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1980년대 일본의 코카콜라 광고[3][4]

거품경제 말기인 '''1992년 도쿄를 1080p로''' 촬영한 모습[5]

버블을 통해서 '''"공짜 점심은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경제의 대원칙이 재확인됐다. 버블 안에 있을 때는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버블이 한 번 발생하면 경제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1993년 일본국 경제백서 中[6]

1. 개요
2. 1980년대 일본
3. 배경
4. 각종 부정부패 사건
4.1. 오노우에 누이 사건
4.3. 허영중(이토만) 사건
5. 거품경제 이후의 일본
6. 세계에 끼친 영향
7. 같이보기


1. 개요


'''バブル景気[7] / Japanese asset price bubble'''
1980년대,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시장 전반에 나타났던 거품경제. 일본은 당시 짧게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8], 길게는 1980년부터 1992년[9]까지 비정상적인 자산 가치 상승 현상을 겪게 되는데, 이후 거품이 붕괴되며 1,500조 엔의 자산('''무려 한화 약 1경 6,500조원''')이 공중분해된다.[10] 그리고 그 결과 이후 일본은 인구 고령화, 금융시장 부실화, 정부의 미약한 대응, 디플레이션 등 여러 요인과 결합해 지금까지도 극복했다고 보기 힘든 장기불황, 잃어버린 10년을 맞게 된다.

2. 1980년대 일본


'''세계 50대 기업 시가총액 순위'''[출처](이미지) (단위=백만달러)
순위
기업
국적
시가총액
87년도 매출액
88년
87년
1
1
NTT

'''276,840'''
46,639
2
2
IBM

76,049
54,220
3
4
스미토모은행

65,335
300,933
4
3
엑슨

62,572
82,100
5
8
다이이치칸교은행

61,971
325,206
6
9
후지은행

59,746
293,103
7
6
도쿄전력

57,318
32,455
8
10
미쓰비시은행

53,934
296,063
9
5
일본개발은행

52,170
225,909
10
7
노무라 증권

51,154
28,707
11
13
로열 더치 쉘


49,312
78,312
12
14
토요타

46,334
54,984
13
12
산와은행

46,136
262,051
14
11
제너럴 일렉트릭

39,617
39,300
15
23
마쓰시타전기

34,852
39,696
16
77
신일본제철

32,252
19,276
17
32
히타치

31,721
40,980
18
27
도카이은행

31,288
194,270
19
16
일본장기신용은행

30,078
156,087
20
20
미쓰이은행

29,351
185,106
21
17
AT&T

28,855
33,600
22
24
포드

28,585
71,600
23
15
BP

27,441
51,589
24
22
브리티시텔레콤

26,612
19,073
25
19
미쓰비시신탁은행

25,621
99,750
26
25
제너럴 모터스

25,050
102,000
27
21
스미토모신탁은행

23,517
94,590
28
40
NEC

22,986
22,362
29
38
간사이전력

22,744
16,573
30
31
미쓰비시부동산

22,647
2,076
31
30
다이와증권

22,282
361,606
32
18
듀폰

22,182
30,500
33
26
메텍

22,162
5,061
34
46
도쿄가스

21,431
6,013
35
98
미쓰비시중공업

21,297
14,788
36
82
도시바

21,151
29,425
37
41
도쿄은행

21,055
153,363
38
37
닛코증권

20,801
24,077
39
44
벨소우

20,753
12,300
40
42
도키오화재해상보험

20,155
6,244
41
35
필립 모리스

19,817
27,700
42
62
후지쓰

19,335
16,862
43
33
아모코

18,743
22,400
44
69
전일본공수

18,140
4,217
45
39
모빌

17,946
56,700
46
99
닛산자동차

17,919
34,957
47
64
주부전력

17,490
13,452
48
47
월마트

17,307
15,959
49
60
다우 케미칼

17,186
13,377
50
58
다케다화학

17,170
5,214
이 당시(1988년)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 순위. 세계 50위 기업 가운데 무려 33개가 일본 기업이고 더구나 20위 위로는 일본 기업이 자그마치 16개에 게다가 시가총액 1위 NTT의 시가총액은 2위 IBM3배가 넘었다.[11] 이 때 한국의 국내총생산은 2023억 달러로, NTT 시가총액의 70% 수준에 불과하다.[12] 아무리 당시 한국이 신생 공업국이었다고 하더라도 올림픽을 개최한 국가의 GDP가 일개 기업의 시가총액보다도 못하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의 경제 규모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GDP가 나머지 아시아 전체 GDP보다 컸다.[13]
환율 비교표[14]를 보면 이 당시의 일본이 얼마나 잘나갔었는지 환율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볼 부분은 상당수가 '''은행증권회사 등의 금융 관련 기업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더 유심히 봐야 할 것은 1987년 매출액으로 1,000억달러 이상 기업은 일본의 은행들과 다이와증권을 제외하면 제너럴 모터스뿐이라는 것이다.[15] 극단적으로 보자면, 도쿄전력/도쿄가스/간사이전력/주부(中部)전력 등도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일개 지역의 전력/가스 공급업체가 글로벌 기업들의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한국전력공사/서울도시가스/부산도시가스 등이 애플, 삼성전자 등과 비슷한 규모의 기업이라 평가받는다고 보면 된다.
사실 얼핏 봐선 그냥 쩌네라고 생각하고 말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비시장이 일본 전체도 아닌, 일부 지역으로 한정되는 지역회사들까지 세계적인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것은 뭔가 '''정상적인 기업 성장과는 다른 상황'''임을 알 수 있다.

3. 배경



197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은 오일쇼크로 인해 침체기를 맞았지만 JVC, 소니, 파나소닉, 토요타, 혼다, 캐논과 같은 일본의 대기업들은 이를 극복하고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차근차근 쌓아올린 기술력으로 그간의 싸구려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미국유럽의 경쟁사들을 고사시키며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동차 회사들은 오일쇼크를 역이용해서 기존 미국차보다 기름을 덜 먹는다는 점을 널리 홍보하고 잔고장도 미국차보다 적었기 때문에 미국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디트로이트가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했을 때가 이 당시부터였다. 이 시기의 분석가들이 언젠가 히타치소니가 '''인텔이나 IBM을 인수해버릴 것이다'''고 전망했을 정도.[16] 이 과정에서 일본은 세계 1위의 무역흑자를 기록하며 막대한 자본을 비축해 놓지만 동시에 타국 간의 무역마찰도 심해진다.
또한 1980년대오일 쇼크의 여파가 잦아들었고, 오일쇼크 이래 인위적인 엔저로 일본의 수출이 매년 급속하게 불어나면서 기업들의 매출이 크게 상승하자 1983년을 기점으로 자산시장이 급속하게 활성화되었다. 그러던 1985년에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올라 일본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이 감소하며 성장률이 떨어졌다. 그 결과 1986년에 '''-0.5%'''(달러 기준. 엔화 기준은 +2.8%). 오일쇼크 이후 최악의 성장률이었으며 달러 기준 마이너스 성장이 기록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런 갑작스러운 무역환경 악화로 인한 경기둔화에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라는 정책을 폈다. 부동산 가격과 주식 가격은 이 때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고, 특히 부동산 시장은 기존의 부동산 불패 신화도 있었기에 더욱 상승했고 이에 따라 기업과 개미들이 재테크로 거금을 벌었다는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투기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혹한 기업과 중장년층이 대박을 꿈꾸며 자산시장에 대거 진입했다. 여기에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부동산 거품을 조장하고 나서니 투자자들은 이에 호응하여 광적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경제성장률은 다시 1987년 달러기준 +1.6%(엔화기준 4.1%), 1988년 엔화기준 '''7.1%''', 1989년 엔화기준 5.4%, 1990년 엔화기준 5.6%, 1991년 3.3%(엔화기준)까지 성장하기는 했다.
문제는 내수경기 부양책이 부동산주식시장으로 쏠린 결과물이었다는 것. 저금리로 시장에 풀린 자금은 부동산과 주식 투기에 쏟아졌고, 안 그래도 올랐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더 오르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다시 수많은 기업과 개미들이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점점 더 몰려들었다. 집값이 너무 비싸진 나머지 주요 대도시 실수요자들은 집을 구하지 못 하고 근교 지역으로 계속 밀려 나갔다. 결과적으로 집을 소유하지 못 하고 밀려난 이 사람들은 버블 당시의 낙천적인 국가 분위기만 즐긴 의문의 승리자들이 된다. 하지만 말이 의문의 승리자들이지, 결국 이들이 궁극적인 패배자였다. 버블로 돈놀이하던 부동산쟁이들이야 자업자득이지만, 일본 기업이 뭉텅이로 쓰러지자 이들 또한 당연히 잘려나갔다. 이후 긴 디플레로 인해 이들의 자산은 증가율은 더뎠고 평생을 저당잡아 마련한 부동산은 짐덩어리로 변했다. 그나마 꾸준한 수요가 생기는 대도시 근교라면 모를까, 지방에 내집을 마련했다면 그냥 안고 죽는 수 밖에. 버블이 꺼질 무렵, IMF에서 똑같이 재현된 아버지는 실직하고 자식은 구직실패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이 승리자들일 리가 없다.[17] 모든 버블의 충격은 중-하층에 있는 사람들이 감당하게 된다. 돈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자본 위기의 진실이었다.
이러자 경기부양책을 펼치던 일본 정부는 자산가격의 비정상적인 폭등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1989년 3%의 소비세[18]를 신설하면서 동시에 전격적으로 금리를 인상한다. 물론 금리 인하가 자산 시장 버블의 요인이 되었던 만큼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 한 것이겠지만, 문제는 천천히 올려야 할 금리를 너무 급격히 올려버린 나머지 이전까지 크게 올랐던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고 이는 소비 심리를 위축시켜서 경제의 경착륙을 불러왔다.
일본은행1988년 9월에 2.50%이던 기준금리를 1990년 12월 6.00%까지 올렸다. 즉 2년 3개월만에 3.50%p나 금리가 폭등한 것. 이로 인해 주식시장이 먼저 고꾸라지고, 부동산 시장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1991년에는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즉, 신규대출 전면금지), 기존대출도 LTV(Loan-to-value, 부동산 감정가 대비 대출액) 200%→70%로 제한'''이라는 자폭을 하고 만다. 부동산은 거래액수가 매우 큰만큼 LTV의 변동은 구매자 성향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데, 담보가치를 130%p나 변동시키는 조치를 '''너무 쉽게 꺼냈다.'''[19][20]
당연히 담보가치 폭락으로 부동산 시장에는 매수세가 뚝 끊겼고, 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한 방에 가버리고 만다.[21]
왜 이렇게 강경한 정책을 펼쳤냐면, 이 당시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집을 구하지 못하는 서민들의 아우성이 최고조에 달해있었기 때문이다. NHK에서는 시민들의 참여로 부동산 관련 방송을 했는데 당시 참여한 샐러리맨은 "외국에서는 닭장같은 집이라고 일본의 집들을 비웃는데 정작 그런 집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즉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인한 사회문제가 만연했다. 이에 국민들은 정부에 강력한 정책을 요구했고 정부는 그에 응했다(...)
이후로도 일본 정부는 불량 채권 회수에 미비하게 대처하면서 경기 침체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중심인 생산 가능 인구가 1992년 정점에 도달한 이후 감소하기 시작해 자산 거품 붕괴로 인한 단발적이며 일시적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었다. 게다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쳐오자, 일본 기업들의 해외 자산이 대규모 손실을 기록하면서 견실한 기업들마저 줄도산하는 등, 글로벌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사실 해당 기간 동안 성장률이 쭈욱 감소세는 아니었고 1994년부터는 조금씩 회복세를 나타냈기는 했으며 1996년에는 경제성장률 3.1%를 기록하며 1997년부터는 경기침체에서 빠져나올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이를 그간의 재정적자를 벌충할 기회라고 판단하며 성급하게 소비세를 3%에서 5%로 올렸고 거기에 더해서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은행들이 줄줄히 파산하는 바람에 1998년부터 완전히 마이너스 성장과 0% 성장을 반복하는 고사 상태로 접어든다. 1996년까지는 도산하는 기업이 부동산, 주식 리스크가 컸던 중소형 은행/증권사, 중소 건설업체, 부동산 회사 등에 집중됐으나, 1998년부터는 대기업과 대형 금융사까지 쓰러지게 된다. 이른바 ‘눈물의 파산선언’으로 유명한 일본 3대 증권사 '''야마이치 증권'''(1998년 파산), 일본 최대의 지방은행 홋카이도 탁쇼쿠 은행(1998년 말 파산), 일본장기신용은행(1999년 파산)은 전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아시아 사업 손실 때문에 파산했다.
학자들은 자산 거품이 꺼지는 중에 금리 인상과 대출 총량 규제 등의 정책이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으로 보았고 이런 사례를 바탕으로 벤 버냉키가 이끌었던 미국의 연방준비제도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시 미국은 금리 인하와 강력한 부양 정책을 펼치는 등 일본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3.1. 주식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재테크를 벌이고 있었는데, 1984년에 일본 대장성은 "투금 계정"[22]이라는 불법 계정을 합법화함으로써 기업이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이 때문에 기업은 자본이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고 증권사 투금 계정에 돈을 넣어두고 재테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 들어 성장세가 둔화되자, 정부에선 일본은행을 윽박질러 기준금리를 5.00%에서 '''2.50%'''까지 떨어뜨린다.
이는 은행의 대출 폭풍을 유발하여 엄청난 액수의 돈이 각종 자산에 쏟아진다. 은행의 고위 간부와 기업가, 그리고 이를 감시해야 할 관료가 서로 인맥으로 묶여있는 일본의 특성 덕분에 무분별하고 부주의한 대출이 많았다. 이는 일본기업의 재테크 수익을 높였고, 다시 주가가 오르면서 더 큰 재테크 수익을 벌어 들이는 '''악순환'''이었다. 1985년 투금 계정의 잔액은 9조엔이었지만, 1989년에는 40조 엔까지 팽창했다. 당시 일본인은 기업의 현금흐름은 신경쓰지 않고, 재테크로 불어나는 자산만 보고 달려 들었다. 이것도 일본 기업을 부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언제든지 흑자도산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PER이 67을 찍었고 전통적인 기업들이 성장주로 과대평가받기 시작했다.
일본 증시가 이렇게 폭등하자, 일본 정부NTT 민영화를 시작했는데, 공모가와 공모 주식 수를 발표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공모청약에 몰려들었으며, 상장 시초가가 120만엔이었다. 그럼에도 단 '''이틀'''만에 25%가 추가상승했고, 2주만에 '''정확히 2배인 240만엔'''까지 올랐으며, 1989년 연말에는 400만엔 부근까지 치솟았다. [23] 당시엔 '''언젠가는 뜰 것이라는 예상'''이나, 수백만엔을 호가하는 NTT보다 주가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주가 폭등하는 등 막장 증시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3.2. 부동산


