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군연합
1. 개요
同君聯合 / Personal Union
한 군주가 다른 나라의 왕위까지 차지하게 되어 두 국가가 한 연합이 되는 것이다.
2. 어형
영어로는 좀 더 명확하게는 personal union을 인적(人的) 동군연합이라고 번역하고 real union이라는 용어를 물적(物的) 동군연합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동'군'연합이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군주'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영어 personal union이나 real union의 정의로는 그보다 범위가 넓은 '국가원수(head of state)'의 공유를 통한 국가 간의 연합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드물긴 하지만 대통령 같은 공화정의 국가원수를 복수의 국가가 공유하는 것도 personal union이나 real union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프랑스와 안도라는 부분적인 personal union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분류되는데 안도라의 공동 공작 중 한 명은 프랑스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personal union이 군주만 해당된다면 절대 이렇게 분류할 수 없을 텐데(안도라의 공동 공작은 군주이지만 동일인이 가지는 프랑스 대통령 직위는 군주가 아니므로), '국가원수'를 가지고 정의하니 자연스럽게 부분적 personal union으로 분류되는 것.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동'군'연합은 영어 personal union이나 real union에 완벽히 대응되는 번역어는 아닌 셈이다.
한국 사학계 에서는 널리 쓰이는 말은 아닌 듯하다. 동군연합을 질문하자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이는 교수의 사례가 있다.해당 사례와 분석글# 명시적이고 구체적이며 범용적인 사례가 아니기에 사학계에서는 개별 사례 각각을 독립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유럽에서 한명의 군주가 여러 작위를 겸하는 일은 흔하기에 유럽에 한정하면 동군연합은 특이한 상황이 아닌 것도 한몫할듯.
혹시 일본 역사물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동(東)군 연합으로 오해하지 말자.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다이묘끼리 동군과 서군으로 서로 갈라져 연합해 싸운 걸 가지고 동군연합 VS 서군연합 이렇게 혼동해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관계없다.
3. 역사
유럽에서는 혈통에 따라서 군주의 지위가 이리저리 옮겨다니기 때문에 때때로 발생한다. 다만 살리카법이 있는 프랑스 등의 경우 부계 혈통 또는 남계 혈통만 인정되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프랑스-나바르 동군연합의 경우 카페 왕조의 직계 남계가 단절되자 카페 왕조의 방계 남계인 발루아의 필리프(필리프 6세)가 프랑스를, 카페 왕조의 직계 여계 자손인 잔느(후아나 2세)가 나바르를 물려받으며 다시 분리되었다.
어떤 형태의 동군연합이든 국민의 권리가 통합 전과 통합 후 모두 변동이 없다는 점은 같다.[4] 그래서 유럽에서는 동군연합 체제에 대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컸다. 가령, 카를 5세 당시에 결성되었던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왕국 동군연합의 경우, 둘 다 가톨릭이 국교이긴 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는 이미 수많은 제후들이 루터교로 개종한 탓에 개신교에 대해 마냥 탄압으로 일관할 수 없었지만, 스페인은 수많은 개신교인들을 이단 심문으로 싹 다 화형시켰다. 또, 현재까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현존하는 동군연합 체제인 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 동군연합에서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국교로, 스코틀랜드는 장로교를 국교로 하는 등, 적용되는 법률이 제각각이었다.
물론 유럽도 나중에 가면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외국계 왕실이 자국을 지배하는 현실을 마뜩찮아하기도 했으나, 원래 동군연합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던 곳이라서 민족별로 자치권을 주거나, 군주가 "'''나도 이 나라 사람이에요.'''"하고 그 나라의 문화나 종교로 전향하려는 노력으로 반발이 수그러드는 경향을 보였다. 헝가리에게 자치권을 주고 이중제국을 설립한 합스부르크 왕조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어난 반 독일 여론 때문에 독일계 왕실에 대한 반감이 늘자, 자기들도 영국인임을 어필하고자 왕가의 이름까지 갈아치운 윈저 왕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외국 군주를 섬긴다는 것에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던 아시아권과는 다른 부분이다. 예를 들면 경술국치 당시의 일본은 천황이 직접 한국의 황제를 겸하지 않았는데, 전통적으로 동군연합의 개념이 없었던 탓에 여론이 대폭발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5] 영국이 무굴 제국의 황실을 폐지한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것은 무굴 제국 황실이 세포이 항쟁을 지원하여 영국의 입장에선 황실 폐지의 명분이 된 것과 무굴 제국 황실부터가 인도의 기층민중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힌두교도들의 입장에선 영국인들보다 인도에 조금 일찍 들어왔을 뿐 이교도, 이민족 지배자라는 점은 크게 다를 바 없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동군연합은 다른 문화권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고, 매우 드물지만 있긴 있다. 청나라 황제가 몽골 제국의 대칸과 티베트의 전륜성왕[6] 을 겸한 것이 그 사례다.
그러나 사실 사서를 확인하면 동아시아에서도 동군연합 비슷하게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일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다음 위키에는 우세한 입장에 있던 자들이 자신들 주요 가문의 남성이나 여성을 결혼시킨 사례들도 있는데, 당연히 괜히 그런 일들을 한 것이 아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Heqin 실제로도 효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 조선만 봐도 초기에 세종에게조차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명나라 사신들조차 명나라 황실과 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아랫사람 취급받았다.[7] 조금 올라가서 고려의 사례를 보면 이는 극명해지는데, 고려 왕이 원나라 황제 사위로 나라를 다스린 덕분에 원나라 사신이 이전처럼 완전히 안하무인으로 굴지는 못하게 되었다.
