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라트

 



몽골어: Ойрад
영어: Oirats
1. 개요
2. 계통
3. 역사
3.1. 오이라트 제국
3.3. 근대


1. 개요


현재의 몽골 서부 알타이산맥 인근에서 살던 종족 연맹.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할 무렵에나 겨우 유목화를 시작했던 부족이었지만,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 과정 막바지에 칭기즈 칸에게 항복하였다. 알타이산맥 인근이라는 절묘한 위치 덕에 그 후 중요한 변수가 된 유목 종족들이고, 아이러니하게도 몽골계 유목 민족의 최후 세력이면서 최대 적이 되었다. 광의로는 몽골계에 속하나 역사상으로는 몽골의 최대 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관계와 비슷하다.[1]

2. 계통


계통은 몽골계라고 통칭하나 라시드 앗 딘의 『集史(집사)』에서는 몽골화한 튀르크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언어학적으로 몽골어족이기에 엄밀히 말하면 투르크화된 몽골족이라고 보아야 한다. 종족계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이지만 문제는 『集史(집사)』에서 튀르크의 정의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중앙아시아에 사는 튀르크인지 서부 몽골의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를 위시한 튀르크계 유목 민족인지 현재로는 확정하기 어렵다. 현재 언어는 몽골어의 방언에 속하는 축이다.
쿠빌라이의 원에 반기를 들어 몽골고원에서 독자적인 반란 세력을 구축한 카이두가 오이라트와 관계가 있음이 추측되는데, 위치부터가 오고타이 칸국의 위치와 겹치기 때문이다.

3. 역사



3.1. 오이라트 제국


오이라트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가 몽골보다 늦지만, 하필이면 몽골의 4칸국의 경계선에 진출했었기에 몽골 제국 시대에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고 주로 원나라의 반대편에 서서 싸웠으며, 홍무제명나라를 세우고 북진하면서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자 몽골에 대항해서 싸웠다. 그 후 영락제의 북벌이 있었으나 도망쳐서 무사할 수 있었고 영락제 사후 몽골 고원을 제패하여 오이라트 제국을 세웠다.
1449년 오이라트의 군주 에센 타이시토목의 변을 일으켜 정통제를 부획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자세한 점은 토목의 변 항목 참조. 이렇게 몽골과 맞서 싸우면서 오이라트는 몽골고원 서쪽의 유목 민족들을 흡수한다.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를 위시해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 당시 가장 거세게 대항했던 부족들로 워낙 덩치가 큰지라 말이 오이라트지 실제로는 흡수된 부족 출신들이 원 오이라트계보다 훨신 많아진다. 즉 이즈음에는 오이라트를 중심으로 서몽골의 유목 부족들이 뭉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오이라트의 최대 부족 순위는 준가르와 토르구트부터 나이만, 케레이트 계열이 된다. 오늘날 알타이인의 기원이 되는 원 오이라트계 부족은 쩌리로 전락한다.
이리하여 세력을 키우고 있던 에센은 당시 몽골의 카간이자 자신의 매부였던 타이슨에게 자신의 누이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할 것을 요구하지만 당시 에센의 세력을 두려워 한 타이슨은 에센의 요구를 거절한다. 에센은 타이슨 카간과 싸워 그를 패사시키고 오이라트 여자와 혼인한 자를 제외한 칭기즈 칸의 황금씨족 전부를 학살한다. 당장 훗날 다얀 칸이 되는 보르지긴 바트뭉흐가 살아남은 이유가 오이라트의 혈통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이때 칭기즈 칸 후손들이 가지고 있던 기록과 문서, 족보까지 소실되고 만다. 그 다음 1453년 직접 대칸의 지위에 올라서 연호를 첨원이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의 후손만이 칸이 될 수 있다는 정통성을 깬 무리수를 둔 데다 몽골 출신의 황족들을 학살한 것 때문에 몽골인들이 좋게 볼 리가 없는지라 칸 지위에 오른 지 2년 만인 1455년에 그의 자리를 노리던 부하 족장인 지원아랄에게 살해된다. 오이라트 역시 에센 사후 혼란에 빠지고 약화되어 몽골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 서쪽 자신들의 본거지로 후퇴하였다. 보통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오이라트 제국의 멸망이지 오이라트의 멸망이 아니다.
이 후유증으로 몽골고원은 동쪽의 몽골과 서쪽의 오이라트로 분열했다. 몽골도 이후 차하르할하로 분열했다. 그 할하도 할하 좌익, 할하 우익으로. 현재 몽골은 할하부 중심이고 중화인민공화국령 내몽골이 차하르부 거주지였다. 몽골과 중국의 기록에서는 몽골에게 수시로 털린다고 나와 있으나 오이라트는 16세기 초반 알탄 칸[2] 의 시대까지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유지했고 이슬람 측 기록에서는 모굴리스탄과 카자흐를 수시로 털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탓에 모굴리스탄은 북쪽의 준가르 분지를 상실하였고 준가르 분지는 오이라트의 새로운 본거지가 되었지만, 알탄 칸의 등장으로 오이라트는 몽골고원을 결국 상실하고 몽골에 복속되었다. 알탄 칸의 시대에는 티베트 불교가 오이라트를 포함한 전 몽골에 퍼져 오이라트도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고 이것은 몽골고원 유목민들이 티베트에 개입하는 시초가 된다. 오이라트나 몽골 양자에게 티베트 불교가 중요해져 달라이 라마의 상징성이 높아진다. 오이라트는 그전에는 이슬람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14세기 말 오이라트의 수령의 이름부터 마흐무드였다. 알탄 칸 시기 이후 몽골이 티베트 불교를 밀자 준가르도 이에 영향받아 결국 티베트를 드나들고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했다. 알탄 칸 치세 이전 이슬람화했던 오이라트 부족들은 당시 오이라트인 무슬림들은 대개 텡그리 신앙 전통이 강한 무늬만 무슬림이었던 관계로 티베트 불교로 배교하거나 튀르크계인 위구르카자흐에 섞였으리라 추정된다.[3]