우주 한복판을 날고 있었던 주식 거품은 부동산 거품으로 합리화되었다. 일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토지 가격이 50배 정도 뛰는 동안 소비자 물가 지수는 고작 2배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즉, 땅값의 실질 가치가 25배 급등한 것으로, 이때문에 일본사회 전반에 토지 불패 신화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오르기는 해도 절대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당시 일본 부동산 버블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지가가 상승하는 와중에 일본은행기준금리를 6%에서 2.5%까지 떨어뜨리자 은행들은 대출 경쟁을 벌였다. A은행에서 8% 금리를 제시하면 옆 B은행에 가서 7.5% 대출을 제안 받고, 다시 그 옆 C은행에서 7% 대출을 받아 가며 토지 투기가 벌어졌다. 당시 LTV는 200%까지 치솟았다.[24][25] 이는 토지만 있으면 지가의 2배에 달하는 대출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렇게 대량의 자금 수혈이 가능하다보니 아직 저렴했던 땅에 돈이 풀리며 지가를 올리고, 이 토지를 담보로 또 지가보다 더 많은 자금을 끌어오고, 이 돈으로 다른 저렴한 땅을 사고, 사 놓은 땅의 지가도 계속 오르니 추가 대출이 가능하고... 이렇듯 터지기 전까지 화수분처럼 불어나는 게 자본 버블의 특성이다. 이렇게 점점 미나토 구를 중심으로 시작된 부동산 광풍은 도내를 넘어 도쿄 광역권 전체에 휘몰아쳤다. 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 사이타마, 치바현 등... 더 무서운 건 이중 치바와 사이타마는 거품 붕괴 이후에도 지가가 요지부동이다. 이러다보니 도쿄 이외도 무사할 수가 없어, 오사카에서 케이한신권으로, 나고야에서 인근 광역권으로 등등 일본 전역에서 비슷 양상이 나타난다. 다만 농촌은 제외.[26]
거품이 붙는 속도도 어마무시해서, 도쿄 지가는 1981년부터 버블 붕괴 직전인 1990년까지 5배 이상 폭등했는데 이중 대부분은 1987년~1988년 1년의 '''3배''' 상승분이다. 당시엔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고[27][28] 이 당시 도쿄 고쿄(황거) 지가가 '''캘리포니아 주 전체 지가'''와 맞먹었다.
그리고 유독 무시무시한 폭등을 이어간 지역이 있는데, 도쿄메트로 긴자선 연선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신바시, 아사쿠사같은 동네는 무려 10배 이상, 아오야마는 15배나 폭등해서 신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이 시기에 민영화된 국철은 부채 청산을 위해 시오도메 화물역 부지[29] 매각 사전작업을 진행하였으나, 지나치게 높은 토지 가격으로 인해 과열 경쟁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매각 보류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화물역 기능이 철거된지 10여년이 지난 1997년에 들어서야 겨우 개발될 수 있었다. 땅값이 워낙 높아진 탓에 도쿄의 상업용지값은 거품이 터지기 이전인 80년대 말에 하락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건 역으로 따진다면 암만 월급이 올라도 집을 사기에는 택도 없다는 셈이므로 당시 내 집 마련을 꿈꾸던 당대 일본 월급쟁이들에게 상당한 재앙이었던지라 100년 만기대출같은 황당한 상품이 등장하기도 했고, 직장인 때문에 지바현이나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 도쿄 중서부지역[30], 이바라키현 남서부 지역의 인구가 급증하기도 했다.[31] 더군다나 공공 임대 아파트의 공급은 이에 훨씬 못미쳤기에 청약 경쟁률이 턱없이 높았다.
당연히 난개발 지역도 땅값이 폭등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더 심각한 것은 버블이 꺼진 후에도 사이타마치바의 땅값은 그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미 도쿄에서 한번 유출된 인구가 복귀하지 않으면서 교외 지역 수요층으로 편입된 것이다. 1981년 대비 1991년(버블 붕괴 시작할 때)의 사이타마나 치바 땅값은 3~4배 정도 상승했는데, 2015년 현재까지도 그 수준에서 유지가 되고 있다. 대기업 종사자는 보너스가 왕창 나오던 시절이었고 중소기업도 인력 부족으로 봉급이 올랐기 때문에 집을 사는 것만 포기하면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대 일본 문화 산업이 전례없는 호황이었던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는 의견도 있는데 암만 월급 모아 봤자 집을 살 수는 없으니 포기하고 문화 생활이라도 즐기려는 젊은층이 많아서 그렇다나.
오늘날 도쿄, 오사카 등 일본 대도시의 주요 거점 스카이라인은 대부분 이 시기에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 롯폰기, 우에노, 오다이바(이상 도쿄), 우메다, 난바, 텐노지, 쿄바시(이상 오사카), 나카교(교토), 미나토미라이(요코하마) 등. 1990년대 이후에 완성된 일본 주요 대도시 상업 지구는 신주쿠, 시부야, 우메다, 난바 정도를 빼면 1981년까지만 해도 빈민가나 놀고 있는 공지였다.
땅값 폭등으로 이 동네에 주거 지구를 남겨두는 것보다 상업 지구로 철저하게 재개발하는 것이 몇 배나 남는 장사가 되면서 부동산개발 회사가 난립했고,[32] 이 회사들이 자체 도시계획을 짜고 부지를 지방자치단체나 소유주로부터 사들인 뒤 1986년부터 전부 오피스 지구로 재개발하게 된 것.[33] 한국의 건설사가 자체적인 도시 개발 능력이 뒤처지는 데 비해[34] 버블 붕괴에서 살아남은 일본 건설사는 자체적인 도시 개발 및 건축 기술을 축적하여 1990년대 이후에도 전 세계적으로 신도시 개발 수주를 따내고 있다. 파산한 부동산 업계와 건설사의 미분양 물량까지 살아남은 회사들이 인수하여 완공한 것이 2000년대 이후의 일본의 스카이라인이다.