천자 즉위까지는 실패해서 그렇지, 다른 사서들을 참고해도 중국인이 선우나 태국의 군주처럼 높은 작위들은 얻어낸 사례들이 있었으며 보바이, 양응룡 등 역시도 자신의 밑에 있던 서로 다른 민족인 자들을 동시에 수하로 부리며 난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했다. 제위 찬탈도 성공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실패해서 그렇지, 정통성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기는 있었다.
4. 양상
동군연합에 의한 정치적 통합의 정도는 다양하다. "어, 너희 나라랑 우리 나라랑 섬기는 군주가 같네?" 정도로 끝나는 경우('인적 동군연합')도 있고, 사실상 한 나라처럼 움직이는 경우('물적 동군연합')도 있다.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청나라가 물적 동군연합의 전형적인 예였다.
동군연합이라도 각각은 법적으로 별개의 국가라서 서로의 권리를 침범했다간 동군연합이 와장창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대표적인 동군연합 체제인 스페인-포르투갈 이베리아 연합도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일개 자치 지방 취급하거나, 포르투갈 식민지의 일부를 집적거리는 것에 귀족과 평민할 것없이 울컥한 포르투갈인들이 독자적인 군주를 옹립해버리면서 해체되었다.
어쨌든 동군연합이 성립할 경우, 해당 양국의 갈등 조정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양국 국민들 모두 일단 왕한테는 한 수 접고 들어가는데다가, 왕 역시 굳이 일방적으로 한 쪽 편을 들 유인이 약했기 때문.[8] 왕이 일종의 판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인지 동군연합 국가들끼리 전쟁을 벌인 예는 극히 적으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거의 대다수가 다른 한 쪽에서 새로운 왕을 옹립하여 동군연합이 해체되곤 했다.
5. 사례
역사적으로 발생한 대표적인 동군연합은 다음과 같다. 물론 이외에도 수많은 동군연합들이 있었으며 여기 있는 게 다가 아니다. 단순히 왕위가 아니라 '제위+왕위', '공위+공위' 같은 작위를 겸하는 식이면 정말 조합이 굉장히 많다.
동군연합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럽 국가 및 유럽 국가의 속령이었다가 독립한 나라들에서 주로 나타난다. 전근대 유럽에서는 각 나라/지역과 거기에 사는 신민들이 군주/영주의 상속 재산이라는 관념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각 군주/영주 간 정략 결혼이 많았다. 따라서 주로 유럽 국가와 유럽 국가에서 독립한 나라에서만 동군연합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5.1. 동군 연합
5.1.1.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이집트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한 것은 총 두 차례였는데, 이집트의 왕조로서는 각각 제27왕조와 제31왕조다. 해당 시기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샤한샤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했다. 훗날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아케메네스 왕조 치하의 이집트를 점령함에 따라 이러한 동군연합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5.1.2. 헬레니즘 제국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차례대로 정복한 후 각각 이집트의 파라오와 페르시아의 샤한샤를 겸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헬레니즘 제국이 혼란에 빠졌다가 이내 아르게아스 왕조가 단절되고 그리스의 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페르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로 분열되면서 동군연합이 해체되었다.
5.1.3. 칼마르 동맹
1397년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1세가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결성되었다. 하지만 1523년 구스타프 바사가 이끄는 스웨덴 독립군에 의해 스웨덴을 상실하면서 해체되고 그 다음은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이 되었다.
5.1.4. 카스티야+아라곤
중세 말 15세기 이베리아 반도는 과거 코르도바 칼리파국의 유산은 남쪽 끝자락에 있던 그라나다밖에 안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포르투갈,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던 상태였다. 이 와중 1469년, 당시 이베리아 반도 중부 지방과 북부 해안, 안달루시아의 레콘키스타 정복지를 다스리던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와 발레아레스 제도, 그리고 이탈리아의 아라곤 왕실 영지를 다스리던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며 양국을 함께 다스림으로써 현대 스페인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1492년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레콘키스타를 완수하고, 또 아라곤 왕국이 별개로 나바라 왕국을 공격해 상 나바라를 손에 얻으면서 현대 스페인의 영토가 완성 되었다.[11] . 즉, 현대 스페인이란 나라의 기원도 원래는 동군연합에 있었던 셈이다.
5.1.5. 스페인 왕국+포르투갈 왕국+저지대
펠리페 2세가 아버지 카를 5세 뒤를 이어 스페인의 국왕이 된 후, 공석이 된 포르투갈의 왕위를 계승하면서(어머니 즉 카를 5세의 아내인 이사벨라가 포르투갈의 여왕이다.)[12] 형성된 동군연합. 이른바 이베리아 연합. 하지만 펠리페 2세 재위 중에 저지대 북부의 네덜란드가 스페인에서 이탈하고, 포르투갈도 흡수된지 60년 만에 다시 독립한다.
펠리페 2세의 최초 병합 당시만 해도 포르투갈은 어느 정도의 독자적인 체제를 인정한 상태에서 국왕만 에스파냐의 국왕을 같이 모시는 것에 가까웠는데, 후대로 가면서 중앙집권 정책에 따라 포르투갈을 억압하자 결국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을 통해 다시 독립국이 되었다.
5.1.6. 헝가리 왕국+폴란드 왕국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카지미에시 3세가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1370년에 죽자 그의 사위인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가 루드빅 1세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국왕 자리를 물려받으며 생긴 동군연합이다. 하지만 러요시 1세도 아들이 없이 죽었고 헝가리와 폴란드가 그의 딸들인 마리어와 야드비가에게 분할 상속되면서 동군연합이 해체된다.
