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주 가문

 


[image]
앙주 가문의 문장
House of Anjou
1. 개요
2. 기원
3. 성장
4. 앙제빈 제국(Angevin Empire)[1]
5. 역대 앙주 가문의 수장
6. 트리비아
[clearfix]

1. 개요


앙주 가문의 시작은 샤토됭 가문(House of Châteaudun)에서 시작된다.[2] 가문의 시조 조프리(Geoffrey)는 훗날 프랑스의 왕가가 될 블루아 가문의 샤르트르(Chartres)의 백작 티보 1세 드 블루아(Thibaud de Blois)에게 샤토됭 자작령(vicomte de Châteaudun)을 하사 받는다. 샤르트르 백작령에 이 샤토됭 지방이 속해있었고 티보 1세와 조프리의 외가가 멘(Maine)의 귀족 로르공 1세(Rorgon de Maine) 가문이였으므로 인척 관계였다. 이후 가문은 페르슈(Perche)와 카티네(Gâtinais) 지방의 방계 가문이 생겼고 이 방계 가문에서 또다시 앙주(Anjou) 지방을 상속받는 방계 가문으로 갈라져 나간다. 1217년 페르슈 계열의 가문이, 1249에는 종가 샤르됭 가문이 각각 부계가 끊겨 과거 같은 멘 가문의 외가여서 먼 친척이었던 프랑스 왕가로 귀속된다.

2. 기원


앙주 가문의 방계인 영국의 플랜태저넛 왕가는 풀쿠아 드 페르슈(Fulcois de Perche)의 막내아들인 위그(Hugues)를 가문의 시초로 적시하고 있다. 이 풀쿠아라는 인물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많은 인물로 초대 조프리의 둘째 아내의 자식이라는 설과 조프리의 아들 위그의 사위라는 설이 있다. 풀쿠아는 장남인 조프리가 있었는데 조프리에게 샤토됭이 상속되었고, 막내아들 위그는 페르슈를 상속받고 그의 아들 조프리는 결혼으로 카티네를 얻는다.
위그는 마콩(Mâcon)의 오브리 2세 백작의 딸인 베아트리체 드 마콩(Béatrice de Mâcon)과 결혼했는데 당시 베아트리체는 조프리 1세 드 가티네(Geoffroy de Gâtinais)의 아내였지만 남편이 사망하자 위그와 재혼을 했다. 베아트리체는 이미 전 남편과 슬하에 가티네를 상속받은 오브리 3세가 있었다. 위그와 베아트레치 사이에서는 조프리가 태어났다. 그런데 가티네를 상속 받은 오브리 3세가 후손 없이 요절하여, 가티네 백작령(comte de Gâtinais)은 이부 동생인 조프리에게 넘어가게 되어 가티네의 조프리 2세가 된다.
조프리 2세는 1035년 훗날 잉젤거 가문의 마지막 적통 후손이 되는 에멩가르드 당주(Ermengarde d' Anjou)와 결혼하여 모계 꼬냑틱(Cognatic)의 관계를 맺는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힐데가르드, 조프리, 풀크를 낳고 1046년 4월 운명한다.[3] 당시 어렸던 3명의 자식은 외삼촌 앙주 백작의 조프리 2세의 궁정에서 성장했다. 시간이 흘러 장남 조프리 3세는 모친 에멩가르드의 오빠인 앙주의 조프리 2세가 후계자가 없고 1060년 수도원에 서원하면서 은퇴를 하자, 아버지 조프리 2세의 모계 결혼을 통한 어머니의 상속권으로 인하여 앙주 백작령(comte de Anjou)을 차지하게 된다.

