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데르 세베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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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Alexander Severus)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
(Marcus Julius Gessius Bassianus Alexianus , 본명)
'''생몰 년도'''
208년 ~ 235년
'''재위 기간'''
222년 ~ 235년
'''세베루스 왕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게타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1. 소개
2. 생애
2.1. 출생과 입양
2.2. 마마보이 군주
2.3. 훌륭했던 내치
2.5. 암살
3. 평가


1. 소개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자 로마 제국의 제24대 황제. 전임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이종 사촌 동생으로 외할머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처제이자 카라칼라, 게타의 이모인 율리아 마이사, 어머니는 율리아 마마이아. 엘라가발루스가 상상 이상의 기괴한 행동과 종교적 광기에 휩싸인 제국 운영으로 문제가 많자 외할머니 마이사가 13살에 불과했던 알렉산데르를 후계자로 점찍고 엘라가발루스를 설득해 그의 후계자 겸 양자로 만들었다.
본명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Marcus Julius Gessius Bassianus Alexianus)이며, 양자 입적 후 이름은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알렉산데르(Caesar Marcus Aurelius Alexander)이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내치에 있어서는 확실히 안정적으로 운영했던 황제였지만, 재위 내내 군권을 장악하지 못했고 어머니에게 휘둘렸다. 또 지나치게 어머니 의견만 따른 마마보이 황제였다. 그 결과, 재위 후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불안감을 노출하더니, 라인 방어선 일대를 침범한 게르만족과의 전쟁 중 초기 승기를 잡았음에도 어머니 조언대로 보조금을 지불하고 평화교섭을 맺으러 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와 함께 독일 마인츠에 위치한 병영에서 암살됐다. 알렉산데르 모자가 암살된 이후, 세베루스 왕조는 끝이 났고, 이후 로마제국은 50년에 가까운, 악명높은 3세기의 위기 또는 군인황제시대가 개막했다.

2. 생애



2.1. 출생과 입양


208년 오늘날의 레바논에 해당하는 시리아 속주 페니키아 아르카 카이사리아에서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게시우스 마르키아누스이며, 어머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처제이자 황후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딸 율리아 마마이아다.
엘라가발루스가 계속되는 상식 밖의 행동으로 세베루스 왕조를 파멸로 몰고가고 있다고 판단한 율리아 마이사는 기지를 발휘해 외손자 엘라가발루스에게 바시아누스 알렉시아누스를 양자로 입양할 것을 제안했다. 섭정인 외할머니의 권고를 받아들인 이종사촌형 엘라가발루스에 의해 그는 카이사르로 임명되었고 양자가 되었다. 이후 무책임한 엘라가발루스에 대한 반동으로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의 인망이 멀쩡하고 차분한 양자 알렉산데르에게 쏠리게 됐다.
이런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엘라가발루스는 외할머니에게 속았다는 사실과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뒤늦게 파악한 뒤, 근위대에게 알렉산데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온갖 이상한 행동들로 인해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근위대는 도리어 어린 알렉산데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뒤, 알렉산데르 제거 명령을 내린 엘라가발루스와 그의 모친을 죽였다. 이후 근위대와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는 알렉산데르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2.2. 마마보이 군주