5.1.7.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이전 동군연합
1385년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튜튼 기사단을 격파하기 위해 크레보에서 체결한 동군 연합. 이후 1386년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폴란드어: 야기에우워)의 결혼으로 야기에우워 왕조가 설립된다. 이후 1562년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일, 발전하였으며 야기에우워 왕조 시기에는 유럽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는 강대국이었다. 왕위계승을 놓고 내분 중이던 루스 차르국도 공격하고 오스만 투르크의 공세를 좌절시키는 등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이 전쟁들에서 활약한 것이 그 유명한 윙드 후사르. 하지만 과두정 의회의 태생적인 한계 탓에, 이후 코사크 대반란이나 대홍수 같은 여러 사건에 휘말려 비틀대다가 결국 망했다. 여담으로 결혼 당시 두 부부는 한국나이로 각각 요가일라 36세, 야드비가 14세였다. 또한 당시 리투아니아는 토속 다신교를 믿고 있었기에 야드비가는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개종을 결혼 조건으로 내세웠으나, 야드비가가 마음에 들었는지 요가일라는 이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당시 주변국들은 이들의 거짓개종을 의심하였으나,[13] 리투아니아는 그 후부터 골수 가톨릭 국가로 거듭났고 연합왕국은 중부유럽의 패권국이 된다.
5.1.8.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아일랜드 섬을 정복하고 명목상의 왕국인 아일랜드 왕국을 세운 후 잉글랜드 왕이 아일랜드 국왕을 겸했다. 다른 동군연합과 달리 아일랜드 왕국은 이름뿐이고 이 시기부터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땅이나 다름없었다.
5.1.9. 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면서 발생했다. 이 사건 이래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사실상 한 국가가 되지만, 법적으로도 한 나라가 된 것은 앤 여왕 때다.
5.1.10. 프랑스 왕국+나바르
이 동군연합은 역사상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130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필리프 4세가 나바르 여왕 후아나 1세와 결혼하여 성립하였는데 1328년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를 4세가 적자 없이 사망하여 동군연합이 단절되었다. 뒤이어 발루아 왕조를 연 필리프 6세는 나바르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는데[14] 프랑스와 달리 나바르는 살리카법이 없어서 필리프 4세의 장남 루이 10세의 딸 잔느가 후아나 2세로 즉위했다.
두 번째 동군연합은 이로부터 261년 후인 1589년 카페 왕조의 방계 후손인 방돔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Antoine de Bourbon, duc de Vendôme)과 나바르의 여왕 잔 달브레(Jeanne d'Albret)의 차남이었던 나바르 왕 앙리 4세가 발루아 왕조의 단절 후 아버지의 혈통으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면서 발생하였다. 사실 나바르는 당시엔 이미 스페인에 의해 영토 대부분을 잃고 프랑스의 일부나 마찬가지인 상태였고 부르봉 가문 이전에도 1234년부터 프랑스 대귀족 가문[15] 이 나바르 왕위를 겸하고 있었다. 앙리 4세의 손자 루이 14세 때 나바르 왕국은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어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라는 부가적인 호칭으로만 남게 된다.
5.1.11. 영국+하노버 선제후국[16] (후에 하노버 왕국으로 격상)
앤 여왕 사후 왕위 계승법에 따라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가 영국의 조지 1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하노버는 살리카법에 의해 여성계승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후에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고, 하노버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즉위하면서 동군연합은 해체된다.
이러한 점 덕에 프레드릭 윌리엄 허셜·캐롤라인 허셜 남매가 영국으로 넘어와 천왕성을 발견하게 되고, 발견한 나라가 영국이 되게 하였다.
5.1.12.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프로이센은 원래 튜튼기사단의 정복지로 튜튼기사단이 폴란드에 굴복하면서 폴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후 기사단 국가로 이어지다가 16세기 종교개혁여파로 1525년 튜튼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이 개신교 루터파로 개종하면서 영지를 세습군주정으로 변경했고, 1619년 프로이센 공작의 대가 끊기자 마지막 공작의 맏사위이자 초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의 증손자인 같은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諸侯)가 프로이센 공작으로서는 폴란드의 봉신이 된다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는 것을 허용해주었다. 이로써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공국의 동군연합이 되었다.
17세기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시절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형식적인 종주권을 청산하고 실제 중심지였던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십수개의 영지내 의회와 정부들을 통합해서 사실상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 흡수된다. 그러나 나중에 프리드리히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허가를 받아 제국 밖의 독립영지인 프로이센명을 사용하여 왕국의 이름으로 삼는다. 하지만, 브란덴부르크 왕국이 아니라 프로이센 왕국(Königreich Preußen)이라는 국호를 쓴 건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왕의 칭호를 쓸 수 있는 건 오로지 '''차기 황제 후계자인 '로마 왕''''과 '''제국 내 선제후이자 1526년 이래 합스부르크가가 계속 쥐고 있었던 '보헤미아 왕''''뿐이었기 때문이었고, 여전히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은 신성로마제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왕국을 표방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könig in Preußen(프로이센 내에서의 왕)"'''이라는 외왕내제 식 칭호를 써야 했고, 프리드리히 대왕 때에 이르러서야 '''"könig von Preußen(프로이센 왕)"'''이라는 군주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5.1.13. 프로이센+스위스의 뇌샤텔 공국
뇌샤텔은 비록 스위스에 가맹해 있었으나, 다른 주와는 달리 영주가 지배하는 공국이었다. 원래는 프랑스 오를레앙 가문의 방계가 뇌샤텔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1707년에 그 대가 끊기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뇌샤텔 공위를 이어받게 된다. 나폴레옹에게 털리기도 하는 등 몇 차례 곡절을 겪으며 내려오다가,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뇌샤텔에서는 스위스의 다른 주들처럼 사실상 공화제가 시행되었다. 결국 1857년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식으로 퇴위하였다.
5.1.14. 합스부르크 제국
'''가장 유명한 동군연합.'''