3.3. 골프장, 호텔, 리조트, 스키장


주식과 부동산 투기가 커피라면, '''골프장골프회원권, 호텔 투기는 티오피'''였다.
일본인들은 1980년대 갑자기 돈이 흘러넘치자, 상류층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해 골프장과 골프회원권, 호텔 투기가 극성이었다. 특히 1986년 일본 경제성장률이 -0.5%를 찍어 금리를 낮춘 이후로 유독 심해졌는데, 이를 근거로 일본 버블경제의 시작을 이 골프 회원권과 호텔 투기 시점으로 보는 미국 경제 학계의 연구도 많다.
특히 이 쪽은 '''야쿠자, 정치인, 관료의 이권개입'''까지 겹쳐서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 유력 부자들이 돈을 모아 골프장이나 호텔을 짓자고 하면, 그 지역의 정치인, 관료와 접촉하여 골프 회원권과 호텔 분양권을 담보로 허가를 받는다. 그리고 야쿠자를 동원해서 수용대상지에 있는 주민을 강제로 쫓아내고 심지어 '''토막살인'''까지 저지르는가 하면, 1988년에는 야쿠자가 골프장을 건설하기 위해 '''일가족을 전부 살해하고 콘크리트에 묻어 바다에 수장시킨 사례'''도 있었다.
이런 골프회원권, 호텔 투기는 1991년 대출 총량규제가 발동되고 투자자와 야쿠자, 지역 정치인까지 한 번에 대형 손실을 보면서 서로 죽이는 사건으로 번지는 등 후유증이 심각했다.
일본 수도권 지역의 골프회원권 시세는 1990년 정점을 찍고 1999년 97% 폭락한 뒤, 2018년 지금까지도 고점대비 3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오히려 공급 과잉과 일본 상류층들의 취미 변화(골프→승마)로 인해 골프장이나 호텔이 줄도산했다. 권리가 불분명하거나 땅주인이 증발한 경우도 있는데다가 철거비용도 만만찮아서 재개발로 철거되는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고, 을씨년스럽게 방치되는 것이 대다수인데, 지금도 일본의 시골지역에는 버려진 골프장이나 호텔이 많은 편이다.
스키장 또한 골프장과 리조트와 함께 지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 뿐 아니라 본토에도 호설지대가 많아(ex.니가타현) 한때 일본 전역에 스키장이 1000여 개에 달했다는 통계가 있다. 물론 그냥 하나의 산에 여러 리프트를 세워두고 운영주체가 다른 경우 서로 다른 스키장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단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지금도 산골 스키장과 지방 공항(도야마 공항 등)은 해외 스키 투어가 지역사회의 큰 관광동력인 경우가 많다.
이런 투기 세태가 당대의 작품에도 반영된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 몰락한 리조트나 골프회원권을 사이에 두고 이권 다툼으로 살인사건을 벌이는 에피소드의 소재가 이것이다. 같은 만화에서 허구헌날 스키장 고립사건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투기 사태에도 불구하고 오이타현의 유후인 같은 몇몇 지역은 개발을 자제했는데, 지금은 이 때문에 오히려 관리가 쉬워서 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3.4. 국내(일본)


  • 외제차 수입이 급증해 벤츠 주력 모델이던 W201 190E[35]는 너무 많이 보급돼 '코벤츠'[36]로 불렸으며 BMW E30롯폰기 코롤라[37]란 별명이 붙었다.여담으로 이 두 차량은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한국에도 수요가 넘쳐서 이때 나왔던 물건을 이삿짐 명목으로 들여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스포츠카들의 수요도 대폭 증가했는데. 국내[38]에선 수프라NSX, 스카이라인 GT-R. RX-7, 미쓰비시 GTO 등이 수요들을 노리고 제작이 되었으며. 외제쪽에선 페라리와 포르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테스타로사911의 수요가 엄청 많았고. 특히 플래그 쉽에 한정생산이였던 F40959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39]
  • 당시에 출시된 이륜차 역시 초고성능 및 고가의 파츠로 도배되었다. 400cc나 250cc 의 저배기량에서 4기통엔진을 쓴다거나 온갖 호화로운 부품은 현재 나오는 것과 비교해도 넘사벽의 포스를 갖고 있었다.
  • 프리터도 이 때 유행하고 있었다. 언제든 취업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새로운 낭만적인 라이프스타일 쯤으로 취급받았다. 면접만 받으러 가도, 교통비로 쓰라며 3~5만엔을 꽂아주는 시대였으니 면접만 보러다니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
  • 테마파크도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노동 시간 최장 국가 중 하나였고[40] 당시에는 주당 44시간 노동제였기 때문에 야근은 물론이고 토요일 오전에도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는 건 당연했는데, 국내외에서 여러모로 지적 받는 일이 많아지자 1987년 주5일제 도입을 시작으로 차츰 노동 시간을 줄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시기가 버블이랑 겹치면서 여가 시간도 늘어나고 돈도 넘쳐서 테마파크붐이 일게 된 것. 후나바시 시에는 일본 최대의 실내 스키장인 자우스[41]가 생기는가 하면 미야자키 현에는 한때 세계 최대 워터파크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오션 돔이 생겼다. 하우스텐보스도 비슷한 흐름을 타고 생겼으며, 그 외에 여러 지방 도시에 테마파크나 박물관이 들어섰다. 물론 80년대 초에 생긴 도쿄 디즈니랜드가 흥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 일조한 듯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거품이 꺼진 뒤 하나둘씩 망했고, 오션돔도 거품이 꺼지더니 세계 최대 워터파크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파리만 날리다 2000년대 중후반 망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42] 더 안습인 건 탄광산업이 사양세로 접어들 때 생명줄로 버블을 타고 볼거리를 유치하려다 그 볼거리마저 거품이 꺼지자 도시까지 끌고가서 망한 동네도 있다. 도쿄 디즈니랜드 정도만 제외하면 버블시대에 생긴 테마파크 중 살아남은 곳이 있다고 해도 불황때문에 여전히 힘들다. 하우스텐보스조차 예전만 못하다고. 우후죽순으로 생겼던 대형시설이 2010년대 이후에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여기로. 굳이 장점을 꼽자면 도시권역을 개발하고도 돈이 남다 보니 지방도시까지 퍼져서 어지간한 시골에서도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문화 인프라가 많이 확충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인구 감소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서 지금 대가를 치르는 중. 앞서 말한 테마파크의 난립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 일본 기업의 아이디어가 기발하거나, 독창적인 제품을 생산한다는 이미지가 버블경제의 영향이라 분석도 있다. 기업이 기술부문에 투자하고도 남아도는 잉여의 돈으로 괴상한 제품을 만든 것. 그 시절 일본의 자동차, 제품 등을 보면 그저 돈지랄로 보이는 게 많다. 물론 당시로서는 일본의 화려한 발전에 눈이 멀어 마냥 우러러 보는 시선이었지만.[43]
  • 일본인의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한 병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의 애정이, 돈과 인력을 때려박아 매머드급으로 팽창한 것도 이 시기였다. 매년 2월 중순 혹은 하순에 도쿄의 실내체육관인 료고쿠 국기관에서 5,000명(!)의 합창단을 모아놓고 공연하는 국기관 5천명의 제9 콘서트(1985~), 간사이 지방에서 가장 큰 이벤트 홀인 오사카성 홀에서 10,000명(!!)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산토리 1만명의 제9(1983~), 히로시마 최대의 이벤트홀인 히로시마 선플라자에서 1,000~2,000명 규모의 합창단과 공연하는 제9 히로시마(1985~) 같은 이벤트성 공연이 시작된 것 역시 이 시기였다. 이 때의 영향으로 수많은 가수들이 교향곡 9번의 An Die Freude를 일본어로 커버했으며, 일본어 커버 버전뿐만이 아니라 독일어 원곡 버전도 일본제 노래방 전기종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44]
  • 자위대는 버블경제를 바탕으로 군비증강을 단행해 80~90년대의 기간 동안 F-15J,E-2,공고급 구축함,패트리어트 미사일과 같은 첨단무기들을 도입했으며 해공군력의 질은 당시 중국군을 크게 앞선다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였다. 해상자위대와 항공자위대에서 운용하는 무기체계들은 남북한 해공군이나 중국 해공군보다 훨씬 우수했다. 일본 해상자위대 장교들은 중국군 장교들 앞에서 자신있게 단독으로 중국 해군을 전멸시킬 수 있다.라고 자신감을 드러냈으며 90년대 이후 일본과 본격적인 외교갈등에 들어선 한국에서도 당시 처참한 해군력의 실태가 조명되면서 분쟁 시 일본에 해상봉쇄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많아졌다. 공교롭게도 버블이 붕괴되고 중국과 남한이 국방비를 본격적으로 크게 늘리고 우수한 해공군 전투체계들을 도입하면서 자위대의 압도적 해상전, 공중전 우세는 상실된 상태이며 특히 중국의 경우 2010년대 이후 자위대의 해공군력을 역전해 양적으로 질적으로 크게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
    • 물론 자위대에게 마냥 좋은 시절은 아니었던것이 모병제 특성상 인력난에 시달렸던 시절이었다. 중소기업도 취직하러오는 사람이 없어서 발 동동 굴리던 시절인데 그 중소기업보다도 급여수준이 떨어지는 자위대가 인력모집이 활발히 이루워질리는 없었다. 사실 90년대 중반~2010년대 초의 취업빙하기 시절에도 자위대는 돈없는 사람들이 별수 없이 가는곳, 막장 취급을 받았는데 당연지사였기는 했다.
  • 술집의 접대부들은 부자가 된 부동산 업자들을 상대로 서비스를 하다 보니 생일 선물로 아파트나 집 한 채를 선물받기도 했으며 자가용 자동차는 물론이고 온갖 명품으로 온 몸을 도배할 수 있었다. 부동산 업자들은 으로 접대부의 가슴에 액수를 세지도 않고 10만엔 지폐 다발을 끼워넣어주었다.

