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박 전투

 

'''Trận Ấp Bắc'''
'''Battle of Ấp Bắc / Battle of Ap Bac'''
압박 전투
[image]
베트남 전쟁
'''날짜'''
1963년 2월 2일
'''장소'''
띠엔장 성 압박 촌
'''교전국'''
<^|1> [image] 베트남 공화국
[image] 미국
<^|1> [image]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지휘관'''
<^|1> [image] 부이 딘 담
[image] 후인 반 카오
[image] 존 폴 밴
<^|1> [image] 하이 호앙
'''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승리
'''병력'''
보병 1,500명
장갑차 13대
헬리콥터 15대
경비행기 1대
보병 350명
'''피해규모'''
남베트남군 83명 전사, 100명 이상 부상
미군 3명 전사 8명 부상
헬리콥터 5대 격추
장갑차 3대 파괴[1]
18명 전사, 39명 부상
1. 배경
2. 전개
3. 베트콩측의 승리
4. 기타


1. 배경


1차 인도차이나 전쟁[2]의 종결 이후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양분된다.북부에는 호치민의 공산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남부에는 응오딘지엠의 자본주의 베트남 공화국이 건설된다.그러나 베트남 남부에도 베트민 병력이 적지 않게 남아있었다. 총선거를 통한 통일에 기대를 걸고 있기도 했고,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중국식 토지개혁을 강행하여 어느정도 후유증 시달리던 북베트남은 이들을 사실상 방치했다.[3] 남베트남에게 있어 베트민 잔존병력은 안보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주의자들도 참여했다지만 주도 세력이 공산주의자들인 이상 베트민 잔당들과 베트남 공화국 정부는 물과 기름일수밖엔 없었다. 탄압과 진압이 뒤따랐고,미국이 제공한 각종 무기들과 차량들[4]을 앞세워 남베트남군은 성공적으로 베트민 잔당들을 쓸어내는 것처럼 보였다.[5]
1960년 남베트남에서 베트민 잔당들과 현지 공산주의자들의 주도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자생적으로 창설된 이후, 해방전선측은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남베트남군은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대통령 응오딘지엠이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싸워 이기는것보다는 정권 유지에 관심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응오딘지엠은 군 장교들을 친구와 가톨릭교도로만 채우고,작전이 성공적이었어도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으면 책임자들을 구박하거나 강등시켰다. 이는 그럭저럭 싸우던 남베트남군이 무능해지는데 일조했다.대표적인 예시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65km 정도 떨어진 전략촌 마을에서 벌어진 압박 전투다.

2. 전개


압박 전투가 일어나기 한 달 전 남베트남 정보국은 압박 지역 북서쪽에 베트콩 1개 중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남베트남군을 지원하던 미군사고문단측은 남베트남군이 베트콩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계획을 세웠고, UH-1, H-21 헬기M113 APC를 지원해주었다. 그들의 전략은 남베트남 부대 1500명 정도가 압박 지역을 세 군데에서 공격하여 포위한 뒤, 도망치는 잔존 세력은 대포와 헬기를 동원한 공중 폭격으로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1963년 1월 2일 오전 6시 35분 10대의 미국 헬기가 남베트남군을 실고 압박으로 향했다. 도보로 향했던, 남베트남군 부대는 그 근처를 수색했다. 남베트남군 두 부대는 남쪽에서 걸어서 압박으로 접근했다. 매복해 있던 베트콩 사령관은 그들이 인근 30m까지 접근하도록 했고, 30m간격까지 들어오자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에게 공격을 가했다. 매복해 있던 베트콩이 남베트남군에게 기습공격을 가하자 남베트남군 여러 명이 죽고, 생존자들은 도랑 뒤에 숨었다. 공격당하고 있던 부대를 실은 헬기 10대가 무장 헬기 5대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했다. 당시 베트콩의 목표는 헬기 5대 이상 격추시키는 것이었고, 남베트남군을 실은 헬기가 착륙하자마자 박격포와 기관총을 맹렬히 쏴댔다. 베트콩의 기관총은 헬기 15대 중 14대를 맞혔고, 5대가 파괴됐고, M-113 w장갑차 3대가 파괴되었으며 미군 3명이 전사했다. 당시 압박 전투에 참전했던 베트콩측 참전용사 레콴콩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그 순간부터 우린 적이 무섭지 않았어요. 그리 용감하지 않은 자들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죠.”

[image]
파괴된 헬리콥터
베트콩은 추락한 헬기에서 나오려는 남베트남군을 집중 공격했다. 당시 작전을 세웠던 미군사고문단의 밴 중령은 어쩔 수 없이 공중을 맴돌았고, 남베트남군 사령관에게 구조를 위해 APC를 보내 달라는 무전을 쳤다. 무전을 받은 측은 APC와 다수의 병력을 압박쪽으로 보냈다. 그러나 지역이 논 근처였기에 APC를 보내는데 시간을 허비했고, 압박 지역으로 보냈지만, 베트콩은 지원하러 온 부대를 공격했다. 8대의 APC도 공격받았고, 몇 분 만에 장갑차 안의 포수 6명이 사망했다. 밴 중령은 남베트남군에게 남은 지상군을 총동원해서 적들을 동시에 공격하라고 간청했으나, 남베트남군 사령관은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날 밤 베트콩은 사라졌다.