전임자 엘라가발루스가 워낙 일반인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황제였기 때문에 어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즉위는 환호를 받으며 시작됐다. 그가 즉위했을 때는 나이가 14살에 불과해서 실질적인 통치자는 여전히 율리아 마이사였지만, 율리아 마이사가 꽤나 통치에 능했고 그 자신도 대단히 차분하고 얌전하며 예의바른, 말하자면 상식적인 성격이어서 제국은 이후 안정을 찾아갔다.
어린 황제는 차분했고 공부에 힘쓰고 부지런한 성격을 지닌 재목이었다. 따라서 그를 섭정하게 된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유명했던 법학자였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와 파울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혔고, 명목상 섭정 역할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16인의 원로원 위원회를 설치해 원로원과도 원활히 소통하여 문치를 펼쳤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늘날에도 로마 시대 법학자로 널리 알려진 울피아누스가 근위대장이 되었다는 것인데, 울피아누스는 군인이 아니라 순수한 문관이었다. 이는 즉 근위대장직이 당초의 무관적 성격에서 탈피해서 점차 문민화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1] 또한 원로원 의원들까지 황실 위원회에 포함시켰으며, 새로 임명된 근위대장 두 명이 이 위원회의 의장이자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격상됐다.
황제가 담당하던 로마 시민 상고심이 사라진 것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치세 때였는데, 그 이유는 카라칼라의 로마 시민권 확대 탓에 로마 시민이 너무 많아진 데 있었다[2]. 또한 호민관 및 평민 안찰관 공직이 폐지 내지 임명 중단되었다. 늘 공직자 명단을 항상 끼고 다니며 거기에 나와있는 수천 명의 공직자와 장군의 이름을 일일이 다 외웠고, 역사를 익히는 것도 열심이었다. 하지만 여걸이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사망한 후에 섭정 자리를 물려받은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는 그 능력이 율리아 마이사에게 미치지 못한 데다가, 어머니가 지나치게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때 알렉산데르는 유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나머지 기껏해야 불만을 터뜨리는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전형적인 "마마보이"의 증상을 보였고 이는 훗날 이들 모자가 몰락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만다.
마마보이 황제는 유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약간의 군사적 역량조차 없었다. 따라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장 지근거리에 있는 근위대조차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와 근위대 통제가 모두 실패하면서 비극이 벌어지는데, 그 사건은 고문이자 근위대장 중 하나인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근위대에 의해 그의 눈 앞에서 암살당한 일이었다. 이 일의 배경에는 근위대장 울피아누스가 근위대 병사들과 일반 시민 간의 4일 간의 유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법대로’로 처리한, 지극히 상식적인 사건이 시작이었다. 울피아누스는 이 시건을 방치 내지 참여한 근위대 지휘관 두 명을 처형시켰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 병사들은 도리어 근위대장인 울피아누스를 223년(224년 초) 황궁에서 암살한다.
이 사건으로 알렉산데르 역시 근위대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제국 전역의 군대 역시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알렉산데르 정부에 대해 소요를 일으켰다. 그러나 알렉산데르는 군대 문제에 대해서 생각보다 크게 신경을 많이 쓰지 않은 탓에 군인들에게 지나치게 소홀한 황제로 인식되게 됐다. 율피아누스가 암살되고, 어머니 마마이아의 명에 따라 장인, 부유한 귀족 등이 누명을 쓰고 살해당할 당시, 역사가로도 유명한 디오 카시우스 역시 고향 니케아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통제되지 못한 군대와 마마이아의 간섭 속에 목숨을 잃었을 확률이 높았다. 다행인 건 집정관을 역임한 이후 그가 알렉산데르의 권유에 따라 원로원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쫓겨나듯 가버렸다는 점이지만.
사실상 여제나 다름없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는 불행하게도 생전의 율리아 마이사와는 달리 나서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녀는 율리아 마이사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적정선에서 정치에 개입했지만, 단독으로 섭정이 되자 아들 알렉산데르를 넘어선 여제가 됐다. 마마이아는 이전까지 수 많은 황후들이 누린 각종 명예를 넘어선 칭호들을 받아냈고, 결국 “전 인류의 어머니”라는 칭호까지 선사받았다. 또 성인이 된 아들 알렉산데르의 사생활까지 통제한데다, 일껏 들인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 오르비아나가 본인만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아우구스타(황후) 칭호를 받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불만을 대놓고 표출하더니 그녀의 출신 가문과 오르비아나의 아버지가 가진 명예와 권력에 대해서도 극도의 질투심을 드러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의 장인은 누명을 쓰고 처형됐고, 알렉산데르의 아내 오르비아나는 시어머니의 심한 질투심에 의해 227년 북아프리카 속주로 내쫓기고 만다. 물론 황제는 여기에 대해 큰 불만을 느꼈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마마보이들이 다 그렇듯이 어머니의 의사를 거역하지를 못했다.