3.5. 해외


일본의 부동산 광풍은 해외까지 뻗어나가 미국록펠러 센터(미쓰비시가 매입),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일본인, 미국인 투자자가 파트너십을 체결해 매입)이나 컬럼비아 픽처스(소니가 매입), 유니버설 픽처스(파나소닉이 매입) 등을 싹쓸이하기도 했다. 이 당시 일본 자본의 해외 진출을 두고 치를 떨면서 록펠러 센터가 넘어갈 쯤 '''일본이 제 2의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는 표현까지 나왔을 정도이다. 특히 록펠러 센터가 미국에 있어 상징성이 큰 건물이었던 만큼 그 소식에 대해 착찹하게 여겼던 미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되자 되려 미국에서 일본이 세계 경제를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 중 많은 수가 '''미래에는 경제적으로 일본미국을 능가할 것'''라는 예측과 함께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시기 유행한 사이버펑크 장르에도 미래 기술과 일본 문화가 융합하여 등장하는 것 역시 버블경제와 절대 무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블레이드 러너(1982년)에서는 2019년의 LA길거리 음식으로 일본 음식이 자연스럽게 팔리고 있으며, 가게 주인도 일본인이고, 전광판 광고로 기모노 입은 일본인이 나온다[45].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는 미래(2015년)에 기업은 일본 기업 외에는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다이하드에서는 사건이 일어나는 빌딩이 일본인 소유의 나카토미 타워였고[46], 로보캅 3편에서는 일본 기업이 악역으로 나왔다.[47] 그리고 소설에서는 톰 클랜시의 적과 동지가 일본의 북마리아나 제도 침공을 다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전쟁을 했던 미국인들이 많이 살아 있었다. 당장 1988년 미국 대선에서 당선(임기 1989~1993)됐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 참전 용사'''였다.[48] 그러다보니 태평양 전쟁 참전용사들을 위주로 해서 1980년대에 미국의 자산들을 싹쓸이로 쇼핑하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찔렀다. 당시 일본에서는 자꾸 미국 언론들이 일본을 비난하는 기사가 늘어나니 '''"미국 언론사까지 인수하면 미국 애들이 좀 닥치지 않을까?"''' 라고 응수했다.(...) 이런 응수는 미국 언론사는 아니지만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2015년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전액 현금 일시불'''로 질러버리는 모습을 통해 반쯤 실현됐다.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뛰어오르면서 이를 담보로 한 대출도 급속도로 많아지고 시중에 풀리는 돈이 급증하자, 넘쳐나는 돈을 쓰기 위해 일본인은 세계 명화(名畵)를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1987년 3월고흐해바라기를 3629만 달러에 낙찰받은 등[49](실제 매입비용은 수수료 등을 포함하여 $39,921,750이었다), 피카소르누아르를 비롯하여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나온 미술품을 모조리 사들였다. 예술품은 경매가가 정해지면 그 다음 경매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거래가가 치솟을 수 있으며,[50] 부를 과시하는 수단[51]이었기 때문이다.
거품이 꺼진 이후에 은행이 담보로 압류한 미술품이 너무 많아서 일부는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은행 창고에 잠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미술품 특성상 제대로 보존 처리를 받지 못하면 아무래도 쉽게 손상되기 마련이고, 이런 작품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면 이전의 가치가 제대로 남아 있기 힘들다. 그래서 버블 이후에 몇몇 명화는 압류하고 있던 은행까지 도산해버려서 영영 찾을 수 없게 된 것이 있다. 이런 작품이 대략 백여점 쯤 된다. 보통 이렇게 소실된 미술품은 모조품 제작 등으로 전시회에 나오긴 하는데, 전시회 큐레이터가 '이는 모조품이며 진품은 소실되었다'고 말해준다.[52]
실제로 한국인이 유럽 유명 화가의 작품을 보고 싶으면, 외국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초대전으로 작품이 잠시 한국에 온 때 보는 경우가 아니면 결국 외국에 나가서 봐야 한다. 이 때, 유럽이나 북미의 미술관이 너무 멀면 일본이 훌륭한 대안이다. 유럽이나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적인 명화가 매우 많이 있는 나라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전공자도 알 수 있을 만한 유명 화가의 대표작은 다 서양에 있지만, 그런 최고 등급의 대표작을 제외한 바로 아래 등급의 작품은 일본에 매우 많다.
실제로 한국의 미술 전공자가 유명 화가의 원화를 보러 일본에 다니는 사례가 꽤 있다. 국립서양미술관, 브리지스톤미술관, 모리미술관, 국립 신미술관, 요코하마미술관, 손보저팬 도고 세이지 미술관 등 수도권 미술관 뿐 아니라 야마자키마작미술관, 나고야시 미술관, 히로시마 미술관 등 지방 미술관조차 그 컬렉션의 양과 질에서 한국과 비교되지 않는다. 다 거품경제 시절에 넘치는 돈으로 전 세계에서 미술 작품을 사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다만 이 해외 투자가 완전한 헛짓은 아니다. 이 투자 덕분에 일본은 지속적으로 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일본은 여전히 대외 순자산 및 외국 채권 보유 규모가 세계 1위로 2위인 독일의 2배에 육박하며, 매년 30~40조엔 가까이 되는 막대한 해외 수입(본원 소득수지)으로 수십 년 동안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경제에 있어 이것이 외환위기 같은 본격적인 붕괴를 막아주는 최후의 보루임을 감안하면 차라리 처음부터 국내의 버블에 미쳐 돌아가는 어리석은 짓 대신 해외 투자에만 전념했다면 지금 같은 꼴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숱한 대내외적 이슈가 있었으나 버블 붕괴에 비하면 그 충격은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반대로 말하면 버블 붕괴 충격이 그만큼 거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에도 해외 자산 투자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결과 오히려 지속적으로 일본 기업들의 해외 자산 보유 건수는 늘어나는 편이다. 비전펀드를 통해 전세계 IT 기업들을 실시간 쇼핑하는 소프트뱅크 그룹을 이끄는 손정의 회장, 2008년 세계금융위기 과정에서 리먼 브라더스를 인수한 노무라 증권, 모건스탠리를 인수한 미쓰비시 UFJ 은행, 2015년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를 '''전액 현금 일시불'''[53]로 인수한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이 있다. 2019년 다케다제약은 아일랜드 제약사 샤이아를 니혼게이자이신문처럼 '''전액 현금 일시불'''로 인수했다. 그러나 2010년대에는 일본 기업의 해외 자산 인수 행렬이 그다지 욕을 먹지 않는데, 중국의 해외기업 싹쓸이가 1980년대의 일본보다 더 미친듯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의 기술 유출, 탈취까지 생각하면... 그러다가 미국-중국 무역 전쟁 발발로 인해 2019년 해외 기업 M&A 실적은 다시 일본이 중국을 앞섰다고 한다. 2012년 이후 6년 만이라고.

3.6. 터지기 시작한 거품


버블 당시에 일본 국민들은 버블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 같은 공무원도 몰랐고, 언론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정치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국민 전체가 버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니시무라 요시마사,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교수, 전직 대장성 은행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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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 225의 '''1970 ~ 2007년의 기록'''
1990년과 1991년 수치에 주목해 보자. 2010년대 아베노믹스를 기점으로 엄청난 회복세를 보이는듯 했지만 2만 초반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중앙은행이 엔화를 찍어내고 그걸로 주식을 사서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54] 닛케이 지수는 1991년 버블 경제 붕괴 이후 29년만인 2020년 11월 11일에야 25,000을 넘는다. 그마저도 코로나바이러스-19 백신 개발 진전에 따른 경제활성화의 기대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다.#

1990년 새해 첫날부터 주식에서 지나치게 높은값으로 거래가 끊기자 가격이 하락하고 매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거품경제 붕괴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연말에는 연초 최고치의 절반수준으로 급감, 그리고 1990년대 후반에 IT버블로 잠깐 동안 주가가 상승하나 싶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IT거품이 꺼지면서 그 절반으로 급하락. 물가 역시 계속해서 디플레이션을 거듭하고 있다.

부동산 시장은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구두개입과 토지구역 감시제도 마련 그리고 금리 인상[55]에도 불구하고 1991년까지 버텼지만, 1990년 3월 27일에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대장성 장관이 발표한 '''대출 총량규제'''[56]로 고꾸라졌다. 대출 총량규제는 쉽게 말하면 총량규제 발표 시점부터 '''신규 부동산 대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였다. 발표 시점부터 6개월간 전면 금지하고 이후로도 3년간 이전에 '''200%까지 막나가던 LTV를 감정평가액의 70%로 제한'''했다. 이러다보니 대출이 없으면 매매가 끊기는 부동산 시장의 특성상, 매매는 없이 호가만 대폭락했다. 이 때 정부의 대책에는 연착륙이라는 생각이 없었는데, '''"땅 가지고 아무것도 안 하고 돈 버는 놈들은 망해도 싸다"'''는 생각을 지녔으며, 류타로도 일본 전체 경제에 다소 영향이 있을 순 있으나 비정상적 경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선 감내할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곧 엄청난 오판이었음이 드러났고, 나중에 아시아의 연쇄 IMF 사태나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등의 경제위기에서 정부의 빠른 대책이 필요하다는 교훈으로 남게 되었다. 버블이 붕괴된 직후 투기업자들과 건설 업계들이 무너졌고, 이들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금융기관들이 부실채권을 떠맡게 되는 여파로 부실화된 금융기관들의 연쇄도산도 이어졌다. 부실채권이 막대해져서 '''일본 정부에서도 환수를 위한 관련 기구를 설치할 정도였다.''' 그리고 도미노의 붕괴처럼 자연스럽게 금융기관에 대출을 했던 일반인들까지 큰 경제적 타격을 입으며, 불황을 맞게 된 기업들은 임금삭감과 대량의 해고를 동반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는 일본 서민 대다수의 지갑문을 닫게 만들었고 소비도 당연히 얼어붙어 경제에 악순환이 가중되었다.
버블이 완전히 사라진 1992년부터 엔화 기준으로 경제성장률이 0.8%(1992), 0.2%(1993), 0.9%(1994), 2.7%(1995), 3.1%(1996)으로 어느정도 회복되나 싶더니... 태국을 위시로 한 아시아 외환위기로 일본 기업의 동남아 및 한국 투자자산이 대거 파산하며 일본 기업도 다시 줄도산, 1998년부터는 '''엔화 기준으로도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된다. -1.1%(1998), -0.3%(1999), +2.8%(2000), 0.4%(2001), 0.1%(2002) 등. 이러다보니 일본에서 엔화 기준으로 완전히 경제성장률 통계를 바꾼 건 1998년부터이다. 1997년까지만 달러기준 성장률을 발표하다가 1998년부터 폐지했다. 일본인의 소득이 늘어나기는커녕 꾸준히 제자리걸음인데도 달러화 기준 GDP는 끝없이 성장하는, 일본의 생활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버블 붕괴는 당시 일본의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이로 인하여 이후로도 수십년간 엔화 기준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당시를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이너스 성장은 아베노믹스를 위시한 강력한 양적완화 드라이브를 통해서 다소 나아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그 엄청난 후폭풍의 피해는 20년이 지나기까지 영향을 미쳐 2014년 기준 가처분 소득은 85년 수준 이하까지 떨어졌다. (자세한 것은 후술)
버블이 붕괴되면서, 폐건물이 늘어났으며, 시골이나 공터에 방치되는 자동차들도 늘어나게 되었고[57], 거리나 공원에는 홈리스가 속출했다.