3. 베트콩측의 승리


“압박 전투는 빌어먹을 처참한 전투였다.”

존 폴 밴이 데이비드 핼버스탬에게 한 말

“가장 힘든 전투에서 우리 병사들은 압박 전투를 떠올리며 용기를 냈죠. 소리치고 열광했어요. 적에 대한 두려움을 잊었어요.”

PBS 베트남 전쟁 2화 인터뷰에서 참전용사 레콴콩의 증언

압박 전투는 남베트남군과 미군사고문단 측의 완벽한 패배였다. 위에 상술했듯이 미군사고문단 3명이 사망했고, 미군헬기 5대가 파괴되었으며, 남베트남군은 80명 이상이 전사했다. 그에 비해 수적으로나 화력면에서 열세였던 베트콩 측은 18명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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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 전투 관련 북베트남 포스터
압박 전투 당시 남베트남의 상황을 하노이에서 지켜보던 호치민이나 레주언을 비롯한 북베트남 측에게 남베트남 정권이 내재적으로 허약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됐다. 압박 전투를 통해서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남베트남군의 이러한 졸전은 본질적으로 대통령 응오딘지엠의 실책이 크다. 미국의 무력한 허수아비라는 평판과는 대조적으로 베트남 남부에서 프랑스군을 추방하고 경제성장과 치안 안정을 이끄는 등의 업적을 남겼지만,전쟁은 정말 몰랐다.군사작전에 대한 응오딘지엠의 무리한 간섭은 대체로 해가 되었다. 응오딘지엠의 간섭에 시달리던 남베트남 장교들은 결국 많은 작전을 어영부영 진행하거나 서류상으로만 진행했고,이는 베트콩에게만 득이 되었다. 응오딘지엠이 살아있던 1963년 10월 17~18일 메콩강 삼각주에서 베트콩과 남베트남정규군 사이에서 벌어진 쯔엉티엔(Chuong Thien)과 록닌(Loc Ninh)에서의 전투는 제2의 압박전투였다. 이는 7대 1이라는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도 처참하게 패배한 사례였다.[6]
응오딘지엠이 1963년 11월 쿠데타로 실각하고 살해된 후인 1964년 빈 지아 전투,1965년 동 쏘아이 전투에서는 레인저.해병.공수부대를 포함한 남베트남 정규군이 역시 베트콩에게 갈려나갔다. 즉 남베트남군의 졸전은 응오딘지엠이 있을때는 가문 중심 족벌 전시행정 때문에, 지엠이 사라지자 아예 통일된 구심점이 사라진 수뇌부의 보신주의와 군벌화 때문에 속빈 강정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전에 베트민 잔존세력과의 전투에서 그나마 선전한것은 장갑차등 장비빨에 59년 말 까지만 하더라도 북베트남 측에서 정식적으로 군사적 충돌과 일제 봉기를 지시하지 않은체[7] 고립된 잔존세력 소탕작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4. 기타


압박 전투를 다룬 매체로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사고문단으로 복무했던 '존 폴 밴(John Paul Vann)'의 인생 스토리를 다룬 영화 '크레모아(A Bright Shining Lie, 1998)'가 있다.[8] 영화상에서도 자신의 명령과 충고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무능함을 보이는 남베트남군 사령관에게 존 폴 밴이 실망하는 모습이 나온다.

[1]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472를 참조[2] 프랑스-베트남 전쟁[3] 1956년에 마무리된 토지개혁은 정부측 입장에선 성공적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2백만 에이커(8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가 2백만 이상의 농민 가족에게 분배되었다. 마을에서 토지를 독점했던 향신 계급의 오랜 지배 체제는 붕괴되었고, 빈농과 중농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력이 형성되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최소 13000~15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처형당하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말이다.[4] 장갑차가 결정적이었다. 베트민 잔존병들은 이렇다 할 대전차화기가 없었고, 있다고 해도 충분하지 못했다.[5] 응오딘지엠 정권이 베트민 세력들을 탄압한 데에는 자신들이 베트민 보다 정통성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남베트남군 장교들 중에 프랑스군 출신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그 반증이다.[6]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472[7]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월맹은 국제 여론전을 통해 남베트남이 56년 총선을 받아들이게 해 전쟁 없이 '남부 해방'을 이룩한다는 방침이었다[8]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 당시 기자였던 '닐 시핸'이 쓴 책인 '밝게 빛나는 거짓말(A Bright Shining Lie)'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