5.1.14.1.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저지대[17] +부르고뉴+나폴리 왕국
선대의 결혼동맹 후광+막강한 조력자들+5개 국어를 구사하던 국제적 감각의 엄친아 버프를 보유한 카를 5세가 구축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고 판도. 카를 5세는 재위 중에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프랑스령을 포함하는 밀라노 공국의 영토까지 손에 넣지만, 대신 부르고뉴 일부와 명목상 가지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위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말년에 카를 5세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저지대+나폴리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 오스트리아 본령을 분할시켜 물려주어[18] 두 합스부르크 통치령은 각각의 역사를 걷는다. 참고로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은 1714년까지 스페인에 귀속되었으며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간다.
5.1.14.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867년 성립. 근원은 보헤미아-헝가리 동군연합이다. 보헤미아와 헝가리는 14세기 룩셈부르크 왕조 아래 동군연합을 이루지만, 동군연합 1대 만에 룩셈부르크 왕조가 단절된 이후 넘겨받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정착하지 못하고 각국의 섭정들이 득세하면서 동군연합은 사실상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어 합스부르크 왕조조차도 2대 만에 단절되면서 동군연합은 끊겼으나, 귀족들 간의 갈등 끝에 두 나라 모두 합스부르크 여자가 시집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 야기에우워 왕가를 왕으로 모시면서 1490년부터 헝가리 왕국이 보헤미아 왕국과의 동군연합이 됐다. 하마터면 폴란드-리투아니아-보헤미아-헝가리 동군연합이 탄생할 수도 있었으나, 보헤미아-헝가리 왕이 폴란드-리투아니아까지 이어받지 못해 두 동군연합이 통합되지는 않았다. 1526년부터는 이 헝가리-보헤미아 동군연합을 헝가리 국왕의 사위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상속받아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 동군연합[19] 이 만들어졌다. 신성 로마 제국이 1806년에 멸망하고 1867년에 헝가리 독립내각이 탄생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만들어졌고, 체코(구 보헤미아 왕국) 독립 내각이 출범하기 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후 해체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왕에서 폐위된 카를 1세는 아직 가지고 있던 헝가리 왕이라는 직위에 복귀하려 했지만 헝가리 의회에서 그의 폐위를 선언했고 섭정인 호르티가 집권. 이후 헝가리를 왕국으로서 존재하다가 2차대전 이후 공화국으로 바뀐다. 한편 헝가리 왕국은 1102년부터 크로아티아 왕위를 겸하고 있었고, 1526년 헝가리에서 야기에우워 왕가가 끊겼을 때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와 독립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왕으로 옹립해 결국은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5.1.15. 바이에른 공국+라인 팔츠
바이에른 공국과 라인 팔츠는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에 의해 통치되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하면서 아들들에게 분할상속되고 바이에른도 4개로 분할상속되다가 통합되었는데 팔츠의 선제후가 바이에른을 상속하고 바이에른 공국으로 영지를 통합하고 바이에른 왕국으로 이어진다.
5.1.16. 덴마크+노르웨이 → 스웨덴+노르웨이
칼마르 동맹에서 스웨덴이 떨어져 나간 후 덴마크-노르웨이로 비뀌어 지내고 있었지만, 1814년 나폴레옹 전쟁 와중 스웨덴에게 대패한 후 노르웨이의 왕위를 스웨덴에 양도했다. 이후 성립된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은 1905년 해체했다.
5.1.17. 포르투갈 왕국+브라질 제국
포르투갈의 왕태자였던 동 페드루 왕자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을 독립시킨 뒤 자기가 페드루 1세라는 이름으로 '''브라질의 황제'''에 오르고, 부왕인 주앙 6세가 죽자 페드루 4세라는 이름으로 '''포르투갈의 왕'''에 오르면서 잠시 형성된 '''2개월'''짜리 동군연합. 당시 브라간사 왕실은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임시 수도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길 정도로 허약해졌기 때문에 브라질을 동군연합으로 계속 유지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페드루1세 & 4세는 브라질 황제는 아들인 페드루 2세에게, 포르투갈 왕은 딸인 마리아 2세에게 물려주면서 동군연합은 2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다만 브라간사 왕실이 브라질로 피난가던 시절을 동군연합으로 친다면 이 동군연합은 10년이 넘는 꽤 오래된 동군연합이다.[20]
5.1.18. 네덜란드 왕국+룩셈부르크 대공국
1815년 빈 회의에 의해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면서 프랑스가 점령했던 룩셈부르크 지역에 대한 처분 과정에서 룩셈부르크를 공작령에서 대공국으로 승격시키고, 네덜란드의 왕이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동군 연합. 이때 네덜란드의 왕가인 나사우 가문 전체에서 협약을 맺었는데, 룩셈부르크는 살리카법을 적용해서 남계후손이 끊기면 나사우 방계가문으로 대공위가 넘어가게 하는 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빌럼 3세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고 외동딸 빌헬미나가 유일한 자녀가 되면서 빌럼 3세 사후 동군연합은 해체되고 네덜란드 왕위는 빌헬미나가 계승하고 룩셈부르크 대공위는 남계로 먼 친척인 아돌프[21] 가 계승하였다.