거품경제 당시에는 100만 엔 코트, 80만 엔 양복을 입고 다니고 예쁜 여자에게 모피코트를 입혀서 데리고 다니고 커다란 반지를 끼고 활보하던 분들이 지저분한 옷을 입고 술 취해 다니는 것을 보면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치즈키 아케미, 긴자 클럽 르 자르댕 사장

  • 울트라맨고질라의 미술감독이었던 스즈키 요시오는 총 12억 엔이라는 거금을 대출까지 해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버블 붕괴로 문자 그대로 쪽박을 차게 되고 빚독촉을 받게 되었다.[58]

  • 자타공인 부동산 재벌 가수이자 3000억 엔의 부동산 자산가 센 마사오[59]1030억 엔의 빚을 지고[60]파산한 것은 물론이고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했다. 전성기 때는 일주일 동안 수억 엔 단위의 부동산 거래를 하던 그였지만 파산 이후 길거리에서 공연할 때는 밴드를 구성할 돈 조차 없어서 녹음된 음반을 재생해야 했을 정도로 궁핍했다고 한다.
  • 도쿄 시내에 빌딩 70채 소유에 8000억 엔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 사업가 코지마 노부타카는 버블 붕괴로 인해 전 재산이 붕괴되고 100억 엔의 빚만 지게 되었다. 다만 위에 파산해서 궁핍하게 살아가는 이들과 다르게 빌딩 한두 채 정도는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듯.[61].

4. 각종 부정부패 사건



4.1. 오노우에 누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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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우에 누이(尾上縫)[62]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를 시작으로 레스토랑 사장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산업은행으로부터 10억 엔 어치의 채권을 구매한 것을 계기로 증권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이후,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레스토랑 가치의 1,500배에 달하는 3조 엔에 가까운 돈을 빌려 주식을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금융계의 큰손이 되었고, 그녀의 레스토랑에는 수 많은 금융계 인사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저택 앞에는 오후마다 금융계 인사가 서류가방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 다음날 새벽 2시~3시가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저택에 들어간 인물 중에는 일본산업은행 총재와 같은 거물도 있었으며, JP모건 일본 지사나 야마이치 증권 등과 같이 내로라하는 증권사에서도 직원을 파견했다.
레스토랑 사장이라는 직함에서 아마 '그렇게나 밥이 맛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나?' 싶었겠지만, 그게 아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그녀의 저택에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닌 '''두꺼비에게 매주 지내는 의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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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꺼비 의식이 왜 중요한고 하니, 이 두꺼비 의식을 통해서 '''어떤 주식을 사고 팔지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당한 액수가 말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누이는 두꺼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원에 세워진 불상 앞에서 불경을 왼다. 누이 부인이 두꺼비 앞에 앉아서 신내림을 받게 되면, 그 순간 어떤 주식을 사고 팔지 신탁을 알려주는 의식이 진행된다. 이런 방식으로 사고 팔린 주식이 전성기인 1990년에는 무려 '''100억 달러'''에 달했다.
사실 냉정하게 접근해도 아예 근거가 없는 짓거리는 아니다. 경제는 자연과학과 다르게 결국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헛소리라 할지라도 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면 시장은 움직이기 마련이다. 간단히 생각해서 두꺼비가 A사의 주식을 매수하라고 신탁을 내렸다고 생각해보자. 소규모의 신실한 집단이 그 말에 따라 A사 주식을 사기 시작한다. 다른 모든 변수가 동일하다면 자연스럽게 A사 주식의 가격은 오른다. 이를 목격한 다른 이들 역시 A사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를 반복하게 되면 두꺼비가 A사의 주식이 오를거라고 한마디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시장에 기대가 형성되어 그 자산의 가격은 실제로 폭등한다(!).
그러나 거품붕괴 이후 오노우에 누이는 파산했으며, 가짜 예금증서로 첫 대출을 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1991년 8월에 경찰에 체포됐고, 은행의 후원자들과 더불어 여러 해의 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녀의 파산으로 대출자는 2,700억 엔의 돈을 잃었고, 일본산업은행장은 사퇴했으며, 은행 2곳이 도산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오노우에 누이가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 모르지만, 2014년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정확히는 2017년 3월 20일 한 방송에서 오노우에 누이의 행적을 추적했는데 이미 3년 전에 사망하였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물론 1930년생인 오노우에는 2014년 기준, 이미 팔순의 고령이었으므로 세상을 떠나도 무리는 아니다. 개인의 병크로 일어난 엄청난 사건으로 육체적, 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에 비하면 오히려 오래 살았다고 볼 수도 있을 듯.
그리고 오노우에 누이가 극히 유명해진 이유는 일본남초 중심사회이기 때문이다. 급격한 거품경제가 발생하면 '''주류 문화에 반대되는 특성이지만 벼락부자'''가 된 '''버블 퍼슨'''이라는 게 나온다. 미국 19세기 도금시대헤티 그린이 그랬고, 일본의 오노우에 누이도 마찬가지였다. 도금시대의 미국카우보이, 서부개척시대로 대표되는 마초적인 남성사회, 일본 또한 '''남성위주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 벼락부자인 오노우에 누이가 이른바 '''성공한 여성'''으로 당대의 급격한 주목을 끌었다. '''뉴스라는 것은 사건사고가 필요'''하니까, 오노우에 누이는 당대 일본 주류 사회에서 '''사건사고'''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실제의 오노우에 능력보다 더욱 과대평가되었고, 수많은 일본 금융맨들이 오노우에 집을 들락날락한 것이다.

4.2. 리쿠르트 코스모스 사건


1988년 6월 가와사키의 하급 공무원 1명이 외부에 양심고백을 함으로서 세상에 내막이 드러났다. 내부정보를 활용해 리쿠르트 코스모스[63] 주식을 매입하여 이익을 챙겼다고 '''시인하고''' 사임한 것이다. 당시 리쿠르트 회장이었던 에조에 히로마사가 자사 관련 입법과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정치인, 공무원, 관료,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자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선물했던 것.[64] 이 사건으로 당시 법무부 장관은 임명된 지 나흘 만에 사임했으며, 대장성 장관도 물러났다.
거기다 타케시타 노보루 당시 일본 총리도 리쿠르트 주식으로 1억 5,000만엔의 부당이익을 챙긴 것이 몇달 뒤 드러났다.[65] 이 사건으로 타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사퇴했고, 후임 우노 소스케도 불륜 혐의가 드러나며 자민당의 지지율이 급감, 소비세 신설문제와 함께 엮여 1989년 7월 23일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처참한 성적을 받게 된다.
그 이전에는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면 '''자민당 참패!''' 타이틀이 뜨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차에 개선의석의 1/3(126석/ 총의석 252석)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총의석에서도 과반에 18석씩 미달하는 상황이 되니 자민당 입장에선 이보다 처참할 수 없는 선거결과였던 것. 오죽하면 다음 해 치러질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중심의 야당연합이 압승하여 55년 체제가 끝장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하면서 55년 체제 붕괴는 몇년 더 늦춰졌지만...

4.3. 허영중(이토만) 사건


허영중 문서로.

5. 거품경제 이후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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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 2008년)실질 GDP 성장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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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 2013년)일본 정부부채 증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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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연평균 실질소비지출 지수. 거품경제가 꺼지고 하락세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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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명목임금, 실질임금의 추이. 1997년에 정점을 찍고 하락세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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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임금지수를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보면, 일본 홀로 하락세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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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실질 가처분소득 추이. 1997년에 정점을 찍었고, 2015년에 1985년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아직도 거품경제 침체의 늪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는 일본인은 1990년부터 2000년까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66] 이 시기를 통해 한국은 일본과의 경제적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67] 1990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일본이 25,359 달러이던 시절 한국은 6,516달러로 거의 4배가량 차이가 났었다. 2018년 한국의 1인당 GDP가 약 32,046달러로 추산되는데, 일본은 40,106달러 수준으로 이제 1.25배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33계단 차이나던 1인당 GDP 순위로는 4계단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의 1인당 GDP는 물가를 고려해보면 사실상 제자리 걸음이다.
취업시장 역시 버블 붕괴의 충격을 받았다. 안 그래도 에코 베이비붐(1971~1974년생) 세대가 취업을 준비할 때라 더 많은 일자리가 필요했는데, 늘기는커녕 왕창 줄었으니 스펙이 아무리 좋아봤자 취업문은 바늘구멍이었다.[68] 이 시기를 '취업빙하기'라 부르기도 했다. 이것이 일본 사회의 출산율 급감의 한 원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덧붙여서 베이비붐 에코 세대 중 상당수가 나이가 들어서도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거나, 니트족으로 남는 경우가 상당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일본/경제에 큰 짐이 되어서 일본 경제에 막대한 후유증을 남겨주었으며, 베이비붐 에코 세대의 출산율은 매우 낮았기에[69] 일본의 고령화 현상을 가속화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10년대 이후, 출생률이 낮아진 때에 태어난 세대가 본격적으로 취업에 돌입할 시기가 되고 나서부터는 버블경제 시기에 버금갈 정도로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뒤늦게 신입사원을 우대한다거나 외국인 노동력을 수입해야 한다느니 하는 호들갑을 떨고있지만 이미 배는 예전에 떠난 셈이다.
다만 일본의 대졸자 취업구조는 한국과 많이 달라서, 취업난의 개념 역시 다르다. 일본은 대학 4학년 1학기가 시작하는 4월부터 공식적인 리크루팅이 시작되어[70], 이르면 골든위크 전, 늦어도 졸업 전에 입사가 확정되는 시스템이다. 물론 취활(就活-취직활동)은 3학년 1학기부터 시작한다. 3학년 2학기가 되면 취직 세미나 등에 참석하고, 빠르면 11월쯤부터 입사면접이 시작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정년이 보장되며, 기업도 30년은 쓸 의도로 뽑기 때문에, 일단 입사하면 이직이나 경력자 전직 등의 형태로 회사를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간단히 말해 졸업식 전까지 결정된 회사가 이후 인생행로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졸업식까지 취직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이런 경우 정상적인 취업은 사실상 불가능.[71]
한국처럼 휴학을 반복한다거나, 졸업하고도 계속 도서관 다니며 취업준비하는 경우는 없다...기보다 불가능하다. 아주 작은 중소기업도 졸업 =신입사원이라는 공식이 박혀 있다.[72] 이렇게 입사하는 사례를 '신졸(新卒)'이라 부른다. 따라서 졸업예정인 4학년이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단 몇 개월에 불과한 리쿠르트 시즌에 인생이 걸린거나 같다. 여기서 밀리거나 탈락하면 패자부활의 기회 따위는 없다.[73][74]
그러다 보니 누구나 채용오퍼를 서너 개씩 받아서 느긋하게 골라 가며 졸업준비하던 거품경제 시기와 비교해서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객관적인 수치로 일본의 고용시장은 다른 OECD국가와 비교해도 상당히 안정적이다. 특히 청년실업률은 일부 유럽국가와 비교해보면 환상적으로 낮은 수준.[75] 물론 1980년대 호황기에 비해서 비정규직이나 블랙기업이 늘어나는 등 일자리의 질은 확실히 떨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건 한국을 비롯해 더 심한 나라도 많다.
실제로 2011년 기준으로 일본의 대학 졸업예정자의 취업내정률 (졸업 예정자 중 진학 등을 제외한 취업 희망자 대비 합격판정을 받은 비율)은 90%를 넘었고, 잃어버린 20년 동안에도 90% 선이 깨진 것은 미국 금융위기가 폭발한 직후인 2009년 정도이다.[76]
버블경제 다음에 장기 불황까지 오면서 세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년에 달한 기간에 취업빙하기를 직접 겪은 세대는 경기 침체 시대에 힘들게 살고 있는 이유가 버블경제 때에 호황을 누리면서 고생도 안 해본 기성세대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이런 세대 갈등은 한국도 비슷하지만 일본은 더욱 심하다.[77]
다만 위의 장점은 뒤집어 말하면 고용유연성이 극단적으로 낮다는 뜻도 되며 직접 현장에서 일해보지 않고는 정확히 깨우치기 어려운 본인의 적성과 맞지 않는 직업을 택해버렸거나, 한순간의 부주의나 실수로 중과실을 저질러 또는 무언가 밉보여 해고(권고사직 포함)당하거나, 사고, 질병 등으로 장기간 상병하게 된 상태로 휴직연한을 초과하거나, 조직문화가 맞지 않거나, 정년퇴직하였으나 퇴직금을 날려먹거나 빚을 값는 데 전부 쓴 경우라면 '''그 즉시 사회 최하층의 나락으로 떨어져서 아예 평생 재기불능한 상태가 되어 생활보호대상자(우리나라의 기초생활수급자)로 여생을 보낼 것을 강요당한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일본 블랙기업에서 시달리다가 더이상 못 버티는 경우 십중팔구 퇴사가 아니라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재취업이 어려운 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일본은 그 정도가 거의 전 사회적 낙인 수준으로 매우 극단적이라는 것. 과거 1회 이상 전직했거나, 졸업이후 2년 안에 취직을 못했거나, 입사한 지 2년이 지나서 전직을 시도하는 구직자가 일본 취업시장에서 받는 대우는 우리나라의 전과자가 받는 대우 수준이라고 한다. 그나마 근래 완화되었다곤 하나 취직후 1~2년 이내에 단 한번의 기회(제2신졸)밖에 없고 여전히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6. 세계에 끼친 영향