2.3. 훌륭했던 내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정직했고 워낙 성실히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재위 초 여걸이었던 외할머니의 섭정 아래, 울피아누스를 비롯한 훌륭한 자문단들의 보필을 받았다. 이때 알렉산데르 정부는 로마 시민들에게 효율적인 행정과 복지를 제공했다. 어린 황제는 세금을 인하하고 민생 안정책들을 시행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알렉산데르는 새로운 목욕탕, 수로, 도서관, 가도 건설을 승인해 사회인프라를 강화했다. 이때 알렉산데르는 교묘한 방법으로 네로가 만든 목욕탕을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건축물로 바꿔 네로 시대처럼 호화롭게 재건하기도 했는데, 야간에도 목욕탕을 운영하기 위해 등에 사용하는 기름을 기부하는 동시에 전역에 목욕탕 운영 유지비를 특별세로 만들어 인프라 유지 비용을 마련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이전 황제들이 세운 공공 건축물들의 복구 외에도 217년 번개를 맞고 크게 손상된 콜로세움 복구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교사, 학자들에게 장려금을 지급했고, 각 속주까지 초등교육을 보급시켰다. 아울러 로마 시민들에게 제공된 식료품 배급 서비스를 확대하고, 가난한 제국 내 농민들에게 무이자로 농지 구입자금을 빌려줬다. 동시에 각종 산업들에서의 길드를 활성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따라서 포도주, 올리브유, 제빵, 제화 산업에는 국가 공인 아래 길드가 만들어졌고, 알렉산데르 정부는 면세 효과 및 법률 자문 등을 이들 길드와 사업가들에게 제공해 이들이 손쉽게 혜택받게끔 해줬다.

2.4.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내치에서는 훌륭했음에도 어머니 문제와 근위대 문제로 불만이 쌓여가는 이중적인 상황은 젊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통치 특징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알렉산데르는 동방 문제로 ‘로마군 최고 사령관으로서의 황제’라는 부분에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바로 파르티아를 누르고 새로운 동방의 적으로 급부상한 강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아르다시르 1세와 맞붙게 된 일이었다. 알렉산데르 입장에선 여기에서 성과를 낸다면 로마 황제로서 군사적인 재능을 인정받게 되는 이벤트였는데, 반대로 고전할 경우 또는 매끄럽지 못한 문제들에 터질 경우 큰 문제가 될 상황이었다. 이는 로마 원수정 체제의 고질적 문제점이었고, 물론 황제가 나름 정상적인 성장을 하면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꾸준히 경력을 쌓았다면 상관이 없겠으나 알렉산데르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데다 어머니의 치마폭에 휘둘려온 유약한 황제이다보니 시작부터 문제가 생겼다.
사실 카라칼라 암살과 마크리누스 이후로 주둔지를 잃고 방치되어 있던 동방 군단들의 문제점은 심각했다. 그런데 알렉산데르는 시작부터 제대로 꼬이는 행보로 동방 군단병들에게 이미지가 나빠졌다. 페르시아가 로마의 속주였던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침공해 나시비스, 카르하이를 점령하고 난장판을 만드는데, 어쩔수 없이 동방원정을 떠난 알렉산데르는 231년 봄에 로마를 떠나 도나우 방어선 일대의 최정예군을 규합해 늦여름이 돼서야 동방의 안티오크에 도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에 주둔 중인 2군단이 알렉산데르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동방에 도착한 알렉산데르는 페르시아한테 동방 군단들의 주둔지를 넘겨준 탓에 주둔지도 없던 2개 군단의 병사들이 황제의 소집에도 늦장을 부리는 태업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군율을 잡겠다고 이를 엄하게 처벌했다. 이에 분노한 병사들은 아무런 대책도 마련해주지 않으면서 처벌만 하는 황제에 대해 파업을 일으켰다. 그런데 알렉산데르는 여기에서 수습한답시고 병사들을 시민 (퀴리테스)라 부르면서 "군단병 노릇을 하기 싫으면 그만둬라"라고 하는 실수까지 저지르고 만다. 이 일로 인해 오히려 병사들을 빡치게 만들어 그들이 자진 해산해서 2개 군단이 흩어지고 깨어졌다가 뒤늦게 달래서 가까스로 복구된 사건이 일어났다.[3][4]
당시 로마군의 물량은 이렇게 동방 군단 2개가 잠시 해체되었다고 해서 바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로마군은 페르시아로 진격했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로마군에게 참패하여 막대한 인적, 재산적인 타격을 받았다. 3로로 진격한 나눠서 진격한 로마군 중 적어도 두 분견대는 페르시아 측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으며, 로마군 쪽의 손실도 상당했지만 유리한 상황이 되어서도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생각보다 그렇게 잘 싸운 건 아니었고, 여러모로 로마 못지 않은 쪽팔린 모습을 보여주었다. 때문에 사산조는 그 후로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국경을 넘보지 못했고,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국경은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안정되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명분이 있던 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는 서로의 승리를 선전/주장했다. 로마 측은 페르시아에게 큰 타격을 주어 국경을 안정화시킨다는 목표를 달성했고, 페르시아 또한 침공해 들어온 로마 측을 어떻게든 격퇴해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는 명분이었다.