5.1.19. 러시아 제국+폴란드 입헌왕국
얼마 없는 황위+왕위 동군연합. 1815년 빈 회의에 결과 바르샤바 공국이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삼국에게 분할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폴란드 지역에 폴란드 입헌왕국을 수립하고 러시아 차르가 폴란드 왕국을 겸하게 하는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 이후 폴란드 입헌왕국이 러시아의 직할령이 되면서 동군연합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5.1.20. 러시아 제국+핀란드 대공국
1809년에 핀란드 전쟁에서 러시아가 스웨덴을 이긴 후 핀란드는 스웨덴령에서 러시아령으로 바뀌었으며 이때부터 러시아 황제가 '핀란드 대공' 이라는 칭호를 새롭게 사용하면서 핀란드 대공국이 성립되었다. 핀란드인들의 자치권은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의 제정이 무너지고 핀란드가 독립하는 순간까지 공식적으로 폐지되지 않았지만, 초창기에는 비교적 유화적으로 자치를 허용하던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과 그에 따른 반동으로 소수민족에 대해 강경하게 돌아선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때부터 핀란드인들을 극심하게 탄압하여 핀란드인들의 반러감정이 높아졌다. 결국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고 러시아의 군주제도 폐지되자 핀란드 의회도 이를 기회로 삼아 핀란드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후 독일계 단명왕조인 핀란드 왕국을 거쳐 오늘날의 핀란드 공화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5.1.21.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 인도 제국
세포이 항쟁 이후 인도는 완전히 영국령으로 병합되었는데 그 와중에 인도의 황제자리를 만들어 영국 왕이 겸임하게 했다. 물론 말이 좋아 동군연합이지 실제로는 식민지나 다름없다. 인도 제국의 군대인 영국 인도군도 인도 제국의 자체적인 군사조직이라기보다 사실상 영국군에 소속된 인도인들의 모임에 가까웠다.
5.1.22. 청나라 + 몽골
'''동군연합 중 유일한 제위+칸위 동군연합.'''
후금이 몽골 차하르부를 정복하고 대원제국 옥새를 얻자,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국으로 바꾼 뒤 천자에 오르고, 이후로 푸이에 이르기까지까지 청나라 황제들은 몽골의 대칸을 당연직으로 겸임하게 된다. 이 동군 연합은 1910년대 청나라가 멸망하고 몽골이 독립하면서 끝나게 된다.
사실, 청나라의 통치 체제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정부가 청나라라는 울타리 내의 여러 세력들을 통치하는 '''동군연합 체제'''였는데, 청나라의 황제는 공식적인 지위와 비공식적이지만 실질적인 지위를 포함하여 '''만주와 몽골의 대칸''', '''중원 한족들의 천자''', '''티베트(+티베트 불교)의 보호자''',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를 겸하여 청나라의 모든 강역을 통치했다.
각 지위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매우 '''정교하면서 유기적이고 다원적으로 작동되는 통치 체제로 운영'''되었다.
- 만주와 몽골의 대칸 자리를 통해 청나라 황실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만주와 몽골에서 최고의 무력집단인 팔기군[22] 을 제공 받았는데, 이는 홍타이지 때 얻은 원나라의 옥새와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이 많이 믿는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와 최왼 관계를 맺음으로써 부여받은 티베트(+불교)의 보호자 자리를 통해 정통성을 확보했고
- 중원 한족들의 천자 자리를 통해 청나라의 재정적 기반을 제공받았는데, 중원에서 징수하는 세금을 통해 경제력이 빈약한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함과 동시에 그들이 제공하는 무력으로 중원을 비롯한 다른 지역들을 통제했으며
- 티베트(+불교)의 보호자 자리는 제정일치 체제인 티베트의 상징적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와 최왼 관계[23] 를 맺어 중원에서 비롯되는 경제력과 물량, 만주와 몽골에서 제공되는 정예 전력으로 티베트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대신, 티베트의 실질적인 통치권, 그리고 티베트 불교를 믿는 만주-몽골의 귀족들에 대한 통치 정당성을 종교적으로 부여받았고
- 서남지역 토사들의 우두머리 자리는 한족의 경제력과 만주와 몽골의 무력으로 서남지역의 토착 소수민족들을 통제하여 반란 세력을 통제함과 동시에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여 경제의 혈액과 같은 화폐, 그것도 실물 경제에서 절대적으로 많이 쓰이는 동전[24] 주조의 원료인 구리를 안정적으로 수급[25] 하는 등[26]
5.1.23. 프랑스 제국 + 이탈리아 왕국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황제가 되었을때 이탈리아 북부에 괴뢰국인 이탈리아 왕국을 세워 이탈리아의 왕도 겸임했었다. 다만 실적인 통치는 부왕인 그의 의붓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가 했다.
5.1.24. 프랑스 공화국+안도라(부분적, 현재)
안도라는 두 명의 공동 공작을 두고 있는 양두제(diarchy) 국가이다. 안도라의 공동 공작 중 한 명은 로마 가톨릭 우르헬(Urgell) 교구(스페인 안에 위치함)의 교구장 주교가, 다른 한 명은 프랑스의 국가원수(현재는 대통령)가 자동으로 맡게 되어 있다.
사실 이 사례는 personal union을 동'군' 연합으로 번역한 것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프랑스 대통령은 군주는 아니지만 국가원수이고, 그가 동시에 맡는 안도라 공동 공작은 군주이면서 국가원수이다. 영어권에서 personal union은 '군주'로 한정하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와 안도라는 부분적인 personal union 상태에 있다고 분류된다. '부분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안도라의 국가원수가 2명인데 그중 한 명만 프랑스와 공유하기 때문이다.
5.1.25. 몰다비아 공국 + 왈라키아 공국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다시 독립했지만, 여전히 오스만은 호시탐탐 루마니아를 노리고 있었다. 결국 1859년 몰라키아와 왈라키아는 연합하여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이 생긴다. 이 공국이 발전하여 마침내 루마니아 왕국이 된다.
5.1.26. 크로아티아 왕국 + 헝가리 왕국
1091년에 스트예판 2세(Stjepan II, 재위 1089~1091)의 사망으로 트르피미로비치 왕가(Trpimirovići)의 대가 끊기자, 크로아티아의 전 왕이었던 드미타르 즈보니미르(Dmitar Zvonimir, 재위 1075~1089)의 왕비 옐레나 리예파(Jelena Lijepa, ?~1091)의 제안으로 즈보니미르의 처남이자 그녀의 오빠였던 헝가리 왕국의 왕 라슬로 1세(László I, 재위 1077~1095)에게 크로아티아 왕위를 제안했다. 제안을 수락한 라슬로 1세는 크로아티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슬라보니아(Slavonia)[27] 의 반(Ban) 페타르 스나치치(Petar Snačić, 재위 1093~1097)를 왕으로 추대한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반발에 크로아티아의 왕위를 얻지 못했다. 그 후 1097년 라슬로 1세의 뒤를 이은 칼만 1세(Kálmán I, 재위 1095~1116)가 스나치치를 살해하고 슬라보니아 점령에 성공하지만, 달마티아 지역 귀족들의 저항에 못이겨 귀족들의 특권을 보장해주되 칼만 1세가 크로아티아 왕위를 겸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이로써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의 동군연합이 성립했다.