플라자 합의로 인하여 세계의 경제 주도권은 다시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일본으로 넘어갈 듯하던 세계경제의 패권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자 미국에서도 엄청난 거품경제가 발생했는데, 빌 클린턴 시대의 IT버블이다. 일본 거품경제와 달리 장기화되지는 않았지만 IT버블 붕괴 이후로 투기자본이 대거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부동산 거품이 생겼고, 정부에서 이를 방관하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며 일본 못지 않게 힘들어졌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아 국방비까지 크게 축소해야 했으며[78] 유럽남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거품경제 붕괴의 후유증을 톡톡히 겪으며 아예 우크라이나러시아의 공격을 받아도 손 쓰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79]
참고로 북유럽은 일본과 같은 시기인 1980년대 중반에 부동산 거품이 달아오르다 90년대 초반에 꺼지며 경제위기를 겪었는데 특히 스웨덴핀란드의 타격이 가장 심했다.[80] 1994년에는 전 국민의 20%가 실업자였던 수준. 다행히 IT산업 육성 등을 비롯, 체질 개선으로 일본만큼 '길게 잃어버리는' 일은 면했다. 그러나 2008년에 아이슬란드 은행 연쇄부도를 시작하여 북유럽은 또다시 '잃어버릴' 위기에 빠졌는데, 아이슬란드 정부에서 은행을 모두 국유화한 뒤 부채를 탕감해주는 식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해 일본처럼 길게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7. 같이보기


  • 버블시대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며 종종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도시전설화된 버블시절의 산물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회자되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버블 시대 애니메이션' 이라며 90년대 애니메이션의 움짤들 몇 개가 올려지며 '일본에 돈이 넘쳐나던 시절에만 나올 수 있었던 작품' 이라며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곤 하는데 엄밀히 말해 애니메이션은 버블 시대의 혜택을 받기는 커녕 80년대 초반부터 TV방송국이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발을 빼며 제작사들이 직접 OVA를 만들기에 이른다. 정말로 애니메이션이 버블의 혜택을 받았다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퀄리티로 제작되어야 한다.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하면 몇 배로 돈이 벌리는데 애니메이션에 돈을 투자할리 만무하다. 저 때의 애니메이션은 오히려 그 이후의 애니메이션보다 제작비가 적다. 저때 작품들이 작화가 좋아보이는 건 그저 잘 그리는 사람들이 잘 그려서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81] 그리고 그 시절 작품이라고 올라오는 것들이 그 시대를 벗어나 있는 등,[82] 망상에 불과한 것들이 많다. 하기의 항목들도 검증되어 있지 않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이후 애니메이션은 OVA 체제로 가다가 심야애니메이션과 제작위원회 시스템의 등장으로 국면이 전환된다.
  • 그리스 경제위기
  • 거품경제
  • 고지라 vs 킹기도라 - 거품 붕괴가 오지 않은 세계에서 먼 미래에 일본이 세계를 석권하자 이에 반발하는 미래인들이 괴수를 이용해 일본을 망치려는 내용의 영화. 장래에 일본이 세계 최강이 될 것이라 진심으로 믿었던 당시 일본인들의 자뻑이 근간에 깔려 있다.
  • 도쿄 80's - 이 때가 배경인 만화.
  • [83]
  • 블랙 레인 - 범죄 스릴러물이지만 외국인의 눈으로 본 이시절 일본의[84] 휘황 찬란한 모습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 백 투 더 퓨처 - 정확히는 2편. 주인공 마티의 미래에서 세계를 휘어잡은 대기업 후지쯔필름이 등장한다. 시리즈 막바지의 중요한 키워드를 담은 마티의 해고통지서도 여기서 보내준 것.
  • 시티 팝
  • 어른제국의 역습 - 짱구의 극장판. 배경은 버블경제의 조금 더 전인 1970년이다. 이 당시는 제조업이나 각종 산업이 성공하고 있을 때로, 일본은 1964년에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성공, 1970 오사카 엑스포로 이제 막 경제성장에 다다를 때이다. 이 극장판은 잘 살던 20세기로 돌아가자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 신입사원 토오루군 - 1984년 코나미에서 제작한 게임. 한국 오락실에서는 신입사원 석돌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알려져있다. 해외판은 Mikie라는 제목으로 발매.
  • 오오에도 줄리아 나이트
  • 용과 같이 제로: 맹세의 장소와 메인 테마인 バブル - 게임 배경은 물론 테마마저 거품경제의 황혼기인 1988년 일본을 묘사하고 있다.
  • 잃어버린 10년/일본
  • 줄리아나 도쿄
  • 지팡구 - 원래는 마르코 폴로 이후 유럽인들에게 황금이 넘치는 나라 지팡구라는 환상 속의 지역으로 알려졌지만, 정체는 바로 일본. 사실 초가집과 볏짚을 황금으로 보고 착각한 것이지만, 1980년대에는 그게 빈말이 아니라고 할 수준으로 돈이 썩어 넘쳐났다.
  • 파푸루 - 해당 세대를 살아온 인물들의 생활 문화가 모티브이고 이름의 유래 역시 버블 경제이다.
  • 폭음열도 - 80년대 초중반 최고점을 찍었던 폭주족 문제와 더불어, 배경으로 당대 일본 사회의 소소한 모습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 하우스 텐 보스 - 나가사키사세보시에 있는 유럽식 테마파크. 바로 버블 경제 시절 돈지랄의 산물. 빈말이 아니라 모나코 공국보다 큰 부지에 헤이그에 있는 왕궁인 실제 하우스 텐 보스를 똑같이 재연했다. 버블경제 시절에는 입장료만 무려 2만엔. 그걸 돈주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지금 입장료는 약 4~5천엔 정도 한다.
  • 헤이세이ABC
  • 혼다 CBR 250RR
  • 혼다 NR
  • 흑자도산
  • 히카루GENJI
  • 1990년대 한국 - 1997년 외환 위기 전까지 1980년대부터 경제 급성장이 지속되고 1987년민주화까지 이루어졌다.[85]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자유로운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고 특히 음악 시장은 양적 황금기를 맞았다. 그러나 안전불감증 역시도 팽배했고 여러 사회적 문제점이 가려져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 AKIRA(1988) - '버블 시대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키라의 실질 제작비는 7억엔[86] 정도로 역대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비 랭킹 중에서는 그렇게 높지 않은 수준이다. 엄청난 컷수를 사용한 것 치고는 높지 않은 제작비라는 것은, 결국 사람을 엄청나게 갈아댔다는 말이다.
  • 20세기 소년 - 주인공들이 어린 시절을 거품 경제 시절에 보낸 것이 중요한 요소이다.
  • beatmania IIDX 14 GOLD - 이 때를 컨셉으로 잡은 시리즈
  • IT버블

