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2세
[image]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그려진 알렉산드로스 2세 모자이크 초상화. 왼손에는 구형의 십자가를, 오른손에는 아카이아를 들고 있다.
그리스어 : Αλέξανδρος(Alexandros, 알렉산드로스)
라틴어 : Alexander(알렉산데르)
생몰 기간 : 871년경 ~ 912년, 재위 기간 : 912년 5월 ~ 913년 6월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오스 1세의 아들이자 레온 6세의 동생. 13개월 동안 재위하면서 제국에 큰 해악을 끼쳤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고대의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인데, 넘버링을 빼고 그냥 알렉산드로스라고도 한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알렉산드로스는 바실리오스 1세와 에브도키아 잉게리나 황후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는 형 레온과는 달리 미하일 3세가 죽은 지 몇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바실리오스 1세의 친아들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형 레온에 비해 아버지의 미움을 받지 않았고 879년 즈음에 부친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받았다. 하지만 그는 방탕했고 알코올 중독증에 빠졌다. 어찌나 주색에 빠졌는지 성불구자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형 레온 6세는 이런 그를 싫어했고 폐위하려 했지만 딱히 후계자가 없는지라 내버려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형을 매우 미워해 903년 성 모키오스 성당에서 성사 도중에 형을 암살하려는 음모에 관여했다가 발각되어 이듬해에 공동 황제에서 잠시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귀되었다.
2.2. 암군 알렉산드로스
912년 5월 11일 형 레온 6세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레온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노스 7세와 함께 황제에 등극했다. 그는 화폐에 "전제 군주"(영어: autocrator, 그리스어: αὐτοκράτωρ πιστὸς)라는 용어를 삽입하게 한 최초의 동로마 제국 군주였다. 그는 레온이 취했던 모든 정책을 중단하게 했고 조카의 모친 조이 황후를 수도원에 감금했으며 조이의 삼촌이자 제국을 위해 혁혁한 공적을 세웠던 이메리오스 장군을 파면 후 투옥시켜 감옥에서 여섯 달 뒤에 옥사하게 만들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레온 6세에게 쫓겨났던 전 총대주교 니콜라오스를 총대주교에 복직시키고 형이 임명했던 총대주교 에우타미오스를 해직시켰다.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복수심에 불타 에우타미오스를 고문한 후 아가톤 수도원으로 유배보내고 황제를 설득해 에우타미오스와 교황의 이름을 딥티코스(diptyque)[1] 에서 삭제한 뒤 성직의 서열을 가리지 않고 에우타미오스를 따르는 무리들을 모조리 해임했다. 그러나 해임된 주교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황제가 군대를 보내 무력으로 자신들을 쫓아내지 않는 한 자신의 교구에서 평상시처럼 성무를 돌보겠다고 선언했다. 급기야 몇 개 도시에서 소요가 일어나 심각한 폭동으로 이어지자,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는 뒤늦게 자신이 실책을 범했음을 깨닫고 모든 명령을 황급히 취소했다. 이때까지 완전히 해임된 주교는 겨우 4명 뿐이었다고 한다.
한편, 알렉산드로스의 기행은 극에 달했다. 그는 공공장소에서 떠들썩한 주연을 즐겼고 고대의 신들을 제국 전역에서 다시 부활시키려 하기도 했다. 한번은 이교적 미신이 광기에 치달아 원형 경기장에 있는 청동 멧돼지상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믿고 쇠약해진 자기 몸을 고쳐보겠다면서 멧돼지상에다가 새로 이빨과 생식기를 붙이라고 명령했다.[2] 심지어 알렉산드로스는 공동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를 거세하려 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7세의 어머니 조이 황태후를 미워한[3]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마저도 이것만은 결사 반대했기에 감행하지 못했다.
한편, 불가리아 왕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내 알렉산드로스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901년에 맺었던 평화 조약을 갱신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 조약은 형 레온이 맺은 것이니 무효라면서 앞으로는 조약 따위는 필요도 없고 더는 공물도 바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고는 그들을 쫓아버렸다. 이에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할 준비에 착수했다.
2.3. 최후
913년 6월 6일, 알렉산드로스는 4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점심을 잔뜩 먹은 뒤 한낮의 열기 속에서 무리하게 폴로 경기를 하다가 발작을 일으켜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성 불능을 치료하려는 목적으로 원형 경기장의 모든 조각상(아마도 그 청동 멧돼지상도 포함되었을 것이다.)들 앞에서 온갖 이교식 제사를 치르고 나서 곧바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의 재위 기간은 고작 13개월이었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막 가파른 성장세를 타고 있었던 불가리아를 심히 자극하여 후대 황제들에게 큰 어려움을 주었다.
[1]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세계 정교회 독립교회 주교들의 명단이다. 성찬예배 중에 보제가 큰소리로 낭송하는데, 세계 각지 여러 정교회들과 영적으로 연대하고 기억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딥티코스에서 이름을 언급하지 않겠다는 것은 상대를 독립교회의 합법적인 수장으로, 또는 아예 독립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2] 서기 10세기경 동로마 제국에는 '모든 인간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본질이 담긴 스토이케이온(stoicheion)이라는 또 다른 저장소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믿음에 근거해 자신의 스토이케이온이 청동 멧돼지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3] 교회에선 3혼까지만 허용하는데, 레온 6세가 3혼까지 했는데도 후사를 보지 못해 제4혼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총대주교를 위시한 교회 측과의 여러 실랑이와 우여곡절 끝에 겨우 제4혼이 성사됐고, 다행히 후사 콘스탄티노스를 보았다. 하지만 니콜라오스는 조이와 레온 6세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다가 쫓겨났기 때문에 조이를 매우 미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