이후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로 남아있다가, 트리아농 조약으로 세르비아 왕국#s-2에 편입되어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왕국이 탄생한다.
5.1.27. 이탈리아 왕국 + 알바니아 왕국 + 에티오피아 제국
이쪽은 이탈리아가 일방적으로 침공하여 보호령/식민지로 삼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알바니아 국왕 및 에티오피아 황제를 겸하게 된다.
5.1.28. 벨기에 왕국 + 콩고 자유국
법적으로 콩고 자유국은 벨기에와는 같은 왕만을 모실 뿐, 벨기에 정부는 내정에 개입할 수 없는 독립적인 자유국가였다. 이는 베를린 회의에서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벨기에와 콩고의 국왕인 레오폴드 2세는 자유국의 설립 및 운영 전반에 독점적인 위치를 누릴 수 있었다. 콩고 인민들은 정치참여에서 배제되었고, 자유국의 지배층인 백인들은 전부 레오폴드 휘하의 위원회와 회사 소속이었기 때문. 그래서 독립과 자유는 명목일 뿐, 실질적으로 콩고는 레오폴드 왕 '''개인의 식민지'''로 운영되었다. 그는 근대적인 군사-경제력을 바탕으로 전제군주로 군림하며 콩고의 부를 빨아먹었고, 콩고 사람들은 온갖 학대와 착취에 시달리며 죽어갔다.
이 연합은 1908년 국제사회의 온갖 압력을 받은 벨기에 정부가 왕으로부터 콩고를 빼앗고 벨기에 정부가 관할하는 식민지로 개편하면서 사라진다.
5.2. 부부 동군연합
부부가 각각 별개의 왕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결혼을 통하여 동군연합이 형성된 예. 편의상 동군연합 취급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각자의 나라에서 각기 다른 왕과 여왕을 섬기므로 동군연합이 아니다. 이 부부왕들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부모의 왕위를 각각 상속하면 그때서야 진정한 동군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5.2.1. 나바르+프랑스
상술했듯이 1308년 나바르 여왕 후아나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결혼으로 성립되었으나, 1328년 샤를 4세 사망 후 카페 왕조의 혈통이 끊어지고 발루아 왕조로 교체되면서 해체되었다.
5.2.2. 오스트리아+부르고뉴 공국
당시 신성 로마 제국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장남인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훗날의 막시밀리안 1세)과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 1세의 결혼으로 성립된 부부 동군연합. 부르고뉴뿐 아니라 훗날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되는 저지대 영토 거의 전부가 마리 1세의 영지였기 때문에 그녀의 손자인 카를 5세가 저지대 영토를 상속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5.2.3.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현대 스페인의 기초가 된다.
5.2.4. 프랑스 왕국+스코틀랜드 왕국
프랑스 왕 프랑수아 2세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1세의 결혼으로 생겨난 동맹. 하지만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고 후계자가 없어서 1년 남짓 만에 소멸하였다. 메리 스튜어트가 두 번째 남편 단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 왕국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한 것을 보면 만약 프랑수아 2세와 자손을 낳았더라면 잉글랜드+스코틀랜드+프랑스 동군연합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5.2.5. 잉글랜드 왕국+스페인 왕국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잉글랜드의 메리 1세의 결혼으로 발생한 동맹. 이 때문에 1598년은 잉글랜드+스페인의 결혼 동맹과 프랑스+스코틀랜드의 결혼 동맹이 대립하는 상태였다.(…) 자못 볼만했지만 둘 사이에서 후계자가 없어서 메리 1세 사망 후 소멸되었다.
5.2.6.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네덜란드
명예 혁명 이후, 메리 2세가 남편인 네덜란드의 빌럼(윌리엄) 3세와 공동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발생했다. 하지만 이 부부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1대 만에 메리 2세의 동생 앤 여왕이 계승하면서 네덜란드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소멸되었다. 네덜란드의 총독이자 오라녀 공작의 자리는 윌리엄 3세의 방계 조상인 요한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빌럼 1세의 동생)의 후손이 이었다.
참고로 메리 2세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네덜란드와 부분적 동군연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메리 2세가 지배자가 아니었기 때문. 메리 2세가 죽고 윌리엄이 단독 군주가 된 뒤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가 완전한 동군연합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윌리엄은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는 빌럼/윌리엄 3세였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윌리엄 2세라고 썼다. 잉글랜드는 이전까지 윌리엄이란 이름을 쓴 왕이 윌리엄 1세 이래로 2명뿐이었고(노르만 왕조 이전은 안 따짐), 아일랜드 국왕 칭호는 잉글랜드 국왕의 이름과 똑같이 썼으니 달라질 수 없었다. 네덜란드는 그전에 빌럼이 2명 있었기 때문에 빌럼 3세이므로 잉글랜드, 아일랜드와 대수가 일치했다. 하지만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 중에 윌리엄은 이전에 한 명밖에 없었으므로 따로 윌리엄 2세라고 표기해야 했다. 메리의 경우, 잉글랜드(더불어 아일랜드도)와 스코틀랜드 모두 여태까지 메리가 한 명씩(블러디 메리와 메리 스튜어트) 있었으므로 자연히 잉글랜드·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메리 2세로 일치했다.