2.5. 암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정부는 세베루스 왕조 성립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가장 강조한 부분, 즉 군대를 장악하지 못한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이런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다행인건 로마군이 사산조와의 전쟁에서 성과를 낸 덕에 알렉산데르는 사산조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기념으로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후, 동방 군단을 비롯한 로마 군단병들은 젊은 알렉산데르를 가리켜 “결단력도 없는 겁쟁이”, “전투도 제대로 수행할 줄 모르는 애송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때 닥칠 뻔한 진짜 문제가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으러 갔을 때 크게 터지고 말았다.
서방 전선은 카라칼라 시절, 카라칼라가 예방전쟁 차원에서 이 일대의 적들을 박살낸 덕분에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 무렵, 라인강 일대의 게르만 부족들이 여러 곳에서 동시에 라인강 국경을 돌파해 요새들을 파괴하고 이 일대의 로마 영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다시 전쟁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는 얼마 전의 전쟁을 통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제국 동부 일대의 군단에서 병력을 차출한 뒤 라인란트 일대의 군단병들을 모아 부교를 만든 뒤 라인강을 도하해 게르마니아에 산재한 침략자들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교본대로 전술을 만들어 초기 승기를 잡은 알렉산데르는 로마군 내 장군들과 장교들의 반대에도 마마보이 황제라는 별명처럼 어머니 마마이아의 의견대로 게르만족들에게 보조금을 지금하고 평화를 얻으려고 했다. 군사적 역량이나 경험이 없다시피힌 알렉산데르 입장에선 시간벌기 요량으로 이런 제안을 했지만, 피를 흘려가면서 싸웠고 개전부터 승리를 거둔 군대 입장에서는 당연히 “황제가 무작정 싸울 생각도 안 하고, 이기고 있는데 어머니 말만 듣고 그 게르만족들에게 돈을 주면서 회유하려 든다”라고 반발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알렉산데르는 여기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바로 전투 중인 군단병들의 급료와 상여금, 군사지원비 등을 제한하려고 한 조치들을 계획한 것이다. 이 조치는 평소에도 스스로의 의사보다는 어머니 말만 따르는 다 큰 황제에게 불만을 가진 게르마니아 주둔 병사들에게 오해를 사고 마는데, 병사들은 “우리에게 가야할 하사금까지 왜 적들에게 줘야 되는거냐”라고 생각해 완전히 황제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게르마니아 군단병들은 게르마니아 내 모군티아쿰(오늘날의 독일 마인츠) 병영에서 235년 3월 19일 자신들의 사령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모자를 황제 막사 안에서 살해했다. 이때를 기록한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처형집행인들에게 죽기 전 알렉산데르는 자신의 막사 안에서 온갖 일에 개입해 논란을 일으킨 어머니를 원망하면서, 그녀에게 죽기 전까지 모든 불만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몰락은 아들 즉위 후 울리아 마이사 사후부터 실권을 쥐고 간섭한 황제의 어머니 잘못만은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순종적이었던 잘못과 평소 근위대와 군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황제의 연이은 군사적 실수와 행동들이 직접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임 황제인 엘라가발루스와는 달리 죽고나서 시신이 강바닥에 내던져지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반란군은 시신을 정중히 운반해 장례식도 융숭히 치뤄준 뒤 화장 후 호화로운 무덤을 만들어 매장했다. 갈리아 지방에는 알렉산데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고, 238년 원로원에서 공식적으로 신격화됐다.