3.2. 준가르


1600년대 초반부터 중가리아에서 오이라트는 부활하기 시작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카자흐스탄 북쪽을 거의 점령하고 트란스 옥시아나 일대의 국가들을 수시로 털고 다녔으며, 심지어 카스피해 북쪽까지 원정했고 1623년 몽골 할하부를 격파하여 완전한 독립에 다시 성공하였다. 그 직후 내분을 겪어 케레이트의 후예 토르구트부가 서쪽으로 이주해 카스피해 북부의 노가이 칸국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중심으로 삼아 지금의 칼미크가 되었다. 이웃 튀르크 부족들이 부르던 호칭을 받아들인 것으로, 본래 준가르 일대의 오이라트인은 경멸스럽다고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은 오이라트의 부족 중 코슈트부는 티베트 내전에 개입한 후 이주해 떨어져 나가고 1640년 청의 성장으로 위협을 느낀 몽골과 화의한 후 준가르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최후의 유목제국이라고 불리는 준가르를 세웠다. 이후 준가르의 흥망에 관하여는 준가르 항목 참조. 예니세이 강에 살던 키르기즈 중 일부가 현재 키르기즈스탄에 거주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준가르와 러시아의 협정이다. 그리고 남은 키르기즈는 하카스인이 되었다.
준가르가 청과의 공방전을 벌일 때 서쪽으로 이주한 토르구트부는 러시아에게 코사크와 비슷하게 대우받았고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오이라트를 지칭하던 명칭을 받아들여 칼미크라고 칭한다. 그들은 유럽에 유일한 불교 민족으로서 러시아와 함께 이웃 이슬람계 국가들과 싸웠으나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러시아의 군사 지원 요구가 강해지고 볼가강 유역에 독일 러시아계 정착민이 늘자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이에 칼미크족은 준가르가 멸망하여 빈 땅이 된 준가르 분지로 귀환을 결정하여 1771년 27만여 명의 칼미크 중 17만여 명이 볼가강을 건너 귀환을 시작하였다. 당연히 러시아는 경악하였고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로 러시아, 카자흐, 키르기즈가 귀환을 막으면서 군사로 충돌하여 크게 해를 입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청의 국경으로 진입에 성공했으나 남은 인원은 귀환 시작 시의 절반도 안 되는 8만여 명에 불과하였고 그중 1만여 명이 급격한 포식과 전염병으로 죽어 7만여 명만이 생존에 성공한다. 그전 오이라트의 인구가 준가르 60만, 칼미크 27만이고 이후 칼미크를 중심으로 고작 20만 명에서 25만 명이 생존에 성공한다.