3. 성장


그렇게 앙주 백작령을 물려 받은 샤토됭 가문의 방계인 페르슈-카티네의 조프리 3세는 앙주 가문의 가장이 된다. 아버지 조프리 2세 드 페르슈가 모계 결혼으로 에멩가르드 당주 사이에서 자신을 낳았기 때문에 조프리 3세는 앙주 가문을 본적으로 두게된다. 이후 앙주 가문은 대를 이어 장남과 차남 사이의 분쟁의 역사가 시작된다.[4] 조프리 3세는 외삼촌 조프리 2세보다 전투감각이 없었다. 1063년 메인 지방을 상실했고, 1064년에도 북쪽 지역을 영국에게 빼았겼다. 1067년 조프리 3세의 동생 풀크는 앙주 가문이 지배력이 점점 쇠락하고 자신의 상속 분마저 날라갈 위기에 처하자 무능력한 형을 대신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형 조프리를 굴복시켰다. 조프리는 외부의 침략에 대항하여 급한 불을 끈 동생 풀크가 자신보다 위상이 높아지자 만회할 목적으로 동생에 반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결론은 동생 풀크의 승리였다. 동생은 형 조프리를 무려 28년동안 감금상태로 유배시켰다. 그 이후 조프리 3세는 수염이 덮수룩한 조프리 3세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고 그림을 그리면 노후를 보낸다. 1096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개입으로 마침내 해방이 되었지만 곧 사망한다.
풀크는 형을 축출하고 앙주의 풀크 4세가 된다. 그는 결혼을 3번 했는데 자식으로 에멩가르드와 조프리, 그리고 3번째 아내 사이에서는 풀크를 낳았다. 풀크 4세는 형제 간의 분쟁에 만족하지 않고 더하여 아내와 부자 간의 불화도 연달아 일으킨다. 마지막 아내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Bertrade de Montfort)는 남편 풀크 4세가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결혼하기 위해 1092년 야밤 도주를 했다. 중세스럽게도 필리프 1세 역시 세 아이를 낳아준 왕비 네덜란드의 베르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버리고 베르트라드와 결혼, 정확히 말하자면 중혼을 한다. 풀크 4세는 격노하여 교황에게 중혼을 고발하면서 제소하기에 이르렀고, 그 두 명은 파문까지 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개판인 상황 와중에 풀크 4세는 아들 풀크를 편애했다. 장남 조프리보다 막내아들 풀크에게 자신의 영지를 물려주려 했고, 딴 집 살림 차린 그의 아내도 자신의 아들인 풀크가 물려받길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장남 조프리는 아버지와 계모의 공공연한 이복 동생에 대한 편애가 강한 위협으로 느껴졌으나 이미 성인이었던 그가 신하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1103년에 후계자로 지목 받는 것은 작은 불씨를 남겼을지언정 누구도 막지 못했다. 1106년 조프리는 아버지의 정책에 반발하여 칸데(Candé)지역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의 명령으로 칸데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준비하는 와중에 화살을 맞고 암살당한다. 그를 못마땅했던 부모의 잔혹한 계략이라는 설이 있다. 1109년 풀크 4세가 죽자, 하나 남은 막내아들 풀크가 상속받으니 그가 풀크 5세이며 예루살렘 왕국의 부왕 풀크이기도 하다.

4. 앙제빈 제국(Angevin Empire)[5]


풀크는 20세 가 채 안된 시점인 1109년 아버지인 풀크 4세의 사망으로 앙주 백작의 지위를 계승했고, 당시 프랑스 영토 중 상당 부분이 잉글랜드 왕의 봉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는 두 왕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처신을 잘 해야 했다. 이후 풀크 5세는 에멩가르드 드 멘(Ermengarde de Maine)과 결혼하여 그녀의 영지까지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다. 결혼을 통해 전쟁 없이 영토를 합병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투자가 어디있었겠냐만은,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결혼을 제테크로 삼던 풀크 5세와 그에게 제테크 교육을 받았던 유럽에 남아있던 후손들이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땅을 전쟁없이 쓸어 담자 결국에 10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될 정도로 나비효과 마냥 번져서 이후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대립조차 풀크의 영토 확장에 한몫을 하게 된다. 어쨌든 먼 훗날의 이야기고, 당시 풀크 5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를 도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와 맞서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풀크 5세의 장남인 조프루아 5세(Geoffrey V de Anjou)를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Matilda de Normandy)와 1127년 혼인을 하게되는 사건이 터졌다.
사실 헨리 1세에게는 어린 아들도 있었지만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기에 마틸다가 부계로 따졌을 때 정복왕 윌리엄의 마지막 혈통인 셈이다. 조프루아는 당시 유럽에서 소문난 미남자에 검술 능력도 뛰어나 유럽 기사의 표지 모델이었고 전투에 나갈 때마다 금작화 가지를 투구에 꽂은 것 때문에 플랜태저넷(Plantagenet)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곧 그의 가문명이 된다. 이 결혼은 결국 앙주 가문이 프랑스 국왕에게 위협이 될 정도의 큰 이익이 되었다. 헨리 1세의 사후 마틸다가 왕관을 차지하려 하자 모계의 스테판 블루아가 대립하여 긴 내전이 발생하지만 종래에는 풀크 5세의 손자이자 조프루아와 그녀의 아들 헨리 2세(Henry II of Plantagenet)가 영국 왕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헨리 2세 역시 조부와 부친의 결혼 제테크를 가훈으로 삼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여자였던 엘레노오르 드 아키텐 (Eleanor de Aquitaine)과 결혼하여 프랑스 남서부 전역을 예물로 가져오는 파문을 일으킨다. 잉글랜드 전역과 아일랜드, 그리고 프랑스를 양분해서 서쪽을 통채로 그의 손자인 헨리 2세가 차지하게 된 것과 이후 풀크의 예루살렘 왕국을 포함해여 현대에는 앙제빈 제국(Angevin Empire)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동군연합의 선봉에는 풀크가 있었고 그가 행했던 여러 가지의 권모술수는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유럽에서는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다. 풀크가 결혼 제테크를 선호하고 그 폐해를 뼈저리게 잘 알던 루이 6세는 때마침 예루살렘 왕국 사절단이 사윗감 찾으러 도착하자 그 혼맥을 미끼로 소개시켜 줌으로써 프랑스의 재앙이었던 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버리려 했고 그로 인해 풀크 5세가 장남 조프루아에게 영지를 맡기고 레반트 지역으로 갔다. 1120년 풀크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 무훈을 세웠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였던 보두앵 2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장녀인 멜리장드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였다. 보두앵 2세는 멜리장드와 그 후손이 예루살렘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프랑스의 루이 6세는 풀크를 추천했다. 풀크는 멜리장드와 1129년에 결혼한다. 1130년 풀크는 멜리장드와의 사이에서 장남 보두앵을 낳았고 1131년 보두앵 2세의 사망 후 멜리장드와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풀크의 장남 보두앵은 보두앵 3세로 즉위했고 그 후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동생 아모리 1세는 즉위하여 보두앵과 시빌라 이사벨라를 낳는다. 이 3명의 자녀는 모두 돌아가며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로 군림힌다.