3. 평가


그의 치세는 13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모든 측면에서 국가의 힘을 키웠다. 로물루스에서 셉티미우스에 이르기까지 로마는 꾸준히 부강해졌지만, 절정에 이른 것은 카라칼라의 치세 때였다. 이후 (로마가)곧바로 하락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알렉산데르 덕분이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관하여>

실제 평가가 어땠는지에 관해 논쟁이 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3세기의 위기와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1세의 등장 이전까지의 무정부 상태를 경험한 로마인들에게 명군으로 불렸다. 실제 당대 로마인들과 4세기 행정가, 정치인이자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평가처럼 고대 로마인들에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라는 황제는 '''고대 로마의 원수정 황제의 교과서'''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동시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가 직접 지적했듯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실용적이지만 매우 고압적인 기존의 세베루스 황제들에 비해 '''매우 귀족적인 안토니네 황조의 2세기적 원로원귀족주의 황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평가도 그 속을 파해쳐보면, 헤로디아누스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이 비꼰 것처럼 알렉산데르는 마마보이, 군대를 통제하지 못한 쫄보, 유약하고 아내와 장인이 핍박받는 것을 책임회피하는 겁쟁이라는 비판처럼 결점이 분명했고, 이런 단점은 그가 안토니네 황제들의 치세기였다고 해도 과연 뛰어난 황제였는가에 대해 의문부호를 받는다고 평가받았다[5].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어릴 때부터 진중하고 사색적인 성격 탓에 평가가 좋았다. 특히 비교 대상이 종교적 광기에 휩싸인 미치광이로 당대에 공인된 엘라가발루스였던 까닭에 온건하고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던 알렉산데르 대한 평가는 등장 당시부터 나쁠 수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 알렉산데르는 본래부터 차분했고, 스스로를 로마시민이라고 자부할 정도로 지극히 로마인이었고[6] 로마귀족적인 기품과 예의를 가지고 있었다.
즉위 후 엘라가발루스가 한 괴상한 행동과 엘라가발루스를 상징하는 검은 돌 등을 시리아로 돌려 보내는 등 상식적인 행동을 했다. 또 사생활 역시 상당히 조용했으며 13년 간의 치세기 내내 매우 성실했다. 업무 스타일 역시 왕조의 개창자와 달리 민중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주고 원로원과 함께 로마를 고전적인 원수정 스타일로 국정을 운영했다. 따라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당대와 후대 로마인들에게 “자칫 하락의 길에 접어들 나라를 곧바로 하락의 길로 가지 않게끔 해준 황제”로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재위 내내 스스로를 “전 인류의 어머니”가 되어 여제가 된 어머니에게 휘둘렸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래로 군대의 힘이 강해졌음에도 군인들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헤로디아누스는 뛰어난 내치와 잘 통제하지 못한 군무 능력이 결합된 그를 일종의 이중적 시각을 가진 군주로 묘사했고, 전해지는 당대의 사료들 역시 휼륭한 황제 임에도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눌려 지낸 나약한 인물로 그를 표현하고 있다. 사실 알렉산데르 모자의 회유책은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 부분 현실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알렉산데르 사후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로마는 고트족에게 상납금을 제공하는 조약을 맺는다. 그러나 문제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신하들과의 상의도 없이 어머니 말을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예의 고질적인 마마보이 근성을 또 다시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결국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과 함께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3세기의 위기를 개막시키고 말았다.
군무 능력과 군대 장악 능력은 의심의 여지 없이 무능했고, 군대 문제로 몰락했지만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이 기록했듯 당대부터 군주로서의 평이 상당히 좋았다. 그가 만약 율리우스-클라디우스 황조 시기에 황제였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적 능력이 없자 바로 아그리파에 맡기고 나서지 않았으며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튼 원정시 후방에서 2주일 깔짝 구경하고 돌아가 버렸다. 네로 황제 역시 직접 출정을 안하고 장군들에게 맡겼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황제가 직접 나가지 않고 총독들에게 맡겨도 군인들이나 시민들에게 아무런 비판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물리적 내전 이후 등장한 플라비우스 황조부터는 황제들이 직접 전선에 나가 싸우는 일이 황제의 중요한 업무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군사적 능력이 부족한 것이 결국 파멸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해 군에 의해 옹립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자체가 황제로서는 생각보다 별거 없는 인물이었음이 드러나면서 사후 3년도 안 된 시점에 당대 로마인들에게 황제로서 완전히 복권됐다. 상술했듯 원로원은 그를 신격화시켰고, 로마군과 정부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까지 건립했다. 아예 황제였다는 것 자체를 부정당하고 일종의 참칭자로 단죄받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나, 이후 등장하는 여러 군인황제들에 비하면 알렉산데르는 상대적으로 나은 처우를 받은 것이다.

