매복시켰다가 닭이 울자 철기 5,000명으로 책문을 공격하여 부쉈다. 이에 고려군은 크게 무너지고 안우와 김득배 등은 단기로 도망쳐 돌아왔다.
공민왕은 남쪽으로 파천하기로 결심하고 김용, 안우, 이방실, 최영 등의 만류를 무릅쓰고 11월 19일 개경을 떠나 남쪽의 복주로 향했다. 결국 11월 24일 개경이 홍건적에게 함락되었고, 홍건적은 소와 말을 죽여 가죽을 펴서 성에다 두르고 물을 부어 얼게 만들어 사람들이 타고 오를 수 없게 했다. 또 남녀를 붙잡아 불태워 죽이고 임신한 여자의 젖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자행했다.
이듬해인 공민왕 11년(1362년) 1월 17일, 이방실은 안우, 김득배, 황상, 한방신, 이여경, 안우경, 이구수, 최영, 이성계 등과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을 포위했다. 그들은 이튿날 새벽에 총공격을 감행해 개경을 탈환하고 홍건적을 몰살시켰다. 다만 궁지에 몰린 적이 결사적으로 항전해 아군의 희생이 커지는 걸 막기 위해 숭인문과 탄현문을 열어줬고, 잔당 파두반 등 1만 명의 홍건적이 빠져나와 압록강을 건너 멀리 달아났다.

2.3. 정세운 암살 사건과 최후


김용은 정세운이 총병관으로서 홍건적을 궤멸시키고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우자 공민왕의 총애가 그쪽으로 쏠릴 것을 두려워해 안우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만들려 했다. 그는 왕지를 꾸며 글을 써서 조카인 전 공부상서 김림으로 하여금 몰래 안우 등을 찾아가 정세운을 죽일 것을 도모하도록 했다. 이때 김림은 안우 등에게 말했다.

정세운이 평소에 경들을 꺼려했으니 적을 격파한 후에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 먼저 그를 도모하지 않는가.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의 장막에 찾아가 말했다.

지금 정세운이 적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으며, 김용의 글이 이와 같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소.

김득배가 말렸다.

이제 겨우 적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마땅히 우리끼리 서로를 죽이겠는가. 옛날 사마양저(司馬穰苴)는 마음대로 장가(莊賈)를 죽였으나, 위청(衛靑)은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은 것은 고금의 밝은 귀감이니,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소. 만약 부득이하면 그를 잡아서 궁궐 아래에 이르게 하여 상(上)의 처분을 듣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안우와 이방실은 이에 물러나와 병영으로 돌아갔으나 밤이 되어 다시 와서 말했다.

정세운을 토벌하는 것은 군주의 명령이오. 우리들이 공을 세우고 군주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가, 그 후환을 어찌하겠는가.

김득배는 그래도 끝까지 거부했지만, 안우 등이 그를 강요했다. 결국 세 사람은 술 자리를 차려두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불러서 오게 했다. 이윽고 정세운이 오자, 안우가 장사들에게 눈짓을 해 좌석에서 그를 때려 죽이게 했다. 이후 장군 목충이 군전으로부터 행재소로 찾아와 말했다.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을 살해하고 비밀로 하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공민왕은 문하시중 홍언박, 김용, 경천흥, 찬성사 유탁, 추밀원사 유숙을 불러서 의논하고 직문하 김전을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용서한다는 뜻을 반포하고, 이어서 행재소로 올 것을 독려해 그 마음을 안심시키도록 했다. 이때 복주 수령 박지영이 재추소에서 와서 말했다.

이방실이 홀로 정세운을 벨 것을 모의했고, 안우 등 또한 해를 당했습니다.

이에 인심이 위태롭고 흉흉하자, 공민왕은 김전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군사를 보내 토벌하려 했다. 얼마 후 판태의감사 김현과 상장군 홍사우가 와서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을 비난한 글을 바치자, 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금, 은, 포, 비단을 하사했다. 공민왕은 다시 김전 등을 보내 용서한다는 뜻을 반포하고, 박지영을 불러 책망한 후 관직을 파면시키고 향리로 돌아가게 했다. 또한 지주사 원송수를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옷과 술을 하사했다.
이후 안우는 공민왕을 뵈러 행재소로 갔다가 김용에 의해 살해되었고, 공민왕은 김용 등에게 교지를 내려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문을 걸게 했다.

안우 등이 불충하여 정세운을 함부로 죽였다. 안우는 이미 처형당하였으니 김득배와 이방실을 잡는 사람은 3등급을 올려 임명하겠다.

또한 공민왕은 대장군 오인택, 어사중승 정지상, 만호 박춘과 김유 등을 나누어 보내 김득배와 이방실을 잡게 했다. 이날 이방실이 행재소에 나아가면서 용궁현에 이르자, 공민왕은 이방실의 장인인 우산기 신순과 안렴 성원규에게 가서 맞이하게 했다. 박춘이 도착하여 교지를 가지고 왔다고 하자, 이방실은 뜰로 내려와서 꿇어앉았다. 그 직후 오인택이 칼을 빼어 내리치자, 이방실은 바로 엎어져 기절했다가 조금 후 다시 깨어나 담을 넘어 달아났다.
박춘이 쫓아가 그를 잡으려 하자, 이방실이 박춘의 칼 뺏으려 했는데, 정지상 등이 뒤따라와 그를 쳐서 죽였다. 얼마 후 김득배도 살해되면서 개경 탈환에 큰 공을 세웠던 세 장수들이 10여 일만에 주살되었다.
[image]
위 사진은 이방실 장군의 묘.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에 위치한다. 고려 후기의 무신 이방실 장군과 그의 두 부인을 함께 모신 합장묘. 1972년 7월 1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었다.

3. 여담


경남 함안군 가야읍과 창원시 마산구 진봉면의 경계지점에 한치라는 고갯마루가 있다. 이곳에는 고려 공민왕 때, 20만 무리를 이끌고 수도 개성으로 침략해 온 홍건적을 물리친 이방실 장군의 기마 동상이 있다
홍건적을 물리친 당시 3원수로 불리던 장군들은 이방실을 필두로 안우, 김득배 등이다. 여담으로 최영과 친구다. 최영같은 유명한 위인들과 활동했지만 다만 이분들은 그리 명성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참수당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함안 사람들[5]은 이방실 장군을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에 필적(匹敵)하는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또한 조선조에서 '''고려왕조를 지킨 16명의 공신 중 한 명'''이 돼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신도비는 군북면 소포리에 있다.
그리고 기마동상은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 함안 공설 운동장앞 함주 공원에 있으며 함안 이씨 가보는 현재 창원과 합쳐진 마산에 있다고 한다.
[1] 현재 마산(이제는 창원과 함쳐졌다.)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창원 쪽과 서울 부분에 많이 배포되었다.[2] 고려의 관리로 이방실이 중시조로 알려져 있지만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시조는 이분이다.[3] 생물학적 아버지다. 그당시에 집안에 뛰어난 인물이 태어나면 양자로 임명하기 때문이다.[4] 최영과 아주 친한 친구라고 알려져 있다.[5] 이방실 장군 후손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