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리 1세

 



[image]
'''예루살렘 왕국의 제6대 국왕'''
'''즉위명'''
아모리 1세(Amaury I)
'''이름'''
아모리 당주(Amaury d'Anjou)
''' 출생일'''
1136년
'''출생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 사망일'''
1174년 7월 11일 (38세)
'''사망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 매장지'''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성묘교회
''' 가문'''
앙주 (House of Anjou)
'''부모'''
부친 풀크 당주
모친 멜리장드 드 레텔
''' 배우자'''
아녜스 드 쿠르트네
마리아 콤니니 (마리 콩넨)
'''자녀'''
시빌 당주
보두앵 당주
이자벨 당주
'''종교'''
로마 가톨릭
''' 재위기간'''
1162년 2월10일 ~ 1174년 7월 11일 (12년 5개월 1일)
프랑스어: Amaury (아모리)
라틴어: Amalricus (아말리쿠스)
보두앵 3세1153년 이집트의 영토인 아스칼론을 점령하여 아모리에게 주었고 아모리는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이 되었다. 아모리는 1157년 에데사의 조슬랭 2세의 딸인 아녜스와 결혼했으며 1162년보두앵 3세가 죽자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아녜스의 행실이 나쁘다는 점을 이유로 이혼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아모리는 아녜스와 이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아녜스는 이벨린의 위그와 재혼했지만 그녀가 낳은 시빌라보두앵은 왕위 계승자의 법적 지위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
1163년 아모리 1세는 파티마 왕조가 연공을 바치지 않았다는 구실로 이집트를 기습했고 이집트는 나일 강의 댐을 허물어 물바다 작전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은 이 기회로 자신의 부관 시르쿠에게 이집트를 공격하게 하는 한편 아모리가 없는 틈을 타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를 포로로 잡았다. 아모리는 에데사 백국트리폴리 백국의 섭정을 맡고 1165년 보에몽의 몸값을 지불하고 빼내왔다. 한편 아모리 1세는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어 자신의 신부감을 구하고 누르 앗 딘에 맞서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1167년 누르 앗 딘이 다시 한번 이집트를 침공하자 아모리는 이집트 칼리프 알아디드와 협정을 맺고 나일 강에서 시리아군에 맞서 싸웠다. 카이로로 퇴각한 시르쿠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아모리는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여 공성전을 폈고 시르쿠는 협상을 통해 그 도시를 아모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모리는 알렉산드리아에 오래 머물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퇴각했다.
1167년 아모리는 동로마 제국의 마리아 콤니니(Μαρία Κομνηνή)와 결혼했다. 이듬해 아모리와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 콤니노스는 동맹을 맺고 누르 앗 딘에 공동으로 맞서기로 했다. 아모리는 이집트가 누르 앗 딘과 내통한다는 의혹이 일자 마누엘 1세와 함께 이집트를 다시 한번 침공하여 많은 공물을 받았다. 그러나 누르 앗 딘은 시르쿠를 이집트로 보내 1169년 이집트를 손에 넣었고 시르쿠의 조카인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권력을 잡았다. 아모리는 살라흐 앗 딘의 등장을 유럽에 알렸으나 지원군은 없었다. 아모리는 동로마군의 도움으로 다미에타(Damietta)의 살라흐 앗 딘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170년 살라흐 앗 딘예루살렘 왕국을 침공하였고 힘을 더 키워 이듬해에는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아모리는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살라흐 앗 딘의 위협을 알렸으나 역시 도움은 없었다. 이제 예루살렘 왕국은 남쪽으로 살라흐 앗 딘, 북쪽으로는 누르 앗 딘,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이슬람 분파인 아사신파의 위협에 직면했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죽자 아모리는 즉각 바니아스(Banias)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 원정길에서 아모리는 이질에 걸렸고 고열에 시달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의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해 7월 11일 죽었다. 아모리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콤니니는 이사벨을 낳고 나블루스(Nablus)를 유산으로 받았다. 아녜스가 낳은 아들 보두앵이 아모리의 뒤를 이었다. 아모리가 사망한 뒤 마리아 콤니니는 발리앙 디블랭과 재혼했다. '이벨린의 발리앙'으로 불리는 그 사람이다. 이 때문에 보두앵 5세가 사망한 뒤 왕위 계승을 둘러 싸고 발리앙과 기 드 뤼지냥 간의 대립이 있었다. 발리앙은 자신의 양녀인 이사벨을 계승 후보로 밀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발리앙 디블랭과 기 드 뤼지냥 문서 참조.
여담으로 프랑스아로 아모리는 amalric 이고 애므리는 aimery 인데 상당히 헷갈린다. 따라서 본래 둘은 다른 이름이지만 서유럽 사가들도 이를 헷갈려하여 전자를 아모리 1세, 후자를 아모리 2세로 칭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국왕의 계보를 따질 때에 아모리와 애므리 드 뤼지냥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