[1] 이 흐름은 후대에까지 계속되어, 실질적 근위대의 역할은 엑스쿠비토레스나 스콜라이 팔라티나이로 넘어가고, 라틴어 원어로는 같지만 최상위 지방장관 정도로 의미가 바뀐다.[2] 그래도 로마 시민은 카라칼라의 개혁 이전에도 이미 그 수가 급속도로 불어나는 추세였던지라 어차피 없어질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평가하고 있다.[3] 이 해프닝은 공화정 말기의 내전 때 카이사르의 심복 군단이 10 군단병들이 임금 인상을 목적으로 파업을 일으켰을 때 카이사르가 그들에게 대답할 때 평소대로 "콤밀리테스(전우)" 라고 부르지 않고 "시민(퀴리테스)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그렇게 원하면 제대시켜 주겠다"라고 한방 먹여서 알아서 기어들어온 에피소드를 멋도 모르고 그대로 따라했다가 피 본 케이스다. 카이사르야 전장에서 10여 년 동안 같이 구르면서 끈끈해질 때로 끈끈해진 사이이고, 10군단은 평소 카이사르의 최정예 군단으로 알려진 터라 그들을 잘 알기에 "시민 여러분(퀴리테스)" 라고 불러서 멘붕시킨 것이므로, 똑같은 행동을 했어도, 사람과 상황에 따라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4] 한마디로 카이사르는 모든 면에서 만렙을 찍은 인물이고 장군으로서 카리스마는 세베루스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고 또 당시 상황은 민중파(포퓰라테스)인 카이사르가 원로원파(옵티마테스)인 폼페이우스 및 원로원 의원들과 한참 전투 중이었는데 거기서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이탈했다고 한다면 전리품이 물건너가는 건 당연하고 로마에 돌아가면 욕을 바가지로 쳐먹고 당연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다녔을 것이다.[5] 헤로디아누스는 젊은 시절과 중장년기는 로마에서, 말년은 고향인 안티오키아에서 보냈던 사람으로 알렉산데르의 페르시아 전쟁이 승리가 아닌, 졸전임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체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알렉산데르에 대해 매우 이중적이라고 지적했다.[6] 알렉산데르는 자신을 ‘시리아인’, ‘레반트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최대 수치라고 여기고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계를 강조하고 자신이 메텔루스 씨족의 후손이자 태생부터 로마시민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가문의 족보까지 만들라고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