3.3. 근대


그 후 준가르 분지에서는 토르구트부를 중심으로 청에 순응하는 몽골계 민족으로서 살아가게 되었고 러시아에서는 코자크에 편입되어 직접 통치의 대상이 되었으나 근대사의 소용돌이로 그 사람들은 또 다시 크나큰 시련을 겪는다.
1864년 신장의 무슬림 봉기를 시작으로 당시 친청파 주둔군 중 하나였던 오이라트인들은 위구르 무슬림 봉기군과 연이어 전투한 결과 수만 명의 인구를 또 다시 상실하였다. 여기에 청의 멸망과 몽골의 독립 당시 몽골에 반발하여 일부는 싸우고 일부는 순응하는 등 시련을 겪은 결과로 몽골에 밀리지 않았던 오이라트의 인구는 몽골인들과 위구르인들에게 압도당하게 되었다. 청의 신강 정벌 당시 위구르인의 수는 조사 결과로는 24만 명, 실제로는 37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청과의 전쟁 이전 60만 명이었던 준가르의 인구를 생각하면 예전의 신강은 과거와는 달리 오히려 오이라트인의 인구가 더 많았다.
그나마 신강이 반독립된 상태였을 때에는 나름대로 군벌 세력 중 하나로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최종으로 승리하고 신강으로 진격하자 그 사람들은 여타 신강의 세력과 함께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공산주의식 개혁으로 사회는 또 다시 해체되었다. 그 와중 일부는 몽골로 도주하고 몽골에서는 또 일부가 몽골인들에 반발하여 신강으로 도주하는 등의 상황을 연출하였다.
러시아에서는 칼미크인들에게 무리한 군역을 강요해서 유목을 방해한 후 칼미크인의 영토에 코사크독일인 농부들을 정착시키는 방법으로 이들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켰다. 푸가초프가 봉기하자 많은 칼미크인들이 참여했다가 수보로프 장군에게 진압당하고 결국 칼미크인은 힘 없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제정러시아가 멸망하고 적백 내전이 일어나 또 다시 시련의 시기를 겪었다. 백군의 편을 들려던 칼미크는 적군의 재빠른 진격으로 대다수가 적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적군은 칼미크 자치구를 만들어 주면서 칼미크인들을 대우하려는 듯하였으나 실제로는 동화정책의 연속이었고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여 이 사람들은 또 다시 고난의 역사를 겪는다.
스탈린그라드 전투[4] 이후 스탈린은 칼미크인을 강제로 이주하게 해서 칼미크인도 절반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솔제니친의 기록을 보면 칼미크인들은 여타 민족과 달리 적응에 실패하여 무력허게 죽어갈 뿐이었다. 이렇게 고난의 시기를 겪은 칼미크는 스탈린 사후 귀환이 허용되나 계속된 동화정책으로 자신들의 언어를 잃어가다가 소련이 붕괴한 후에 몽골 및 티베트와 연락해 자신들의 문화를 복원하려고 한다.
현재 남은 오이라트인의 수는 63만 명으로서 몽골과 러시아 칼미키아 등지에 20만, 18만 명씩, 중화인민공화국에 25만 명이 거주한다. 몽골의 오이라트인들은 서부 호브드 주와 오브스 주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오브스 주의 경우 인구의 60%가 오이라트계로 집계된다. 몽골의 독재자 욤자깅 체뎅발이 오브스 주에 거주하는 오이라트계 도르베트[5] 부족 출신이다! 현재는 몽골 칭기스칸 대학교의 총장 카바수렌이 오이라트인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오이라트 인들은 주로 간쑤성과 칭하이성에 거주하고 있다. 신장 지역 북부에도 오이라트인들이 거주한다.
참고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할머니가 칼미크인이라고 한다.
무협작가 양우생의 작품 평종협영록에서 오이라트가 등장한다. 토목의 변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에센 타이시가 중요인물로 등장.
[1] 둘 다 광의로는 여진족에 속하지만 해서여진은 여진 통일 전까지 건주여진 최대의 적이었다.[2] 알탄 칸은 다얀 칸의 손자이지만 몽골의 대칸은 아니다.알탄 칸은 몽골 6부중 튀메드부의 칸일뿐이다.하지만 여러차례 중국을 침입하고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 공격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는등 그 명성과 영향력이 몽골 전부족에 퍼졌다.그래서 당시 몽골의 대칸이었던 다라이손 구덴 칸은 알탄 칸에게 게게엔 칸이라는 직위를 주어 타협할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다라이손 구덴 칸은 차하르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으며, 대칸의 권력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3] 카자흐인들 역시 러시아 제국 지배 이후 타타르인 상인들과 접촉하기 전에는 이슬람에 대해 매우 단편적인 지식만 가졌었으며, 제사와 결혼을 전부 토속신앙 관습대로 진행했었다.[4] 스탈린그라드부터가 과거 칼미크인들이 정복했던 노가이 칸국의 영역권에 있던 도시이다. 근본으론 유목 민족들을 감시하고자 세워진 도시이지만 말이다.[5] 에센 타이시가 이끌었던 오이라트 4부족 연맹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