일반적으로 두 나라의 군주가 결혼을 하면서 공동군주가 돼 성립되는 동군연합의 경우, 부부 중 원래의 계승자가 죽으면 배우자도 자동으로 공동 군주 지위를 잃게 되거나 다음 후계자와 공동군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시기에는 예외였다. 윌리엄이 잉글랜드 의회가 주도한 명예혁명을 수락할 당시 요구했던 게 "만약 아내가 나보다 먼저 뜨면 내가 단독 군주로 남게 해달라"는 것이어서 잉글랜드의 의원들이 이에 동의했고 혁명 성공 뒤 이 내용을 담은 법을 만들었기 때문. 이 조치가 없었다면 메리 2세가 사망한 직후 윌리엄 3세는 즉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왕위를 잃고 처제 앤이 단독 군주로 즉위하게 되거나, 윌리엄 3세와 앤 여왕의 공동 군주 체제가 들어서게 됐을 것이다. 이러면 권력의 안정성에 문제가 찾아올 수 있기 때문에 메리가 먼저 죽으면 윌리엄이 계속 단독 군주로 남게 조치한 것이다. 그래서 메리 2세가 사망한 뒤 윌리엄 3세가 단독 군주로 남아 있다가 그도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처제인 앤 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다.
한편 잉글랜드 국왕은 백년전쟁 이래로 오랫동안 프랑스 왕을 사칭하고 있었고, 당시 네덜란드의 지배자들은 명목상 프랑스 남부 오랑주(오라녀, 오렌지) 공의 칭호를 쓰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명목상의 칭호까지 따지면 이 시기 동군연합의 양상이 훨씬 복잡해진다(...).
5.3. 실제로는 동군연합이 아닌 경우
5.3.1. 고려+심양
원 간섭기에 고려국왕 충선왕이 심양왕에 봉해졌고 두 작위를 합쳐 고려심왕이라고도 한다. 심양왕은 후에 심왕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동군연합은 별개의 두 국가가 먼저 존재하고, 그 후 두 국가의 군주를 같은 사람이 겸하게 되어 탄생하는 데 반해 고려심왕의 경우, 심왕은 작위로서의 왕일 뿐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작위가 아니었으므로 이를 동군연합이라 볼 수는 없다. 참고로 충선왕 이후에는 고려국왕과 심왕의 작위가 각기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으므로 이를 함께 겸한 것도 충선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5.3.2. 영연방 왕국[28]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총 16개의 나라들이다.[29]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가 한 나라를 이루는 영국과 달리, 이들 16개국은 평등한 주권국가들이다. 단, 영국 이외의 나라들에서는 여왕을 대리해 총독이 국가원수대리 역할을 한다.[30] 이들이 동군연합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나, 영국이 다른 국가에 간섭 할 수 없는 데다 다른 국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탈퇴할 수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들을 동군연합이 아닌 그저 상징적인 연합체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자세한 내용은 영연방과 영연방 왕국 참고.
6. 매체에서의 등장
대항해시대 4에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동군연합을 이뤘다는 소식에 라파엘 카스톨이 발끈해서 스페인을 죽입시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원쑤를 외치지만 실제 역사대로라면 "본국에서 그런 일도 있었네?" 수준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게임상의 흔한 고증오류다. 더욱이 레콘키스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옛날만 해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서로 동류의식이 매우 강했고[31] , 그래서 16세기 무렵에는 결혼동맹을 이용하거나, 19세기경에는 심지어 포르투갈 수상을 스페인 왕으로 추대해서라도 동군연합을 만들려고 악을 썼다. 그래서 만일 대항해시대 4의 스토리가 실제 역사를 따라갔으면 라파엘 카스톨은 자기 나라인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베리아 반도 통일이 완수됐다고 격하게 기뻐했어야 한다(...)[32]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사의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인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와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시리즈를 해보면 동군연합이라는 복잡한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냥 속국처럼 묘사되는 유로파와 달리 귀족 개개인 시점에서 진행되는 크킹의 구현도가 좋은 편. 외국의 왕위를 동군연합으로 물려받기 위해 친척들을 암살하거나 동군연합 상태에서 두 왕위의 계승법이 달라 플레이 캐릭터 사후에 다시 별개 국가로 쪼개지는 등 다양한 중세의 난장판을 겪어볼 수 있다. 다만, 크킹의 경우 동군연합이 무조건적으로 강력한 물적 동군연합으로, 한 개의 국가처럼 취급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엄연히 서로 다른 국가로 취급되는 유로파 시리즈에 비해 구현도가 떨어진다.[33]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도른 공국은 기나긴 도른 전쟁 끝에 동군연합을 통해 칠왕국에 평화적으로 편입되었다. 다만 칠왕국의 왕이 도른의 대공을 겸하는 것은 아니고, 마렌스 마르텔의 맏이로 적법한 후계자인 마리아 마르텔이 칠왕국의 왕인 다에론 2세와 혼인해 그 자식이 칠왕국의 왕이 되었고, 도른에서는 마리아 마르텔의 남동생인 마론 마르텔을 독자적으로 대공위에 올렸다.]
거유 판타지 외전 2에서 에델란트의 국왕이자 주인공 류트 헨데는 히로인들과의 결혼으로 왕비로 맞아들여서 힐즈랜드의 왕, 노르드란트의 왕, 그리고 루트에 따라서는 이베리아 왕까지 즉위한다. 여기에 작중 나오는 강국 프론스까지 우호국으로 확보하여 엔딩에서는 대제국 취급.[34] 물론 야겜인 본작 특성상 진지하게 나오기보단 한 나라의 여왕/공주였던 히로인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하렘엔딩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긴 하다.
