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크
앙주 백작 풀크 4세와 몽포르의 베르트라드의 아들로 1089년 또는 1092년 태생으로 추정된다. 1109년 아버지 풀크 4세가 죽자 앙주의 백작 지위[3] 를 물려받았다. 영지는 프랑스에 있었지만 당시 프랑스 영토 중 상당 부분이 잉글랜드 왕의 봉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풀크도 두 왕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처신을 잘 해야 했다. 처음에는 루이 6세를 지지했으나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아들 조프루아 당주[4] 가 결혼하면서 헨리 1세의 편에 가담했다. 훗날 헨리 1세가 적자가 없어 왕위를 딸 마틸다에게 넘기려 했으나, 헨리의 사후에 조카 스티븐이 마틸다가 여자임을 이유로 왕위를 스틸해버리자 잉글랜드는 내전에 빠진다. 결국 합의 끝에 스티븐의 왕위는 인정하나 다음 왕위 계승자는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가 이어가기로 하여 훗날 헨리 2세가 즉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풀크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 격이 된다.
1120년 풀크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 무훈을 세웠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였던 보두앵 2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장녀인 멜리장드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였다. 보두앵 2세는 멜리장드와 그 후손이 예루살렘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프랑스의 루이 6세는 풀크를 추천했다. 풀크[5] 는 멜리장드와 1129년에 결혼한다. 1130년 풀크는 멜리장드와의 사이에서 장남 보두앵을 낳았고 1131년 보두앵 2세의 사망 후 멜리장드와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를 두고 풀크와 멜리장드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멜리장드는 풀크가 1세대 십자군 세력을 대신해 자신의 세력을 끌어 들이려 하는데 불만을 가졌고, 풀크는 야파 백작 위그 2세와 멜리장드의 추문을 문제삼았다. 위그는 보두앵 2세의 충신이었으며 멜리장드의 사촌으로 왕실의 일원이기도 했다. 위그는 공동왕 중 멜리장드에게만 충성을 맹세했고 풀크에게는 충성 맹세를 거부했으며 급기야는 1134년 풀크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반란 와중에 위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 배후로 풀크가 의심 받았다. 위그의 반란은 위그 개인의 반란일 뿐 아니라 풀크에 불만이 팽배해 있던 1세대 십자군과 2세대들의 불만이 배후에 있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풀크는 주도권을 잃고 멜리장드와 화해할 수 밖에 없었으며 1136년 차남 아모리를 낳았다. 1143년 풀크는 멜리장드와 함께 아크레에서 사냥을 하다 낙마하고 만다. 워낙 심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콧구멍으로 뇌수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결국 사흘 동안 혼수상태로 있다가 사망했고 멜리장드는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