[1] 페르시아어로는 کن برنیس[2] 타지크어로는 Кен Бреннис[3] 참고로 CF 속 미소짓는 여주인공은 마츠모토 타카미(松本 孝美, 1965년 생)다. 연인으로 나온 남자는 일본계 미국인인 켄 브레니스(ケン・ブレニス[1][2], 일본에서 활동하다 나중에 버블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하자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참고로 2분 쯤부터 나오는 광고는 80년대 한국에서도 거의 똑같이 리메이크되어 방영된 바 있다. 심혜진이종원이 출연했으며, CM송도 한국어 가사였다. 코카콜라 내부 정책에 따라 일본의 원본을 정식으로 로컬라이징 했다.다른 영상들도 있는 버전도 있다.[4] 이는 단지 광고를 카피한게 아니라 당시 한국의 분위기도 일본 버블 경제의 영향을 받아서 패션, 영화, 드라마등,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일본과 거의 흡사했다. 한국에서 리메이크한 코카콜라 광고도 당시의 한국 분위기나 사회상과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잘 어울렸고, 많은 젊은이들이 광고속의 나오는 샐러리맨들처럼 되기를 바라며 대학생활을 즐기던때였다.[5] 1992년이면 세계적으로 HD 영상은 커녕 DVD(480p)급 SD영상도 드물었던 때다. 선진국들도 VCR에 만족해야 했고 개발도상국은 그것조차 없었다. 그러나 1989년에 일본은 MUSE 방식의 HDTV(하이비전) 본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절대 SD급 영상을 업스케일링해서 뻥튀기한 화질이 아니다. 1080P는 현재 TV에 가장 많이 쓰고 있는 '''FHD급이다'''. 한국 기준으로 1080P급 화질의 방송이 시작된 시기는 2001년 말이지만. 여전히 360p가 쓰였고, 본격화된 시기는 2010년대 이후이다, 즉, 당시 일본은 다른 나라들보다 대략 10년에서 20년 이상 앞서간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1080p가 보편적으로 쓰이고 4K가 막 태동할때 8K방송을 송출하는 셈이다.[6] KBS스페셜 '욕망과 혼돈의 도쿄, 1991년'의 마지막 내레이션. 일본 거품경제를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는 다큐이다.[7] '버블 경기'.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이 제목으로 문서가 존재하며 일본의 거품경제와 관련한 다른 것들도 모두 버블 ○○라고 지칭하고 제각기 문서도 있다. 버블 붕괴(バブル崩壊), 버블 시대(バブル時代), 버블 세대(バブル世代) 등.[8] 환율평가 절상(플라자) 합의 때부터 헤이세이 불황이 터지기까지.[9] 2차 석유파동이 끝난 시점부터 부동산 경제 붕괴까지.[10] 다만 일본의 이 빚들은 외국인이 아닌 자국인들, 자국 은행에 진 빚들이라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출처] 매일경제신문 1988년 9월 24일 제4면[11] NTT의 시가총액은 서독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에 맞먹었다.[12] 1987년 연말 한국 증시의 전체 시가총액이 26조원으로 당시 환율로 4조엔 수준이었다. NTT의 시가총액 최고치는 87년 4월 22일의 49조 6천억엔.[13] 당시 석유붐이 끝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이란, 이라크의 GDP가 대폭 하락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는 1981년의 고점 18,800달러에서 1988년 6,400달러까지 꺼졌다. 또 당시 중국이나 인도는 인구 대비 경제력이 미약한 후진 개발도상국이었다는 것도 컸다. 그런데 놀라운 건 거품 꺼진 2020년대도 일본 GDP는 세계 3위다.[14] 출처는 e-나라지표[15] 단, 위의 자료에서 은행은 매출액이 아닌 자산을 기입한 것으로 보인다. 통상 은행업은 예대차익이 사업의 본질이기 때문에 회계에 매출 개념을 인식하지 않는다.[16]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당시 일본 경제의 성공 요인을 주제로 하여 그 유명한 피터 드러커가 쓴 장문의 분석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17] 그저 30억엔 하던 건물을 담보로 15억엔을 빌려서 사업을 하다가, 사업은 망하고, 건물값은 10억엔으로 떨어져 건물값이 대출금보다 낮아지자, 건물은 은행에 빼앗기고, 나머지 대출금 5억엔에 대한 이자만 내면서 평생 살아야하는 사람에 비해서 승리자로 보이는 일종의 착시현상같은거다.[18] 한국의 부가가치세.[19] 한국의 사례로는 2002년 LTV 규제가 도입된 이래 노무현 행정부(2002~03)에서 60→40~50%로 강화되었다가 박근혜 행정부(2012~14)에서 70%로 상향 조정되고 다시 문재인 행정부에서 2017년 8.2 부동산대책으로 LTV를 비수도권 70%→ 60%, 수도권 60%→ 50%, 투기과열지구 50%→ 40%로 내렸다. 10~20%p 정도의 변동에도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20] 단 일본의 LTV 규제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텍스트가 없어 확인이 필요하다. 기껏해야 홋카이도타쿠쇼쿠은행에서 120%짜리 대출을 해줬다는 사례가 언급되는 정도. 현재 일본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적용하는 LTV 규제가 없는데 국내 텍스트에는 (아마도 정부의 간접 지도 또는 금융기관 자체 기준을 인용해서) 80% 혹은 100%로 쓰는 경우가 많다. 또한 미즈호 은행 계열 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일본 기업용 부동산 대출의 LTV 비율은 이미 버블에 들어서기 전부터 감소하고 있었고 지가가 하락한 92년 이후는 오히려 상승했다. 또한 88~90년 사이 부동산 대출 총량이 20~30%씩 급증하다 브레이크가 걸려서 그렇지 어쨌든 대출 자체가 감소한 해는 없었다.[21] 일본 전체의 공시지가를 보면 1989~1991년 사이 상업용지는 40%, 주거용지는 36% 상승하는데, 1992년에 각각 -4%, -5.6% 떨어진다. 특히 가장 등락이 심했던 오사카권은 동기간 주거용지가 95% 상승했다가 -23%로 급반전한다.(관련 논문)[22] 투금계정이란, 재무상태표에만 나타나고 손익계산서에는 기타포괄손익으로 처리할 수 있는 특별자산들을 모아놓은 펀드 투자자산 계정이다. 기업들이 펀드 투자할 수 있는건 당연한 거 아닌가 싶겠지만, 일본에서는 1984년 이전까지 비금융권 기업이 펀드에 투자하는 것은 불법으로 규제해왔다. 회사의 본업을 망각하고 돈놀이에만 올인하면 안 된다는 이유. 한국에서는 불법이었던 적이 없다. 대신에 한국에 펀드라는게 유행을 탄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였기에, 1997년 이전에는 한국 기업회계에 투금계정이 있다 하더라도 기업에서 활용하지 않았던 것이다.[23] 위 50대기업 시가총액 표에서 1위인 NTT항목을 보라. 2위와는 아예 자릿수부터 다른것을 알 수있다.[24] 시장 가격 10억짜리 땅을 가지고 있으면 20억까지 대출해 준다는 소리. 물론 은행들이 '언젠간 2배가 될 거니까 그 정도 쯤 쳐줘도 된다'는 생각에 이런 담보율을 설정했다고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 타 은행과의 경쟁, 실제 파산 비율 등도 고려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걸 감안해도 LTV 200%는 그만큼 은행이 자신이 있었다는 뜻이고,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25] 2010년대 한국 LTV는 50% 선이다.[26] 수도권에서 가장 멀리 있는 권역인 후쿠오카삿포로까지 가면 당시 소득 대비 큰 거품이 끼었다고 보기 어렵다. 산골은 말할 것도 없고...아라카와 히로무백성귀족 6권에서 이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데,'''워낙 깊은 산골짝이라 땅값이 한푼도 안 올랐다고''' 말하는 아버님과 '''이놈의 땅을 긴자에 들고 가서 팔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하는 어머님의 표정이 압권.[27] 당시 토지 가격을 보자면, 미나토 구는 평당 1,900만엔, 스기나미 구는 350만엔을 기록했다. 오사카는 평당 200만엔, 나고야는 85만엔, 후쿠오카는 45만엔까지 치솟았다. 긴자는 평당 1억엔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0년대에!''' 그리고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20년 동안 지속적인 디플레이션을 겪었기 때문에 실질 가치는 명목상의 1,900만엔보다 '''훨씬 높았다'''.[28] 미나토구 중에서도 아자부나 아오야마 같은 곳은 평당 5,000만엔에 육박했다. (출처:상기한 KBS스페셜)[29] 현재의 시오도메 시오사이트 부지.[30] 타마지역, 이 지역은 한국으로 친다면 1970년대-1980년대 강남구노원구 비슷한 지역이라고 볼수 있다.[31] 하지만 버블 붕괴 후엔 상황이 반전되어서 상속을 받았다가 거액의 세금을 무는 바람에(이 경우에는 버블 시기에 재산 신고해서 서류상 재산은 빠방했는데 막상 상속받을 시기가 되자 부동산이 팔리지 않아 애물단지가 되어 버리고, 설사 부동산이 팔리더라도 엄청나게 손해를 보기 때문에 세금 감당도 못할 지경이 되면서 결국 파산하게 되는 것) 파산하는 일이 잦아서 상속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고 한다.[32] 개중에는 '지아게야'라 해서 야쿠자가 운영하는 개발 회사들도 많았다. 이 경우 굉장히 폭력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억지로 땅을 사들였기 때문에 원주민 입장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33]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이면 공공기관에서 토지 수용 후 전면 개발한다. 공공의 수용이므로 감정가의 2배 이내에서 수용가가 결정된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공공의 수용이 아닌 민간이 토지를 다 사야 하므로 개중에 몇 몇 알박기 등으로 인해 토지가가 무한정 올라갈 수 있다.[34] 한국은 일개 건설사가 독자적으로 도시 개발을 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보통 한국토지주택공사나 지방공사가 도시개발을 하고 건설사는 단지 시공만 한다.[35] 현재 팔리는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의 전신이다. 당시 상대는 BMW의 3시리즈.[36] 아기벤츠(子ベンツ) 혹은 작은벤츠(小ベンツ)로 해석 가능.[37] 토요타의 준중형 세단. 한국에서 흔히 쓰는 "강남 쏘나타"와 비슷한 표현이다.[38] 한국이 아니다. 여기서의 국내는 일본을 말한다.[39] 전술하였듯 지금 한국에서 돌아다니는 오래된 병행 수입 차량 대부분이 이시기 일본에서 출고된 차를 한국에 들여온 것이다.[40] 연간 노동시간이 2,200시간 정도였다. 참고로 OECD 노동시간 2위를 찍은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16년기준 2,113시간이다.[41] 지금은 망해서 이케아 일본 1호점이 생겼다. 그러나 이 이케아는 엄밀히 말해서 최초의 일본 1호점은 아니다. 일본에서 한 번 실패를 겪은 뒤 2000년대에 재진출해서 리부트로 1호점을 다시 세웠는데 공교롭게도 자우스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42]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치히로의 부모님이 작중 주요 배경이 되는 유바바의 목욕탕과 부속시설을 거품경제 당시 만들어졌다가 망한 테마파크로 오해한다.[43] 1980년대 일본 전자 기업들이 완전한 오리지널은 아니더라도 각각의 8, 16비트 컴퓨터 아키텍처를 갖고 있었던 것을 상기해 보자. 현재 전기8사로 일컬어지는 대형 전자기업 중 NEC, 후지쯔, 샤프, 히타치 등은 CPU에서 모니터 브라운관까지 대부분의 부품을 자사 공장에서 만들어서 자사 소프트웨어로 돌리는 PC를 출시할 수 있었다.[44] 물론 버블 당시의 일인지라 버블시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 현재의 젊은 층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45] 이 기모노 입은 일본인은 훗날 영화 블랙팬서에서 수산시장 아줌마로 나온다. “사고치기 좋아하는 애들이라구?”라는 명대사를 남긴다.[46] 빌런은 독일계인데 독일도 플라자 합의에 일본과 같이 불려나간 전적이 있다.[47] 이러한 것들의 영향으로 SF의 상류층 집은 일본적인 인테리어나 정원 등을 가지는 모습이 종종 묘사된다. 