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무라 미사

 


山村 美紗(やまむら みさ、1934年8月25日 - 1996年9月5日)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작품


1. 개요


추리 소설 작가. '미스터리의 여왕' '트릭의 여왕'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 등으로 불린다.
교토를 무대로 한 젊은 여성이 사건을 해결하는 작품이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미국 부통령의 딸인 금발벽안 백인 여성 캐서린 터너가 교토에서 활약하는 '캐서린 시리즈'가 유명

2. 생애


교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경성법학전문학교 학장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아버지를 따라. 일제 강점기 시절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자랐다. 1남 3녀중 장녀로 서울에서 초등학교와 지금의 중학교[1]까지 진학했다. 이 때 집안은 운전수와 가정부까지 두고 부유하게 잘 살았는데. 1945년 패전으로 일본으로 올 때는 돈 한 푼 못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는 3년 간 실직 상태였고, 다행히 1950년에 어머니의 고향 교토로 가서 교토대학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집안이 겨우 안정이 되었다. 그의 나이 17살 때 일이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한국에 있을 때에 징용당해서 비행기의 유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몸에 안좋은 가루를 들이마셨고 전후에는 고생을 많이 해서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해서 천식을 지병으로 얻어서 평생 고생했다. 이 시절 교토에 옮겨와서는 고등학교에는 거의 가지않고 집에서 쭉 책만 읽었다. 이런 요양생활을 할 때 에도가와 란포 등을 알게 되면서 추리소설 팬이 되고 마침내 추리소설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다.
1957년에 교토부립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다. 제자들의 회상을 들어보면 젊은 여선생이 자주 학교 근처에 있는 경찰서를 찾아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경찰서에서 인간 관찰같은 것을 했을 것 같다고 회상했다. 한동안 교사로 읽을 하다 같은 학원에서 교사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교사로 일하면서 추리소설 습작을 쓰고 가정과 아이를 돌보는 일을 동시에 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고 당시 일본 경제가 호황인 점도 있고 타고난 좋은 두뇌로 주식으로 큰 돈을 벌었고,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어서 작가 도전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나이 서른 살 때였다.
에도가와 란포상에 응모했지만 세 번이나 후보에는 들었지만 수상을 하지 못하고 낙방한다. 트릭은 휼륭하지만 문장력이나 문학성이 부족하다는 평가였다. 이런 그의 작품을 아깝게 여긴 출판사의 어떤 편집자가 도와줘서 1974년에야 작가에 도전한지 10년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잡지에 단편을 게재하는 것이 아닌) 정식으로 장편 단행본 출판을 하고 프로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교토를 무대로 젊은 여성이 살인사건을 해결한다는 일련의 시리즈를 써내려갔고, 때마침 1980년부터 버블 경제와 함께 교토 붐이 일면서 잡지에 교토가 자주 소개되었다. 교토의 명소와 전통 축제같은 문화, 교토 요리, 꽃꽂이, 다도, 일본 무용 등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는 그의 작품을 젊은 여성들이 너나 나나 찾아 읽으면서 시대를 선도하는 유행작가가 되었다. 특히나 미국의 부통령의 딸이 백인여성 캐서린 터너가 일본의 전통문화를 배우기 위해 교토에 머물면서 사건도 해결한다는 캐서린 시리즈는 대표적인 인기 시리즈가 되었다. 1983년에는 캐서린 시리즈의 [사라진 상속녀]가 제3회 일본문예대상을 수상하면서 그 동안 무관의 여왕이었던 것에 첫 수상을 맛보았다. 드라마화도 되었다. 그녀는 에도가와 란포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기고 존경했는데 에도가와 란포상에 3번이나 후보에도 올랐는데 결국 수상을 못하고 다른 상복도 거의 없어서[2] 작가생활하는 내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에도가와 란포 선생님처럼 독자가 즐거워하는 소설을 쓰면 그것으로 좋다고 여겼다고 한다.[3]
야마무라 미사의 작품은 인기를 얻고, 여러 작품이 TV 드라마로 많이 만들어졌다. 일본에서는 소설보다 드라마로 더 친근할 정도이다.
1996년 9월 5일, 62살 때 심부전으로 도쿄도 세타가야구에 있는 테이코쿠 호텔에서 급서거했다.

3. 기타


트래블 미스터리로 유명한 니시무라 교타로와의 우정이 유명하다. 스캔들같은 소문이 날 것이 분명한데도 여관으로 쓰던 저택을 공동으로 구입해서 본관은 니시무라 교타로가 별관은 야마무라 미사가 서로 옆집으로 살았고. 연결된 비밀 통로도 있었다.
니시무라 교타로는 야마무라 미사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미 기혼한 몸이라 결혼을 못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아직 비인기 작가였던 시절 니시무라 교타로에게 야마무라 미사가 팬레터를 보낸 것이 계기로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고, 니시무라는 야마무라 미사를 여대생으로 착각하고 이윽고 교토에 여행을 가게 되었을때 서로 만나자고 해서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야마무라 미사는 첫 팬레터를 보낼 때도 결혼해서 아이도 있는 유부녀였다.
딸인 모미지는 배우로 활동하면서 어머니와 니시무라 원작의 드라마의 작품에 많이 출연했다.
꽃꽃이와 다도, 일본무용은 취미생활 정도를 넘어서 사범 자격까지 가졌다. 특히 을 좋아했다.
항상 화려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화려한 고급 저택에서 뭐든지 일류 물품을 지니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았다고 한다.
상복이 없는 대신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욕심이 있어서, 책 표지도 서점에서 눈에 띄고 잘 보이기를 원해 화려하고 타이틀도 큼직하게 보이기를 원해 출판사에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썼는데 왜 표지가 이 정도밖에 못 만드냐고 따졌다고 한다. 그래서 책 표지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얼굴 그림과 화려한 디자인과 색깔과 큼직한 타이틀이 달린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에서는 추리소설 팬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저명인사인데도, 한국에서는 다루는 소재가 소재라서 인지, 무슨무슨 유명한 상을 받은 수상작이라는 선전 문구를 달만한 요소가 없어서 인지, 한국에서 일본 추리소설 번역에 관심을 가진 1990년대 중반에는 이미 사망하고 유행이 흘러간 옛날 작가 취급해서 인지 여태까지 제대로 번역이 된 적도 없고, 인지도도 낮다.
1981~1985년까지 에도가와 란포가 창설한 일본추리작가협회의 이사장을 맡았다.

4. 작품


일본 위키피디아 작품 목록 참조
집필시간은 많을 때는 하루 20시간을 글을 쓰고, 다작이라 작가생활 22년간에 장편과 단편을 합쳐 364편의 작품을 남겼다.
[1] 京城師範付属小学校、京城第一高女[2] 상이라고는 생전에 딸랑 이것을 포함해서 2개만 받았다[3] 에도가와 란포도 생전에 소설을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추리소설에게 주는 문학상 자체가 없었다. 1955년부터 시작된 에도가와 란포상은 그 첫 회의 상금은 에도가와 란포 본인이 후원금을 부담해서 태어난 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