마탄의 왕과 바나디스에서 티글블무드 보른이 브륀 왕국과 지스터트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브륀과 지스터트의 동군연합이 이루어진다.
[1]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2] 당시 이 지역은 여러 공국과 백국들이 카를 5세라는 한 명의 군주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현재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다.[3]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바하마, 그레나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투발루, 세인트 루시아,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벨리즈, 앤티가 바부다, 세인트 키츠 네비스.[4] 이건 정확히 말하면 종교 덕분이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기 전까지는 이민족이라도 같은 신자를 탄압한 군주나 귀족들을 미친놈 취급했고 그런 짓을 실행하면 공적이 되어 망하기 십상이었다.[5] 대한제국 말에 일부 지식인들이 한국-일본 동군연합을 꿈꾸고 일진회라는 친일 단체를 수립하고 한일합방에 적극 협조했으나, 정작 합방 후에 일본 제국과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진회 전체가 가차없이 내버려졌다(...). 동양에서 가장 유럽화된 일본에서도 동군연합의 개념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6] 본래 전륜성왕이란 인도 문화권에서의 이상적인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티베트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티베트 전체를 통치하는 세속 군주의 명칭으로 쓰였다.[7] 군주들도 명나라 사신의 횡포가 심하면 그들에게 부탁을 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들은 오히려 조선에서보다 명나라에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더 강하기도 했다. 그래서 외교나 조공 문제에서도 굉장히 활약했다.[8] 물론 일방적으로 한 쪽 편을 든 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왕들도 몸이 한 개인 사람인지라 본인이 거주하고 있는 국가에게 조금 더 힘을 실어주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9] 프랑스어로 루시용[10] 프랑스어로 세르다뉴[11] 이 와중 피레네 산맥 위로 삐져나와있던 로세요[9] , 세르다냐[10] 같은 카탈루냐의 일부는 훗날 17세기 중반에 프랑스에게 빼앗긴다[12] 정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나, 펠리페 2세는 애초에 포르투갈 왕국의 제1왕위계승권자였다.[13] 사실 리투아니아는 이미 주변나라들 (주로 기사단국들)을 낚기위해 카톨릭, 정교회 여러번 거짓 개종을 해왔던 전적이 있었다.[14] 필리프 6세는 필리프 4세의 조카로 나바르의 핏줄이 전혀 없었다. 다만 필리프 6세는 후아나 2세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였던 잔느와 결혼했다.[15] 상파뉴, 카페, 에브뢰, 알브레 가문[16]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17] 당시 이 지역은 여러 공국과 백국들이 카를 5세라는 한 명의 군주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현재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한다.[18] 물론 모든 영토를 아들인 펠리페에게 물려주고 싶었으나 동생인 페르디난트 역시 엄청난 정치천재였기에 실패했다.[19]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선출직이므로 당시 황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가 대표가 된다.[20] 사실 포르투갈의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처럼 포르투갈-알가르브 연합왕국이었고,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왕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본토가 탈탈 털리던 시기에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국력이 커지면서 식민지가 본토보다 더 힘이 셌던 주객전도 시기가 있었기 때문. 참고로 알가르브는 현재 포르투갈의 남부지방의 지명이다. 원래 포르투갈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만 가리키는 지명이었다.[21] 하지만 여계를 따지면 빌럼 3세의 조카뻘[22] 만주 팔기군과 몽골 팔기군[23] 초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무력과 경제력을 제공하는 대신 로마 교황이 통치 정당성을 부여하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24] 은은 어디까지나 납세나 대규모 거래를 위한 고액권이었기 때문에 은과 동전 간의 환율은 그때 그때 변동되었다.[25] 사천과 운남, 귀주는 당시에 청나라 내에서 구리를 비롯한 각종 광물들이 풍부한 지역이었다.[26] 물론, 청나라 황제들 중 중앙집권 체제 확립에 골몰했던 옹정제 때 개토귀류라는 조치를 시행해서 토사들의 군사&행정&사법 자치권을 회수하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유관들과 중앙군이 이를 대체하게 했다.[27] 현 크로아티아의 동부 지방.[28]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바하마, 그레나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투발루, 세인트 루시아,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벨리즈, 앤티가 바부다, 세인트 키츠 네비스.[29] 영연방 회원국 중에선 영국 여왕을 국가원수로 모시지 않는 나라도 많기 때문에 영연방과 정확히 겹치는 개념은 아니다.[30] 물론 총독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 실질적인 권력은 그 나라에서 뽑은 총리 등에게 있는 것이 보통이다.[31] 같은 이베리아 반도 국가에 같은 뿌리를 두고서 이슬람 세력의 지배에서 힙겹게 벗어났다는 데서 동질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양국의 통일을 간절하게 원하는 여론이 강했다. 그래서 16세기에 결혼동맹을 이용해서 동군연합을 만들려던 계획이 좌초됐을 때,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쪽의 국민들이 못내 원통하게 여겼을 정도다.[32] 참고로 실제로도 포르투갈은 펠리페 2세 때에 스페인과의 동군연합을 이루는 식으로 합병이 되긴 했다. 근데 왜 도로 두 나라가 분리되었느냐면, 기껏 합병했더니 스페인 측에서 포르투갈을 아시아 국가와의 무역으로 돈을 벌어다주는 돈셔틀로만 취급한데다(...), 브라질, 마카오 등의 몇몇 돈되는 식민지를 탐내서 찝적거리는 것에 포르투갈인들이 격분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 통일의 대업이고 나발이고 딴 살림차려버린게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이 당시의 포르투갈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같은 민족주의 운동이 아니라, 오늘날의 카탈루냐 독립운동마냥 돈 가진 쪽의 꼬장부리기에 더 가까운 편이었다.[33] 특히 부부 동군연합의 구현도가...[34] 작중 나오는 유로디아 대륙 자체가 현실의 유럽을 모델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