5. 역대 앙주 가문의 수장


  • 샤르됭 가문이 아닌 예루살렘 왕국 앙주 가문의 부계만
House of Châteaudun
House of Anjou
조프리 드 샤르됭 (Geoffrey I de Châteaudun)
풀크 당주 (Foulques I d'Anjou)[6]
위그 드 샤르됭 (Hugues I de Châteaudun)
풀크 당주 (Foulques II d'Anjou)
풀쿠아 드 페르슈 (Fulcois de Châteaudun-Perche)
조프리 당주 (Geoffroy I d'Anjou)
위그 드 페르슈 (Hugues II de Perche)[7]
풀크 당주 (Foulques III d'Anjou)
조프리 드 페르슈 (Geoffrey II de Perche-Gâtinais)
조프리 당주 (Geoffroy II d'Anjou)
조프리 당주 (Geoffrey III d'Anjou)
풀크 당주 (Foulques IV d'Anjou)
풀크 당주 (Foulques V d'Anjou)
보두앵 당주 (Baudouin III d'Anjou)
아모리 당주 (Amaury I d'Anjou)
보두앵 당주 (Baudouin IV d'Anjou)
시빌 당주 (Sibylle d'Anjou)
이자벨 당주 (Isabelle d'Anjou)

6. 트리비아


Anjou의 이름의 어원은 2가지 가설이 있다.
먼저 로마 제국켈트족갈리아 전쟁 이후 로마 통치에 복종한 안데카비(Andecavi)의 부족의 이름을 따 왔고 로마의 통치아래 안데카비의 정착촌은 요새화되어 현재의 앙제(Angers)의 기반이 되었다는 가설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가설은 Anjou와 Ange가 동음이의어로 발음이 같다. Ange는 천사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어원은 영어의 엔젤(Angel)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어 단어인 앙겔로스(Angelos)이다. 천사라는 뜻이 지역명으로 인한 변형이라는 설이 있다. 가문명이 천사인데 예루살렘 왕국의 왕가가 되었으니 아이러니 하다.[8]
[1]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천사들(Angevin)의 제국[2] 사실 앙주의 초대 영주는 잉젤거(Ingelger)의 아들 풀크 1세 당주(Foulques d'Anjou)이다. 하지만 최초의 앙주 영주라는 타이틀 빼고는 별 두각없이 샤토됭 가문 페르슈계열으로 마지막 여성 후손이 모계결혼으로 가게되어 부계가 끊긴다.[3] 에멩가르드는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의 아들 보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와 재혼을 한다.[4] 이런 분쟁들은 훗날 앙주 가문의 결혼 제테크의 예행연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5]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천사들(Angevin)의 제국[6] 잉젤거(Ingelger)의 아들[7] 플랜테저넷-앙주 가문의 시조[8] 비슷하게 프랑스의 리옹의 도시 이름의 유래는 갈리아족의 신 '루구스'(Lugus)에서 유래된 라틴어 지명 '루그두눔'(Lugdunum, "루구스의 언덕/요새")이다. 뒷 부분의 자음이 점점 약화되면서 '리옹'이 된 듯하다. 현재 'Lyon'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사자"를 뜻하는 'lion'와 동음이의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