블랙 레인(1989년)은 아예 일본 본토까지 날아와 찍었고, 데몰리션 맨에서도 지배층은 일본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48] 것도 치치지마 식인 사건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 그래서 1989년 쇼와 덴노 사망 이후에야 "이제야 겨우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들었다"라는 술회를 했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다.[49] 이게 왜 남아있냐면, 이 해바라기 최고가 낙찰 기록은 '''무려 17년이나''' 있다가 갈리기 때문이다.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수없다.[50] 물론 거품 꺼진 뒤에는 예술품 가격도 폭락했다.[51] 당시 돈 좀 있다 싶은 부동산 회사는 명화를 입구부터 사장실까지 걸어 놨다고 한다. 미국인이 사업차 와서 이를 보고 뒷담화를 까기도 했다고[52] 만화 갤러리 페이크에서는 주인공 후지타 레이지가 이렇게 거품경제에 미친 졸부와 은행들의 농간에 휘말린 명화들을 거래하거나 복원하다가, 진품은 자기가 챙기고 복제품을 파는 식으로 나름대로의 복수를 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53] 파이낸셜 타임즈는 원래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블룸버그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고 경쟁했는데, 인수의향서를 제출하지도 않았던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의 키타 츠네오(喜多恒雄) 회장이 파이낸셜 타임즈의 모회사 피어슨 그룹의 회장을 1:1로 만나서 '''007 가방에 들어있는 현금 다발을 보여주고''' 그 자리에서 니혼게이자이의 FT 인수가 확정됐다.(...) 사실 이런 인수과정은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고 정식으로 인수 경쟁을 하는 인수 후보 기업들한테는 '''엄청난 결례'''다.[54] 일본 엔화가 기축통화에 준하는 격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도 연준이 주가 부양을 위해 비슷한 일을 한다. 당연히 한국에서 하면 큰 일이 난다.[55] 본래 일본은 플라자 합의로 인해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을 위해 금리 인하를 단행했으나 부동산 시장의 과도한 거품으로 인해 금리 인상을 단행한 것이다.[56] 실시 기간 : 1990.03.27 ~ 1991.12.20[57] 그래서 이 시기에 많은 수입차들이 한국, 중국, 동남아, 러시아로 중고로 팔려나갔다.[58] 여담으로 이로 인해 그의 아내는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심지어 자살시도까지 했을 정도로 가정도 파탄이 났다. 〈욕망과 혼돈의 기록, 도쿄 1991〉 당시 스즈키의 집이 나오는데 아내가 머물고 있는 문을 찍기만 할 뿐 얼굴도 비추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우울증이 현재까지도 진행중임을 알 수 있다.[59] 별빛의 왈츠, 북국의 봄 등으로 유명했던 엔카 가수. 향토적인 외모와 양 눈썹 사이의 커다란 검은 사마귀(현재는 없음)가 트레이드 마크였으며, 노래 또한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분위기의 곡이 많았다. 당시 사람들은 '센' 마사오가 아니라 '억' 마사오로 불렀고 전용 헬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업을 했고 그를 풍자한 개그 프로그램 등이 만들어질 정도였다.[60] 본래 3천억엔에 달했지만 현재 은행으로의 공적 자금 투입으로 인해 최종적인 개인 부채액은 1,034억엔이 되었다.[61] 그가 진 100억엔의 빚을 다 갚기까지 소요될 기간을 직접 계산해서 보여줬는데 무려 8333년이 걸릴 것이란 답이 나왔다! 한마디로 평생에 못갚는단 얘기[62] 이명으로는 오사카의 흑녀, 거품 부인(Bubble lady).[63] 일본 굴지의 구인구직정보 회사인 리쿠르트의 자회사. 역시나 부동산 사업을 하던 곳이다.[64] 당시 주식을 받았던 사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일본 총리, NTT 회장,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회장 등 약 50명이었다.[65] 당시 총리를 대신해서 현금을 받은 비서는 자살했다.[66] 다만 거품 붕괴의 후유증이 오래 간 만큼, 그 충격도 서서히 나타나서 1995년까지는 분위기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위협론이 아직 힘을 얻던 시기이기도 했고.[67] 자세한 설명은 한국/경제, 일본/경제 문서로.[68] 그 시기에 한 명문대생이 취직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서 전철역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나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린 적도 있다.[69] 실제로 베이비붐 에코세대가 본격적으로 출산에 돌입할 시기가 출산율이 가장 낮은 시기이다.[70] 대기업은 설명회 등의 비공식적인 리크루팅을 그해 1월부터 시작한다.[71] 물론 이것도 이제는 과거의 일이라고 할만큼 많이 달라졌다. 아직도 50년 이상 유지되는 중견기업 같은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에서는 이직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고(특히 대기업의 경우에는 이직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졸업 이후에 직장을 구하려는 사람도 많다. 현직 리크루팅 회사들도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지 않는다면 '왜 바로 졸업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스토리가 충분하다면 면접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72] 우리나라의 중, 고등학교처럼 생각하면 편하다. 우리나라는 군대 때문에 대학 졸업시기가 제각각이라 다소 약하지만 병역의무가 없는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것. 입사담당자가 고등학교 1년 휴학한 학생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믿고 뽑을 수 있겠는가?[73] 물론 그 대신에 일본은 다른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에 한국보다 비교적 관대한 편이긴 하다. 졸업 이후 뭔가 예술을 하고 싶다거나 사회운동을 하고 싶어서 취직을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나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취업한 회사는 일반적인 이미지의 회사보다는 조금 크리에이티브한 일자리, 혹은 그만큼 이직이 잦은 일자리다. 소위 말하는 '리크루트 수트' 입고 돌아다니는 회사원의 인생과는 많이 다른 것.[74] 다만 상술했다시피, 이것도 10년 전이나 통용되던 상식이고, 한국만큼은 아니더라도 최근엔 화이트칼라 직종이라고 하더라도 이직이나 졸업 이후 취직도 많이 관대해졌다. 외자계 기업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75] 고용시장을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만 보더라도 고용률이 70%를 넘으며(평균 65% 수준. 그 이하도 수두룩하다) 비정규직 비중도 평균 수준(근데 이건 비정규직의 정의가 기관, 학자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청년 고용률도 정확히 평균.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낫다'''. 다만 가계 소득을 기준으로 하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는데 이는 가구 구조의 변화, 고령화가 제일 큰 원인이지 노동 시장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OECD/중위 가처분 소득 문서로. 물론 국가 경제의 문제라고 본다면 맞지만.[76] 일본은 세계에서도 톱을 달리도록 경직된 채용 시스템이 굴러가는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 특히 대졸자의 취업률을 다른 나라와 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반대로 한번 입사했다가 1~2년 정도의 단기간에 퇴사한 자가 재취업을 하는 소위 '제2신졸' 바닥은 다른 나라에서 나름의 경력직 대접을 받는 것과 달리 근래 들어와 다소 개선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며, 이직자에 대한 인식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다만 어쨌든 완전실업률을 포함한 일본의 고용 사정은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보다는 여전히 낫고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이다. 게다가 일본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2018년 기준 54.67%로 한국(69.7%)에 비해 낮으며 인구 변화 요인도 있기에, 대졸자의 취업내정률은 아직까지 90% 이상으로 높은 편이다.[77] 한국은 그나마 IMF 겪은 후 다시 옛날만큼은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성장세를 이어왔기에 그럴 수도 있다. 적어도 일본처럼 마이너스 성장, 저성장은 잘 없었다.[78] 이 때문에 투자 대비 수익이 안 나오는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손 떼고,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등지의 국가들과 관계를 맺어 중국 견제에 전념하고 있다. 아니, 그 이상 할 여력이 없다.[79] 하지만 우크라니아-러시아 갈등은, 그동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려 놓고 서방으로 갈아탄데다, 역사적으로나 실질적인 이유로나 러시아로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흑해함대 모항 세바스토폴이 걸린 문제라 돈만 있다고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전면적으로 개입했다간 3차 세계대전까지 각오해야 하기 때문. 더군다나 동우크라이나와 서우크라이나의 인프라의 차이와 경제 구조의 차이는 늦든 빠르든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약점으로써 존재했다.[80] 노르웨이는 거품이 몇 년 일찍 꺼져 저 두 국가만큼 심한 위기를 겪지는 않았다.[81] 애니메이션의 제작 편 수가 적었던 시절이라 좋은 애니메이터가 한 작품에 여러 명이 모이는 경우가 많았다. 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1980년대 초중반의 애니메이션은 실력있는 애니메이터는 미국 하청 애니메이션을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리지 않아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의 질이 좋지 못했다.[82] 1990년대 애니메이션을 가지고 자꾸 버블 시대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를 지적하면 변호를 위해 튀어나오는 변명이 1990년대도 버블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표를 봐도 알겠지만 일본에선 1991년부터 내려가기 시작해 1992년이면 바닥을 쳐서 버블이 끝난 것으로 본다. 1990년대 애니의 대부분은 버블 덕을 전혀 볼 수 없다. 단순히 잘 만들어서 작화가 좋은 걸 돈과 시대를 이유로 포장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83] 신격호가 도쿄 땅 50평 팔아서 세웠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물론 실제로는 일본 롯데의 주력 계열사들을 모두 동원한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였다. 다만 이때 롯데가 엄청나게 성장한 건 사실. 80년대 당시 신격호는 일본 4위의 부자였다고 하며, 실제로 당시 세계 부호 리스트에서 일본의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에 나와 있다. 참고로 같은 시기 한국은 이병철정주영만이 그 리스트에 있었다.[84] 정확히는 오사카.[85] 다만 자산시장의 거품은 90년대 1기 신도시 건설로 땜빵했기 때문에 대규모 버블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진짜 문제는 경상수지 적자였다.[86] 현재 물가 기준으로 보면 대충 21억엔정도.